<킹덤>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 OTT 플랫폼의 경쟁으로 한국 장르 콘텐츠에 모였던 관심은 최근 서서히 옅어지는 분위기다. 넷플릭스 독주 체제가 형성되면서 승자나 패자나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를 줄이려는 상황이고, 대형 플랫폼 진입 장벽이 높아졌다. 한국산 오리지널 콘텐츠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친 영향도 있었다. 한국 영상 산업계가 글로벌 흥행을 노리고 대작 장르물에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것이다. 그만큼 새로 공개되는 대작의 성패에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4월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공개되는 대작 중 가장 기대를 모은 건 단연 연상호 감독의 <기생수: 더 그레이>다. 한국 시청자들이 새삼스러운 K-콘텐츠 글로벌화에 벅차한 최근 몇 년 동안에도 일본 문화 파워는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2023년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콘텐츠는 <원피스> 실사판과 <푸른 눈의 사무라이>였다. 모두 다음 시즌 제작이 결정되었다. 디즈니+는 최근 <쇼군>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행> <지옥>을 연출하며 글로벌한 인지도를 얻은 연상호 감독, 누적 판매량 2,500만 부 이상을 기록하며 서브컬처계에 오랫동안 각인된 일본 만화 <기생수>의 결합은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연상호 감독은 이와아키 히토시의 원작 만화가 자신의 영화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지난해 화제를 모은 한국 크리처물 <스위트홈> 시즌 2와 <경성크리처>는 비주얼에 비해 스토리의 힘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배경을 한국으로 바꿔서 원작에 없던 이야기를 펼치는데 기존의 탄탄한 세계관과 연상호 감독의 장르 감각이 만나 좋은 시너지를 낸다. 사실 기생 생물이 인간의 신체를 조종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원작 만화의 매력은 인간의 손가락에 기생하는 눈 달린 생물처럼 독특한 비주얼로 그것을 발전시킨 데 있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한국 VFX 기술력을 활용해 팬들이 <기생수> 유니버스에 기대하는 볼거리도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인간의 얼굴이 열리면서 기생 생물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을 포함해 대규모 액션, 카 체이싱 등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디즈니+는 오리지널 콘텐츠 <지배종> 홍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오는 10일 공개되는 이 작품은 인공 배양육 시대를 연 세계 최대 생명공학 기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을 다룬다. 한효주가 연기하는 생명공학 기업 대표는 회사의 신기술이 허구라는 루머가 퍼지고 연구소를 노린 거액의 랜섬웨어 해킹 사건까지 발생하자 주변을 의심한다. 전 대통령 암살 시도를 조사하던 중 단서를 쫓아 그에게 접근하는 경호원 역은 주지훈이 맡았다.

<지배종>은 인공 배양육이라는 소재와 제목 때문에 SF처럼 보이지만 정치, 기업 비리를 파헤치는 서스펜스 스릴러에 가깝다. 디즈니+는 지난해부터 <최악의 악> <비질란테> <킬러들의 쇼핑몰> <로얄로더> 등 오리지널 콘텐츠를 연달아 내놓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한국 누아르물이 글로벌 시청자에게 소구하지 못하고 국내 시청자의 피로도 역시 높은 상황을 대변한다. <지배종>은 과연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지배종>은 총 10부작이고 제작비는 240억원 선으로 알려졌다. 대작이라 불리고는 있으나 글로벌 OTT에 기대하는 블록버스터 장르물과는 거리가 있다. tvN 로맨틱 드라마 <눈물의 여왕>도 제작비가 400억원이라고 알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비밀의 숲> <라이프> <그리드>의 이수연 작가가 각본을 썼다는 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연출은 <그리드>를 함께한 박철환 감독이 맡았다. 이수연 작가는 늘 신선하고 야심 찬 시도를 해서 기대가 되는데, 전작에서는 이야기가 복잡해서 전달력이 떨어지거나 작은 메타포에 주목하느라 전개가 공회전하는 대목이 종종 있었다. 기존 한국 드라마보다는 시청에 집중력을 요하는 유형이다. 한국 드라마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와 잠재력이 이번에는 제대로 폭발할 수 있을지가 이 드라마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다.

오는 26일 넷플릭스에서 오픈하는 <종말의 바보>는 일본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200일 후 소행성이 한반도 인근에 충돌한다고 발표된 상황, 죽음이 예정된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대처 방식을 그린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친구들, 종교 단체, 젊은 부부, 노년 부부, 동호회, 위계질서가 확실한 군부대까지, 여러 군상이 등장한다.

<종말의 바보>는 총 12부작이고, 제작비는 300억원으로 알려졌다. 2022년 촬영을 마쳤으나 주인공 유아인의 마약 스캔들 때문에 공개가 지연되었다. 사건 수사가 후반 작업 과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거 편집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작품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재편집을 진행했다. 유아인 주연의 또 다른 넷플릭스 영화 <승부>는 아직 공개 여부가 불투명하다.

<종말의 바보>가 특별한 점은 이미 폐허가 된 디스토피아나 그것을 막으려는 영웅의 활약이 아니라 예정된 죽음 앞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의 정성주 작가가 각본을 썼기 때문에 삶과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도 기대된다. 그는 한국 사회 풍자의 최고봉이자 한국인 심리 해부의 달인이다. <종말의 바보>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소행성 충돌이라는 집단 시한부 선고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대재앙을 계기로 쏟아져 나와 범람하는 부패와 악덕은 그 모든 것을 별 탈 없이 살던 시절에 방조하고 묵인해온 대가가 아닐까.” 그에 따르면 <종말의 바보>는 SF적 설정 속에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듯하다. 연출은 <인간수업> <마이 네임>의 김진민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