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한옥에서 에르뎀과 나눈 탐미주의에 관한 대화

지난봄, 북촌 한옥에서 마주한 우리 시대 패션 탐미주의자 에르뎀 모랄리오글루.

패션 화보

한옥에서 에르뎀과 나눈 탐미주의에 관한 대화

지난봄, 북촌 한옥에서 마주한 우리 시대 패션 탐미주의자 에르뎀 모랄리오글루.

ACCENT!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에게 영감을 받은 에르뎀 2024 F/W 컬렉션. 마리아의 강렬한 에너지를 화려한 패턴으로 표현했다. 긴 테일이 달린 슬리브리스 드레스에 매치한 검은색 장갑과 신발.

BE TWIN 쌍둥이 같은 모델 제이와 오송화. 하늘거리는 깃털 장식은 에르뎀 컬렉션의 주요 디테일이다.

BYSIDE 런웨이의 시작을 알린 그린 오버사이즈 피 코트와 스커트. 1950년대 실루엣이 에르뎀의 손길로 2024년 재탄생했다.

DREAMLIKE 마리아 칼라스는 꽉 쪼이는 허리, 넓게 퍼지는 스커트로 옷장을 채웠다. 볼륨감 있는 흰색 드레스에 깃털 구두를 신고 누운 오송화는 마리아가 환생한 듯한 모습이다.

HELLO 한옥 안마당에 서 있는 에르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르뎀 모랄리오글루.

에르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ioglu)는 2005년 패션 세계에 데뷔한 뒤 궁극의 여성미가 강조된 디자인을 자신의 시그니처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 패션 탐미주의자가 서울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보그>는 데이트를 요청했고, 우리는 종로구 북촌로의 한옥에서 마주했다. 무지 티셔츠에 뉴발란스를 신고 1977년 빈티지 롤렉스(40세 생일에 남편에게 선물 받은 것)를 손목에 찬 모랄리오글루가 영국식 인사를 먼저 건넸다.

환영한다! 서울 방문 목적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3층에 서울 매장 오픈을 논의하기 위해 왔다. 기분이 아주 좋다. 런던 부티크 이후 첫 매장이다. 서울에 ‘나의 세계’를 새로 다진다는 생각을 하니 흥분된다. 나에게 매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다. 런던 매장은 건축가인 남편과 함께 디자인했다. 집의 연장이라 여겨 좋아하는 조각 등 예술 작품을 놓았다. 서울 매장 역시 런던 메이페어의 사우스 오들리 스트리트에 들르는 느낌을 주고 싶다.

2021년 이후 ‘비스포크’ 라인을 추가하며 맞춤 제작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가능한가.

우선은 여성복에 집중하고, 소소하게 비스포크 서비스도 시작할 것이다. 세상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아이템보다 더 흥미로운 건 없다.

대학 졸업 후 비비안 웨스트우드에서 아카이브 업무를 맡았다.

1년 정도 일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상징적인 컬렉션을 보며 자란 내게 그녀의 1997~1999년 작품은 감동적이었다. 자신만의 개성과 언어를 전달하는 모습이 멋졌다. 비비안은 물론 칼 라거펠트가 만든 코르셋 같은 보물을 직접 만지며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당신의 첫 고객은.

바니스 뉴욕 백화점. 이스트 런던에 있는 18㎡(6평)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만든 첫 컬렉션과 빌린 돈을 들고 뉴욕으로 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바니스는 최초로 일본 디자이너들과 계약하고, 드리스 반 노튼과 시작을 함께하는 등 젊은 디자이너들을 적극 지지하는 백화점 중 하나였다. 덕분에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 새들러스 웰스 극장, 영국 박물관 같은 곳에서 연이어 쇼를 열고 있다.

지속성! 뭐든 3부작을 좋아하는데, 패션쇼도 그룹화하는 걸 좋아한다. 2024 S/S 컬렉션의 주인공 ‘데보(Debo)’, 2024 F/W에는 ‘칼라스(Callas)’, 그다음 컬렉션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동일한 공간에서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 그 공간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는 공통점도 있다.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

모든 것은 도서관에서 시작된다. 이전 컬렉션에서 얻은 피드백을 참고해 리서치를 하는데 가끔 사라(Sarah)라는 사서가 자료 조사를 도와준다. 2024 F/W 컬렉션을 앞두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공연 <마리아 칼라스의 7가지 죽음(7 Deaths of Maria Callas)>을 봤다. 마리아 칼라스가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라는 걸 도서관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그리스풍’은 어떻게 표현했나.

그리스식 드레이핑 기법. 고대 그리스의 복식 스타일을 1950년대 트위드나 헤링본 울에 적용했다. 그리고 오간자를 활용해 드레이핑을 살렸다. 노출된 어깨와 무심하게 디자인한 듯한 느낌을 감상할 수 있다.

1950년대 하우스 코트 실루엣이 많이 보였다.

마리아 칼라스의 어느 인터뷰 사진에서 눈에 띈 큼지막한 칼라가 모던해 보였다. 그 디테일을 활용해 2024 F/W 컬렉션의 첫 번째 룩, 구조적인 민트 코트 룩을 완성했다.

런웨이에 등장한 헤드피스는 무엇인가.

마리아 칼라스는 공연할 때마다 가발을 썼다. 무대에서 내려와 가발 망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코트를 입는 미완의 모습이 좋았다. 거기서 영감을 받아 검은색, 살색 가발 망을 머리에 얹고, 신축성을 활용해 얼굴을 당겨 올렸다.

디자인 루틴이 궁금하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패브릭 팀과 미팅을 한다. 새로운 옷감, 자수, 모든 프린트를 우리가 작업하기 위해 의논하는 시간이다. 화요일에는 도서관에 간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리서치를 진행한다. 목요일에는 모델 피팅, 금요일엔 매체나 홍보 관련 업무를 본다.

끝없는 열정의 원천은.

특정 캐릭터 탐구를 즐기는 호기심 그리고 연결성. 나의 모든 컬렉션은 연결된다. 그래서 새로운 시즌의 컬렉션은 한 권의 책에서 새로운 챕터다. 여전히 ‘첫 컬렉션’을 준비하는 느낌이 들어 어떨 땐 하얀 스케치북을 멍하니 바라볼 때도 있다. 계속 도전하면 좋은 날이 온다고 믿는다.

당신의 스타일에 대해 얘기해보자.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옷 입는 스타일이 어떻게 변해왔나.

(웃음) 믿기지 않겠지만 어릴 때는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했다. 입술에 링을 끼우고, 빈티지 티셔츠만 입었다. 하지만 엄격한 부모님께 들키기 싫어 밖에서 끼던 링을 빼고 귀가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취향이 바뀌었다. 같은 회색 티셔츠를 15벌 사고 뉴발란스를 신으며 나만의 ‘유니폼’을 완성했다.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나.

패션에 대한 욕망은 아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쌍둥이 여동생과 항상 인형 놀이를 하고, 옷 그림을 그렸다. 열두 살 때는 팀 블랭크스(Tim Blanks)가 진행하는 <패션 파일>과 진 베커(Jeanne Beker)가 진행하는 <패션 텔레비전>에 미쳐 있었다. 열서너 살 무렵에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면서 미래를 꿈꿨다.

당신의 절대 뮤즈는.

없다. 매 시즌 바뀌는데, 나만의 뮤즈는 내 스케치북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영화감독 혹은 발레 공연을 위한 의상 총감독. 발레의 움직임과 선을 고려하면 매우 섬세하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사진가로서 도전 욕구도 있는데 최근 폴란드 <보그> <하퍼스 바자> <아크네 페이퍼>를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나.

아름다운 지속성을 지닌 디자이너. 100년 뒤 누군가가 내 컬렉션을 되돌아봤을 때도 입고 싶어지면 좋겠다. 아름다움과 힘을 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늘 짜릿하다.

    포토그래퍼
    김민주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허보연
    모델
    오송화, 제이
    헤어
    배경화
    메이크업
    안세영
    로케이션
    휘겸재
    SPONSORED BY
    ER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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