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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포스터가 쌓아 올린 꿈의 제국

2025.07.03

노먼 포스터가 쌓아 올린 꿈의 제국

소프트 모더니즘 건축의 창시자, 놀랍도록 날카로운 디자인 비평가, 지독한 통제광··· 노먼 포스터가 70년째 공들여 건설해온 미래의 제국이 호황기를 맞았다. 호기심과 야심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 세계에서 그의 눈이 매섭게 번쩍인다.

미술관부터 공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 세련되고 우아한 랜드마크를 건설해온 건축 거장 노먼 포스터는 90세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왕성한 창작혼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그는 강남 한복판에 현대자동차의 새 본사를 설계하는 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 엘레나 포스터는 그의 삶이 “온통 건축뿐”이었다고 증언한다.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는 그와 작업하는 거물 의뢰인과 닮아 있다. JP모건 체이스, 애플, 블룸버그, 현대, 사우디국립은행 등 자이언트 기업이 랜드마크가 될 만큼 자기과시적이면서도 희소성 있는 사무실을 디자인하기 위해 포스터를 고용해왔고, 그 틈에 꾸준히 팽창해온 포스터의 야망과 부는 그를 그 기업의 수장과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건축가로서 포스터의 경력은 어느덧 70년째에 접어들었다. 온갖 종류의 시민적, 문화적, 상업적 건물로 각종 건축상을 휩쓸었으며 그만큼 재정적으로 어느 건축가보다 풍족해졌다. 세계 각지에 대저택을 갖고 있으며 갖가지 예술품과 한때 르 코르뷔지에가 소유했던 건물을 비롯해 수많은 차종을 보유하고 있다. 마드리드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웠는데, 최근 입학생을 받기 시작한 그곳은 사립대학 승격을 목표로 순항 중이다. 과거에는 헬리콥터를 몰고 출근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흰 제복을 갖춰 입은 가정부가 한쪽 팔을 등 뒤로 숨긴 꼿꼿한 자세로 그에게 커피를 가져다준다. 언젠가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는 런던에 유럽 본사를 세우기 위해 포스터와 협력한 일을 일컬어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억만장자와 억만장자가 되고 싶었던 건축가의 협업”이라고 묘사했다.

1999년 이후 포스터 오브 템스 뱅크 남작(Baron Foster of Thames Bank)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포스터는 지금도 아주 건강하며, 옷차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덕분에 펠리니 영화에 등장하는 말쑥한 신사를 연상시킨다. 그는 매년 일정 기간을 미국 매사추세츠주 해안가에 자리한 마서스비니어드(Martha’s Vineyard)섬에서 보내는데 2011년에 매입한 12만1,400㎡ 규모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7월 어느 아침, 포스터는 그날의 두 번째 자전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새벽에 있었던 첫 번째 산책에서는 평소처럼 48km까지는 아니지만 조용한 시골길을 따라 꽤 긴 여정을 만끽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Partners) 직원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했다. 포스터가 설립한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12개국에 18개 사무소를 갖추고 있으며 직원 2,400명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회사의 디자인 수장 겸 브랜드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포스터는 자신이 디자인한 긴 유리 테이블에 앉았는데, 그 위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이 격자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전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였다. 각 프로젝트의 부동산 규모를 계산하면 다 합쳐 최소 200억 달러(약 29조원)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 회사는 아니지만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이름을 내건 회사 중에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의 포트폴리오 중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자리한 반지 형태의 애플 본사, 베를린 시내 전망을 360도로 조망하도록 재설계한 베를린 의사당, 맨해튼 미드타운에 치솟은 허스트 타워가 있다. 포스터는 자신의 세련된 명성을 거래에 적극 활용하며 공고히 지켜왔다. 포스터는 건축가가 맞닥뜨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공 유형 사이의 경계를 허문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하나는 성당이나 콘서트홀 등 소수의 특별한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작가주의 건축이고 또 하나는 쇼핑몰과 고층 건물, 병원, 철도역 같은 대규모 기업 건축이다. 덕분에 포스터의 생산 라인은 매년 수십 개의 구조물을 토해낸다. 그중에는 병원이나 철도역도 있지만, 초호화 요트나 베니스의 산조르조마조레섬에 있는 교황청을 위한 야외 예배당 등도 포함돼 있다.

대규모 작업을 완수하면서도 개성과 역사를 간직한 부티크 같은 느낌을 잃지 않는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당연히 모든 프로젝트는 수십 년에 걸쳐 더더욱 정교해진 포스터의 지속적인 통제 아래 놓인다. 포스터는 작업을 통제했고,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했으며, 자기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또한 통제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노먼 포스터의 스케치가 놓이는데, 설계 단계가 아니라 사후에 회고하듯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케치에는 포스터 특유의 뾰족한 필체로 주석이 달려 있으며, 일부 동료들은 어느새 그 필체를 거뜬히 흉내 낼 정도다. 거기에는 건물의 미래 사용자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양손을 머리 위로 쭉 뻗은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포스터가 살아생전 단 한 번이라도 그런 포즈를 취해본 적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포스터의 건축적 취향은 회색과 흰색, 기둥과 주랑현관(여러 개의 기둥을 줄지어 세운 현관), 유리와 철 등으로 대표된다. 질서 정연하고 시선을 계속 잡아 끄는 그의 건축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설계한 공항과 갤러리, 회사 로비, 애플 스토어를 지나가는 수백만의 일상에 미묘하게나마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포스터의 친구이자 고객인 런던 부동산 개발업자 스튜어트 립턴 경(Sir Stuart Lipton)은 최근 이 미학을 칭송하며 ‘소프트 모더니즘’으로 소개했다. 이런 건축물은 다른 설계안을 채택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터무니없이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아닌 의뢰인들을 좀체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며, 건물에 드나드는 사용자까지도 모두 고려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스터의 작업이 전부 다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전 상무이사인 그레이엄 필립스(Graham Phillips)는 최근 자기 상사가 2002년 완공된 포스터의 런던 시청 건물을 가리켜 “못생긴 놈(Ugly Fucker)”으로 불렀다고 고백했다. (포스터는 이를 부인하지만 말이다.) 또한 포스터는 걸프 지역을 비롯한 일부 고객의 윤리적 문제나, 자신이 내세운 지속 가능성의 진정성에 관해서도 끝없는 비판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가 건축계에서 일한 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의 작업 중 졸속으로 처리된 것이나 부유한 클라이언트의 변덕에 터무니없이 휘둘린 듯한 결과물은 놀라울 정도로 드물다. 대다수의 작품은 우리를 포스터 특유의 낙관주의로 이끌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포스터와 같은 시기에 예일대 대학원에서 수학한 미국 건축가 칼 애벗(Carl Abbott)에 따르면, 주요 공공건물을 포스터보다 더 많이 설계한 건축가는 없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덴마크 건축가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마저 최근 “자신의 정체성을 그토록 큰 규모로 전파한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라고 포스터의 업적을 두둔하면서 포스터가 스티븐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블록버스터를 창조하면서 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둘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잉겔스는 렘 콜하스를 스탠리 큐브릭에 빗대었다.) 반대로 아쉬움을 피력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의 건축가 겸 작가 피어스 테일러(Piers Taylor)는 포스터의 승승장구가 “지구상에 더 큰 기발함, 흥미로움, 엉뚱함, 대담함, 기이함이 설 자리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포스터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완벽한 마감을 위한 집착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깔끔하게 정돈되고, 점점 가늘어지는 모서리 같은 디테일에 대한 애정은 포스터를 유명 건축가라기보다 애플이나 폭스바겐의 제품 디자인 혁신가처럼 느끼게 한다.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작업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포스터는 초대형 제트여객기를 선택한 적이 있다.

마서스비니어드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중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팀의 새 경기장, 토스카나에 들어설 레스토랑, 샌프란시스코의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 리노베이션, 그리고 과학관과 콘서트홀을 아우르는 서울의 대규모 복합 지구를 위한 스케치와 컴퓨터 렌더링 자료가 포함돼 있다. 그 외에도 빌바오, 마드리드, 샌디에이고의 박물관, 높이가 2km에 달하는 리야드의 고층 건물에 관한 제안서 등 현재 진행 중인 수십 건의 프로젝트를 다른 날, 서로 다른 회의에서 논의한다.

포스터가 두 번째 산책에서 탄 것은 수상 자전거였다. 두 개의 평행한 플로트(부유체)를 기반으로 자전거는 위에 높게 장착된 형태로, 페달을 밟으면 뒤쪽에 달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구조였다. (30년 전 노먼과 결혼해 지금은 포스터 부인이 된 심리학 박사이자 예술 서적 출판인 엘레나 오초아 포스터(Elena Ochoa Foster)의 단호한 언급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런 형태의 탈것을 페달 보트나 페달로(Pedalo)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대개 플라밍고 머리가 달린 관광용 보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포스터는 잔디밭에서 시작해 3.2km 떨어진 모래톱까지 이어지는 연못 위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모래톱 너머에서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포스터는 바람을 가르며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 언젠가 그가 런던에 있는 친구 스티븐 베일리(Stephen Bayley)와 자신의 경력에 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관통하는 장면이었다. “계속 가야 해. 계속 가야 해.”

수상 자전거로 일렁이는 물살을 헤쳐나가는 와중에도 계속된 대화 내내 포스터는 지상에서 그가 보인 과묵함과 격식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는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풍자나 과장 없이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지만 ‘말하자면’이나 ‘어떤 면에서는’이라고 덧붙이며 표현을 얼버무리는 습관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 보였지만 자기에 대해 언급할 때는 구체적인 기억을 늘어놓기보다 몽타주식의 화법을 구사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면, 젊었을 때 했다는 미국 여행 이야기를 꺼내면서 “로스코인지, 모던 재즈 콰르텟인지, 아니면 케이프 커내버럴에 가는 중이었는지···”라고 얼버무리는 식이다.) 포스터는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마치려고 고집하면서 중간에 말을 자르거나 청자의 입장에서 알맞게 요약하려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고 완고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베일리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아주 쉽진 않죠”라고 말했다. “그는 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지난해 수개월 동안 포스터와 직접 나눈 대화에서 그는 관대한 군주처럼 친절했으며 그의 동료들이 때때로 목격한 신경질적인 면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포스터는 언젠가 자신을 실망시켰던 한 젊은 건축가에게 감자 농사나 지으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물론 포스터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물 위에서 포스터는 1999년의 일화를 꺼냈다. 당시 그는 바그너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바이에른 숲을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런던의 새 웸블리 스타디움을 겨냥해 회사 차원에서 공표한 디자인을 재고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한 구조는 지붕을 네 개의 기둥으로 떠받치는 방식이었지만, 그는 기울어진 하나의 아치가 지붕을 떠받드는 형태가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존 설계는 ‘명예로운’ 것이었지만 특별한 매력은 다소 부족했다. (당시 완공을 앞두고 있던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의 밀레니엄 돔에서도 비슷한 기둥 구조를 알아볼 수 있다.) 포스터가 당시 웸블리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괴팍하기로 악명 높은 영국 축구 행정가 켄 베이츠(Ken Bates)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포스터는 비용 문제로 생길 우려를 다음의 격언으로 잠재우려 했다. “품질은 마음가짐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훗날 포스터가 다시 베이츠를 찾아갔을 때 그 인용구를 넣은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다. “품질은 곧 마음가짐이다. -켄 베이츠” (현재 93세인 베이츠는 이 일화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포스터의 작품을 칭찬하면서도 그를 ‘다소 권위주의적인 사람’으로 회상했다.)

포스터는 또한 마서스비니어드 자택에서 직접 손본 작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오래된 클랩보드 스타일의 본채를 개조했고, 이후에는 예술품을 전시하고 머물 수 있는 풀사이드 파빌리온도 새로 지었다. 공사 도중 시공업자들은 본채와 보트하우스 등 여러 건물 사이를 잇는 내부 배선이 놀라울 만큼 과도하게 설치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포스터는 이 인프라가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과 가족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무렵 통신 및 보안 목적으로 설치된 장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후 이웃집에서 오바마를 만났을 때, 그는 이 집을 계속 빌릴 수 없겠느냐는 오바마의 농담 섞인 요청에 웃음을 참으며 응해야 했다고 터놓았다. “오바마는 꽤 재치 있는 사람이었어요.” 포스터가 회상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죠. 안타깝지만, 안 된다고요.”

우리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고, <비니어드 가제트>에 따르면 30년쯤 전에 영화 <꿈의 구장>에 등장하는 농가를 똑같이 재현하려 시도한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저택 본채를 지나 계속 걸어갔다. 엘레나 포스터가 ‘로봇 친구’라고 소개한 자율 주행 잔디깎이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캐나다 거위를 불편하게 한다는 유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흰 자갈길을 건너 덩굴로 뒤덮인 터널로 진입했고, 뒤이어 별채가 있는 탁 트인 대지가 나왔다. 거기에서 하얗게 칠한 강철 지붕 아래 야외용 흰색 소파에 앉아 있는 엘레나 포스터를 발견했다.

노먼은 흰색과 베이지색 옷을 입고 있었고, 엘레나가 입은 옷은 전부 흰색이었다. 그녀는 두 자녀 중 큰딸인 파올라 포스터(Paola Foster)와의 통화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예일대 건축학 석사과정에 있는 파올라는 베를린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업에 종사하는 포스터의 막내아들 에두아르도(Eduardo)는 이비자에 머물고 있었다. 남매는 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포스터는 그 기간이 거의 20년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스페인 사람인 엘레나는 자녀들이 스스로를 ‘80% 정도 영국인’으로 여겼다고 귀띔했다. (포스터는 자녀들이 ‘모든 언어’를 구사한다고 즐겨 말하곤 한다.) 포스터는 첫 번째 결혼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은 파올라와 에두아르도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건축과 상관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남매는 둘 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 합류할지도 모르는데, 포스터는 그런 기대에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화답했다.

우리는 회색 나무 데크가 넓게 깔린 수영장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젊은 여성이 샴페인과 오징어튀김을 가져다주었다. 포스터는 자신이 영국 맨체스터에 지은 건물 중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암 환자를 지원하는 센터로 경사 지붕과 목재를 넉넉히 사용해 병원 같은 차가운 분위기 대신 따뜻하고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엘레나는 15년 전 그 건물이 위치한 도시 근처로 여행 갔던 일을 기억해냈다. 그들은 당시 포스터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포스터의 어린 시절 집을 방문했다. 포스터의 공식 전기 작가인 데얀 수직(Deyan Sudjic)이 각본과 내레이션을 맡았다. 집은 빅토리아풍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연립주택으로 포스터의 유년 시절에는 노동자 계층이 거주하던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포스터는 자신이 어릴 적 사용하던 작은 침실을 다시 방문했다. 그 방은 지금도 여전히 기차가 오가는 맨체스터와 런던을 잇는 주요 철도 노선이 지나는 철둑을 바라보고 있다.

포스터의 외부 활동에 열정적으로 관여하는 엘레나는 그날 촬영을 지켜보면서 그가 무거운 감정에 휩싸였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고백했다. “노먼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반응했어요. 전 아마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결코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같아요.” 포스터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저는 정말 과거를 돌이켜본 적이 없어요.” 이런 대조적 성격은 다소 고정관념 같은 국가별 성격 차이일지도 모른다. 엘레나는 스페인의 유명 TV 프로그램 <성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Let’s Talk About Sex)>의 진행자로도 활약했다.

엘레나는 포스터를 바라보며 “당신 가족이 매우 친절하게 당신을 대했을 거라고 짐작해요”라고 말하며 “아주 작은 가족이었으니 말이죠”라고 악의 없이 덧붙였다. 외아들이었던 포스터는 일전에 ‘일종의 거품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내게 터놓은 적 있었다. 그 표현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발적 고독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부모는 1970년대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디자인한 건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포스터는 맨체스터 태생의 20세기 화가 L. S. 라우리(L. S. Lowry)의 작품을 몇 점 소장하고 있다. 라우리는 너무 작아서 구별할 수조차 없는 수십 명의 사람들(포스터의 건축 도면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비슷해 보인다)로 가득한 도시 풍경으로 잘 알려진 화가다. 포스터는 어린 시절, 증기 기관차가 지나갈 때마다 침실 창문이 덜컹거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승객의 얼굴도 물론 흥미롭지만, 자신의 관심은 오직 기관차에 머물러 있었다고 터놓았다. “저는 기관차를 비롯한 모든 기계적인 것들과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그는 특히 기계의 내부를 묘사하는 단면도를 보며 즐거워했다. 포스터는 21세였던 1956년에 맨체스터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입학을 위해 당시 그가 학교에 제출한 포트폴리오에는 침실 밖 풍경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포스터가 학교를 떠나 지방 정부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몇 년이 흐른 뒤였다.

그날 오전,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이라 불리는 집의 데크 위에서 엘레나는 1990년대 중반, 포스터와의 관계가 시작됐을 때 가끔은 그와 함께하는 일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말에 포스터는 미소 지었지만, 아주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뜻이야?” 포스터가 물었다. “당신은 온통 건축, 건축뿐이었어요.” 엘레나는 언젠가 남편에게 연필은 내려놓고 자기 말에 집중하라고 요구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포스터는 천으로 감싼 스케치북을 늘 곁에 끼고 산다. 포스터가 그녀의 말을 잘 듣고 있으며, 방금 그녀가 한 말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항변했을 때, 엘레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난 당신이 나를 ‘눈으로’ 들어주길 원해요!” 회상을 멈춘 엘레나가 수영장 옆에서 이야기했다. “지금은 훨씬 수월해졌죠. 이제는 손님도 맞이하고, 술도 한잔하고, 일하러 돌아가고 싶은 게 분명할 때도 기다릴 줄 알게 됐어요.” 말을 마친 엘레나가 포스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확실한 진보죠.” 포스터가 호응했다.

몇 년 전, 당시 30대였던 스페인 영화감독 기예르모 로하스(Guillermo Rojas)는 런던에서의 치열했던 삶을 마무리하고 고향 세비야로 돌아온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영화 <원스 어게인>(2019)을 선보였다. 영화 속 그 여성은 한때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서 근무한 건축가로 설정되어 있다. 나는 최근 로하스에게 왜 그 회사를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형제인 파코 로하스(Paco Rojas)를 소개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파코는 약 10년 전, 실제로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 입사한 이력이 있었다.

현재 세비야로 돌아온 파코 로하스는 한때 런던 남서부 배터시 지역, 포스터 앤 파트너스 본사가 자리한 템스강 변의 여러 건물 중 하나에서 근무했다. 이곳이 포스터의 귀족 작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템스 뱅크’다. 회사가 이곳으로 이전한 시기는 1990년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런던의 유일한 헬리포트(헬리콥터 전용 비행장)가 있다는 점이 주요 이전 사유 중 하나였다. 덕분에 포스터는 윌트셔에 있는 시골집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출근할 수 있었으며, 회의가 열리는 여기저기로 신속히 날아갈 수 있었다. 이 사무실은 늦은 밤이나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언젠가 그곳에서 포스터를 만났을 때 우린 본관의 매우 긴 복층 구조 공간 끝에 있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서 포스터는 늘 해오던 대로 개방형 사무실, 개방형 도서관, 개방형 학교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조차도 수평선 너머 점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테이블이었다.

파코 로하스는 애플 스토어에 관한 업무를 주로 담당했는데, 싱가포르의 해안가 개발 지구에 자리한 작은 섬에 지은 애플 스토어도 포함돼 있었다. 이 스토어는 반구 형태의 유리 돔으로 지어졌기에 포스터의 대표 작업으로 꼽히는 베를린 의사당에 대해 알고 있다면 친숙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로하스는 포스터를 지배적인 존재이면서도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인물로 묘사했다. 회사 창립자인 포스터는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만 그가 속한 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사무실 전체가 눈에 띄게 고요해졌다. “제 상사뿐 아니라 그보다 세 직급 이상 높은 관리자들까지 작은 말실수 하나로 문제를 일으킬까 봐 조심했죠.” 그의 증언이다. “포스터의 사고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고, 그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프로젝트 수정은 때때로 밤샘과 주말 근무가 뒤섞인 광적인 작업으로 번지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로하스는 한 번도 짜증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훌륭한 결과물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내 문화 속에서 일부 동료들의 성격이 차츰 변해가는 것을 목격했다. “점점 벽처럼 변하는 거죠. ‘무엇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어. 단단한 내면을 유지하자’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지난여름 포스터와 직원들 사이에서 진행된 화상회의를 몇 차례 지켜보며 나는 로하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포스터의 개입은 구체적이고 세세했다. 그는 코네티컷에 있는 어느 학교 극장 외관에 쓰인 글자가 잘 읽히는지 물었고 극장 앞에 설계된 주차장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집중력을 흐리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차장 진입로를 더 좁히면 어떨지 한번 궁리해보세요.” 한번은 고층 건물 디자인을 논의하다가 사내 최고 구조 엔지니어인 로저 리즈딜 스미스(Roger Ridsdill Smith)를 언급하며 “로저를 불러 캔틸레버 형태(한쪽 끝은 고정하고, 다른 쪽 끝은 허공이나 수중에 붕 뜬 것처럼 자유로운 들보 형태로 설계한 건축물)로 설계하는 것을 고려해보는 게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날 회의에서 나는 그의 말버릇을 감지했는데, 바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회의 참가자 중 십중팔구는 기대하던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했다.

그렇지만 포스터의 모든 발언이 변덕스럽다거나 달갑지 않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핵심이다. 직원들이 계단과 로비에 관한 10가지 도안을 만들고 나서 가장 좋은 버전을 현실화하기로 합의하지만 그 후 누군가(아마도 포스터 경)가 11번째 버전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포스터는 디자인에 유능한 만큼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끊임없이 구상하도록 부추기는 데도 아주 능숙했다. 1960년대 초반 예일대에 재학할 당시 포스터는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자신의 조수를 자처하는 학우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던 일을 떠올렸다. “의식적으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 게 결코 아니었어요. 저도 모르게 저의 비전에 그들을 끌어들인 거죠. 사람들은 언제나 제 팀의 일원이 되려고 했어요. 자기가 먼저 저를 찾아내 ‘내가 도울 건 없을까요?’라고 묻곤 했죠.” (같은 시기 예일대에 재학한 칼 애벗이 이를 확증해주었다.) 어느 날은 수업 시간에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그에게 야유가 쏟아졌다. “어째서 그런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데 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느냐는 의미의 야유였어요.”

그것은 그가 건설할 미래의 제국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과거 포스터의 오른팔 같은 동료였으나 지금은 자기 사업을 경영하는 켄 셔틀워스(Ken Shuttleworth)는 포스터와 20년 전 갈라섰다. 셔틀워스가 회사의 밀레니엄 히트작 중 일부에 대해 공로를 과하게 인정받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불거져 나온 영향도 있었다. 만화에서 나올 법한 로켓을 닮은 런던의 사무용 마천루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건물을 가리켜 거킨(Gherkin, 오이 피클)이라고 부르지만 포스터는 “소위 거킨이라 불리는” 건물로 확실하게 소개한다. 셔틀워스는 여전히 그의 옛 상사를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어 함께 절벽에 매달린다면 목숨 걸고 따라갈 만한 사람”으로, 그리고 “놀랍도록 날카로운 디자인 비평가”로 평한다. “그는 늘 당신이 가야 한다고 가늠하는 곳 너머로 당신을 밀어붙이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포스터는 모든 계획이 수립되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가 경제적으로는 가장 신중한 시기는 아닐지 몰라도 급진적인 수정을 시도하기에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라고 이야기했다. “프로젝트의 모든 가능성과 제약에 대해 완벽하게 검토가 끝난 상태에서는 전부를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가 더없이 좋죠.” 셔틀워스가 포스터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상무이사를 역임한 그레이엄 필립스는 1970년대 중반부터 포스터와 함께 일했으며, 당시 회사 직원은 30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그가 퇴직한 2008년이 되자 직원은 1,000명으로 불어났다. 필립스는 출근 마지막 날도 첫날만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최근 내게 이야기했다. 포스터의 감시가 지독하게 끈질기다는 소문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고위직일수록 한밤중에 포스터의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죠.” 그러나 필립스는 ‘창의적인 천재’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포스터를 현대사회를 대표할 만한 테크 억만장자 중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포스터와 일과 관련이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 일을 기억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치열한 경쟁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내고 난 후 모든 직원이 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조차 “노먼은 결코 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음 회의와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눈치챘죠.” 배터시로 본사를 이전하고 난 후에도 몇 년 동안 포스터는 본사 최상층에 자리한 광활한 규모의 아파트를 누비고 다녔는데, 화가 리처드 롱(Richard Long)의 213cm짜리 벽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필립스가 농담을 반쯤 섞어 진저리가 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거기, 그러니까 가게 위에서 살았던 거예요. 끔찍한 일이죠. 일요일 아침에 소리 소문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누가 일하고 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당연하게도 오늘날 포스터의 감시는 그보다는 훨씬 덜한 편이다. 그는 원격으로 감독하고, 대리인을 통해 의견을 건네는 경우도 많다. 나와 대화를 나누며 포스터는 자신의 지속적인 통제에 대해 변론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필요성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여전히 그는 매일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1980~1990년대에 한창 사무실에서 근무에 매진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 곳곳의 사무실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여전히 일정을 빽빽하게 설계한다. 한번은 이미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마드리드 사무실에서 포스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떤 직원이 내 코트를 펼쳐 들고 방 안으로 쳐들어왔다. 선택을 종용하는 경비원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 천년이 시작될 무렵(포스터가 대장암과 심장마비를 이겨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포스터는 더 많은 양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고, 또 자신보다 더 오래, 굳건히 지속할 수 있는 환경으로 회사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재탄생(Rebirth)’으로 명명한다. 포스터는 일상적인 의사 결정에서 물러났다. 그로 인해 엘레나와 함께 이끄는 재단을 위해 일하고, 크로스컨트리 스키 마라톤에 참가하기도 하며, JP모건의 새 뉴욕 마천루를 위한 예술적 디자인에 골몰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2003년에 포스터는 대부분의 직원을 6개 스튜디오에 나누어 배치하고, 오랫동안 함께해온 파트너급 인사들을 각 스튜디오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6명의 파트너 모두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전부 남성이다. 또한 스튜디오는 수많은 엔지니어, 모델 제작자, 소재 및 기타 전문가로 이루어져 있다. (포스터는 “건축은 건축가에게만 맡겨둘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사안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스튜디오는 모든 분류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설계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공항 전문 스튜디오나 동아시아 담당 스튜디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회사는 신입 사원에게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감을 갖게 한다. “회사의 규모를 감안하면 각각의 스튜디오는 독자적으로도 세계 건축계에 엄청난 보탬이 되는 집단일 것입니다.” 10년 전 ‘스튜디오 4’는 런던 블룸버그 빌딩(10억 달러 이상 가치를 지닌 프로젝트다)을 건설하는 동시에 캘리포니아 애플 파크(추정 예산은 50억 달러였다) 작업을 수행했다.

또한 포스터는 주말마다 사무실 이곳저곳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던 스스로의 과거가 떠오르는 임원 10명으로 구성한 디자인 위원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그의 회사는 1년에 40~50개에 달하는 신규 프로젝트를 도맡는다. 위원회는 실현되기 전에 좌초되는(경쟁에서 지거나 고객이 마음을 바꾸는) 경우를 포함해 모든 프로젝트를 감독한다. 위원들은 임기 동안 평일 기준 3~5시간 정도 모든 디자인에 대한 온갖 질문을 담당자에게 던진다. 위원 중 한 사람인 암스트롱 야쿠부(Armstrong Yakubu)가 최근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질문 구성은 “어째서 그렇게 거대한 계단이 필요합니까? 경사로로 만들면 더 낫지 않을까요?” 같은 식이다. “건축가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담당자들은 본능적으로 답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러면서 30년 전에 비하면 회사에서 포스터를 비교적 덜 맞닥뜨리긴 하지만, “포스터가 갑자기 자신의 스케치를 보내올 때면 그런 느낌이 싹 가십니다”라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요즘은 포스터가 스케치북에 그린 것을 이메일이나 문자로 전송받지만 과거에는 팩스로 전달받곤 했다. (어느 위원은 “팩스는 완전히 악몽이었죠”라고 회상한다.)

2007년에 포스터는 영국의 사모펀드 회사 3i에 자신의 지분 중 상당 부분을 매각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파트너를 여럿 얻게 됐다. 3i가 포스터 앤 파트너스 전체 지분의 40%를 갖게 된 이 거래 덕분에 해외 사무소, 특히 중국에 투자할 여력도 생겼다. 그리고 이 거래는 포스터를 더 큰 부자로 거듭나게 했다. 상세한 내막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회사는 수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두 번째 매각이 이루어지고 난 후인 지금, 회사의 최대 주주는 50%의 지분을 보유한 캐나다의 한 투자 회사이며, 남은 지분을 226명의 파트너가 나누어 소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걸프 지역에서의 성장이 눈에 띄며, 지난해 4월 마무리된 영국의 회계연도 기준으로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수수료만 5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으며 그중 40%는 중동 고객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었다.

3i와 거래를 진행할 무렵에 스위스의 법적 거주자가 된 포스터는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18세기 성을 매입했다. (이 시기 포스터 가족이 소유하던 부동산 목록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시장인 생장카프페라(Saint-Jean-Cap-Ferrat)에 있는 절벽 위 주택도 포함돼 있었다. 포스터는 그 집을 혁신적으로 개조했으며, 거기에는 18톤에 달하는 미닫이문과 리처드 롱의 또 다른 작품이 있었다.) 그때부터 포스터는 1년 중 대부분을 영국 외 지역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재를 공식화함으로써 아마도 세금 혜택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거주 영국 시민은 해외 소득에 대해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포스터의 이민은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2010년에 비거주 귀족은 더 이상 상원에 앉거나 투표할 수 없다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포스터가 상원에서 연설한 것은 딱 한 번뿐이다.)

포스터는 여전히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모든 프로젝트에 정통했지만 “어떤 프로젝트에는 다른 것보다 더 몰두하기도 한다”며 집중력의 편차를 인정했다. 일부 프로젝트에 대한 포스터의 관심은 개인적인 기억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위스 생모리츠에 완공을 앞둔 어느 공공 및 상업 건물은 포스터가 현재 자신의 주거지로 소개하는 산악 주택 인근에 자리한다. 또한 문화적 위상이나 예산 측면에서 두바이에서의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신규 주거 개발(포스터의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문구)” 프로젝트보다 포스터의 관심을 더 많이 끌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도 분명 존재한다.

스티브 잡스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8년 8월, 포스터와 그의 아내는 제네바 공항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중 런던 사무실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잡스 씨가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 하는군요. 알려줘도 될까요?” 포스터는 허락했다. 몇 분 뒤 성사된 통화에서 잡스는 “쿠퍼티노에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빨리 여기로 오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포스터는 엘레나와 상의한 후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말한 다음 끊었다. 부부는 이젠 여행은 한동안 쉬자고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십중팔구 잡스가 같은 사안을 놓고 (여러 건축가를 놓고 이리저리 재면서) 다른 회사와도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거라 믿은 엘레나는 다른 고위직 임원을 대신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포스터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잡스는 강경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어떤 논의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포스터는 엘레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잡스와 마지막으로 통화했고, 그로부터 2주 뒤 포스터 부부는 잡스의 주방에서 피자를 먹었다.

지난해 7월 어느 아침, 포스터는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금융 기업 지위를 사수하고 있는 JP모건 체이스의 본사로 사용되던 매디슨 애비뉴 383번지의 로비에 서 있었다. 당시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47번가 건너편에 이 회사의 새로운 본사를 건설하고 있었다. 포스터의 시선이 멈춘 북쪽 건너편에 진녹색으로 칠해진 공사장 합판과 그 뒤로 더 육중해 보이는 대각선 철제 기둥이 눈에 띄었다. 로비에서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 메릴(Skidmore, Owings & Merrill)이 설계한 1960년대 건축 걸작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Union Carbide Building)의 하단부를 볼 수 있었다.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은 건축적 가치와 탄소 배출 문제가 적극적으로 제기되며 끝내 2019년부터 2021년 사이 철거되었다. 9·11 테러로 인한 사태를 제외하면 당시 전 세계에서 이보다 더 높은 건물이 철거된 사례는 없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을 철거한 자리에 지은 새로운 본사 건물은 2023년 11월 최고 높이에 도달하며 뉴욕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은 매디슨 애비뉴와 파크 애비뉴 사이, 47번가와 48번가 사이의 블록을 차지하고 있다. 상층부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지고 북측이나 남측에서 보면 오르락내리락하는 막대그래프처럼 보인다. 포스터는 캐시 호컬(Kathy Hochul) 주지사와 에릭 애덤스(Eric Adams) 시장 등과 함께 새 건물의 상량식(건물의 골재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상량)를 올리고 거기에 공사 관련 기록과 상량문을 봉안하는 의식)에 참석해 공사 근로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행사는 아주 좋은 의미에서 지극히 미국적이었어요. 축제 분위기에 매우 사교적이었고, 국수적이었으며 애국적이었죠.” 포스터의 말이다. JP모건은 조만간 이전을 완료할 계획이다.

JP모건의 글로벌 부동산 책임자 데이비드 아레나(David Arena)는 고전적으로 보이지만 명랑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포스터와 함께 로비에 있었다. 아레나는 포스터에게 근사하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랬다. 지난 2주 동안 포스터는 잠비아에서 캠핑을 하며 잠비아 대통령과의 동행을 누렸다. 그러고 난 다음엔 아내와 자녀, 자녀들의 친구 몇 명을 데리고 코모 호수 인근에 있는 별장에서 행복한 일주일을 보냈다. 드라마 <석세션>에서 루카 맷슨이 로이 가족을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다. 다소 검게 탄 포스터는 옅은 리넨 정장을 입고 겨자색 양말에 남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있는 현장을 방문하기 위한 작업복인 동시에 이후 엘레나와 더 그릴(The Grill)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한 차림이었다. 포스터는 원래 포시즌스 레스토랑의 바였던 그 식당의 오랜 단골로, 처음 방문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당시 예일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영국 건축가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과 포스터의 학교 친구로 장차 사업 파트너가 될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였다. (그로부터 25년 후 세 사람은 런던 왕립미술원이 개최한 전시 <New Architecture>의 주인공이 된다.)

포스터는 몇몇 동료와 함께 현장에 있었지만, JP모건 프로젝트의 수석 파트너였던 나이젤 댄시(Nigel Dancey)가 병가를 내고 런던에 머무는 중이었고, 그의 부재는 약간의 변수였다. 하지만 포스터는 모든 제안이나 프로젝트를 손쉽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자였다. 어떤 때는 국가원수 모드로 돌입해 공항에서 프레젠테이션 장소로 이동하는 도중 긴박하게 차 안에서 빠른 속도로 업무를 숙지하기도 한다. 켄 셔틀워스는 ‘심장이 멈출 듯이’ 조마조마하긴 해도 정말 놀라운 능력이라고 이야기했다. (셔틀워스는 포스터가 정치를 했다면 영국의 정치인 대다수를 쉽게 이겨먹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나 포스터는 자신을 설계의 유일한 저자나 모든 설비와 시공 일정에 정통한 척척박사로 내세우진 않는다. 그에게도 수천 장의 도면이 담긴 아이패드를 소지한 동행인의 존재는 무척 소중하다. 이날은 댄시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젊은 파트너 두 사람이 그와 동행했다. 이들 역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조성하는 일에 크게 기여한 중견 건축가들이었지만 이런 자리에 정식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눈에 띄게 긴장한 상태로 보였고, 한 명은 조용히 상사에게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요?”라고 묻기도 했다.

우리가 새 본사의 모형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JP모건의 몇몇 임원이 우연을 가장해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제삼자가 이 광경을 봤다면, 포스터를 건축가가 아니라 거물 고객으로 추측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사를 건넨 사람 중에는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 CEO 바로 아래 임원인 다니엘 핀토(Daniel Pinto)도 있었다. “그러니까 거의 다 끝나가는 거죠?” 핀토가 유쾌하게 말을 걸며 상층부에 어떤 작품을 둘지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적절한 벽면에 딱 맞는 크기의 작품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포스터는 마야 린(Maya Lin),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자신이 오래 알고 지낸 예술가로부터 작품을 확보하는 데 이미 큰 도움을 준 상태였다. “시간을 잡아보죠.” 포스터가 또다시 회의를 제안했다.

데이비드 아레나는 말했다. “물론 노먼을 파트너로 선정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었어요.” 건축 초기 단계에서부터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엄청난 신뢰감이 느껴지는 파트너였다는 아레나의 칭찬은 정당하다. 그러나 아레나는 자신의 칭찬에 극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실은 JP모건이 신사옥 건축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비공개로 수십 명의 경쟁자를 검토하는 등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포스터를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 칭한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건물을 지을 때 보통 우리는 조각하듯 상상하잖아요. ‘원형으로 하자!’ 혹은 ‘팔각형으로 하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노먼의 관점은 시작부터 다르더군요. ‘거리의 격자 구조는 직각으로 교차하고, 이 지역이 특정한 구역화 방식을 따르고 있으니 그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건물을 만들자!’ 이렇게 말이죠.”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웨딩 케이크 형태의 설계를 유도하는 뉴욕의 구역화 규정은 오래전 개정되었으나 그 실루엣으로 설계된 건물은 여전히 훌륭하게 여겨진다.) 또한 아레나는 자신과 동료들이 몇 년 전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파크 애비뉴 425번지에 설계한 고층 건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현재 헤지펀드 시타델과 그 산하의 트레이딩 부서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훗날 추가로 이야기를 나눈 마이클 블룸버그는 JP모건이 포스터와 계약을 맺기 직전 제이미 다이먼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일을 기억했다.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포스터는 자기 생각이 확고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에는 까다로울 거라고요. 하지만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걸 실제로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했죠.”

우리는 안전모를 쓴 채 JP모건의 새 둥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새 건물 바닥은 전보다 두 배나 넓은 면적을 자랑하지만,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구조일 뿐 아니라, 길에서 볼 땐 규모감이 덜 느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상 24m 지점부터 건물 하단부는 안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특히 서쪽과 동쪽 끝에서는 그 경사가 더 뚜렷하다. 이 때문에 건물 외부를 지나다니는 보행자에게 약간의 숨 쉴 공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구조적으로도 인상적인 아우라를 뽐낸다. 건물 규모가 본격적으로 쪼그라드는 지점 아래에는, 외벽을 따라 내려오는 두꺼운 기둥이 무모할 정도로 안쪽으로 가파르게 휘어지며 지면에서 보이는 부채꼴 형태의 접합부 여섯 개 중 하나에서 서로 만난다. 아레나는 내게 설계 안정성을 안심시키고자 새 건물의 하부에 사용한 철근이 이전 건물 전체에 사용된 철근보다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순간, 포스터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JP모건 측에 강철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서쪽과 동쪽 외벽에 대각선 지지대를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JP모건 측에 관철시켰다고 한다.

캔틸레버 구조나 부채꼴 모양의 접합부는 결코 무모한 시도가 아니다. 실현되지 않은 계획을 포함해 포스터의 아카이브에서도 이와 유사한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78년에 구 휘트니 미술관을 확장하기 위해 설계한 타워에서도 이와 비슷한 디자인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번 신사옥 설계는 눈에 띄게 강렬하고 역동적인 인상을 준다. 플랭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 혹은 정비소에서 받침대 위에 들려 올라간 자동차를 연상시켰다.

포스터는 1986년 홍콩에 홍콩상하이은행의 본사를 설계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물이던 이 본사에 주목할 만한 (엄밀히 말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던) 외부 골조를 도입했다. 포스터는 흠잡을 데 없는 모더니스트 박스형 건물의 미학을 사랑하지만, 늘 그 너머에 있는 공학적 혁신, 그리고 그 혁신이 진보를 드리운다는 믿음에 더 이끌리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건축이 유행에 휩쓸리거나 과도한 상징성으로 치닫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낙관주의는 포스터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이고, 이는 시간에 지나치게 쫓기거나 예산이 너무 빠듯한 일부 클라이언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고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덕목이다.

그러나 훌륭한 공학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포스터의 사무소가 만든 런던의 밀레니엄 브리지도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는 현수 보행교처럼 보이는 이 다리는 케이블이 보통처럼 높은 탑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Y 자 형태의 새총 같은 낮은 지지대에서 뻗어나오도록 설계해 실제로는 현수교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포스터에 따르면 이런 디자인은 “템스강 위에 빛의 칼날을 수놓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터의 다른 프로젝트에 존경을 표해온 영국의 건축 및 공학 사학자인 앵거스 맥도널드(Angus Macdonald)도 이 다리에 대해서는 “찌그러졌고, 흉물스럽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포스터는 오랫동안 공학자들을 고용해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창조의 순간을 함께 여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는 전형적인 행보는 아니다. 부동산 개발업자 스튜어트 립턴 경은 엔지니어링에 대한 포스터의 신중함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했으나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예른 웃손(Jørn Utzon)의 접근 방식에 빗댔다. 웃손의 추종자이기도 한 포스터 역시 오페라 하우스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건 ‘어떻게 디자인하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죠.”

포스터는 기술 혁신을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만족감을 주는 데 능하다. 가능한 한 가장 큰 구조용 유리 패널, 독창적인 환기 시스템, 스타디움 지붕을 떠받치는 아치 구조 등이 좋은 예다. 그런 다음 제조업체가 그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실현하도록 압박한다. 포스터의 베를린 의사당 설계안이 포함한 전체 부지를 덮는 3,700㎡ 크기의 반투명 지붕은 예산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블룸버그 오피스의 유리 엘리베이터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일반적인 케이블 방식이 아니라 건물 외벽에 캔틸레버 형태로 매달려 지게차에 의해 들렸다 내려지는 것처럼 작동한다. 이런 설계가 놀라운 이유는 엘리베이터 시프트를 완전히 투명하고, 눈에 띄는 방해 요소 없이 매끄럽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는 클라이언트와 포스터 모두가 강조한 핵심적인 설계 방식이었다.

JP모건 신사옥 상량식에서 연설할 때 포스터는 아주 중요한 발언을 했다. 바로 건물을 ‘장치’라 표현한 것이다. 절제와 기술적 과시주의를 향한 그의 두 가지 충동은 프랑크푸르트와 필라델피아의 최고층 빌딩을 비롯해 수많은 인상적인 고층 건물을 설계하게 했다. 전부 근사하고 가벼운 기계와 장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JP모건 건물에서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는데 청동으로 주조한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색조 때문이다. 경제 부흥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매끄러운 은빛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는 듯 금빛으로 번쩍인다. 47번가에서 타워를 올려다보는 포스터의 모습이 지지 기둥과 대각선 모양의 버팀대를 두드러지게 하는 외장재에 정확히 어떤 색조를 사용할지에 대한 복잡한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나는 은빛이 아닌 금빛으로 반짝이는 은행 건물에 대해 어떤 우려가 있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당연히 우려가 많았죠.” 포스터가 혼잣말처럼 내게 되물었다. “시간을 초월한 가치를 지니면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계속 지속되는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포스터의 예술품이 놓이게 될 3,250㎡ 규모의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아레나는 30억 달러 상당의 내역서를 내려다보는 사람의 우습고도 자학적인 어조로(JP모건은 보고된 가격 확인을 거부했다) 엘리베이터 구역을 덮고 있는 트래버틴에 대해 말했다. “이탈리아의 특정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재예요. 전 지구를 통틀어 채석장 딱 한 군데서만 구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 조각을 맞출 수 있는 사람도 딱 한 명이고요. 채석장에서 나오는 형태 그대로 벽에 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탈리아 기술자가 거대한 창고에 조각 하나하나를 전부 펼쳐놓고 작업하더군요. 아마 업계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거예요.” 아레나가 포스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노먼이 밤낮으로 감독하지 않는 한 이런 수준의 아름다움을 끌어낼 순 없겠죠.”

우리는 북쪽 타워에 있는 공사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6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장소였는데 여름에는 고객 및 직원 행사를 위한 ‘스카이 바’와 갤러리로 쓰이게 될 장소였다. 그 순간, 우리는 365m 상공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건 인간이 만든 걸작입니다!” 포스터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속시킬 가치가 있어요. 이걸 보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고, 그는 다소 긴장한 듯했다. 그런 말을 입으로 내뱉기보다 생각으로 곱씹는 것이 그에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외벽이 완전히 설치되지 않은 동쪽에서는 투명한 하늘이 보이고, 철망과 그물로 이루어진 허리 높이의 장벽만 아슬아슬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남쪽에는 보이지 않는 크레인이 매달린 유리 패널이 보였다. 그렇게 포스터와 함께 안개 낀 미드타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포스터가 이야기했다. “전 크라이슬러 빌딩을 가장 좋아해요.”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레나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도시의 모든 전망대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아요.”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서 포스터는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의 설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건축가 나탈리 드 블루아(Natalie de Blois)를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지은 건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장점을 알아봤지만 그녀의 건물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 건물이 ‘구식’이라고 표현했다. “진부한 냉각 공기를 재순환하고 있었죠. 층고도 낮고, 자연광도 거의 없는 데다, 공간의 다채로움도 부족했고요. ‘무엇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 대체의 이면에는 어떤 이상이 깔려 있는가?’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을 설계할 때는 한 번도 제기되지 않은 의문일지 모르지만 저는 결국 그런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1971년 포스터는 런던 자택에서 한 TV 예술 프로그램을 위한 인터뷰에 응했다. 거기서 그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부서에서 일하는 문제 해결사”로 소개했다. 건축가는 모든 의뢰 작업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쥐어짜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 인터뷰는 마케팅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증명했다. 당시 30대 중반이던 포스터는 이미 몇 가지 자랑할 만한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또 그 인터뷰는 야망이 내성적인 성격을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정복한 상태까지는 아니었던 포스터의 어색한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와 인터뷰 진행자 모두 구레나룻이 있었고, 넥타이까지 꼼꼼히 맨 수트 차림으로 긴 노란색 빈백 소파에 반쯤 파묻힌 채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은 흡사 영국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Monty Python)이 연출한 코미디 같았다. 진행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누가 봐도 전통적으로 앉는 방식을 거부할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두 손으로 한쪽 무릎을 붙잡고 똑바로 앉아 있기 위해 남몰래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듯한 포스터가 응수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앉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자가 필요하다고 여겼지요.” 비록 그는 제발 의자 좀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당시 그레이엄 필립스는 리버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전후 공적 자금을 잔뜩 쏟아부어 견인하던 경제 호황이 슬슬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 기간에 지방 정부에 고용된 수많은 건축가들은 콘크리트와 평지붕 등 제한된 양식을 앞세운 모더니즘 건축에 의거해 저렴한 주택과 학교, 병원을 지었다. 필립스와 친구들은 전문 잡지에 실린 포스터의 사무실 사진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당시 포스터의 사무실은 웨스트엔드 피츠로이가의 어느 가게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필립스가 이야기했다. “놀라운 건물이었어요. 외관을 검은색 유리로 설계한 점이 정말 특이했고 문설주도 없었죠. 실내는 밝은 녹색과 노란색이었는데 거의 형광색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건물 측면의 창고나 화장실로 향하는 문 둘레에는 검은색 고무를 덧대 잠수함으로 진입하는 입구처럼 보였다니까요. 그걸 보고 ‘아,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은 여기 말곤 없어’라고 결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필립스는 또한 그 잡지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포스터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팀 4(Team 4)’에서 일하며 1960년대 중반을 보냈다. 팀 4는 포스터와 그의 친구 리처드 로저스, 그의 아내 수 로저스(Su Rogers), 그리고 조지(Georgie)와 웬디 치스먼(Wendy Cheesman) 자매가 함께 차린 회사였다. 조지는 시작하자마자 자기만의 길을 찾아 떠났다.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조지의 딸 수크 월턴(Suke Wolton)의 회상에 따르면, 지금은 고인이 된 조지는 포스터의 자아도취를 약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노먼을 정말 존경했지만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진 않았어요. 이모에게 그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했죠. ‘그 사람은 네가 맡아줘.’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웬디는 포스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1964년에 노먼과 결혼했다.

수크 월턴도 조지와 마찬가지로 포스터를 존경하긴 했으나 그와 웬디,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들과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서는 다소 불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모부는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수크 월턴의 증언이다. “예를 들면,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아니라고? 그럼, 난 나가 있어야지.’ 이런 식이었죠. 또 아이들은 눈에는 보여야 하지만 말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특이한 사람이었어요.”

전당포 관리자였고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그리고 한때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포스터는 일찍부터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가족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집에는 책도 없었다. 게다가 건축이라는 화두는 “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돼 있지도 않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있다. 나는 1940년대 후반, 그가 13세에 그린 온갖 건축 스케치로 가득한 노트를 보여주었다. 그 노트는 포스터의 아카이브에 디지털 형식으로 보존돼 있으며, 성 평면도, 튜더 양식 주택, ‘로지아(Loggia)’와 ‘식당 공간(Dining Recess)’이 딸린 평지붕의 현대식 주택 도면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노트에는 한 교사가 “정말 훌륭해요. 계속 열심히 하세요”라고 쓴 메모도 있었다. 포스터는 자료를 보며 놀라움을 표했지만, 이 학교 과제가 자신의 ‘고독한 건축적 서사’에 반하는 일화가 아님을 강조했다. “학교 과목으로서 건축과 직업으로서 그것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습니다.”

포스터의 팀 4 동료들은 중상류층으로 전부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웬디 치스먼은 말도 키우고 있었다. 포스터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맨체스터 시청에서 견습 공무원으로 일했다. 이후 영화관, 자동차 정비소 등에서 아마추어 근로자로 일하며 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언젠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말겠다는 강한 열망을 그때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포스터가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히 동료들의 강점이 회사를 설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팀 4가 맡은 초기 의뢰 중 하나는 은퇴한 수 로저스의 부모님을 위한 주택을 짓는 일이었다. 이처럼 당시 포스터의 회사가 맡은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우아한 단독주택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하트퍼드셔에 지은 주택은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베토벤 5번 교향곡이 초인종 음악으로 들려오는 섬뜩한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1967년 팀 4는 관계가 틀어지며 해체됐다. 노먼과 웬디는 새로운 회사 포스터 어소시에이츠(Foster Associates)를 설립했다. 렌초 피아노(Renzo Piano)와 함께 일하던 리처드 로저스는 1971년 파리 퐁피두 센터를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훗날 포스터는 로저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재결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최근 포스터는 그들의 서로 다른 노선에 대해 이야기하며, 로저스 특유의 외부로 노출된 관(Duct) 시스템을 언급했다. 눈에 잘 띄도록 밝은색으로 칠하는 로저스의 작업을 효율적으로 배관을 숨기려는 자신의 설계 방식과 비교했다. 그러면서 복사 난방 또는 냉방 기능을 갖춘 좁은 배관을 애플 파크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벽 내부에 정교하게 숨긴 자신의 방식을 예로 들었다. 사람들은 두 건축가를 하이테크 건축 운동의 선구자로 묶어 설명하지만, 1970년대에 포스터 사무소에 합류한 건축가 셔틀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좀 더 ‘쿨한 박스’를 만드는 쪽이었어요. 로저스는 뭐든 다 드러내는 스타일이었고요.”

한번은 대화 중에 포스터가 2021년 사망한 로저스가 “러시아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매우 낭만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그와 벌인 논쟁을 끄집어냈다. 영국 노동당의 열혈 지지자였던 로저스는 확실히 포스터보다 정치적으로 좌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근 내가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 리버 카페(The River Café)의 공동 창업자이자 1973년에 리처드의 두 번째 아내가 된 루시 로저스(Ruthie Rogers)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포스터의 기억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남편은 친소련파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포스터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이야기하며 그가 페스토를 준비하는 것을 본 일을 떠올렸다. 포스터가 100장이 넘는 바질잎을 일일이 세고 있었다고 말이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었어요. 포스터는 음식을 정말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었죠. 호기심과 야망이 적절히 섞인 노먼 포스터만의 스타일로 말이에요.” 포스터가 품은 질문은 이런 종류였을 것이다. “진짜 제대로 만든다면, 최고의 페스토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팀 4의 마지막 주요 프로젝트는 1967년에 상을 받기도 한 작업으로 잉글랜드 남서부 스윈던에 미니멀한 공장과 사무실 건물을 짓는 일이었다. 값싼 기성 자재로 시공한 이 프로젝트는 많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이론적으로는 자주 논의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현되지 않는 청사진을 내세웠다. 이후로도 포스터는 산업화된 단순함과 경량성을 자신의 디자인 이상으로 꾸준히 언급해왔다.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미국 디자이너 겸 발명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말을 인용하면서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More with Less)’라는 철학이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은 스윈던의 공장에도, 그로부터 몇 년 뒤 포스터 어소시에이츠가 IBM을 위해 설계한 놀라울 정도로 비용 효율적인 유리 벽 사무실에도 어울리는 묘사다. 또한 회사의 주목할 만한 초기 업적 중 하나로 영국 입스위치에 있는 보험 중개 회사 윌리스 페이버 앤 듀마스(Willis Faber & Dumas)의 사무실을 설명하는 데 적용하기에도 충분한 표현이다. 밋밋한 10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이 프로젝트는 중세 거리의 곡선을 따라 부지를 꽉 채우고, 낮에는 반사되고 밤에는 빛나는 검은 유리의 낮고 깊은 형태로 설계했다. 개방형으로 지은 세 개 층이 중앙에서 폭포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에스컬레이터 구역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완성된 퐁피두 센터의 옆면에서 보이는 디자인과 닮아 있기도 했다. 수백 년 된 거리의 패턴에 따라 설계한 깊이 있는 평면도, 위에서 들어오는 자연광 등은 40년 후 완공된 런던의 블룸버그 빌딩에도 적용된 설계였다. 포스터는 클라이언트를 설득해 옥상정원은 물론, 1층에 직원 전용 수영장까지 만들었다.

오늘날, 20세기에 지어진 영국 건축물 중 약 100곳은 강력한 법적 보존 보호 목록에 올라 있어 개조가 불가능하다. 입스위치의 윌리스 빌딩은 1970년대에 설계∙건축된 건물 중 유일하게 그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그 건물을 방문했을 때 나를 안내해준 직원들은 그 건물에 진심으로 애착을 가진 듯했다. 한 직원은 유리 벽의 견고함을 보여주겠다며 자신의 몸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치기까지 했다. 1970년대에 포스터와 함께 일했으며 이후 독자적인 커리어를 쌓은 마이클 홉킨스(Michael Hopkins) 역시 이 건물을 설계하는 작업에 기여했다. 이 건물은 칼 애벗의 비틀 자동차를 타고 미국 중서부를 여행하거나 포시즌스 바에 앉아 있는 젊은 날의 포스터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듯하다. 섬세하고 공학 중심적이면서도, 어딘가 억눌린 듯한 감성에 미국적인 광활함과 모험심이 스며든 공간. 어느 안내 직원이 인정한 것처럼 입스위치는 인기 있는 도시라고 보긴 어렵다. (건물 밖에서 다 죽어가는 쥐를 막대기로 찌르며 웃고 소리치는 아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법적으로 1970년대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밝고, 이상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한 인상을 주었다. 복도는 여전히 노란색이고 라임 그린 컬러의 카펫도 깔려 있었다. 1991년 수영장이 문을 닫을 시기에 건물 철거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대신 물을 빼고, 판자를 덮고, 카펫을 깔았다. 저물 무렵 내가 방문했을 때는 연금 관리 부서 직원들이 그 위에 책상을 놓고 앉아 일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 곁에는 여전히 원래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 간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수심이 깊은 쪽(Deep End).”

빈백 소파에 앉아 진행한 인터뷰 무렵, 포스터 어소시에이츠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마침 내부적으로는 저비용 미니멀리즘 작업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음이 느껴지던 시기였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신도시 밀턴킨스 개발 당국은 포스터에게 새로운 격자형 계획에 맞춰 공공 주택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다. 포스터는 여기에 약 500세대 규모의 단층 타운 하우스로 이루어진 연립주택 빈힐(Beanhill)을 설계했다. 이 프로젝트는 규모 면에서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포스터의 공식 웹사이트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실려 있지 않으며, 그의 커리어를 총망라한 1,000페이지 분량의 대형 아카이브 책(2023년 퐁피두 회고전에 맞춰 출간됐다) 뒷부분에 작은 이미지 하나로 소개되었을 뿐이다. 빈힐 프로젝트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당시 그 프로젝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셔틀워스는 포스터의 그런 과묵함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말하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가 몇 가지 있기 마련이죠. 우리 모두 그런 것 몇 가지는 갖고 살잖아요. 누군가 물어보면 ‘예, 그래요. 우리가 했어요’라고 대답은 하겠지만 얼마나 관여했고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다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거요.” 셔틀워스의 증언이다.

빈힐 주택은 단열이 전혀 되지 않은 콘크리트 슬래브 위에 지어졌고, 평지붕과 단일 유리창, 수평으로 골이 나 있는 알루미늄 외장재를 덧댄 얇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알루미늄 외장재는 1970년대 후반 포스터가 극찬을 받게 만든 세인즈버리 센터(Sainsbury Centre)의 초기 외장 패널(나중에 교체되었다)과 유사하다. 포스터의 설명에 의하면 세인즈버리 센터에 사용된 패널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매우 작고 소박한 엔진이 장착된 지프형 차량 메하리(Méhari)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포스터는 자동차 수십 대를 소유하고 있으며, 1934년식 크라이슬러 에어플로우, 1961년형 재규어 E-타입 같은 클래식 카도 갖고 있다. 그는 마서스비니어드에서 하얀색 메하리를 직접 몰고 다니며, 과속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빈힐의 입주자들에게 이 주택 외장은 시트로엥보다는 골함석 강판을 떠올렸다. 셔틀워스는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창고 같은 집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기후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집은 누수와 결로 현상에 취약해 아침에 일어나면 카펫이 젖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집도 독특한 이중 초승달 구조에 평지붕으로 지었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저는 건축가인 동시에 클라이언트니까요. 물이 새더라도 누구에게 소송을 걸 이유가 없죠.” 빈힐은 그 외관과 결함 때문에 건설 노동자를 위한 임시 주택으로 지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밀턴킨스시는 포스터 어소시에이츠와 시공사에 소송을 제기했다. 1984년 체결된 합의금은 평지붕을 경사 지붕으로 교체하는 보수 비용으로 사용됐다. (한 건축 저널리스트는 이를 ‘굴욕적인 일’이라고 표현했다.) 빈힐에 대해 글을 쓴 뉴욕대학교 역사학자 가이 오르톨라노(Guy Ortolano)는 오늘날 밀턴킨스에서 영국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와의 관련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빈힐의 일부 가구는 세입자 소유로 전환되었고, 지난여름에는 그중 한 채가 15만 파운드도 안 되는 가격에 매물로 나와, (이동식 주택을 제외하면) 런던 인근에서 가장 저렴한 주택으로 꼽혔다. 빈힐은 보수와 개조, 생존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이 지역은 풍요롭진 않지만,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 포스터가 가끔 도시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 강연하면서 이 프로젝트(실망스러운 부분을 포함해)를 언급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포스터는 2016년에 프리츠커상을 받은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와 친분이 있다. 아라베나는 ‘반쪽짜리 좋은 집’ 프로젝트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제한적인 공공 주택 예산 안에서 주민이 직접 증축하거나 개조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설계 방식이다. 최근 대화에서 아라베나는 포스터를 따뜻하게 언급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건축가일수록 임시적이고 ‘충분히 괜찮은’ 것에 마음을 여는 일이 쉽지 않아요. 완제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해요. 통제권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죠.” 이는 바질잎을 하나하나 세며 요리에 집중하는 포스터 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포스터와 시간을 보낼 때 겪게 되는 여러 스트레스 중 하나는 가방을 어디에 내려놓든 그것이 잘못된 장소일 것이라는 점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당신의 가방을 치울 것이고, 그 자리에 원래 존재하던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내가 빈힐에 관해 묻자 포스터는 약간 괴로워했고, “끝내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라고 운을 떼며 그 프로젝트가 왜 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했다. 높이 살 만한 점은 그가 함께 설계를 담당한 동료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당시 발주처의 수석 건축가가 “심하게 간섭을 했다”는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지난여름에 나눈 대화에서 엘레나 포스터는 2004년 프랑스 남부의 협곡 위를 가로지르는 미요 대교(Millau Viaduct)가 개통되기 전날 밤, 남편이 보인 극도의 불안감에 대해 터놓았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와 정통한 교량 전문가 미셸 비를로죄(Michel Virlogeux)가 힘을 모아 설계한 그 다리는 바늘처럼 가느다란 교각 위로 다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지나가는데 가장 높은 철탑은 프랑스에 있는 어떤 건물보다 높다. 당시 포스터 부부는 인근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엘레나는 노먼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끝없이 자책했다. “어째서 흰색으로 했을까! 왜? 왜? 왜? 하늘은 파랗잖아! 그러면 내가 의도한 것처럼 다리가 풍경 속으로 스며들지 않을 거야! 차라리 검정이었으면! 갈색도 괜찮았을 텐데!” (다음 날, 포스터는 다리를 다시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흠잡을 곳 없는(Pristine)’이라는 단어를 최고의 찬사로 여기는 포스터는 자기가 설계한 건물 안에 있을 때조차 완전히 편안하진 않다고 고백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언제나 ‘더 잘할 수 있었던’ 부분뿐이다. (하나 이상의 출처로부터 포스터는 가장 악몽 같은 협업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포스터의 회사에서 건축가로 근무한 후 테크 사업가로 변신한 데이비드 갤브레이스(David Galbraith)는 신입 사원 시절, 자신이 포스터의 배터시 아파트 프로젝트에 배정되었을 때 스스로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한 동료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목에 손가락을 긋는 제스처로 반응했다. 포스터는 여전히 약간 불편을 느끼는 지점이 있는 자신의 완성작 중 특별한 애착이 가는 한 가지 예외로 대영박물관의 그레이트 코트를 꼽았다. 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그곳 지붕은 아래의 석조 공간 위에 섬세한 그림자 무늬를 드리운다. 포스터의 동료인 암스트롱 야쿠부는 또 하나의 기억을 들려줬다. 그는 2003년 트럼프 타워에 오픈한 럭셔리 브랜드 아스프리 매장을 포스터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포스터는 그 공간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했고, 잠시 동안 자신이 기뻐한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포스터가 야쿠부에게 물었고, 야쿠부는 “글쎄요, 지금 보고 계신 모든 것이 전부 수작업으로 완성됐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2002년 런던에서 작업 중이던 포스터 앤 파트너스 팀은 야외에서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때 셔틀워스는 포스터 바로 오른쪽에 서 있었다. 그는 파트너이자 핵심 디자이너였으며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사전 스케치를 능숙하게 그리기로 유명했다. 셔틀워스는 1980년대 초반에 홍콩상하이은행 타워를 짓기 위해 홍콩으로 이주했고, 그 건물은 포스터 어소시에이츠에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셔틀워스가 말했다. “그 전까지는 3층짜리 건물까지만 설계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프로젝트였어요. 모두가 ‘노먼이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완벽하게 해냈어요.” 셔틀워스는 현지에 150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구성했다. 포스터는 중앙 순환 중추 없이 다리처럼 양쪽에 걸친 구조를 추구했다. 오랫동안 홍콩에서 근무한 그레이엄 필립스는 그 결과물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호두 하나를 깨려고 대형 망치를 쓴 격이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공적이었어요. 다소 과한 기술력이긴 해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건축이 됐죠.”

모두의 예상과 달리, 포스터는 홍콩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그는 직항 편도 없던 시절에 런던을 넘어 끝없이 출장을 다녔고, 이 격무를 견디기 위해 지구력 운동에 전념했다. (건축가의 커리어는 보통 중년 이후에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렌초 피아노, 렘 콜하스,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웬만한 유명 예술가보다 훨씬 고령이다.) 런던에 남은 포스터는 계속 새로운 일을 모색했다. “다른 건축가들이 주요 경쟁에서 이기고, 그 프로젝트에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위기를 겪고 결국 본사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수많은 사례를 보았습니다.” 포스터의 말이다. 로저스도 퐁피두 센터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포스터 어소시에이츠는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 터미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곧이어 홍콩의 신공항 프로젝트에도 착수했다. 그 시기 사무소에 합류했던 데이비드 갤브레이스는 당시 사무실 분위기가 아주 화려하고 세련됐다고 회상한다. “포스터는 포르쉐를 몰았고, 직원들은 모두 경쾌한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1989년 포스터의 첫 번째 아내 웬디 포스터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배터시에 새로운 사무실 부지를 함께 매입한 상태였고, 사무실은 이듬해 그곳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의 경기 침체로 사업은 잠시 위축되었다. 기계에 매료된 포스터는 그즈음부터 글라이더와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사무소의 매니징 디렉터가 된 그레이엄 필립스는 당시 회사의 재정 상태를 유지하는 데 큰 부담 중 하나는 포스터의 헬리콥터와 전용 제트기 유지비였다고 증언한다. “우린 전체 직원이 100명 정도인 작은 사업체였다고요!” 포스터가 맞받아쳤다. “클라이언트와 동료들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기회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요소였어요.”

회사는 이후 익명의 미래 임차인을 염두에 둔 투자용 사무 공간 프로젝트를 수주함으로써 어느 정도 번창했다. 이런 형태의 프로젝트는 훗날 거킨이나 허드슨 야드에 지은 포스터의 초고층 건물로 이어졌다. 하지만 40년 전만 해도 이런 유형의 작업은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하고 상까지 받은 엘리트 건축 사무소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셔틀워스는 설명한다. “당시에는 클라이언트가 누군지도 모르는 건물보다는 실제 사용자와 협업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인식이 있었죠.” 셔틀워스는 포스터가 이런 종류의 의뢰를 받도록 독려한 데 자신에게도 공로가 있다고 덧붙인다. 그 첫 사례는 1990년대 초반 완공된 런던 부동산 개발자 스튜어트 립턴을 위한 오피스 건물이었다. “그 후 10년 동안, 우리는 런던 부동산 시장에서 1억 파운드 이상을 벌어들였어요.” 셔틀워스의 회상이다.

건축가의 수수료는 일반적으로 총예산에서 일정 비율을 따져 계산한다. 포스터는 언제나 가장 저렴한 설계비를 제시하는 건축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설계한 프로젝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더 희귀한 자재와 더 정밀한 공정을 포함하는 경향을 띤다. 립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끔은 가장 단순하고 빠른 선택지를 찾고 싶을 때도 있지만, 자기는 포스터와 같은 스타 건축가가 실험을 위해 밀어붙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이다. “들어보세요. 건축가는 보통 전체 예산의 5~6% 정도 수수료를 받아요. 걱정할 건 나머지 95%입니다. 그 돈으로 충분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장기적인 투자로 괜찮을까? 완공은 제때 될까? 디테일은 만족스러울까?” 무엇보다 그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 같은 회사를 고용하면 도시계획 당국과의 소통이 좀 더 원활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더 수월한 거래, 열린 마음을 구매하는 셈이다. 포스터의 수석 건축가 중 한 명인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가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대영박물관 그레이트 코트와 블룸버그 본사, 2009년 완공된 보스턴 미술관의 확장 프로젝트 등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존스는 최근 자신이 소유한 영국 해안 도시의 에드워디언 스타일 주택을 꽤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했다. 지자체에 설계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일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출된 도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한 공무원이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고, 다음 미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대영박물관 인테리어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면, 이 집도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군요.”

게다가 포스터보다 수수료가 훨씬 높은 건축가도 많다. 건축가 비야케 잉겔스는 언젠가 입찰 경쟁에 관한 세부 안건을 보다가 포스터가 제안한 수수료와 유럽의 어느 유명 건축가의 수수료를 비교해본 적이 있는데, 후자가 세 배나 더 높았다. 잉겔스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를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수작업을 중시하는 애스턴 마틴의 광기보다는 메르세데스에 가깝죠.” 포스터의 전기 작가 데얀 수직은 최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포스터의 커리어는 건축 잡지에 실릴 만한 건축과 그 외 나머지 모든 건축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물론 포스터는 높은 명성의 프로젝트를 맡기 위한 노력을 멈춘 적이 없다. 1990년대 중반, 그의 회사는 베를린 의사당, 대영박물관, 밀레니엄 브리지 등 굵직한 국제 설계 공모에서 연이어 수주에 성공했다. 곧이어 포스터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평생 문화 훈장(Order of Merit)의 종신 수훈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24명의 문화∙과학계 원로로 구성된 엘리트 문화 집단의 일원이 됐다. 해당 지위로 인해 포스터는 톰 스토파드, 데이비드 아텐버러, 데이비드 호크니 등과 함께 여왕과의 오찬에 종종 참석했으며 지금은 국왕과의 만남도 갖고 있다.

포스터와 두 번째 부인 사비하 루마니 말릭(Sabiha Rumani Malik)과의 결혼은 1995년에 끝났다. 그는 이듬해 엘레나 포스터와 삼혼을 했는데, 엘레나는 친구에게 “노먼이 버크민스터 풀러에 관한 영상을 틀어줬다”며 첫 데이트 일화를 터놓기도 했다. (노먼은 이를 부인했다.) 그 시기 포스터 사무소의 직원은 약 250명이었지만, 2004년에는 600명까지 증가했다. 그레이엄 필립스는 디자인 위원회나 온전한 기업 구조를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급성장한 회사의 과거를 회상하며 켄 셔틀워스의 독자적인 행동이 사무실에 다소 긴장감을 줬다고 회고했다. 사무소 내 수석 건축가들이 포스터와 지속적으로 신경질적인 소통을 벌인 반면, 곡선형 건축에 골몰한 셔틀워스는 ‘그냥 알아서 작업을 진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템스강 변의 런던 시청을 포함한 일부 디자인이 충분한 검토 없이 통과되는 일도 벌어졌다. 필립스는 이 건물이 “노먼을 비롯한 직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기술적으로는 훌륭했다”고 회상한다. 시청의 둥글납작한 형태는 직사광선을 최소화해 에너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전면 유리 외관을 통해 ‘투명성’이라는 가치를 은유적으로 구현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흉측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건물의 첫 주인이 될 당시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은 건물을 ‘유리로 된 고환’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현재 이 건물은 더 이상 시청 건물로 사용되지 않으며, 최근 소유주는 건물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이와 비슷하게, 런던의 상징이 된 거킨 역시 포스터가 별로 좋아하지 않은 프로젝트였다고 필립스는 증언했다. “예쁘게 보이지 않았어요. 분명 노먼도 그렇게 여겼을 겁니다.”

2003년 1월 셔틀워스는 업계 전문지 <빌딩>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어로 나선 마커스 페어스(Marcus Fairs)가 주도한 대화는 머지않아 시청, 웸블리, 거킨(당시에는 첫 임차인 이름을 따서 ‘스위스 리 타워’로 불렸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페어스가 셔틀워스에게 물었다. “모든 건물을 당신이 디자인했나요?” 셔틀워스가 답했다. “모든 건 사무소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작업하고, 노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죠.” 그러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많은 초기 아이디어와 스케치는 저에게서 나오긴 했습니다. 스위스 리 타워가 그 예죠.” 그는 또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재건 프로젝트에서 두 개의 타워가 꼭대기에서 ‘입맞춤하듯’ 맞닿은 설계 역시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주장했다. 페어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도 당신 이름이 거의 거론되지 않는데, 괜찮습니까?” 셔틀워스는 답했다. “그럼요. 저는 주목받는 것을 그리 원치 않아요. 노먼이 인정받는 것이 기쁩니다. 우리 회사는 그의 것이고, 그가 우리 회사의 회장이니까요. 처음 회사를 설립할 용기를 낸 주인공이자 그 도전을 위해 자신의 명성을 내건 사람이고요.”

하지만 이 인터뷰는 내부적인 반발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사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셔틀워스는 최근 그때 일을 회상하며 “모두 제 발언에 대해 약간 화가 나 있었어요. 분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그냥 그렇게 말이 나온 것뿐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포스터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에게 사과했지만, 필립스에 따르면 회의 중 포스터가 셔틀워스에게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셔틀워스는 이를 거부했다. “노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버렸고, 그 뒤로 두 사람은 말을 섞지 않았어요.” 그러나 셔틀워스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그 후에도 포스터와 일정 수준의 소통은 유지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서도 사무실 분위기는 인터뷰를 기점으로 다소 ‘껄끄러웠다’. 그해 말 셔틀워스는 포스터를 떠나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2004년 10월 거킨은 스털링상(Stirling Prize)을 수상했다. 영국에서 매년 단 하나의 건축물에 주어지는 상이다. 그 주에 회사는 포스터의 커리어를 정리한 신간을 발간했고, 이 책에는 2002년에 찍은 단체 사진도 실렸다. 하지만 그 사진에서 셔틀워스는 더 이상 포스터 옆에 서 있지 않았다. 사진 속에서 그는 다섯 자리 옆으로 밀려나 있었고, 필립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셔틀워스는 이런 좌천 행위를 스탈린식 조치라고 유쾌하게 말했지만, 틀림없이 포스터가 이 사진이 이렇게 실리도록 조작하도록 주문했을 것이라고 짐작했고, 그의 개인적인 짐작은 또 다른 이슈를 일으켰다. 그러자 포스터의 회사는 별도의 사과는 없이, “촬영이 진행되던 때 핵심 직원 모두가 참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라며 사진이 편집되었음을 인정했다. (실제로 필립스 역시 해외 출장 중이었다.) 포스터는 최근 이메일에서 이 편집이 “정확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포스터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라고 이야기할 때, 정작 ‘적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는 이 문구를 270 파크 애비뉴 꼭대기에서 인용한 적 있다. 현재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전 세계 곳곳의 공항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며, 그중 세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 또한 다른 걸프 국가의 상징적인 기념물과 서양의 억만장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시타델 CEO 케네스 그리핀(Kenneth Griffin)이 의뢰한 프로젝트 외에도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의 이름을 딴 옥스퍼드 연구 캠퍼스, 센트럴파크 웨스트 인근에 자리한 디자이너 네리 옥스만(Neri Oxman)과 금융인 빌 애크먼(Bill Ackman) 부부의 펜트하우스가 그 예다. 얼마 전, 런던 블룸버그 본사의 빌딩 외관 설계를 담당했던 한 컨설턴트는 “이 예산이면 건물을 페라리로 덮을 수도 있을 정도”라고 농담을 건넸다. 최근 영국은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구상한 304m 높이의 콘크리트 면봉 형태의 전망대를 건설하겠다는 제안서를 거부했다. 계획대로라면 거킨 바로 옆에 지어질 예정이었다. (건축 회사는 이것이 “도시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도한 프로젝트”라고 주장했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리야드에 세워질 2km 높이의 초고층 타워에 대해 묻자, 포스터는 프로젝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점을 사과했고, 설계도가 걸린 방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도 피했다. 대신 그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건넸다. 예컨대 이런 초고층 건물은 “건물 꼭대기 온도는 낮고, 아래쪽은 더우니 완벽한 에너지 순환을 유도할 수 있다”거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바람 전단(비교적 짧은 거리나 시간에 바람의 속도와 방향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다소 당혹스러운 설명이다. 고도가 높아지면 공기 밀도가 낮아지는 것은 맞지만, 풍속은 더 빨라지므로 바람 전단은 오히려 극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건축가들 중에서도 포스터는 누구보다 강력한 리더다. 그가 때로는 덜 자신 있어 보이고, 다소 불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연설가이자 간혹 작가로도 활약하는 포스터에게서 눈에 띄는 독특한 점은 그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하지 않은 일’에 관해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즉 억만장자 고객들에게 우울하지 않은 건물을 선물한 수많은 업적보다 모듈식 주택, 도보 친화적 도시 설계 같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이상에 관해 더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포스터는 미요 대교가 심각한 교통 체증을 완화했기 때문에 ‘생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생태학적으로 정확한 주장은 아니다. (이후 포스터는 이 다리가 주요 운송 경로를 단축했기 때문에 탄소 절감 효과를 냈다고 주장했지만, 다리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이나 유도 수요(도로가 개선되면 차량 이용이 증가하는 현상)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주장은 고가교 같은 인프라가 사회적으로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거가 지닌 신뢰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몇 년 전 노먼 포스터 재단은 개발도상국을 위한 드론 배송 인프라를 제안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포스터가 그린 도면에는 물결 모양을 이룬 벽돌 지붕 아래, 벽이 없는 공간이 등장했다. 그의 목표는 2030년까지 아프리카의 모든 작은 마을에 ‘드론포트’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실제 건물은 단 한 번도 지어진 적 없다. 실제로 르완다에서 드론 배송 업체가 운영을 시작했을 때는, 평범한 창고 건물을 활용했다. 최근 포스터 재단은 시멘트로 강화한 캔버스 벽으로 짓는 비상 주택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하는 일에도 골몰했다. 각 유닛의 예상 건설비는 1만5,000달러 이상이다. 견고한 디자인을 택한 첫 번째 이유로 포스터는 사람들이 난민 캠프에 머무는 기간이 평균 17년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인터넷상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 수치를 그는 나와의 인터뷰에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기도 했다. 이에 관해 계속 지적을 받자 포스터는 “실제로는 난민이 캔버스 아래에서 평균 10~15년 정도 거주하게 될 거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며 발언을 정정했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 세계은행에서 추정한 자료를 토대로 다시 추산한 정보였다. (이후 재단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더 영구적인 주택 설계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해 1월 마드리드에서는 포스터 재단 산하의 새로운 교육기관인 노먼 포스터 인스티튜트(Norman Foster Institute)가 출범했다. 이곳은 미래 시민 리더를 위한 지속 가능한 도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첫해에 24명의 국제 학생들이 입학했다. 몇몇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포스터의 드로잉, 스케치북, 모형 등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재단 소유의 타운 하우스에서 열렸다. 건물 옆 중정에는 포스터가 직접 설계한 거울 천장을 지닌 아름다운 파빌리온이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포스터와 아라베나 등 주요 건축가들의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모임의 풍경치고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파빌리온 내부는 화석연료 산업을 기념하는 전시장으로 오해받기 충분했다는 점에서다. 한쪽 진열장에는 포스터가 몰아본 모든 항공기 모델과 제트기, 반대편에는 포스터가 맞춤 제작을 의뢰한 다이맥시온 차량(1930년대에 버크민스터 풀러가 디자인한 매끄러운 형태의 3륜 자동차)의 실물 크기 복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가장 긴 벽에 걸린 것은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2008년에 완공한 베이징 공항 터미널의 9m 모형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인 그 터미널은 바닥 면적만 92만9,000㎡가 넘는다.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도 새 공항을 짓고 싶다는 의뢰가 빗발치는 시대에 거창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건물들이 최대한 지속 가능한 형태여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를 느낍니다.” 그의 말은 과하지 않았다. 포스터가 세상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가는 아닐지 몰라도, 자연 채광과 자연 환기,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설계한 잔디 지붕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많은 동료들보다 앞서 있다. 동료들에 대한 그의 어조가 엄해지는 것을 느낀 유일한 순간은, 동료들이 프로젝트 과정에서 에너지의 재활용 기회를 간과하고 있다고 그가 강조했을 때다. 하지만 솔직히, 포스터가 스스로를 ‘적은 것으로 더 많이’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으로 더 많이’ 해내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은 지금보다 쉬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애플 파크에 나무 8,000그루를 옮겨 심었다는 사실이 탄소 흡수 측면에서 대단한 성취라고 성토하기보다 그 부지에 자동차 1만 대의 주차 공간이 있다는 것을 부담 없이 강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좋은 디자인을 갖춘 건축물은 지속 가능성을 위한 논의를 거듭했지만 정작 설계가 엉망이라 철거 위기에 놓인 건물보다 훨씬 덜 낭비적이다. 포스터가 1971년에 주장한 말 그대로다. “결국 빈민굴을 창조한 거라면, 거기에 들어간 돈은 헛된 것이다.”

마서스비니어드의 본채 데크에서 우린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 위에 있는 그늘막이 아무 이유 없이 윙 소리를 내며 접히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이에요.” 포스터가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식탁보 위에 올려둔 리모컨으로 날개를 재조정했다. 순간 또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포스터가 사랑하는 기후 제어 기술 장치(블룸버그 본사에 신선한 외부 공기를 들여보내는 자동 날개 시스템 같은)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단순한 난방 조절 장치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실질적인 진보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참고로 세인즈버리 센터의 반투명 유리 지붕 아래 설치한 자동 루버 차양은 20년간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고, 수동 조작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조명은 늘 켜진 상태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햇살이 잘 드는 포스터의 작업실 별채를 방문했다. 엘레나는 프린터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옆방에 들어갔다가 포스터의 자료를 긴 작업용 책상 위 어디에 둘지 고민하는 척하며 은근히 남편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기가 좋을까? 아님 여기?” 포스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엘레나, 그것 좀 위에 올려줄래?” 그러더니 그의 어조가 조금씩 단호해졌다. “아니, 거기 말고. 아니야, 아니야.”

이후 우리 셋은 메하리를 타고 연못 반대편, 즉 본채 맞은편으로 이동했다. 역시 부부의 소유지인 그곳에 포스터는 최근 포스터 리트리트(Foster Retreat)라 불리는 400㎡ 규모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그러고 보니 포스터가 처음으로 의뢰받은 건물 역시 리트리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실험적인 정원 겸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조종석처럼 생긴 공간은 땅속에 파묻힌 상태였고, 유리 벽과 경사진 지붕, 물가를 내려다보는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이 리트리트는 리처드 로저스의 처가를 위해 1964년 콘월에 지은 것으로 총공사비는 500파운드에 불과했다.

포스터 리트리트는 설계 과정에서 동네에 약간의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맨 처음 그는 침실 세 칸짜리 주택으로 건축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웃들은 이후 포스터 재단 웹사이트에서 이 건물이 “싱크탱크 세션, 워크숍, 세미나를 위한 유연한 공간”으로 소개된 사실을 발견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눈 한 동네 주민은 아주 중립적인 어조로 해당 건물을 ‘컨벤션 센터’로 묘사했다.) 이런 갈등이 공론화되자 홈페이지 문구는 “노먼 포스터 재단의 동료, 협력자, 친구 등 포스터 가족의 손님들을 위한 프라이빗 레지던스”로 수정되었다. 그것은 도시계획 전문 변호사와 비영리법인 세무 변호사가 함께 고심해서 작성한 협상문처럼 읽힌다. 엘레나 포스터의 요약은 이랬다. “한동안 와글와글했지만, 지금은 다들 좋아해요.”

측면에서 본 포스터 리트리트는 사다리꼴 형태다. 지붕은 앞에서 뒤로 꽤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고, 전면 벽도 기울어져 있다. 외장은 내부의 목재 프레임을 감싼 강철 외부 골조로 되어 있는데, 토스트 거치대처럼 보인다. (이 구조는 애리조나주 피닉스 인근에 자리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집 겸 스튜디오인 탈리어센 웨스트(Taliesin West) 건축양식과 비슷하다.) 건물 뒤쪽에는 작은 침실 세 개가 딸려 있으며 앞쪽에는 커다란 다목적 공간이 있고, 마야 린이 그린 템스강 지도가 걸려 있다. 반대편 끝에는 도서관이 있고, 그곳에는 버크민스터 풀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엘레나가 덧붙였다. “나중에는 노먼의 초상화로 바꿀 거예요.” 포스터가 버튼을 누르자, 창가의 블라인드 여섯 개가 동시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왜 내려요, 노먼?” 포스터가 답했다. “그냥 만져보는 중이야.”

파빌리온 앞의 데크에서 우린 포스터가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아흔이 넘었는데도 포스터가 여전히 주요 사업의 디자인 책임자로서 온전히 활동하고자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0여 년 전, 현대자동차그룹은 서울 강남 한복판의 7만9,342㎡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매입하고, 이곳에 새 본사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포스터는 이 부지를 록펠러 센터에 비유했는데, 규모나 입지의 상징성 면에서 비견할 만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105층짜리 초고층 타워 계획을 발표했다가 곧 그 계획을 폐기했다. 이후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설계하는 공모에 참여했다. 2023년 여름,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결과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았어요.” 그가 서울에서 정의선 회장을 만났을 때, 그는 그 순간을 ‘마지막 고비를 넘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그의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설계를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이후 대화에서 동료에게 무례하게 보일까 봐 걱정한 포스터는 “기존 설계를 기반으로 아이디어를 확장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표현을 완화했다.) 그러나 이런 충동이 회의에서 나온 특정 이야기 때문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웸블리 스타디움의 지붕과 관련된 갑작스러운 성찰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재검토의 시간”이었다. 그의 초기 설계는 부지 전체에 “건물을 흩트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터는 그 계획이 부지가 지닌 “동네 전체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도시 조성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지난해 봄, 포스터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성당과 파리의 르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완성했다. 이 시점에 현대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를 공식 설계사로 채택했다. 계획은 중앙 광장을 둘러싼 세 면에 일곱 개의 건물을 록펠러 스타일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공원, 지하에는 쇼핑몰을 설계하는 것이다. 공원의 은행나무는 정확한 격자 형태로 심어져 있고, 그 아래엔 나무가 정갈하게 늘어선 코르도바의 숲을 본떠 설계한 구조물이 있다. 각각의 기둥은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로 천장에 도달하면 위의 나무뿌리를 품는 그릇 형태를 이룬다. 부지 한쪽에는 세 개의 고층 타워가 일렬로 들어서고, 반대쪽에는 네 개의 저층 건물이 서로 마주한다. 한쪽엔 백화점과 과학박물관, 다른 쪽엔 컨퍼런스 센터와 콘서트홀이 들어선다.

2023년 여름, 포스터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의선 회장과의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동료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하던 무렵에는 일렬로 늘어선 세 개의 타워가 포스터의 제안에 따라 역피라미드 형태로 바뀌었다. 한번은 마서스비니어드의 긴 책상 앞에 앉은 포스터가 “중앙 타워 꼭대기층 호텔 위에 아파트를 넣자”는 클라이언트의 지령을 처리하고 있었다. 세 타워 중 가운데 타워 꼭대기에 호텔을 만드는 것이 원래 계획인데 호텔 위에 아파트를 설계하라는 주문이 추가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호텔 투숙객의 시야가 너무 가려지지 않을까? 양옆 타워 때문에 공간이 너무 좁아지는 건 아닐까? 작은 타워의 꼭대기를 자르고 줄어든 면적을 저층으로 넘기는 게 나을까? 그럴 경우 저층 건물은 구조적으로 안전할까?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포스터는 즉석에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화상회의는 작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로만 가득한 가운데, 포스터가 중간중간에 스케치를 카메라에 보여주었다. 포스터가 다시 창조한 타워는 소리굽쇠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건물 상층부가 구조적인 긴장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며칠 뒤 다시 회의가 열렸을 때, 세 개의 타워는 더 이상 일직선으로 배치되지 않았다. 런던에 있는 파트너 마이클 워젤(Michael Wurzel)이 되물었다. “만약 이것이 체스 게임이라면, 퀸이 갇힌 상황이군요. 그런데 룩(Rook)을 한 칸 앞으로 움직이면요? 갑자기 여왕이 모든 방향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거죠!” 포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세 개의 건물을 일렬로 놓았을 때보다 훨씬 나은 계획이군요.”

런던 팀원들은 테이블 위에 모형을 올려두고 논의 중이었다. 워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모형 위로 몸을 기울이며 좌우로 움직였다. “내가 태양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순간 포스터는 역피라미드 형태가 여전히 유효한 디자인인지 팀에 물었다. 그가 이 형태를 추천한 이유는 “타워의 외관을 시각적으로 분절하고, 주변 건물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음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또한 상층부는 상업적 가치가 크다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포스터가 말했다. “내가 학창 시절 이후로 줄곧 역피라미드 형태에 깊이 매료돼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첫 번째 시도는 예일대학교에 다닐 때 이뤄졌죠. 아직 실현된 적은 없지만, 이번엔 정말 가능할 것 같아요.” 아직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논의는 계속되었고, 좀 더 논의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포스터는 클라이언트에게 너무 많은 선택지를 주지 말자고 조언했다. “결정권을 클라이언트에게 넘기는 건 오히려 그들의 이익에도 반하는 일일 수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확고하게 선택지를 내밀어야 합니다.”

270 파크 애비뉴 투어가 끝난 뒤, 포스터는 JP모건의 임원 데이비드 아레나와 함께 임시 본사로 돌아와 신사옥에 설치할 자신의 키네틱아트 작품에 대해 소개했다. 이 작품은 포스터가 뉴욕에서 시각예술가로서 데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몇 년 전 그는 425 파크 애비뉴의 고급 레스토랑을 위해 ‘구름 조각(Cloud Sculpture)’을 구상한 적이 있었지만 대중에 소개하지는 못했다. 일레븐 매디슨 파크(Eleven Madison Park)의 총괄 셰프이자 대표 다니엘 흄(Daniel Humm)이 운영할 예정인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나 흄의 ‘비건 선언’으로 건물주는 계획을 철회했고, 결국 포스터의 ‘구름 조각’도 실현되지 못했다. JP모건의 새 글로벌 본사를 위해 포스터가 이번에 고안한 작품은 청동으로 마감한 플루트 모양의 기둥 네 개다. 각각의 높이는 12m로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였다. 세 개는 건물 바깥에, 하나는 로비에 설치할 계획이었다. 로비 안에 설치할 깃대는 기둥 위쪽 끝에서 공기를 분사해 깃발을 휘날리도록 연출할 것이다. “홀로그램이 아닙니다.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이죠.” 포스터가 설명했다.

이 작품에 대해 언젠가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 있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기둥 꼭대기로 바람을 쏘면 된다고요.” 하지만 모형을 제작하고, 컴퓨터 모델링을 거치며 마드리드에서 수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깃발을 움직일 정도로 강한 압력의 공기가 노즐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고음의 소음이었다. 그 소리를 없애면서도 깃발을 부드럽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포스터가 구상한 대로 완성된다면 깃대에는 어떤 디자인의 깃발이든 다 걸 수 있게 되어 귀빈의 국기를 띄우는 이벤트도 벌일 수 있다. 그는 아레나와 논의를 거듭하며 실내 깃발이 외부 날씨 조건에 맞춰 활기차게, 정확한 방향으로 펄럭이길 원한다고 설명했다. 즉 깃대는 회전 가능해야 하고, 상단에서 분사되는 공기의 세기 역시 조절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터가 아레나에게 물었다. “건물 17층 테라스에 풍속계를 설치할 수 있을까요?” 아레나는 난색을 표했다. “지금 모든 일정이 완벽하게 맞춰져 있고, 이미 승인까지 다 끝난 상태라서요.” 대신 그는 옥상에 설치될 예정인 기후 제어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받아오는 것은 어떤지 제안했다. 만약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포스터가 원하는 대로 풍속계를 설치해보겠다고 덧붙였다. (이후 두 사람은 결국 실외 깃대 중 하나의 꼭대기에 풍속계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아레나는 예전 본사 앞에 꽂혀 있던 깃발들이 얼마나 자주 축 늘어져 있었는지 기억해내고는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아도 실내에서 계속 깃발을 펄럭이게 할 건가요?” 포스터가 대답했다. “논의해볼 문제죠.” 그런 다음 생각을 바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아레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하죠. 초현실적인 건축의 일부로서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다소 신기한 느낌을 가미해도 좋겠어요.” 아레나가 화답했다. “그게 바로 예술이죠!”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IAN PARKER
    사진
    JULIA FULLERTON-BATTEN
    세트
    JAINA MI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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