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신천희 시인의 ‘술타령’에 공감하던 젊은 날. 시대가 한잔을 즐기는 방식은 달라졌어도 나는 여전하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더워봐라, 내가 술을 끊나.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영화 <카사블랑카>의 이 대사는 가장 유명한 건배사일 거다. 본래 “Here’s looking at you”였으나 초월 번역됐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상수(손석구)는 은정(전여빈)에게 이를 설명하며 그녀의 눈에 소주잔을 갖다 댄다. 그리고 로맨틱한 한마디.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옆에는 소주 세 병이 있다.
10년 전 외국인 친구는 소주의 정체를 물었다. 저 초록 병이 뭐길래 한국 영화에, 특히 미스터 홍(홍상수 감독)의 주인공들이 매번 마시고 그때마다 이야기가 급전개되느냐고. 나는 고민하다 “국민 술”이라고 설명했는데, 이젠 그의 친구들도 소주가 뭔지 안다. 런던의 한식당에 같이 갔을 때 친구는 한 병에 3만원 하는 코리안 드링크를 시키며 신나 했다. 나는 원가 생각에 온전히 즐길 수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한국 기자들과 가는 해외 출장 마지막 날은 어김없이 한식당이었다. 내일 한국에 들어가는데 굳이 코리아타운에서 삼겹살에 소맥을 먹는 그들을 한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사히 출장을 마친 세리머니였음을.
나의 첫 술 역시 세리머니였다. 수능을 100일 앞두고 백일주를 마신 날. 학교 앞 즉석 떡볶이집 내실에 둘러앉은 우리는 아주머니가 가스버너를 들고 오기 전까지 검은 봉지에 소주를 감췄다. 아주머니는 오늘이 ‘그날’임을 알았는지 평소 열어두는 방문을 닫아줬다. 셋이 소주 한 병을 비우지 못하고 나오면서 “이 맛없는 걸 대학 가면 억지로 먹인다는데 어쩌지” 걱정했다.
놀랍게도 나는 학과 주당이 됐다. 소주 한 병을 빨대로 비우는 게임 벌칙에 흑기사를 자처한 선배를 보며 ‘나도 마실 수 있는데 오버’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은 서로의 치사량을 알아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119 구급차를 불렀고, MT 간 민박집 마루에 토한 친구는 휴학했다. 나는 망신은 있어도 큰 사고는 없었는데 친구들의 수고 덕분이었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졸업식 날 학생들이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교사인 마르틴(매즈 미켈슨)이 환락의 음주 댄스를 추며 마무리한다. 술과 인생의 찬가다. 나의 대학 시절도 비슷했다.
취직한 후에도 소주는 여전히 애착 술이었다. 낮에는 회사 계단에서 울고 저녁에는 소주로 달랬다. 당시는 주 6일제로 토요일에도 출근했는데, 이 불토는 그야말로 달리는 날이었다. 안주는 직장 생활 토로와 상사의 험담이었고, 동기들과 “다시 한번 지화자” 하자며 월요일을 기약했다. 대학 시절 세리머니였던 소주는 그 시절엔 카운슬러에 가까웠다.
시절 인연처럼, 40대가 되니 옛 친구와 조금씩 이별해갔다. 소주가 맛없었다. 나이 들면 입맛이 변한다더니. 근데 소주를 맛으로 먹었나. 혹시 나 지금 평안한 거야? 내 인생보다 쓰지 않던 소주가 이제는 반대 입장이 됐나.
부어라 마셔라가 사라진 시대의 흐름도 있을 거다. 젊은 세대는 확실히 폭음에서 ‘경험의 음주’로 방향을 틀었다. 살펴본 통계도 그랬고, 20~30대 초반 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져도 “한 잔 더”를 외치는 건 나뿐이다. 그들이 술맛이 안 났을 수도 있지만.
미디어에선 젊은 세대가 술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결론짓곤 하지만, 자기만의 음주 찬가를 그려나가는 중으로 보인다. 그런 후배의 영향을 받아 바에 드나들고 있다. 나와 바가 얼마나 어색한 사이였느냐면, 3차까지 살아남은 소수를 데리고 선배가 선심 쓰듯 데려간 바에서 나는 속으로 블랙 러시안 한 잔에 소주가 몇 병인지 계산했다. 당시 슈퍼에서 1,100원이던 소주를(1만원 내고 9병 사면 100원 거슬러 받았기에 정확히 기억한다) 대여섯 병 살 수 있었다. 이거 한 잔이면 소주로 벌써 취했겠다며 아쉬워했다.
후배는 촬영이 끝나면 마티니 한 잔으로 그날 회포를 푸는 주류 전문 기자다. 물론 한 잔으로 끝나지 않고 어느 순간 바텐더의 밀착 마크를 받으며 신메뉴를 연타로 시음하는 피날레지만. 그녀를 따라 방문한 바엔 환대가 있었다. 시드니 뒷골목의 바 플래닛(Bar Planet)에는 서스펜더에 체크 반바지를 입은 바텐더들이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를 흥얼거리며 칵테일을 만들었다. 내가 주문하면 종이에 해당 칵테일을 드로잉해 선물하고 바스테이션으로 깨금발 뛰기를 했다. 이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인간들의 세계가 있다니. 처음엔 걱정과 우울이 생략된 바 분위기에 취했다. 시간이 갈수록 바텐더들의 연구 자세에 매료됐다. 2023 월드 50 베스트 바에서 1위 한 바르셀로나의 십스(Sips)는 오픈 시간인 저녁 7시에 좌석을 겨우 뺄 수 있었다. 그마저 십스와 연이 있던 셰프 찬스 덕분이었다. 실험실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칵테일부터 우리 엄마가 팥빙수 먹던 시절에 있을 법한 얼음 기계로 내린 셔벗 가니시까지 ‘와우’ 포인트가 이어졌다.
진짜 내가 이 세계에 반한 건 한국 여성 바텐더들과 만나고부터다. 주류업계 중에도 바 문화는 열린 편이라 여성이 더 자리 잡을 수 있었다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정관념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고난보다 그녀들이 정말 말하고 싶은 건, 한 잔에 담긴 철학과 스토리텔링이었다. 이유 없는 칵테일은 없었다. 2024 아시아 50 베스트 바 2위에 오른 제스트(Zest)의 신미영 바텐더는 이렇게 말했다. “날이 갈수록 무엇이든 이유가 있어야 소비자들이 찾아요. 음료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죠.”
어느 분야든 그 세계의 깊이를 발견하면 매료될 수밖에 없다. 깨끗한 한 방울을 만들고 싶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강릉의 양조장으로 떠난 친구도 그랬을 거다. 나파밸리에서 만난 여성 와인메이커들도 그랬다. 친환경 포도를 키우는 와이너리 오너가 닭똥으로 더러워진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염소와 닭, 토끼가 있는 주조장을 지나 포도밭으로 날 데려갔고, 달의 주기와 와인의 관계를 설명했다. 언뜻 타로 카드를 봐주는 점술사 같기도 했다. 솔직히 그때 된장 독에 첼로 연주를 들려주던 강원도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취재하면서도 사기꾼이라 여겼는데, 그냥 된장에 미친 사람 아니었을까. 무언가에 미친 자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어느 지점에 가닿은 이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난해 여름, 스페인에서 열린 돔 페리뇽 행사를 취재할 때였다. 어떠냐는 편집장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샴페인에 미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돔 페리뇽의 맛을 총괄하는 셰프 드 카브인 뱅상 샤프롱(Vincent Chaperon)의 언어는 양조 용어라기보단 시어에 가깝다. 효모와 버블의 세계에 일생을 바치며 그가 깨달은 것을 잠깐의 인터뷰로 이해하긴 어려웠다. 이세돌의 은퇴 인터뷰 영상이 생각났다. 그는 진행자에게 바둑의 세계를 설명하려다 멈칫한다. 몇 마디 언어로 전하려다 그 세계를 왜곡할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깊이 내려간 자가 발견한 진실 혹은 디테일을 참관자인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한때 나는 만화 <신의 물방울>의 대사를 조롱했다. 현대풍 모나리자 와인이라느니, 혼연일체 된 마그마처럼 복잡한 액체라느니. 하지만 내가 그 세계에 가닿지 못했던 거다. 돔 페리뇽 출장을 함께 간 남성지 기자이자 소믈리에 자격증 보유자는 내가 샴페인의 미학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취재를 마치고 그와 무더운 바르셀로나를 걷다가 카페에 들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그를 점원이 허탈하게 쳐다봤다. 그런 건 스타벅스나 가서 찾으라는 표정. 그곳엔 커피의 세계에 진심인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다양한 술의 세계에 조금씩 매료되는 중이다. 덕분에 부엌에는 낯선 이름의 병이 늘어난다. 최근엔 굴 맛이 나는 진을 구입했다. 호주의 한 펍에서 제조한 것인데, 굴과의 마리아주를 시도할 겨울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면 오히려 비릴까. 진의 세계는 어떤지 알고 싶다.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문이 열릴 테니 설레기까지 한다.
이런 얘기를 남자 친구에게 하면 잠자코 들어준다. 리스닝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내 부엌에서 꺼내오는 술은 언제나 소주다. 레드 와인에 얼음을 넣어 먹는 이 남자에게는 소주가 세계다. 그러고 보니 그가 처음처럼도 진로이즈백도 아닌 참이슬 프레시만 마시는 이유가 궁금하다. 무뚝뚝한 부산 사나이에게 물으면 술이나 마시자고 하겠지. 난 또 그 억양이 좋을 테고. 각자의 세계를 살다 여름날 우리 집으로 모였으니 한 잔 세리머니가 빠질 수 없다. 나는 와인글라스, 그는 소주잔으로.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아티스트
- 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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