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나단 앤더슨 “오늘 일어나는 일과 대화를 시도하는 거죠”

2026.04.01

  • VOGUE

조나단 앤더슨 “오늘 일어나는 일과 대화를 시도하는 거죠”

조나단 앤더슨이 제시하는 동시대적 비전.

Working the Room “아이디어를 쥐어짜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조나단 앤더슨의 디자인이 구현되는 디올 아틀리에. “하지만 일종의 집착이죠. 어떤 예술가나 빈티지 작품 하나가 컬렉션 전체에 영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빛이 창백하게 옅어지는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은 파리의 한 고요한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의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미래의 조각들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게 뭐죠?” 그가 물었다.

그의 디자인 디렉터 알베르토 달라 콜레타(Alberto Dalla Colletta)는 외과 의사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그날 결정해야 할 꾸뛰르 쇼 관련 사항을 살펴본 뒤, 여성복 컬렉션에서 당장 처리해야 할 사안으로 넘어갔다. “이게 수정한 버전의 치마예요.” 그가 서류 뭉치를 휙휙 넘기며 말했다. “점점 흥미로운 방향으로, 하나의 뚜렷한 형태가 잡히고 있어요.”

“등 부분이 아주 좋군요.” 확신에 찬 말투로 답한 앤더슨은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 키와 거침없는 태도, 흐트러진 적갈색 머리칼, 리듬감 있는 아일랜드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 41세의 앤더슨은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인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해 그의 임명이 발표됐을 때, 패션계 전반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 당시 그는 로에베에서 보낸 11년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패션사와 개인적인 관심사를 넘나드는 창조적 절충주의 스타일로 시장에 신선하고 새로운 매력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론칭한 지 18년 된 런던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브랜드 JW 앤더슨(JW Anderson)을 운영하며 이 모든 것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 말 공개된 그의 꾸뛰르 데뷔 컬렉션은 폭발하듯 만개하는 꽃을 그려낸 봄 그 자체였다. 디올이 지닌 방대한 기술적 역량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조나단은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의 디자인이 한 가지 모습만 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레드 카펫에서 앤더슨의 디올 드레스를 먼저 입은 배우 중 한 명인 제니퍼 로렌스가 말했다. “보통은 같은 세계관의 스케치를 세 장 정도 받아요. 그런데 조나단이 보내는 것은 디자이너 25명이 각기 다른 선택지 25가지를 보내온 것처럼 보이죠. 그의 폭넓은 스펙트럼에 늘 놀랍니다.”

“색감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브라운 컬러가 조금···” 달라 콜레타가 약간 주저하며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갔다. “브라운에 금색을 더해보면 꽤 좋을 것도 같은데요.” 앤더슨은 흔들림이 전혀 없이 제안했다. “이상할 수도 있겠죠.” 앤더슨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스튜디오 한쪽 끝에 있는 벽난로 선반 위에는 ‘Ulysses by James Joyce’라는 문구가 수놓인 가방이 눈길을 끈다. 앤더슨이 선보인 책 표지 가방 시리즈의 일부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동 타자기와 과일 모양 양초가 놓여 있다. 방 중앙에는 바퀴 달린 패널 보드 8개가 무작위로 늘어져 있고, 여기에는 아직 작업 중인 광고 캠페인 이미지가 붙어 있다. 마네킹에는 수정 표시가 가득한 캘리코 투알 원단이 걸려 있고, 행어 2개가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다. 앤더슨의 임명이 큰 기대를 모은 것은 높은 위험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창립자 크리스챤 디올 이후 처음으로 가방과 신발을 비롯해 여성복, 남성복, 꾸뛰르 등 하우스의 모든 패션 라인을 총괄하는 디자이너다. 현재 가장 규모가 큰 파리의 꾸뛰르 하우스에서 해마다 막중한 컬렉션 10개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각기 다른 주제의 회의가 대위법처럼 동시에, 숨 쉴 틈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건 지난번에 받은 다른 레퍼런스를 참고했습니다.” 달라 콜레타가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자카드 원단을 전부 잘게 잘라서 프린지를 만들 거예요.” 앤더슨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그 페이지를 한참 쳐다봤다. 그의 작업 방식은 시골 병원의 수술실 밖에서 의사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자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의 왼쪽 팔꿈치 옆에는 가방을 통째로 테이블 위에 탈탈 쏟아놓은 것처럼 개인 소지품이 펼쳐져 있다. 아이폰, 커피잔, 에비앙 물병, 무선 이어폰 케이스, 틱택 한 통, 담배 한 갑, 작은 줄자와 지퍼 달린 밝은 연두색 동전 지갑이다. ‘Dumb as a Dream’이라고 쓰인 이 지갑은 미국 아티스트 리처드 호킨스(Richard Hawkins)와 협업한 로에베 제품이다.

“멋지군요.” 한참 만에 입을 뗀 그가 좀 더 가까이에서 유심히 들여다봤다. “다만 여기 색감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여요.” 달라 콜레타가 그에게 두 장을 더 보여줬고, 앤더슨은 또 다른 회의를 위해 방을 뛰쳐나갔다. “1시간짜리 회의도 조나단은 10분이면 됩니다.” 달라 콜레타가 서류를 정리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튈르리 정원에서 열린 앤더슨의 첫 디올 여성복 컬렉션은 몇 달 동안 파리에서 가장 큰 기대를 모은 쇼였다. 시작 1시간 전부터 몰려든 인파는 공원에서 흘러나와 콩코르드 광장까지 번져나갔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온 구경꾼도 있었다. 또 일부는 팻말을 들고 제니퍼 로렌스, 사브리나 카펜터, 안야 테일러 조이, 지수, 지민, 로버트 패틴슨, 조니 뎁 등 셀러브리티들이 안전 요원을 따라 군중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튈르리 정원 중앙의 팔각형 연못 근처에 세워진 거대한 황갈색 구조물 내부를 천장이 낮은 갤러리로 연출한 것은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와 그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스테파노 바이시(Stefano Baisi)다. 얼룩진 회색 벽면에는 이탈리아 모더니즘 양식 몰딩을 겹겹이 둘렀고, 박스형 나무 스툴을 좌석으로 활용했다. “미술관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5년 전 앤더슨과 처음 만난 구아다니노가 설명했다. 그는 최근 영화 세 편의 의상 작업을 앤더슨과 함께 하기도 했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다큐멘터리 감독 아담 커티스(Adam Curtis)가 만든 짧은 몽타주 영상이 삼각형 패널 위로 투사되었다. ‘디올의 집에 들어갈 용기가 있나요?’라는 문구가 등장한 뒤 이어진 영상은 79년 디올 역사를 공포 영화처럼 변모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밝아졌고, 앤더슨의 첫 번째 디올 여성복 컬렉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름진 플리세(Plissé) 원단을 비틀어 완성한 실루엣, 짧게 자른 트위드 미니스커트 수트, 기묘하게 들쑥날쑥한 패턴으로 짜인 레이스 의상이 등장했다. 상징적인 디올 바 재킷을 변주하거나 드레스 형태를 장난스럽게 전복하기도 했다. 턱받이처럼 덧댄 앞판, 끝을 접어 내린 칼라, 리본 크라바트, 풍성하고 재기 발랄한 체크무늬를 통해 점잖은 미드 센추리 패션 관념을 암시했다. 그러나 기이한 볼륨, 세로 방향으로 팽팽히 당긴 비율, 허브를 다듬는 것처럼 완성된 형태를 뿌리만 남기고 잘라낸 듯한 갑작스럽고 과감한 생략은 전통주의에 극단적이고 삐딱한 감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6월 앤더슨이 선보인 첫 디올 남성 컬렉션의 언어를 여성복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남성 컬렉션에는 버슬처럼 보이는 거대한 볼륨의 카고 반바지 등 여성복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구별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디자인함으로써 ‘디올 커플’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 가능성이야말로 그가 요구한 총괄 리더십의 핵심이었다고 회장 겸 CEO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가 밝혔다. “매우 동시대적인 비전이죠. 남녀가 서로 바꿔 입을 수 있는 옷을 착용하는 겁니다.” 이는 앤더슨이 본인 브랜드를 운영하던 초기부터 추구해온 비전이다. 2013 가을/겨울 시즌 앤더슨은 JW 앤더슨 남성 컬렉션에서 러플로 밑단을 장식해 미니스커트 같은 반바지를 선보여 이슈가 되었다.

“여성과 남성 컬렉션의 간극을 진정으로 메운 최초의 디자이너입니다.” 배우이자 카바레 아티스트, 트랜스 인권 운동가로 활동 중인 저스틴 비비안 본드(Justin Vivian Bond)는 앤더슨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여성 컬렉션에 늘 남자 모델을 한두 명 포함시켜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그 점이 깊이 와닿습니다. 전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설득력 있고 재미있거든요.” 둘은 20여 년 전 처음 만났다.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가 본드의 런던 공연에 그를 데려간 것이다. “조나단은 깃털 달린 니트 모자와 인조 모피 터번, 파리들이 걸린 그물로 장식한 멋진 헤드밴드를 만들어줬답니다. 그의 전형적인 초기 스타일 작업물이죠.”

앤더슨은 본드에게 런던 예술대학(London College of Fashion) 졸업 쇼에서 선보일 공연을 부탁했다. 이후 두 사람은 여러 프로젝트에서 협업을 지속했고, 최근에는 오페라 <Complications in Sue> 작업을 함께 했다(앤더슨이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작업하면서 특유의 기발함을 한 번도 잃은 적 없어요.” 본드가 계속 말했다. “그런 점이 조나단의 작업을 끝없이 흥미롭게 합니다. 계속 진화하게 만들죠.”

조나단 앤더슨이 특히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급진적(Radical)’이다. 칭찬할 때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다. “급진적이라고 해서 꼭 요란할 필요는 없어요. 때로는 새로운 작업을 고민하고 찾는 과정 자체가 급진적일 수 있죠.”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디올에서의 새로움은 로에베에서의 새로움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로에베는 LVMH 그룹 내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지만, 대부분의 역사를 스페인 가죽 전문 브랜드로 일궈왔다. 가방 제조 기술로 명성을 쌓았고, 의류로 확장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앤더슨은 그저 하우스에 에너지를 불어넣은 것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로에베 스타일’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로에베에는 패션 언어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디올에는 필요하지 않죠! 가방 구조는 필요합니다. 하나의 세계관이 필요해요.” 앤더슨의 급진적인 행위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조율해 신선한 병치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비롯된다.

유산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특정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공포 영화로 시작하는 패션쇼는 드물다. 앤더슨은 역사적인 파리 꾸뛰르 하우스를 책임지는 중압감을 위트 있게 표현하려 한 것이다. 전후 ‘뉴 룩’을 창조한 창립자를 시작으로 이브 생 로랑, 존 갈리아노 등 하우스의 역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하나같이 신처럼 압도적이니 말이다.

“그렇게 심한 압박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고백하듯 말했다.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도, 브랜드 때문도 아니었어요. 지금 이 순간 패션을 구원해야 한다는 패션계 전반의 분위기 때문이었죠. 그것이 일종의 기묘한 유토피아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것 같았어요.”

앤더슨의 작업은 대부분 투쟁과 추진력으로 이뤄진다. 그의 아버지 윌리(Willie)는 아일랜드 럭비 국가대표 팀 주장이었다(구아다니노는 이렇게 말했다. “럭비 스웨트셔츠는 조나단에게 가장 상징적인 아이템 중 하나죠. 그가 시대와 브랜드를 넘나들며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앤더슨은 아버지를 의지의 화신처럼 여긴다. “아버지는 낙농 종가 출신으로, 18~20세의 꽤 늦은 나이에 럭비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프로 팀이 없을 때부터 럭비를 하신 거죠. 경기에서 이겨도 받는 건 1파운드뿐이었어요.” 그의 형 토마스(Thomas)도 럭비 선수다. “형과 아버지의 경쟁심을 지켜보면서, 내가 럭비를 안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마러펠트(Magherafelt)에서 자라며 1지망이던 패션 스쿨에서 떨어졌을 때, 그 또한 비슷한 정신적 갑옷을 걸치게 되었다.

“늘 인생에서 약자로 살아왔어요. 스스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도록 일부러 그런 환경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앤더슨은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 풀기 때문에 심리 치료사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농담을 덧붙였다.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약자의 위치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겠지만, 앤더슨은 전임자들에 비해 자신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느낀다. “엄청난 사랑을 받은 여러 디자이너가 거쳐간 자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디자이너를 가장 좋아할 테니까요.” 그가 말을 이었다. “존 갈리아노가 디올에서 이룬 성취를 보세요. 그는 천재예요, 근간을 흔들었죠.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아주 다른 시대였습니다.”

앤더슨이 패션계에 처음 발을 들이고 얻은 일자리 중 하나는 런던 본드 스트리트에 있는 프라다 매장에서 마누엘라 파베시(Manuela Pavesi)의 윈도 디스플레이를 돕는 어시스턴트였다.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성격도 좋았지만 쇼윈도에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과정에 심리학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죠.” 그가 말했다. “프라다가 로봇을 테마로 하던 시기였어요. 쇼윈도에는 단순한 마네킹과 가방 하나만 놓여 있었죠. 나는 ‘괜찮은데!’ 싶었지만, 그녀는 ‘마음에 안 들어!’라고 하더니 갑자기 제품을 던져 넣기 시작했어요. 가방과 로봇 50개를요. 밖으로 나가 새로워진 쇼윈도를 보고 깨달음 같은 걸 얻었습니다. 상품의 포화 상태를 연출한 거였죠.” 그 절충주의 구성은 하나의 흥미로운 전체로 응집되었다. “그녀는 늘 의상에 치밀한 모순을 연출했습니다. 잠옷에 악어가죽 코트를 매치하는 식으로요.” 그가 회상했다. “그녀가 무서워 앞에선 꼼짝도 못했지만, 완전히 사로잡혔어요. ‘도대체 그런 사고방식은 어떻게 얻는 걸까?’ 하고 말이죠.”

앤더슨은 자신의 브랜드로 성공을 거둔 뒤, 비슷한 절충주의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묘사와 스타일링으로 자신의 비전을 전달하는 능력으로도 주목받았다. 이는 사업가와 유명 인사를 비롯해 시장을 움직이는 이들에게 그의 작업을 더 가치 있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매우 능숙하게 표현합니다.” 델핀 아르노가 말했다. 앤더슨은 다시 한번 자신의 성장 배경을 언급했다. “아무리 대단하고, 유명하고, 부유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늘 존재합니다. 부모님께 배운 거죠.” 앤더슨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모님께 가장 먼저 조언을 구한다고 덧붙였다.

앤더슨은 기회를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 나서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스무 살 때 프라다에서 일하던 그는 우연히 발견한 물건으로 브로치를 만드는 디자이너로 <I-D> 매거진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델핀 아르노가 갑자기 전화해서 자신의 작업에 관심을 보인 일을 이야기했다. “깨어 있는 척하려고 애쓴 게 기억납니다.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꾸미는 건 어렵잖아요.” 아르노는 그보다 1년 전 런던의 한 전시에서 그와 처음 만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LVMH가 JW 앤더슨에 투자한 2013년, 공석인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서둘러 채워야 했던 아르노는 그에게 적합한 인물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LVMH 패션 부문 총괄에 의하면, 앤더슨은 자신을 추천했다. 202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미래에 대해, 그리고 그룹 내에서 어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르노는 이렇게 회상했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디올을 떠나자(현재 그녀는 펜디에 있다), 앤더슨은 여성복과 남성복, 꾸뛰르까지 모두 자신이 총괄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앤더슨이 로에베에서 이룬 성과는 하나의 현상이 되어 있었다. 첫 7년 동안에는 공예에 집중했다. 유서 깊은 브랜드 고유의 장인 정신을 현대적이고, 우아하며, 입체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다 팬데믹 기간에는 더 거칠고, 더 유희적이며, 더 노골적인 절충적 개념주의로 전환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흉갑과 디지털 픽셀처럼 표현한 원단, 잔디가 돋아난 코트, 미니 마우스 펌프스와 풍선 모양 굽, 윌리엄 사토리어스(William Sartorius)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거대한 딸기가 등장한 시기다(지속적인 협업을 선보인 유니클로를 위해서는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에서 착안한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조나단의 로에베는 획기적이었습니다. 단순히 브랜드를 바꿔놓은 게 아니라 문화적인 지각변동이었죠.” 로렌스가 회상했다. “그는 문화를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섬세한 방식으로 흡수하는 정말 뛰어난 예술가였습니다.”

앤더슨은 플랑드르 거장부터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예술을 연구하고 수집한다. 런던에서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 이사회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동안 건축에 관심을 두기도 했으며, 도자기에 대한 열정은 평생 품어왔다. 팬데믹 이후 그가 자신의 브랜드에서 일궈온 스타일은 더 밝고 한층 절제된 것으로, 이런 개인적 관심사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듯했다.

House on Fire “어떻게 하면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을까?” 조나단 앤더슨은 첫 디올 여성복 쇼에서 하우스 역사를 기리는 동시에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다. “오늘날 일어나는 일과 대화를 하는 거죠.” 앤더슨 뒤로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작품 ‘Spine/Rückgrat’(1996)가 걸려 있다.

“그런 식으로 예술과 패션을 결합하는 것은 조나단에게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2017년부터 로에베 앰배서더로 함께해온 조시 오코너(Josh O’Connor)가 말했다. “그렇게 놀라운 쇼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면서 점점 더 자신감을 얻었다고 봐요.” 앤더슨이 매료된 것들은 전염성이 있다. 도예가 할머니를 둔 오코너 역시 그와 몇 가지 관심사를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저녁을 먹으러 조나단의 집에 갔다가 정말 멋진 컬렉션을 보게 됐죠. 그의 도자기 컬렉션은 마법 같았어요!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아일랜드 도예가 사라 플린(Sara Flynn)의 작품이 있더라고요. 루시 리(Lucie Rie)의 작품도 있고, 특히 이안 고드프리(Ian Godfrey)의 도자기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앤더슨은 자신의 도자기 사랑이 외할아버지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북아일랜드 앤트림의 섬유 회사 사무엘 라몬트 앤 선즈(Samuel Lamont & Sons)에서 일했다. “가족 중 가장 창의적인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도자기에 둘러싸여 지냈죠.”

오늘날 앤더슨의 인간관계 중 상당 부분이 예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요즘 그는 JW 앤더슨 컬렉션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는 카탈루냐 출신 작가 폴 앙글라다(Pol Anglada)와 교제 중이다. “누구든 이런 자리에 있으면 사생활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월드컵 관련 일을 하실 때 부모님을 보며 느꼈어요. 떠났다가 돌아오면,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가야 한다는 걸요. 나이가 들수록 관계를 지키려면 일부러 시간을 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놓쳐버릴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장치를 만들어둬야 해요.”

그 밖에 그의 관심사는 보통 긴급한 업무를 따라간다. “지금은 매주 룩북과 광고를 찍고 있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디어를 캐내는 데 쓰죠.” 그가 말했다. 그러다 그 긴장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일종의 집착입니다. 어떤 예술가 한 명, 빈티지 작품 하나가 컬렉션 전체에 영감을 줄 때도 있거든요.”

12월 어느 아침, 오르세 미술관에서 앤더슨과 만나기로 했다. 영국 화가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앤더슨은 라일리의 1988년 작품 ‘다프네’를 소장하고 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그는 하루 일정을 미리 확인하거나 다음 회의를 사전에 계획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것이 과연 할 만한 일인지 스스로 의심하지 않도록 피하는 거다. 당연하게도 그는 늘 시간에 쫓긴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크리스마스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가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언급했다. 내게 설명한다기보다 스스로 확인하듯 하나씩 꼽으면서 말이다. “꾸뛰르 피팅이 한 번 더 남았고, 남성복과 여성복도 각각 한 번 더 있습니다. 그리고 크루즈 컬렉션을 발표한 다음 프리폴과 리비에라 컬렉션을 출시해야 하죠. 매번 이번 시즌이 가장 힘들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하거든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분위기는 긍정적이에요!” 그러고는 박물관의 아치형 복도를 힘차게 걸어갔다.

앤더슨은 간결하게 덜어내고 본질만 남기는 라일리의 작업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 같은 겁니다.”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위대한 인도 회화나 렘브란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그들은 멈춰야 할 때를 알아요. 그럼 관람자는 왜 그 작품 앞에 서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죠.”

우리 뒤를 따라오던 전시 큐레이터 니콜라 고세랑(Nicolas Gausserand)이 벽의 색을 가리켰다. 흰색이다. 이제 90대 중반에 접어든 라일리는 미술관 관례에 맞서 쇠라의 작품은 흰 벽에 걸어야 더 돋보인다고 주장했다.

“흰색이 더 하얗게 보이는군요.” 앤더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우 급진적이에요.” 그는 갤러리를 마지막으로 한 바퀴 더 돈 뒤 출구로 향했다. “뇌를 깨우려면 빠르게 훑어야 합니다.” 그가 미술관을 나서며 설명했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합니다. 할아버지 영향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늘 고심하거든요. 오늘 일어나는 일과 대화를 하는 거죠.”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오래된 나무 패널로 꾸민 강변 레스토랑 르 볼테르(Le Voltaire) 안쪽으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은 아니었지만, 일정이 밀린 탓에 즉석에서 변경되었다. 앤더슨과 함께일 땐 흔히 그렇다. 웨이터가 무와 살라미, 빵과 버터를 담은 접시를 가져왔다. 앤더슨은 농어 요리를 미디엄 웰로 주문했다. “미디엄 웰은 30분 정도 걸립니다.” 웨이터가 우아하게 이견을 감추며 답했다. “그럼 미디엄으로 할게요. 감자튀김도요. 많이 주세요.” 앤더슨이 말했다. “다코르(D’accord,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앤더슨은 여전히 런던에서도 일한다. JW 앤더슨의 영역을 가구와 예술, 수집용 아이템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그는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가끔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두 도시는 먹거나 외출하는 방식부터 정말 다릅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웃긴 차이는 얼음이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얼음을 잘 못 다루는 것 같더라고요. 여기에서 마시는 진토닉은 그다지 맛있지 않아요. 얼음이 별로거든요.”

식사를 시작하면서 앤더슨은 자신의 문화적인 프로젝트가 “디지털 시대에 럭셔리 브랜드의 의미를 정의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패션에 끌린 건 미래를 위해 뭔가를 디자인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디자인을 하고, 쇼를 열고, 6개월 뒤에 매장에서 판매하죠.” 그가 말했다. “그건 소비자에게 이해할 시간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장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디자인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매장에 걸릴 때쯤이면 이미 김이 새버리죠. 혈당 스파이크처럼요.” 그는 이런 환경에서는 일정한 품질의 기준을 높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해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하루에 수백만 장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읽는 양은 줄었죠. 글 대신 이모지로 답하고, 음성 메시지를 남겨요.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요. 어릴 때라면 이런 상황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앤더슨은 난독증이 있다. “하지만 옷을 만드는 일은 뇌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작업이고, 글을 쓰는 것도 뇌에서 손으로 이어집니다. 흔치 않은 행위죠.” 앤더슨은 그런 의도적인 노력 덕분에 패션이 현재의 즉각적인 자극을 넘어 앞선 미래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거라 여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자리 잡으려면 세상에는 그것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내 약점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으로 휘둘린다는 거예요.” 앤더슨은 스테이크를 힘차게 썰며 말을 꺼냈다. “모델 스케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원하는 장소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고, 회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죠. 그런 것들로 분노하게 됩니다.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예요.” 그가 말을 끊지 않고 이어나갔다. “하지만 요즘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건 우리에게 인내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나 역시 인내심이 없으니 문제의 일부죠. 우리는 그저 소비하고, 취소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게 창의성을 파괴해요. 사람들이 급진적인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위대한 영화나 음악이 부족한 거죠.”

앤더슨의 새로운 영역인 꾸뛰르는 대담함과 감상 문화를 재건하는 방식으로 그를 매료한다. 그는 디올의 새로운 꾸뛰르를 더 접근성 있게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다. 그가 구상하는 본보기는 V&A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개방형 박물관이다. 꾸뛰르 드레스를 살 수 없는 사람도 가까이에서 그 작업을 보고 배우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사람들이 패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꾸뛰르는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전체를 떠받치는 나무의 몸통 같은 존재예요. 유산, 장인 기술, 지식이 그 안에 담겨 있죠.”

앤더슨에게 꾸뛰르는 디올에서의 여러 작업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영역이다. 여전히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첫 꾸뛰르 컬렉션은 존 갈리아노에게 영감을 받았다. 갈리아노는 앤더슨이 자신의 여성 컬렉션을 가장 먼저 보여준 외부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거든요.” 앤더슨이 수줍게 말했다. “존은 테스코에서 산 음식 바구니와 야생 시클라멘 꽃다발 두 묶음을 가져왔어요. 내가 좋아하는 꽃이었죠.” 갈리아노가 자신의 정원에서 꺾어온 시클라멘은 앤더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꽃은 자수부터 무대 장식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원단과 앤티크 초상화 미니어처에서 출발한 앤더슨의 꾸뛰르 컬렉션 전반을 아우르는 모티브로 등장했다. 선배 디자이너를 향한 이례적인 헌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여성 컬렉션의 오프닝 룩에서 발전시킨 랜턴 모양 드레스로 꾸뛰르 쇼의 막을 열기로 했다. 흑백 두 가지 버전으로.

“그 디자인 기법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기성복에서는 이런 방식이었다면, 꾸뛰르에서는 또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그가 말했다. “첼시(Chelsea) 도자기를 수집해요. 초기와 두 번째 시기의 도자기는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어요. 그저 다른 역학을 지닐 뿐이죠.”

쇼는 시클라멘과 이끼로 덮인 천장 아래,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열렸다. 봄과 저녁 빛깔로 물든 의상 63벌이 연이어 등장했다. 꾸뛰르 언어로 표현하자면, 플리세 드레스의 실루엣은 느긋한 우아함을 띠었고, 비즈 장식은 걸음마다 살아 움직였으며, 층층이 쌓아 올린 꽃잎 형태는 실제로 피어오르듯 펼쳐졌다. 꾸뛰르에서 보기 드문 니트웨어는 정원에서 막 자라난 듯한 유기적인 생명력을 풍겼고, 앤티크에서 영감을 얻은 원단은 21세기 실내조명 아래 반짝였다. 앤더슨은 조개껍데기를 닮은 섬세한 드레스를 런웨이에 올렸다. 정교한 자수 장식을 더한 검정 오버 코트의 테일러링과 드레이핑은 걸작에 가까웠다. 작은 환희가 톡 터지는 듯한 커다란 폼폼 귀고리도 인상적이었다. 쇼는 디자이너 자신뿐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이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자리를 함께한 앤더슨과 갈리아노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치밀한 장인 정신이 지닌 아름다움, 시간 속에서 이어온 변화와 연속성의 거대한 물결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작은 차이와 방대한 기획 사이의 균형점은 바로 앤더슨의 창의적 사고와 야심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도 많지만, 제대로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걸 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프로젝트에 끌어들인 모든 사람을 위해서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죠.”

디올의 수장이 된 후 앤더슨은 삶의 대부분을 이동하는 데 쓴다. 지난해 11월과 12월에는 평소처럼 유럽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것 외에도, 브랜드 관련 업무로 뉴욕, 도하,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각기 다른 6개 컬렉션을 동시에 작업했다.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화창한 아침, 그는 줄줄이 잡힌 미팅을 시작하기 위해 샤토 마몽 호텔 로비로 서둘러 내려왔다. 그날 일정은 베벌리힐스의 새 매장 오픈 행사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언제나 로스앤젤레스에 오는 걸 좋아했어요. 살고 싶진 않지만, 이곳에 머무는 걸 좋아하죠.” 그는 숟가락을 국자처럼 쥐고서 큰 그릇에 담긴 요거트와 그래놀라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젊은 여성 두 명이 그를 몰래 촬영하고 있었다. 유명인이 모여드는 도시에서, 디올의 세계적인 위상으로 인해 앤더슨 또한 한 명의 셀러브리티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처음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앤더슨은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에게 선셋 대로 10086번지로 가달라고 했다. 영화 속 전설적인 여배우 노마 데스몬드(Norma Desmond)의 주소다. “그냥 차고 같은 곳이더라고요.” 그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지나간 시대의 할리우드 스타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잖아요.” 그는 오늘날 셀러브리티들이 지나치게 쉽게 접근 가능한 존재가 된 것에 대해 다소 애석하게 여긴다. 그로 인해 한때 그들이 지녔던 상징적인 힘이 약해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디올이 영화와 여배우를 위해 의상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죠. 실루엣과 아이디어, 캐릭터 성격까지 통제했습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들려주던 패션에 대한 낭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요.” 그는 바 근처의 촛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디올이 조금 더 과장되고, 조금 더 연극적으로 변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존이 이미 그 문을 열었죠. 무슈 디올이 그 문을 세웠고요.”

베벌리힐스 로데오 드라이브 중심부에 자리한 새 디올 부티크는 4층짜리 건물로, 내부에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나선형 계단을 설치했다. 이는 브랜드의 일관된 이미지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디올의 새로운 장입니다.” 아르노가 소개했다. 건축가 피터 마리노가 설계한 매장은 옥상 테라스와 VIP 라운지, 그리고 도미니크 크렌(Dominique Crenn)이 메뉴를 맡은 레스토랑을 포함한다. 도미니크 크렌은 샌프란시스코의 플래그십 레스토랑 아틀리에 크렌(Atelier Crenn)을 통해 미국 최초로 미쉐린 3스타를 획득한 여성 셰프다. 지난여름부터 비슷한 형태의 매장이 베이징, 밀라노, 뉴욕, 오사카에 문을 열었거나 개점을 앞두고 있다. 모두 파리 몽테뉴가 30번지 디올 부티크를 모델로 삼았다.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선언이자 대규모 투자입니다.” 아르노가 설명을 더했다. 디지털 시대라 해도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오프라인 매장은 여전히 디올 매출의 핵심 동력이다. 그리고 모든 패션 컬렉션을 총괄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앤더슨의 포괄적 접근 방식은 범우주적이면서도 통일된 ‘디올 월드’를 구축하려는 노력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저녁 7시 25분, 앤더슨은 베벌리힐스 부티크 꼭대기 층의 테라스 겸 라운지에 도착했다. 패션 디너치고는 게스트 목록이 꽤 독특하다. “조나단의 세계관을 잘 대변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디올의 간결하고 우아한 회색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으로 참석한 그레타 리가 말했다. “그의 아이디어와 선택은 종종 예상을 뛰어넘곤 해요. 그의 관심사도 흥미롭죠.” 로렌스는 남편과 함께 왔고, 오랫동안 디올 앰배서더로 활동 중인 샤를리즈 테론이 마지막에 도착했다. 이 특별한 자리에는 지아 코폴라(Gia Coppola)와 모드 아패토우(Maude Apatow),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이재도 참석했다. 로렌 산체즈 베이조스(Lauren Sánchez Bezos)가 셀피를 찍고 포옹을 나눴다. 디올 스웨터를 입은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의 프로듀서 마이크 화이트(Mike White)는 모든 걸 기억하려는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레타 리처럼 앤더슨이 디올 앰배서더로 영입한 여러 셀러브리티는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온 이들이다. 그들은 보수적인 프랑스 하우스에 색다르고 유머러스한 에너지를 빠르게 불어넣고 있다.

이번 행사를 위해 델핀 아르노도 날아왔다. 앤더슨은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건넨 뒤 곧장 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는 뮤즈가 아니라 친구예요. 옷을 입는 게 전부가 아니죠. 함께 술 한잔하면서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는 옅은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 갈색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 웨이터가 캐비아를 채운 노리 롤과 하얀 종이학처럼 보이는 작은 양파 타르트를 나른다. 야외 테라스에는 말보로 담배를 담은 작은 컵이 놓여 있었다(누군가 아르노에게 이것이 로스앤젤레스답지 않다고 하자, 그녀는 매우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답다고 농담을 했다).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 손님들이 자리에 앉고 음식이 나오면서 활기찬 분위기가 감돌았다. 9시 15분쯤 앤더슨은 셀러브리티 군단을 이끌고 담배를 피우러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30분 뒤 모두에게 테킬라 샷을 돌렸고, 다시 흡연이 이어졌다.

“그런 시간은 어떤 예술가에게나 아주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전환의 순간이죠.” 나중에 리가 그날 저녁을 떠올리며 내게 말했다. 앤더슨이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녀에게도 짜릿한 일이다. “그날도 그랬어요. 뭔가 본격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죠.”

연말이 가까워지자 파리 관광객들이 조명이 반짝이는 디올 플래그십 매장 앞에 몰려들어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반 블록 떨어진 로에베 매장 바로 맞은편에 디올 헤리티지(Dior Heritage)가 위치한다. 이곳은 창립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의상, 액세서리, 향수, 작업 지시서, 스케치, 패턴, 서신, 보도 자료 등을 관리하는 아카이브 공간이다. 모든 자료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회색 디올 상자에 담겨 있다. 문서는 언제나 내부에서 보관해왔지만, 아카이브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하우스 초기 꾸뛰르 드레스를 추적하고 수집하는 작업으로 이뤄진 것이다. 아카이브 책임자 페린 셰레르(Perrine Scherrer)가 초기 보물 중 하나를 보여줬다. 크리스챤 디올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온전한 상태의 ‘주농(Junon)’ 드레스다.

앤더슨은 디올에 부임하자마자 아카이브를 폭넓게 연구했다. “역대 디자이너 의상을 6벌씩 가져와 팀과 함께 훈련을 했습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챤 디올의 피스는 1952년에 탄생한 아이보리색 ‘시갈(Cigale)’ 드레스다. “공기역학적입니다. 구조가 정말 놀라워요.” 다음 날 그는 플래그십 스토어 건너편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갤러리 디올(La Galerie Dior)의 새 전시를 보러 갔다. 이곳은 13개 전시실로 구성된 하우스의 역사 박물관으로, 2022년 디올 꾸뛰르 아틀리에 중 하나로 문을 열었다. 지금도 하루 1,500명, 연간 약 50만 명이 방문하며, 티켓은 한 달 전부터 매진된다. 이번 전시는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가 모은 디올 컬렉션에서 엄선해 구성했다. 알라이아는 생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수집 규모를 감춰왔으며, 그 의상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다. “알라이아 재단이 보유한 600점 중 100점을 골랐습니다.” 갤러리 책임자인 올리비에 플라비아노(Olivier Flaviano)가 말했다.

크리스챤 디올은 1947년에 첫 컬렉션을 발표했고, 10년 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우스에서는 직원 수백 명이 5개 대륙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뒤를 이은 인물은 스물한 살의 이브 생 로랑이었다. “지금 스물한 살 젊은이가 그 정도 규모의 하우스를 맡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경악할 거예요.” 앤더슨이 강조하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때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도 금세 잊게 됩니다.”

플라비아노는 우리를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디올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초기 대표 라인, 원래 모습 그대로 정교하게 재현한 피팅 룸, 지금까지 VIP 고객을 접대하는 내부 전시 홀, 수십 년에 걸친 잡지 커버로 장식한 벽, 그리고 창립자의 사무실에 있는 점술가와 그가 늘 지니고 다닌 행운의 부적을 담은 사진까지 이어졌다. “무슈 디올은 미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플라비아노가 사진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의 공통점이군요.” 앤더슨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며 말했다.

다음 날 저녁, 앤더슨은 스튜디오 보드 앞에 앉아 곧 공개될 광고 이미지를 보여줬다. “우리는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려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디올이 서로 다른 남자, 여자, 누구든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디올은 단일 유형에 머물 만큼 작지 않거든요.” 앤더슨이 설명했다. 그는 디자인할 때 광고를 염두에 두진 않지만, 그것은 세상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고 결과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필수 요소다. 데이비드 심스가 촬영한 첫 광고 캠페인을 기획하면서, 그는 탈(脫)귀족 시대에는 과거 오뜨 꾸뛰르의 주 고객이었던 ‘귀족’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주 만족스러워요.” 평소와 달리 솔직한 말투다. 그는 모델 라우라 카이저(Laura Kaiser), 사르 만스벨트 벡(Saar Mansvelt Beck), 선데이 로즈(Sunday Rose)가 2인용 안락의자에 바짝 붙어 앉은 사진을 가리켰다. “이게 정말 좋아요. 어떤 행복감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파티에 가면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 즐기려 애쓰는 사람, 누군가를 유혹하는 사람이 늘 있죠. 전부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 선수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é)의 사진이 있는 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음바페는 청바지에 회색 스웨터를 입고, 엘드리지 매듭으로 묶은 타이를 매고 있었다. “여기엔 리더십이라는 개념이 담겨 있어요. 축구 선수를 경기장 밖으로 끌어내 다른 맥락으로 변신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레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리의 보드를 가리켰다. “두 가지 유형의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어요. 어떤 연령대에 속하든 늘 똑같은 에너지를 발산하죠.”

앤더슨이 팔짱을 꼈다. “나는 이걸 시간을 두고 더 들여다볼 예정이지만,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또 저마다 의견을 내놓겠죠. 그래도 이게 맞는 선택이라고 봐요.” 그가 단언하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좋아할지, 그 기대감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보고 있으면 우리 팀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올바른 방향이었어요. 완전히 새로운 언어의 탄생이냐고요? 아직은 아니죠. 하지만 적어도 이전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기쁨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VK

    Nathan Heller
    사진
    Annie Leibovitz
    시팅 에디터
    Jack Borkett
    헤어 & 메이크업
    Jillian Halouska
    세트
    Mary Howard
    프로덕션
    AL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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