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을 다루는 청년들

사그라지던 전통에 숨을 불어넣은 건 사람 냄새 나는 작업 방식과 질 좋은 작업물, 그리고 희소성에 매료된 젊은이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건 가죽을 다루는 청년들이다.



고구사 서른하나 구본호와 스물아홉 고하림 두 청년의 앳된 얼굴은 의심과 불신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저 어린 친구들이 사업을?), 둘은 고구사로 합치기 전부터 각자 본호앤파트너와 독립 피혁 잡화 디자이너(미네타니를 위해 한정판 악어가죽 클러치를 제작하기도 했다)로 활동해온 실력파. 각자의 성을 따서 고구사라 이름 짓고 간판을 달기 시작한 올 초부터 지금껏, 꾸준히 매체에 소개돼왔을 정도로 업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구본호가 대략적인 아이디어만 가지고 작업에 돌입한다면, 고하림은 꼼꼼한 사전 스케치 과정을 거쳐 일을 시작한다. 구본호는 가볍고 캐주얼한 가방을 선호하는 데 반해, 고하림은 무게감 있고 클래식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식. 이렇듯 성향이 상극인 두 사람의 조합은 꽤 흥미롭다. “평소에는 각자 좋아하는 가방을 만들어요. 물론 함께 작업하는 경우도 많죠. 그럴 때는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맞춰나가죠.” ‘부엉이의 왕’ 같은 경우, 예전에 고하림이 만들었던 가방 형태에 구본호의 가방 커버 디자인을 결합해 탄생한 것. 여태껏 별다른 다툼이나 의견 충돌 따위는 겪어본 적 없는 이들은 가방에 대한 관점을 공유한다. “가방을 디자인하고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활용성이죠. 사소한 스티치 장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만 넣습니다.” 그러나 함께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 ‘고구사의 작업은 이러하다’라고 정의하길 바라는 건 아직 이르다. 여전히 둘은 서로의 조합이 만들어낼 시너지 효과를 기다리는 중이고, 재기발랄하거나 혹은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듣고 있자면, 이들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예측 불가능하다. 

어쨌든 지금 고구사에 가방을 맞춤 제작하러 오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반 이상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저희 또래들이죠. 드물게 악어가죽 같은 고급 소재를 주문하는 40~50대 고객분들도 있습니다. 웬만한 유명 브랜드 가방은 이미 다 가지고 있기에 이제는 나만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하는 경우죠.” 정해진 디자인 내에서 소재와 컬러, 장식 같은 소소한 디테일 정도만 고르는 게 전부인 기존 브랜드의 MTO 서비스에 익숙하다면, 고구사의 MTO는 꽤 흥미로운 경험일 것이다. 당신이 가죽 백팩을 주문 제작하는 대학생이라면, 전공 책이 두꺼우니 내부를 보강하고, 노트북 넣을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는 식으로 이들과 디자인 상담을 할 수 있다(함께간 사진가도 카메라 가방 제작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고구사의 유명한 수강생 교육(정해진 단계 없이 원하는 것을 바로 만들 수 있다)외에도 ‘작업왕의 물건’처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실제 일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용품들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와 ‘부엉이의 왕’처럼 둘의 디자인을 결합한 가방 컬렉션도 꾸준히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도 구본호와 고하림은 제일모직, 리빙 브랜드와의 협업 프로젝트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한 땀 한땀’ 공들여 만든 가방을 사람들이 어떻게 쓰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더러워지면 더러워지는 대로, 손때 타면 타는 대로 사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가방은 가방답게 들어야 보기 좋고 멋지니까요.”




골든프로그 골든프로그는 준수한 외모의 모범생 같다. 맵시 있는 권덕근의 차림새처럼 그의 노트 케이스(로디아사의 노트 패드 사이즈에 맞춰 최적화된 모델들)와 지갑들은 네모반듯하며,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으로 구성돼 있다. 누구나 엄친아를 좋아하듯, 골든프로그는 금세 남성 편집 매장에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 됐고, 그 인기는 스펙테이터, 므스크샵과의 콜라보레이션, 갤러리아 백화점 팝업 스토어로 이어졌다. “겉면은 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최소화해서 간소하게 만들었죠(“보통 장식이 많으면 쉽게 질리니까요”). 대신 지갑을 열고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봤을 때 만듦새에 정성이 보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무게를 줄이고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 얇게 깎은 두 장의 가죽을 붙이거나 안쪽에 천을 덧대고, 보기 좋으면서도 스크래치가 잘 나지 않는 가죽을 사용한다. 명품 못지않은 깔끔한 모양새와 완성도를 갖춘 데다 가격도 착하다는 게 골든프로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

골든프로그의 또 다른 매력은 아이코닉한 작은 가죽 소품이다. 원래 관심 분야도 다양하고 취미가 많은 권덕근의 개인적인 취향이 컬렉션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탈착 가능한 유락 홀더(작업실 벽에는 자전거가 달려 있다), 베스파 열쇠 커버(그는 베스파 마니아다)나 만년필 케이스 같은 것들은 모르고 지나칠 일상의 순간들에 색을 입힌다. “멋을 부린다기보다 그냥 라이프스타일인 거죠. 자전거 안장이나 가죽 바구니처럼요. 가방도 매일 들고 다닐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이 주를 이룹니다. 역시 겉모양보다는 튼튼하게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주안점이죠.” 딱딱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용자에게 맞춰지는 가죽의 성질을 좋아하는 그의 다음 계획은 악어가죽의 고가 라인을 구성하는 것. 권덕근은 자신이 필요로 하고, 관심 있고 갖고 싶은 것들로 골든프로그를 꾸려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루비 헬멧처럼 내부를 가죽으로 커버링한 베스파 헬멧이라든가, 목재와 가죽, 금속이 결합된 가구 등 아직도 하고 싶은 게 한참 남았어요!”



제프 김승준은 레일로드 워커스에서 자신의 애칭인 제프로 브랜드명을 바꾸면서, 투박하고 묵직한 가죽 가방에서 좀더 캐주얼하고 중성적인 스타일로 디자인 노선에 변화를 시도했다. 이전에는 잠금장치의 버클 하나까지 남성호르몬이 폴폴 풍겼다면, 지난 봄과 여름 각각 발표한 ‘그린 슬리브스’와 ‘블루 웨이트’ 컬렉션은 가죽과 튼튼한 천을 함께 사용해 무게를 줄이고, 보다 가볍고 동시대적인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5년 전부터 우연히 가방에 ‘꽂혀서’ 사 모으기 시작했죠. 역사는 오래됐지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실용성과 지속력을 가진 미국 브랜드 가방만 엄청난 양을 수집했습니다. 그러면서 공통적으로 흠모하게 된 성향을 제 것으로 만들었죠.” ‘성향’이란 딱딱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견고함과 빠른 시간 내에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디테일. 그리고 작업 방식은 60년대 실제 미군이 사용한 실리콘 방수 텐트 원단으로 내구성 좋은 방수 파우치를 만들거나, 국내에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질 좋은 부자재(진짜 구리 리벳 같은)를 직접 구해 가방에 하나하나 박는 식이다. “가방은 내 눈에 가장 보기 좋은 소품이자 치장거리입니다. 기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남자다운 멋스러움을 담으려고 노력하죠. 가죽은 도전 대상으로 모험이 가능한 소재라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실물을 봤을 때 질 좋은 소재와 꼼꼼한 만듦새가 더 잘 보이기도 하지만, 가끔 왜 이럴까라고 생각할 만한 디테일에도 이유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자주 쓰는 신용카드, 신분증, 사진 한 장만 겨우 들어가는 납작한 카드 케이스는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만 가지고 다니라는 의미고, 위에 지퍼가 없는 쇼퍼백은 남 보여주기 흉한 건 넣지 말라는 뜻이다. 여느 컬렉션과 달리 그 계절이 왔을 때 컬렉션을 발표하는 건 나름의 여유다. 9월 말에서 10월 초쯤 선보일 가을 컬렉션은 가죽만 사용해서 만든 가방 세 종류다. 첫 작품부터 지금까지 균일한 수준의 완성도 높은 가방을 만들어온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정답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방을 수집하면서 무게, 사용감, 스트랩의 길이와 폭을 꼼꼼하게 분석했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걸 찾지만, 디자인적 가치는 이미 과거에 모두 갖춰져 있었어요. 저는 그것들을 믹스하는 것뿐이죠.”



이세 이세는 직접 가죽을 만지고 바느질하는 다른 공방과는 조금 다르다. TK와 케빈 두 형제가 직접 소재를 염색하거나 재봉틀을 돌리진 않지만, 이세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은 한국 문화와 전통적인 작업 방식에 기반한다. “미국에서 자라면서 접할 수 있는 한국 문화는 극히 일부분이죠. 처음 서울에 와서 접한 전통문화는 정말 멋졌어요! 오래됐기 때문에 그걸 현대적인 방식으로 응용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들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에 열광했다. 전통 방식의 천연 염색, 아자살문, 연꽃무늬 문고리, 스님의 바랑(손으로 묶는 어깨끈 매듭과 끈을 조이는 윗부분) 등. 지난 2월 말 이세는 2013 가을 · 겨울 시즌을 위한 첫 컬렉션으로 ‘천연 염색 컬렉션’을 선보였다. 다섯 종류의 가방은 나주와 제주도에서 전통 방식으로 천연 염색한 이탈리아 가죽과 실크면 소재로 만들었으며, 오랜 경력의 가방 제작자가 노련한 손길로 완성했다. 1년 이상 시간을 들여 테스트한 것들 중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두 가지 색만 사용하고, 세 번의 샘플 체크를 할 정도로 꼼꼼한 과정을 거쳤다. “천연 염색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최종으로 어떤 색이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요. 첫 번째 천은 우리가 기대한 색과 달라서 다시 염색을 해야 했죠. 돈과 시간이 드는 작업이지만 미묘한 색의 얼룩과 선들, 그리고 자르는 천의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패턴의 유일무이한 가방이 나온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렇게 제작한 제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죽에 광이 나고, 주름진 형태에 따라 색이 변한다(청바지 워싱처럼). 이세 제품을 사는 사람들은 한 철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보다 하나를 사서 오랫동안 사용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인터뷰를 하는 시점에 첫 번째 샘플이 나온 2014 봄 · 여름 컬렉션은 연꽃무늬 고리 장식에서 영감을 얻은 무광 가죽 소재 가방들(이세 컬렉션은 매 시즌 각기 다른 한국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하며, 천연 염색은 첫 번째 컬렉션의 주제일 뿐이다). “우리는 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죠. 먼저 한국 전통문화에서 다음 컬렉션의 주제가 될 만한 디테일을 찾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을 구상합니다. 그다음 소재를 찾아 나서는데, 디자인에 맞는 소재와 부자재를 찾는 데만 두 달 이상이 걸리죠.” 이번에도 TK와 케빈은 서울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져 전통 방식으로 연꽃무늬 고리를 만드는 대장장이 장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제품을 만드는 수공 방식과 질도 중요하지만, 이세에겐 그 뒤에 깃든 역사와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국 전통문화에 완전히 매료됐고, 그 문화를 패션 아이템으로 해석해 전 세계에 보여주고자 합니다. 전통과 문화가 깃든 제품을 사는 것만으로 그 문화의 일부가 되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