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디자이너 #황록

Fashion

세계가 주목하는 디자이너 #황록

2020-04-03T19:58:53+00:00 2020.04.13|

클래식 체제 전복

견고한 비전을 지닌 디자이너 황록이 파리에서 세 번째 패션쇼를 열었다.

파리 쇼룸 근처에서 촬영한 디자이너 황록.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은 록(Rokh) 2020 F/W 컬렉션으로 직접 개발한 플라워 프린트와 양어깨의 절개 디테일이 돋보인다.

디자이너 황록(Rok Hwang)을 처음 만난 건 2018년 LVMH 프라이즈 심사 프레젠테이션에서였다. 그 당시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한 지 2년쯤 지난 그는 차분하게 자신의 옷과 컨셉을 설명했다. 클래식한 재킷과 코트에 체제 전복적 느낌을 가미했지만 디자이너의 말투가 예측 불가능하거나 지나치게 튀지 않았다. 디자이너 자신이 곧 브랜드이며 디자이너의 소셜 미디어 포스팅으로 컬렉션의 영감을 추측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의 브랜드 ‘록(Rokh)’은 예외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또 쇼룸에서 만나니 반갑군요!” 파리 8구 엘리제 궁전 근처에서 그가 인사를 건넸다. 록은 LVMH 스페셜 프라이즈를 수상했고 파리 패션 위크에 정식 데뷔해 세계 100여 곳이 넘는 매장에서 팔리는 브랜드로 ‘폭풍 성장’했다.

브랜드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를 쉽게 수식할 수 있는 문장은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브랜드에 합류할 때 처음으로 꾸린 팀의 일원’, ‘끌로에와 루이 비통의 프리랜스 디자이너’, ‘센트럴 세인트 마틴 석사 출신’ 등이었다. 하지만 브랜드 론칭 4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한정 지어 그를 설명하는 것만큼 게으른 일도 없을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어요. 개인 일상에 큰 변화는 없고, 브랜드에 변화가 많았죠. 세계적으로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이 많이 늘었고 최고의 전문가들이 아낌없이 지원해주었죠. 고객층도 폭넓어졌어요. 즐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가열차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중에도 바이어와 기자들이 계속 쇼룸에 들렀고, 디자이너는 그들에게 인사하느라 분주했다. 프랑스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1층 쇼룸에는 이틀 전 팔레 드 도쿄에서 발표한 2020 F/W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나무 바닥에는 런웨이에 깔렸던 보랏빛 에리카 꽃이 빼곡히 놓여 은은하게 향을 풍겼다. “덴마크에서 농부들과 함께 심은 꽃이에요. 쇼가 열린 바로 그날 채취해 가져왔죠.” PVC 케이스의 쇼 초대장에 담긴 꽃도 바로 그 꽃이었다.

특정 브랜드의 잠재적 미래를 가늠할 때는 프런트 로에 앉은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개인적 취향을 떠나, 패션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주목하는 브랜드라면 나의 판단에 확신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록 패션쇼의 프런트 로는 그래서 더 시선이 갔다. 샤넬, 디올 등의 패션쇼 음악을 담당하는 미셸 고베르(록의 음악도 맡았다), 전 세계 <보그> 에디터들, 유명 스타일리스트들이 맨 앞줄을 채웠다. 또 <셀프 서비스> 패션 디렉터, <데이즈드> 영국판의 아트 디렉터가 스타일링과 아트 디렉팅을, 홍보는 베테랑 그룹 PR 컨설팅이 전담했다.

“패션쇼를 위해 함께 일한 스태프들과는 예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어요. 세계 유수의 브랜드와 일하는 전문가들이기에 금전적인 것보다 개인적인 신뢰로 저를 무조건 지원하겠다고 나섰죠. 제가 추구하는 여성상과 비전을 잘 이해해줬기에 저 역시 즐겁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쇼가 끝난 후에는 영국인 동료 디자이너이자 친구 시몬 로샤도 찾아와 그를 격려했다.

세 번의 쇼를 치른 디자이너의 표정과 화법에서 자신감과 여유가 비쳤다. 차분한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생각하는 바는 더 뚜렷해졌다. “2019 F/W 시즌은 제 브랜드로 처음 여는 쇼였기에 시간을 체계적으로 예측하고 관리하는 게 다소 미흡했어요. 2020 S/S 시즌에는 프랑스 파업, 또 파리 패션 위크 일정에서 유명 브랜드와 경쟁하다 보니 모델 캐스팅, 쇼장 섭외 등에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프랑스 패션협회에서 시간과 장소에 우선권을 준 덕분에 런던과 파리에 있는 직원들과 시행착오 없이 보다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수트를 입는 여동생의 직업에서 영감을 받은 재킷과 스커트. 파일을 담은 형태의 가죽 체인 백과 선글라스는 록(Rokh) 2020 F/W 컬렉션.

비가 쏟아지던 2월 29일 관객들은 팔레 드 도쿄로 향했다. 쇼장 좌석에는 작은 글씨로 한 장 빼곡히 쓰인 보도 자료가 놓여 있었다. 소설의 한 페이지를 읽는 듯한 글은 여동생에게 바치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황록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유일무이한 동생이 서울에서 결혼하는데 오빠로서 못 가게 된 감정을 담고 싶었어요. 지금껏 살면서 느낀 것을 동생에게 보내는 ‘시각적 러브 레터’랄까요. 동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우리 남매가 살아온 인생의 장면 장면을 컬렉션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동생으로부터 받은 영감은 단순히 감정뿐 아니라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다. “동생이 좋아하던 베이비 핑크, 블루, 라일락 컬러를 컬렉션에 도입했습니다. 또 오프닝의 여덟 벌은 검은색 수트로 구성되는데, 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동생의 직업적인 면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했습니다.” 이 기본 수트에도 디자이너는 여러 테크닉을 섞었다. 영국 요크셔의 공장과 협업해 새빌 로의 남성 수트에 주로 쓰이는 옷감을 사용한 것이다.

해체했다가 재조립한 듯한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 그리고 여러 패턴이 충돌한 드레스도 시선을 끌었다. “사실 옷을 통해 해체주의를 표현한 적은 없었어요. 옷을 대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건 입는 사람의 편의성입니다. 오히려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여기는 것은 입었을 때 폼이 나는 팬츠, 그리고 드로잉부터 생산까지 스튜디오에서 모두 진행하는 패턴이죠.”

모델들이 들고 나온 스케이트보드 역시 어릴 때 동생과 미국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나무 보드에 ‘Reduce Waste(쓰레기를 줄이자)’라는 슬로건을 새겼다는 것. 그 역시 지속 가능 패션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PVC를 쓰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녹을 수 있는 재료를 쓰려고 해요. 또 기본적인 일이지만, 종이 인쇄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해요. 대신 전자 업무를 선호하죠. 궁극적으로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드는 것도 지속 가능한 패션에 포함됩니다.”

황록은 정규 컬렉션 외에 여러 분야와 협업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식스와 함께 신발을 만들어 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론칭했다. “록이라는 브랜드는 럭셔리 여성복의 범주에 속하지만, 록 팬은 다양합니다. 스트리트 패션 애호가인 남자일 수도 있죠. 아식스에 꾸뛰르적 요소를 가미하고 싶었습니다. 신발 끈을 정교하게 꼬아 수공예적 완성도를 높였죠. 아식스에서도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하루가 걸릴 만큼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아이템입니다.”

이렇듯 황록은 지금 세계 패션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한국인 디자이너다. 그가 인터뷰를 보며 꿈을 키우고 있을 예비 디자이너들에게 선배 디자이너로서 조언을 남겼다. “디자인을 잘하는 것도 훌륭한 디자이너의 역량이지만, 무엇보다 주위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최대한 많이 봐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 정보가 열려 있는 시대니까 방법은 더 쉬울 거예요. 많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세계 패션 무대에서 활약할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