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여행, 그 음식

2016.03.15

by VOGUE

    그 여행, 그 음식

    맛으로 기억되는 여행이 있다. 침샘을 돋움과 동시에 다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음식의 기억들. 그 여행을 새삼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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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의 태평한 조식

    방콕 공항에 발을 디딘 그 밤은 뜨겁고 습했다. 호텔까지 가는 택시안은 서울의 대중교통만큼 차가웠다. 나는 되뇌었다. ‘이 택시를 내려서 그 성 안으로 들어가면 3일 동안 나오지 않아. 절대 나오지 않아.’ 룸피니 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통유리창으로 만들어진 소피텔 소 방콕의 클럽 룸 안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천국과 마주했다. 나는 한 뼘짜리 수영복을 달랑 걸친 ‘이 구역의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면세점에 사온 싱글 몰트위스키를 물처럼 마시고 거품이 구름 같던 거대한 욕조를 들락날락하며 호사를 누리던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불타오르기 직전의 태양을 마주하며 호텔 꼭대기 테라스에서 먹은 조식이야말로 난생처음 경험한 ‘퍼스트 클래스’였다.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배가 부르면 담배도 피워가며 나는 1시간이 넘는 아침 식사를 신음 소리를 내며 양껏 즐겼다. 자리에 앉으면 놓이던 거대한 빵 바구니, 뜨겁고 진한 커피와 색색의 생과일 주스, 그리고 일본식, 태국식, 미국식, 중국식 중 한 나라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 이그제큐티브 전용 메인 요리까지 뷔페에서 줄 설 필요 없이 나는 그저 입만 벌리면 됐다. 사기그릇에 담긴 미소 장국과 플레이팅마저 벚꽃 같던 연어 데리야키구이 등. 몇 달간 서울에서 차곡차곡 챙겨놨던 불쾌지수가 아침밥 한 끼로 사라질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오랫동안 2014년의 여름의 기억은 그 꽃같이 어여쁘던 분홍빛 연어로부터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글 / 진명현(독립영화 컴퍼니 무브먼트 대표)

    사라예보에서 맛본 채소의 맛

    몇년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여행 중영국에서 살다 온 한국 남자를 만났다. 런던에서 공부를 하고 여행 중인 그는 채식주의자였다. “런던에 살면 주변에 베지테리언이 많아요. 아예 고기를 요리한 식기를 쓰는 식당에도 안 가는 사람도 있고요.” 벌써 한 달을 사라예보에 있었다는 그가 올드타운에 단골 레스토랑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여느 사라예보의 전통 식당과 다를 바 없는오래되고 별스럽지 않은 레스토랑이었다. 실내에는 대낮의 햇살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가득했고, 이슬람 전통 뜨개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공간의 반을 점거하고 있었다.

    고기 메뉴도 없지는 않았지만 채식 강의를 들은 직후라 그를 따라 나도 ‘베지테리언 플레이트’를 주문했다. 몇 분 후 별스럽지 않은 접시에 버섯, 피망 등을 위시한 온갖 채소와 치즈를 구운 주문 요리가 나왔다. 남자의 설명을 소스 삼아 채소 하나를 덥석 베어 물었다. 뭔가 설명하기 힘든 천상의 맛이었다. 앞에 그리스 산토리니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파리 에펠탑이 내다보이는 프렌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덧붙여 그 남자에게 홀린 것도 아님을 일러둔다. 이것은 분명 순도 100% 음식 본연의 맛이었다. 식당을 나오며 든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단지 구웠을 뿐인데… 입안으로 가득 퍼지는 화덕의 맛을 느끼며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채소가 이 정도 맛이라면 이 집 고기는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거야?’ 신념에 따라 식사를 하는 그 남자 앞에서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나는 저녁 식사에 맞춰 따로 그곳을 찾았다. 화덕에 구운 고기를 즐겁게 맛보며 아마 나는 흔들림 없이 육식을 고수하겠구나 생각했다.

    이후 나흘 정도 사라예보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곳 외에 다른 레스토랑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라예보를 떠나던 날 한 끼도 이곳의 음식을 더 먹어보겠다는 심정에 나는 기어이 포장까지해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언제 다시 사라예보를 가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10년, 20년이 지나도 다시 못 먹을 그 화덕의 맛을 은박 도시락에 그렇게라도 눌러 담고 싶었던 것같다. 글 / 이화정(〈씨네21〉 기자)

    터키의 짜디짠 고등어 케밥

    한 젊고 잘생긴 셰프가 인기 TV 프로그램에서 만들어 논란을일으킨 ‘꽁치 샌드위치’에 대한 뉴스를 읽은 아침이었다. 댓글창에는 ‘비린내 나는 엉망진창 괴상한 음식’이라는 악플로 가득했는데 그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고였다. 소고기 패티도 아니고 새우도 아니고 등 푸른 생선에 빵이라니, 보기에도 듣기에  도 비릿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한번 운동을 시작한 침샘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내 혀를 자극한 범인이 바로 20년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처음 맛본 고등어 케밥에 대한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90년 대 초 친구들 사이에는 유럽 배낭여행이 대유행이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유럽 기차에서 마주치는 푸른 눈의 미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나 우연히 한 도시를 함께 여행하고 다시 한국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가는 커플에 대한 전설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 역시 배낭여행에 대한 부푼 꿈을 꾸기 시작했고 차근차근 돈을모았다. 마침내 여름방학 동안 14개국을 밟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이라는 말보다는 ‘찍고 오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어처구니없는 여정이었다.

    2개월 여행에 비행기 삯까지 포함해 200만원이 넘지 않는빠듯한 예산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사를 슈퍼마켓에서 산 빵과 햄, 혹은 치즈로 때웠다. 스위스에서 퐁뒤를 먹는 일은 당연히 꿈도 못 꾸었고 파리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맥도날드에서 콘아이스크림으로 달랬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동유럽, 서유럽을 돌면서 점점 눈과 마음이 무뎌지기 시작할 즈음, ‘성은 성이요, 성당은 성당이다’를 외칠 무렵,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터키에 도착했다. 당시 나에게 이스탄불은 목적지라기보다는 꿈에도 그리던 그리스 섬으로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다. 게다가 여행 중반의 피로감과 무력감까지 한꺼번에 몰려온 탓에 보통 때면 <론니플래닛> 설명을 읽어가며 꼼꼼하게 구했을 숙소를 호객꾼의 손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숙소는 혼자 여행하는 20대 초반의 여자를 불안하게 만들 요소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었고, 결국 느끼한 주인아저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숙소를 도망쳐 나왔다.

    한참을 달렸더니 항구가 나타났다. 오가는 많은 사람으로 정신없이 분주하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항구였다. 그 연기를 따라간 곳엔 사람들이 어떤 배를 향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뱃사람처럼 검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갑판 위에 그릴을 놓고 종로 뒷골목 아줌마처럼 고등어를 굽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운 고등어를 빵에 떡하니 집어넣었다. 비릿하지만 고소한 냄새와 뜨거운 연기에 휩싸인 나는 급작스럽게 허기가 밀려왔고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긴 줄을 따라갔다. 노을이 지는 이스탄불의 항구를 뒤로하고 키만 한 배낭을 메고 허겁지겁 빵에 끼운 고등어구이를 베어 물었다. 뜨거운 고등어 육즙이 빵으로 스며들면서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헤엄쳤다. 그 순간만큼은 오늘 밤 잘 곳이 없어도, 허리 지갑에 돈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행복한 맛이었다. 어쩌면 그 뜨겁고 짭조름 하던 고등어 케밥은 가장 뜨거운 계절에 가장 빠듯한 예산으로 떠난 내 스무 살의 짜디짠배낭여행과 가장 간이 맞는 음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 / 백은하(영화 저널리스트)

    바닷물로 간한 쿠바의 옥수수

    그릴드 콘이 유행이다. 뉴욕의 한 유명한 쿠바 카페에서 내놓는 구운 옥수수를 따라 만든 것인데, 여기에 쓰이는 옥수수는 우리나라의 찰옥수수와는 다른 종류로 생으로 먹어도 달콤하고 입안에서 사각사각 씹히는, 이름까지 ‘스위트콘’인 옥수수다. 조리법은 가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뜨거운 물이나 대형 밥솥에 냉동 옥수수를 넣어두었다가 겉을 그릴이나 오븐에 한 번 굽고 거기에 카이엔 페퍼와 짭짤한 치즈 가루를 뿌리는 것. 그저 그런 재료를 얼기설기 조합한 조악한 음식인 데다가 들큼한물이 질퍽하게 터지는 냉동 옥수수의 맛과 식감은 뻔한지라 이 메뉴를 내가 사 먹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요즘 메뉴판에서 이 메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아마 다시는 맛보지못할 어릴 적 바닷가 옥수수의 맛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은 틈만 나면 전국을 쏘다녔다. 바닷가에 도착하면 어른들은 살림을 펴고, 우리들은 무조건 물로 뛰어든다. 오후 3시가되면 더 놀고 싶어도 놀기가 힘들 정도로 파김치가 된다. 소금에 절인 배추 모양을 하고 파라솔 아래로 기어 들어가면 이때가 간식 시간이다. 늘 메뉴는 같았다. 해수욕장의 행상 할머니들이 아침에 삶아온 강원도 옥수수다. 뜨끈한 옥수수를 손에 쥐고 허겁지겁 뜯기 시작하면 사카린을 넣고 삶은 들큼한 옥수수의 맛에 쪼글쪼글한 손가락에 밴 바닷물의 소금기가 얹힌다. 그럼 그 들큼한 맛은 훨씬 더 강렬하게 달콤해지고, 적당히 삶은 신선한 옥수수알은 입안에서 터졌다. 이 사이에 끼는 옥수수 껍질을 손가락으로 빼낸 다음 그 손가락을 쪽 빤다. 옥수수를두세 개쯤 결딴내고 나면 타월지로 만든 비치가운을 걸치고 파라솔 그늘 아래에 눕는다. 종일 햇볕에 그을린 살이 가운에 쓸려 따끔따끔했고 다 먹어버린 옥수수가 아쉬워 손가락과 입술을 빨다가 잠이 들었다.

    어쩌면 쿠바의 바닷가에도 구운 옥수수를 파는 게 아닐까. 바닷물로 간한 여름 옥수수의 맛을 쿠바 사람들도 알아서 저런 메뉴를 만든 게 아닐까 바보같이 생각한다. 누가 알까, 사람들이 먹는 건 알고 보면 다 비슷비슷하다는 걸. 글 / 이주희(칼럼니스트)

    작은 접시의 인연, 스페인 타파스

    스물여덟. 졸업과 제대 후 비로소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며 찾아간 유럽. 바르셀로나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고도, 그라나다로 향하던 길이었다. 몇 자리 건너 동양인 여자아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어느덧 혼자 하는 여행에 지쳐 대화가 그리웠던 건지, 나와 그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걸었고, 창밖 풍경조차 보이지 않는 7시간의 지루한 여행길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준코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영어를 상당히 잘했다. 지나칠 정도로 짧은 쇼트커트 때문인지 어찌 보면 소년이나 선머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침이 되어 버스는 그라나다에 도착했고, 우리는 피차 숙소 예약도 없이 여행하고 있던 처지라 함께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기가 막힐 정도로 싸고 좋은 방을 찾았는데, 그 방은 더블베드 하나만 있는 2인실이었다. “여기 좋다. 너 이거 써. 난 다른 데 알아볼게” 하고는 방을 나서려는데 준코가 말했다. “이 방 같이 쓰자. 진짜 싸고 좋잖아. 2인실이고. Why not?”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합리적이고 순수한 눈동자. 거부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상그리아를 마시고 타파스를 먹었다. 한 잔에 한 접시. 길고 긴 밤이었다. 글 / 윤성현(KBS 라디오 〈심야식당〉 PD)

    독일의 19금 소시

    여름 한낮에 찾은 맥줏집에는 이미 반쯤은 이성을 내려놓고 맥주를 들이켜는 게르만족 후예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독일인이 술집에서는 그 꼿꼿한 품위를 무장 해제한다. 빨리 이곳의 대표 음식 소시지를 해치우고 자리를 뜰 생각이 강렬해질 즈음, 그 문제의 요리가 식탁 위에 올랐다.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는 흰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니 말간 물 위에 흰 소시지 두 개가 ‘똥똥’ 떠 있었다. 도무지 입맛이 살지 않는 시각 충격이었다. 하지만 배가 고팠고, 나는소시지의 말랑한 허리춤을 포크로 찔러 입안에 통째로 넣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옆테이블에 앉은 독일 청년 무리의 알 듯 모를 듯한 웃음, 나와 소시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그들끼리 나누는 귓속말…. 그리고 한 청년이 단단히 결심을 한 듯 내 자리로 걸어왔다.

    “바이스부르스트를 먹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한번 보여줘도 될까요?” 그는 내 소시지를 물 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칼 끝으로 소시지를 감싸고 있는 비닐을 우아하게 벗긴 뒤 먹기 좋은 크기로 두세 점 썰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독일에서 소시지를 포크로 찔러 먹으면 남성의 성기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조그만 한 동양여자가 겁도 없이 그 큼지막한 소시지를 그대로 입에 넣었으니 그들이 어떤 은밀한 농담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무지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지만 나는 한편으로 바이스부르스트가 그립다. 맥주와 소시지 안에서 자유로웠던 헤픈 농담과 쑥스러움, 그리고 내 식탁으로 손수 찾아와 소시지의 껍질을 벗기던 그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이 간혹 떠오른다. 얇은 껍질을 벗겨냈을 때 말랑말랑하게 피어오르던 육향을 내 몸이 기억한다. 독일을 떠올릴 때맛과 냄새는 없다. 하지만 특정한 모양을 떠올린다면, 그건 바이스부르스트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글 / 신진주(〈행복이 가득한 집〉 에디터)

    숨어 있던 태국의 맛

    아내와 두 번째 찾는 방콕이었다. 12월의 방콕은 연말의 들뜬 에너지속 볶고 튀기는 기름내가 가득했다. 마침 그해 ‘2014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방콕이 꽤 이름을 올렸고, 우리는 그 맛을 확인하고자 했다. 1위 ‘남’을 시작으로 21위인 미슐랭 스타 셰프 헨릭 이드 앤더슨의 ‘스라 부아 by 킨킨’까지 리스트를 충실히 따라 움직였지만 매운맛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의 얼얼함에 당황하고, 부산스러운 서비스에 낙심했다.

    마지막 날 아침, 조금은 포기한 마음으로 마지막 식당 ‘이사야 시암세 클럽’을 찾았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 큰 정원을 갖고 있는 2층 단독주택. 작은 간판 하나가 수풀에 파묻혀 있어 구글 지도 없이는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어 있다. 우아한 1920년대 옛타이 건축 안에 핑크색 소파와 형광 파랑 테이블을 둔 인테리어의 대담함은 요리의 창의성과 비례했다. 숯불 화로 위의 폭립, 뜨끈한 솥밥, 바삭한 양고기 등 매 코스마다 재료와 식감, 소스를 달리한 세심한 메뉴 구성도 훌륭했고, 매 디시가 저마다 다른 태국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조리법으로 굉장히 영리하게 만들어낸 코스였다.

    최고의 맛집은 왜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일까. 서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인사하며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한도 초과였다. 다른 카드는 호텔에 있었다. 쇼핑도 안 했기에 밥값만으로 달성한 한도 초과. 이 식당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돈을 썼다. 글 / 석 정호(올리브 TV 〈오늘 뭐 먹지?〉 PD)

      에디터
      정재혁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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