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자연의 ‘퀸마마 마켓’
지금 윤한희와 강진영은 옷이 아닌 식물과 함께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패션 여왕에서 라이프 스타일 여왕으로 거듭난 윤한희와 함께 도심 속 자연, ‘퀸마마 마켓’을 탐험했다.
8월 13일 그랜드 오프닝을 하루 앞둔 수요일 아침. 서울 강남의 산소 탱크쯤 되는 도산공원과 맞닿은 지상 4층짜리 건물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말복의 기온 30℃만큼 후끈했다. 건물 4층에서 강진영과 윤한희 부부(서울 패션계에서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존재들)가 어느 일간지 취재에 임하며 <보그> 팀을 향해 잠시 양해를 구한다는 식의 눈인사를 보냈다. “‘쑈’하고 있죠, 뭐!” 윤한희는 초록색 띠를 두른 보터 햇을 쓴 채 흰 티셔츠에 검정 바지, 여기에 앞치마 차림이다. 세상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디자이너(오브제, 오즈세컨, 와이앤케이, 하니와이,루즈앤라운지 등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가 맞나?
윤한희는 요즘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한다. “라이프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퀸마마 마켓’으로 출근해 수많은 나무와 화분에 물을 주려면 2시간이 훌쩍 지나거든요.” 그러자 강진영이 “이건 정말 새롭고 신기한 발견이자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도를 닦는 사람이 왜 난을 키우는지 알겠어요. 식물과 교감하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죠. 신기하게도 밤새 시들하던 나무에 물만 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생기가 돌거든요.” 디자인 실에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밤새 옷본을 뜨고 세부 장식에 몰두하며 가위와 시침 핀, 광목과 피륙 더미의 먼지 속에 지낸 뒤 다음 날 피로에 절어 출근하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이 대체 어떤 계기로 바뀐 걸까? “모든 게 뉴욕 때문이에요.” 윤한희가 늘 그렇듯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며 우리는 뉴욕에 모든 걸 걸었어요. 지극히 도회적인 삶 가운데 모든 게 다 있는 욕망의 도시에 딱 하나 없는 걸 발견했죠. 바로 자연이었어요.” 두 사람은 강진영의 대학원 공부를 위해 서부로 향하던 중 삶의 방향을 정반대로 꺾는 결정적 순간과 맞닥뜨렸다. “뉴욕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과 LA에서 마시는 커피는 달랐어요. 맛이 아닌 태도와 분위기였죠. ‘뉴욕에선 급한 반면, LA에서의 커피가 느긋한 이유는 대체 뭘까?’ 이런 고민의 해답은 가까이에 자연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죠.”
지난달 윤한희와 강진영 커플을 인터뷰하며 <보그>는 이렇게 썼다. “8월 초 퀸마마 마켓이 오픈하니 그들이 제시한 답을 이제 직접 체험해볼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의 답이자 취향은 바로 ‘자연 친화’였다. “우리의 취향이 반영되지만, 그보다는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공간을 꿈꿉니다.” 그들이 제시한 자연은 식물과 햇빛에서 시작된다. 4층이야말로 식물과 햇빛이 만개한 도심 속 낙원. 4층 삼각 지붕에서 세로로 쏟아지는 자연광과 보조를 맞추는 건 좌우 두 개의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다. “한쪽은 성수대교 사거리로 향하고 있어 압구정동 빌딩들의 루프톱을 구경할 수 있어요.” 내일 오픈 준비로 쉴 틈 없던 부부가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나 압권은 반대쪽 통 유리창 밖의 전경. “보시다시피 도산공원이 내 집 앞마당처럼 펼쳐져요.”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 손을 뻗으면 5층 높이로 자란 나무들의 이파리를 딸 수 있을만큼 가깝다. “양쪽 유리창을 열면 새들이 이쪽으로 휙 날아와 저쪽으로 날아가곤 하죠.”
이 자연을 좌우에 끼고 있는 ‘매뉴팩트’는 정말이지 행운아다. 연남동에서 젠틀한 형제가 시작해 이제 3년이 넘은 커피 하우스 ‘매뉴팩트’의 카운터와 쇼케이스는 가로로 쫙 펼쳐져 있다. 덕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이 열리면 누구라도 “와우!” 하는 탄성을 내뱉는다. 일렬횡대로 길게 배열된 다섯 개의 탁자는 양쪽 통유리의 다리 역할. “‘퀸마마 마켓’의 주요 골자 가운데 ‘프렌드십’ ‘네이버후드’ 등이 실현되는 공간입니다. 보통 카페에 가면 다들 마주 보고 앉지만, 이곳에서는 옆으로 앉아 서로 무릎을 맞댄 채 대화를 나눌 수 있죠. 옆자리 수다가 들려도 상관없고, 또 그 자체로 새로운 소통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누구라도 한없이 게으르게 쉴 수 있으면 해요.” 매뉴팩트 실험실에서 커피 용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속도만큼 느긋한 공간을 소망한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느리게’보다 ‘게으르게’가 컨셉인 이곳에는 청채각, 공작, 레오, 밍크, 선녀무 등 생소한 이름의 선인장과 이국적 식물이 <잭과 콩나무>의 한 장면처럼 천장을 향해 이파리와 가지를 뻗고 있다. 삼각 천장은 ‘땅속의 집’으로 유명한 건축가 조병수의 발상. “조병수의 작은 갤러리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갤러리 서까래를 뜯자 그 사이사이로 드는 빛이 일품이었다고 그가 말하더군요.” 그 결과 빗살무늬의 자연광이 시간과 기후에 따라 각도와 농도를 달리하며 어떤 인공조명보다 변화무쌍하게 비친다.
“3층은 그야말로 마켓이에요. 시장이죠.” 아래층으로 우리를 안내하던 윤한희가 좀 다르지 않느냐는 투로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퀸마마 마켓에 여러 형태로 의기투합한 팀이왁다글닥다글 어울린 구역입니다.” 브랜딩을 책임진 박진우는 빈티지 매표소를 활용한 부스(실제로 3층 계산대로 활용된다), 식물에 관련된 모든 것을 책임진 ‘베리띵즈’ 팀과 1층 온실을 담당한 ‘제로랩’ , 또 ‘길종상사’ 등이 각자의 부스를 통해 이런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상품도 진열한다. “시장에 가면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어요. 사람을 흥분시키는 뭔가가 늘 도사리죠. 퀸마마 공동체에 동참한 젊은 인재들에게 이 공간을 통해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생각 아래, 이 열린 공간엔 규칙이 없다. 따라서 3층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자행될 예정이다. “통인시장에 간 적 있는데 푸줏간 옆에 떡집이 있고, 그 옆엔 또 고무신집이 있더군요. 이곳 역시 모든 일이 ‘느닷없이’ 이뤄집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얻어 부딪치고 스파크를 일으킨 뒤 예측 불허의 일이 성사될 예정.
3층 중앙에는 강진영이 디자인한 ‘퀸마마 스튜디오’ 옷이 걸려 있다(왕관을 쓴 Q 스펠이 심벌이며 원피스는 40만~50만원대). 그 가운데 물방울무늬 원피스 차림 마네킹은 물뿌리개를 들고 서 있다. 또 다른 원피스의 마네킹은 메탈 쓰레받기를 쥐었다. “타샤 튜더는 20년대 빈티지 원피스를 멋지게 입고 오리 떼를 몰곤 했어요. 우리 여자들에게 청소는 늘 귀찮은 일거리지만, 기왕 하는 거 좀더 예쁜 도구를 쓰면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노동과 취미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다는 윤한희의 신념에 따르면 쓰지 않는 럭셔리는 박제에 불과하다. 젊고 창의적인 집단의 여러 부스와 퀸마마 스튜디오의 솔깃하고 재기 발랄한 시도가 잠시 빛을 잃을 만한 아이디어가 이곳에 또 있으니, 그건 구석에 비스듬히 배치된 피팅 룸. 외양만 보자면 평범한 부스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식물원이자 꽃밭이 숨어 있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안, 매장에서 고객에게 중요한 건 쇼윈도와 함께 피팅 룸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개는 옷을 사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지배적이죠. 그래서 과감하게 안쪽을 뚫어 식물과 꽃을 가져다놓았습니다. ‘꽃밭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면?’ 이런 감흥을 전하고 싶었어요. 결코 소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3층에 진열된 ‘퀸마마 스튜디오’가 윤한희 스스로 입고 싶은 옷이라면, 2층에 전시된 강진영의 ‘진 케이’는 디자이너로서 이 부부가 누군가에게 입히고 싶은 옷이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삭 포니테일’로 도무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여전히 젊은 강진영이 미니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어번 보헤미안입니다.” 그는 90년대 대한민국을 풍미한 공주풍 옷에서 세련된 어번 보헤미안으로 핸들을 꺾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꾸뛰르 실험을 거쳤다). “런웨이 패션쇼에 대한 미련이있지만, 이젠 전혀 다른 접근으로 옷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에어 플랜트의 일종이자 공중에 매달려 거꾸로 자라는 식물 사이에 초현실적으로 걸린 진 케이 컬렉션은 강진영의 현재 취향으로 편집돼 있다. “컬렉션은 꼭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진 케이에서 볼 수 없어요. 다음 시즌엔 빈티지 리폼을 통해 신개념 꾸뛰르를 보여줄 수 있고, 그다음에는 아트 피스도 가능하다는 얘기죠.”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패션 디자이너 강진영’에 대한 선입견이 ‘진 케이’를 통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2층이 ‘진 케이’ 쇼룸으로 한정된 건 아니다. 이 공간에서 의미심장한 건 시각만큼 청각이다. 제단처럼 한쪽 벽을 떡하니 차지한 매킨토시 오디오 시스템과 탄노이 스피커를 보면 누구라도 눈이 번뜩 뜨이고 귀가 열릴 것이다. “진공관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고 예열이 되면, 나는 당신을 위해 최상의 소리를 낼 준비를 마쳤습니다, 라고 오디오와 스피커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요.” 윤한희는 수차례 패션쇼를 발표하며 소리가 주는 어떤 효과를 경험한 뒤 이 장치를 마련했다. “소리만이 선사할 수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초록 식물을 통해 시각적 힐링을 경험했다면, 이제부터는 사운드 테라피를 체험해보라는 식. 아울러 좌우 스피커를 통해 사운드를 제대로 만끽할 지점에는 브룰레 형제가 만든 의자를 놓아 고객이 최상의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할 예정이다. “2층에서는 사운드 스타일리스트와 소리 전문가들과 함께 오디오 클래스를 기획할 거예요.”
가만있자, 시각과 청각과 미각을 모두 갖춘 이곳에서 후각 체험은 빠진 것 같지 않나? 윤한희는 얼른 2층으로 안내했다. 뷰티 섹션으로 향하는 난간에 서서 우리는 1층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 뒤 프로젝터를 통해 재능 넘치는영상 작가들의 작품이 상영될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1층에서는 오픈 전시로 <슈퍼 가든>전을 기획했습니다.” 윤한희가 다시 1층에 마련된 철제 구조물을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1년에 네 차례 기획전이 여기서 열립니다. 11월에는 또 전혀 예상치 못한 전시가 마련됩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일단 ‘연극적인 것’이라고만 슬쩍 귀띔했다. 2층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드디어 마켓 속의 마켓 ‘슈퍼 가든’이 떠들썩하게 자리하고 있다. 형형색색의 모종삽부터 물뿌리개, 앙증맞은 화분, 희한하게 생긴 호박이나 온갖 열매 등등. “전시가 끝나면 1층의 모든 것은 지하로 내려갑니다. 지하는 식기와 정원용품 위주예요.” 이와 함께 매뉴팩트처럼 철학을 지닌 식당도 준비된다. 물론 지하에도 정원과 자연광은 충분하다. “정원에서 가꾼 채소로 음식을 만들면 어때요? 상추, 셀러리, 허브 등등. 이를테면 ‘팜 투 테이블’이 되겠죠.”
자,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윤한희를 만나고 있다. 패션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채 패션쇼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던 때보다 훨씬 들떠 있다. 물론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안에도 위축된 그녀를 한 번도 본 적 없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던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의 주관을 믿고 직감으로 밀어붙였다. “존경하는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게 규칙이다!’ 저 역시 제 본능대로 이곳을 가꾸고 있습니다.” 사실 윤한희 정도의 이력이라면 누구라도 그 변별력과 남다른 해석 능력을 신뢰할 만하지 않나?
이제 오늘 밤을 꼬박 새워 지하까지 단장하고 나면 퀸마마 마켓은 비로소 완성이다. 내일 이곳을 방문할 손님들을 위해 큼지막한 화분 선물을 준비한 그들. “분갈이를 하거나 옮겨 심어 몸살을 앓던 나무에 빛과 물을 주자 파릇파릇 되살아나는 걸 매 순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려식물 입양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반려동물 개념은 익숙하지만 반려식물 개념은 낯설어요. 그런 즐거운 책임과 부담으로 식물을 키우면 어떨까요?” 이렇듯 강진영과 윤한희 커플은 90년대에 프린세스 룩으로 반향을 일으켰듯 이번에도 몇 걸음 앞에서 또 다른 문화를 제안해 ‘자, 이제 이쪽으로 따라오실까요?’라며 말을 건네고 있다. 이런 선구적 태도는 매 순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싶은 그녀의 본능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규칙을 만드는 순간부터 그 규칙에 함몰되고 말아요.“ 1층 정원의 벚나무와 계수나무 사이에서 윤한희가 강진영과 눈을 마주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 역시 자연 안에서 모든게 자유롭습니다!”
- 에디터
- 신광호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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