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서울에서 열리는 리우웨이의 개인전 <파노라마>

2016.05.27

서울에서 열리는 리우웨이의 개인전 <파노라마>

1세대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중국 사회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면 90년대 포스트 감성 세대인 리우웨이는 그 모순된 현실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개인전 〈파노라마〉는 현 사회를 토대로 건설한 리우웨이의 초현실적인 왕국이다.

1세대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중국 사회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면 90년대 포스트 감성 세대인 리우웨이는 그 모순된 현실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개인전 〈파노라마〉는 현 사회를 토대로 건설한 리우웨이의 초현실적인 왕국이다.

천지개벽이란 말이 있다. 1972년생인 리우웨이(Liu Wei)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둘로 나뉘는 듯한 변혁을 숱하게 경험했다. 문화대혁명의 시뻘건 광기가 한바탕 중국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에 태어난 그는 천안문 사태와 개혁개방 등 급격하게 재편되는 중국 현대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했다. 이 불안정한 상황은 리우웨이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큐레이터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몇 해 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몇 년마다 모든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늘 무언가를 믿었어도 내일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장샤오강, 위에민준, 쩡판즈 등 1세대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냉소적 사실주의에 천착했다면 모택동 사망 이후 세대인 리우웨이는 이 같은 혼돈과 모순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1999년 1월 베이징의 한 반지하 아파트에서 열린 <포스트-센스 센서빌리티> 전시는 데미언 허스트로 대변되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센세이션>전만큼이나 화제였다. 리우웨이를 포함한 열 명의 동시대 작가들은 태아의 사체 같은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았고 이 전시장은 정부 검열로 몇 시간 만에 강제 폐쇄 당했다. 당시 리우웨이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10cm 크기의 작은 모니터 화면 속에서 벌레처럼 움직이는 6채널 영상 작품 ‘참을 수 없는’을 공개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 비엔날레(2004)에서 관료주의적인 중국의 미술 체제에 다시 한 번 ‘엿 먹였다’. 주최 측의 일방적인 요구로 예정된 작품을 설치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면전에 궁둥짝을 들이민 것이다. ‘풍경처럼’은 멀리서 보면 한없이 평화로운 한 폭의 수묵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산봉우리들은 허리를 굽힌 채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이들의 알몸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진 작품은 리우웨이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는 지난 4월 말부터 리우웨이의 개인전 <파노라마>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앞서 언급한 문제적 작품을 비롯해 다수의 신작이 공개된다. 로댕의 작품이 놓인 유리 파빌리온은 형형색색의 광장으로 변모했다. 전시 제목과 동명인 이 작품은 고대의 아레나에서 영감을 받은 일종의 원형극장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건축 풍경을 투명한 아크릴 등 여러 재료로 재구성한 것이다. 국회, 정부 기관 등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 사이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시장은 하나의 왕국처럼 느껴진다. 광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기술 서적을 갈아 만든 새하얀 암석 형태의 조형물 ‘Look! Book’이 거대한 장벽처럼 서 있고, 그 동선의 끝에선 베이징의 재개발 현장에서 수집한 건축 폐기물로 만든 여러 채의 성전(‘하찮은 실수’)을 만나게 된다. 공공 기관의 디자인, 버리는 책, 건축 현장의 폐자재 등 지극히 일상적인 재료와 현실 사회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신화적이고 초월적이다. 이 기묘한 왕국의 건설자 리우웨이는 까까머리에 굵은 금목걸이를 하고 나타났다. 그는 이곳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중국 작가다. 8월 31일 전시가 끝나면 플라토는 문을 닫는다.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꽌시(관계)’였다.

<하찮은 실수 II No.1(2009-2012)>

<동녘 No.9(2015-2016)>

<풍경처럼(2004)>

로댕의 ‘지옥의 문’ 앞에 설치된 도시 풍경 ‘파노라마’는 언뜻 천안문 광장을 연상시킨다. ‘천상의 평화로운 문’이라는 뜻과 달리 천안문 광장은 중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 사실 천안문이 그런 뜻이라는 것도 지금 알았다. 아마 로댕의 작품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광장을 연상했다면 그건 내 작품이 공공장소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우장이라든가 커다란 극장이라든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천안문 광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작업 초기엔 검열을 피해 미술관 외의 장소에서 임시 전시를 주로 해왔다. 전시 현장의 공간성을 당신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로 볼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장소에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다. 이 유리 건물을 처음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좀 고민이 됐다. 꽤 까다로웠다.(웃음) 하지만 그게 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아니다. 다만 난 작품을 공간에 던질 뿐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후엔 공간과 작품 간에 관계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 관계가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적합한 관계를 형성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현실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 내 작품의 핵심이다.

책은 당신이 오랜 기간 탐구해온 조각적 재료 중 하나다. 문명의 상징인 활자 책으로 바위 같은 자연의 오브제를 만드는데, 분서갱유 같은 역사적 사건과 ‘Look! Book’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게 이 작품의 시작점은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는 책으로 대변되는 지식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책과 돌. 둘 다 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무겁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을 놓고 무엇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다. 만약 분서갱유 사건을 말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시각적 조형물보단 언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쪽이 훨씬 더 선명하게 의미를 전달할 테니까.

작업의 명제가 되는 몇 개의 단어를 알려달라. 당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글쎄, 정말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글자를 한번 찾아봐야겠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한 후) 못 찾겠다. ‘표현할 수 없음’을 내 작품의 명제라고 하자.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땐 ‘불확실성’ 그리고 ‘인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두 다 맞는 얘기다.(웃음)

베이징 근교의 시골 사람들이 스튜디오 작업의 주축이 된다고 들었다. “미학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기업 방식에 저항한다”고 했는데, 이 숙련되지 않은 일꾼들의 서툰 솜씨가 당신의 작품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궁금하다.
난 비교적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편이다. 이건 예술에 대한 나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작업을 시작할 때 그 종착점을 예측하긴 힘들다. 원래 생각한 것보다 일찍 마무리될 수도 있고, 처음의 아이디어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육안으로 직접 과정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게 조력자들과 함께 일하는 이유다. 작품은 공산품처럼 완성도가 정해진 게 아니다. 그래서 공장식 생산 시스템에 저항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도심에서 벗어나 농촌 지역에 작업실을 구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그랬다.(웃음)

예술가들에게 임대료 혜택을 제공하는 798 예술지구 같은 곳도 있지 않나?
바로 그런 예술지구에서 독립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이징 시 외곽으로 나온 것이다. 무슨 신농촌 프로젝트나 경제 개발 지구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작업하는 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별로였다. 산업 단지 같다.

1999년 온갖 규제로 점철된 중국 미술계에 충격을 준 포스트-센스 센서빌리티 그룹 작가들과 지금도 교류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친하지만 더 이상 그룹으로 활동하진 않는다. 각자의 전시 때문에 요즘은 다 너무 바쁘다. 가끔 전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다.

활동을 멈춘 건 본인들의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애초에 끝났다. 당시 그룹을 결성할 때는 각 구성원 모두가 대립하는 예술계 공통의 문제가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한 것이다. 예술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예술가에게 자유가 주어지면서 작업에 대한 고민은 예술가 각자의 몫이 되었다. 그러면서 90년대 포스트-센스 센서빌리티의 역할도 종결되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 당신의 개인적 고민은 무엇인가?
나의 화두는 ‘무엇이 예술인가’다. 작품일 수는 있으나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예술가도 생산자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개인과 현실 사회가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만들어야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인지, 계속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하찮은 실수’ 시리즈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제목 그대로 실수가 만들어낸 뜻밖의 결과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조각 작업인데, 처음에 전시장 측에서 전시 환경에 대한 착오가 있었나 보더라. 그 문제로 인해 계속 수정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작품이 완성됐다. 여러 가지 실수가 쌓여 탑이 된 셈이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은 상태로 인터뷰를 하며 작품을 보니 ‘바벨탑’ 같은 느낌도 든다.
‘하찮은 실수 II No.1’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재미있는 반응이다. 작품에 사용된 목재는 중국의 학교나 병원 같은 공공 건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문짝과 창틀을 재조합한 것이다. 색깔도 원래 이랬다.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건축물이 모여 전혀 다른 구조물로 나타났다.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가?
특정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다. 영감보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중요하다. 무엇이 예술이고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영감을 받아 완성한 걸 예술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전시 외에 관광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나?
없다.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작업하지 않을 땐 사람들과 술 마시며 얘기를 나눈다. TV도 거의 안 본다. 음악 역시 친구들이 선곡해준 리스트만 반복해서 듣는다. 노래는 알아도 가수 이름은 모른다. 그래도 송중기는 안다.(웃음) 요즘 유행하는 게 뭔지 정도는 알고 있다.

플라토에서 전시회를 여는 마지막 작가가 되었다. 소감이 어떤가?
왠지 미안하다. 좋은 전시 공간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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