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화장품 사면 호구?
비싼 화장품 사면 호구? 뉴 럭셔리 브랜드가 선사할 작고 무해한 호사에 관하여.
로고도 브랜드명도 없는 관조적 패키지, 기품 있는 질감과 우아한 사용법. 뷰티 에디터에게 ‘네세세르 드 보떼’는 간판 없는 프라이빗 위스키 바, 그 자체로 예술적인 ‘오브제’다. 창립자는 무려 세르주 루텐. <보그>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시작해 크리스찬 디올 메이크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세이도 그룹 아트 디렉터를 지낸 40년 경력의 뷰티 장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품어 낳는 제품을 서울에서 만질 수 있다니! ‘쓰부(서브) 다이아’ 풀 파베 세팅 반지가 지겨워질 무렵 3C 모두 최상 등급을 받은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를 마주친 기분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브랜드에도 허들은 있다. ‘사악한 가격’ 말이다. 네세세르 드 보떼의파운데이션은 30g 21만7,000원, 립스틱은 2.3g 8만7,000원이다. 브랜드명을 직역하면 ‘뷰티의 필수’인데, 이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여긴 서울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제품이 프레스티지 시장을 무너뜨린 K-뷰티의 성지란 말이다. 무엇보다 빠르게 밀려 내려가는 소셜 미디어의 피드와 ‘병맛’ 포스팅 사이에서 무슈 세르주 루텐의 고고한 미감은 과연 전해질 수 있을까?
럭셔리, 한동안 뜸했었지
‘테스팅 베드’ ‘트렌드 바로미터’ ‘디자인 마켓’ ‘브리지 마켓’ 등 세계 뷰티 마케터들이 한국을 부르는 별명은 다양하다. 작은 나라지만 여자들의 취향이 까다롭고 단장하는 습관이 세분화되어 있어 서울에서 합격점을 받으면 주변 나라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속설이 있다. ‘불란서 화장품’에 목말라하던 뷰티 변방국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 한류 드라마로부터다. 세계 각지의 에디터들이 우리의 피부 비밀을 묻는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도, 해외 출장을 가면 그들이 전에 없이 따뜻하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것도다 그즈음이다. 모두들 한국형 BB크림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여기에 한국의 IT기술, 불경기가 낳은 뷰티 소확행, ‘코덕’ 개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가세하며 ‘저렴이’의 장점을 쉽게 어필하는 환경이 되자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뷰티 레드 오션, 서울의 변화에 빨리 적응한 건 몸집이 가벼운 국내 브랜드였다. 그리고 그들은 K-팝과 K-뷰티로 이어지던 시대적 흐름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원가를 앞세운 미투 제품의 노이즈 마케팅도 한몫했다. 위용을 떨치던 전통의 백화점 브랜드의 입지가 좁아진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당시 럭셔리와 프레스티지 유통은 크게 타격을 입었고 지금까지도 완벽히 회복되지 못했어요.” 뷰티 컨설턴트, 퍼플패치 최대균 대표는 새로 등장할 럭셔리 브랜드가 얼마나 붐업할 수 있을지 헤아려보며 앞으로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진 않을거라 말한다. 돌아보면 2013년 YSL 뷰티 여배우 틴트 대란, 2014년 하이엔드 타깃의 톰 포드 뷰티 론칭, 2015년 직구 1위 어반디케이 론칭 정도의 이슈를 제외하면 ‘고렴이’ 해외 메이크업 브랜드는 K-뷰티 이전만큼 대중적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장이 다소 안정되어 뷰티 춘추전국이 펼쳐진 뒤, SNS 피드에 등장할 만큼 ‘있어 보이는’ 아이템이 간간이 깃발을 꽂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파이가 누구와 나눠 먹을 만큼 크진 않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퀄리티를 간판으로 하는 ‘비싼’ 브랜드가 연달아 한국 론칭을 계획하고 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4월 네세세르 드 보떼, 5월 아워글래스, 7월에는 지방시가 온다. 이뿐 아니다. 내년엔 구찌와 돌체앤가바나 뷰티가 서울 상륙을 준비 중이다. 이들의 속내는 뭘까?
한국 여심의 변화
그들에게 한국의 여심이 변하고 있다는 사인이 감지되냐고 물었다. 세르주 루텐 홍보 담당 박나연 과장은 럭셔리에 대한 니즈는 분명 있다고 단언한다. “화장품 관련 정보가 넘쳐나면서 근거 없는 고가 제품은 무용지물이 되었죠. 그 자리를 ‘저렴이’가 채우게 됐지만 개중에는 가격만 싼 제품도 많다는것 역시 알려지게 됐어요.” 그 결과 진짜 제대로 된 것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제품 개발부터 유통까지 선별적으로 만든 진짜 럭셔리 말입니다.” 아워글래스 마케팅 담당 정수영 대리 역시 한국 여자의 보는 눈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진짜배기를 못 알아볼 리 없다는거다. “한국 뷰티 시장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되어 있어요. 아워글래스만의 장점인 슬릭 시크 패키징, 피부에 베일처럼 감기는 텍스처, 자연스럽지만 세련된 발색 등 고급진 퍼포먼스를 일단 한번 경험하고 나면 외면하기 힘들 거라 확신해요.”
물론 론칭 초기 어떤 제품을 밀어줄 것이냐를 결정하는 데는 심리전이 필요하다. 기존 하우스의 베스트셀러와 서울에서 스타가 될 제품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YSL 뷰티는 파운데이션과 컨실러가 우월하다. 하지만 서울에선 립 틴트로 일어나 한국형 쿠션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에서 럭셔리를 사는 여성들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다.
‘국민 립스틱’을 바라는 게 아니다
각기 다른 유통과 캐릭터의 브랜드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화장품 ODM 기업, 한국 콜마 이진성 연구원에게 럭셔리와 매스 제품의 차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매스가 95점이라면 럭셔리는 98점”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합격점을 받은 95점 제품에 좀더 특화된 성분을 추가하고 컨셉을 부여해 98점을 만들어낸다. 가격 차이는 그렇게 나면서 겨우 3점이냐 반문하겠지만 실제로 제조에 돌입해보면 그 3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진성 연구원은 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 최상층을 예로 들며 화장품은 재료의 원가만으로 값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고 당부한다. “이쯤이면 됐다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특별해지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 넣는 것, 그게 럭셔리입니다. 그들은 색감, 무게감, 그립감, 소리 등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디테일을 뽑아내기 위한 과정에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모던 럭셔리’ 아워글래스는 친환경 성분만 사용하는 비건 코스메틱을 모토로 한다. 창시자 카리사 제인은 성분, 포뮬러, 패키징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꾸준히 어필하고 있다. 자신들은 대중적인 브랜드이기보다는 럭셔리한 친환경 브랜드이며 그렇기에 독보적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까다롭기로 말하면 세르주 루텐도 지지 않는다. ‘네세세르 드 보떼’ 프랑스 본사는 매일 3시간씩 모로코에 있는 루텐과 화상회를 한다. 원료나 포뮬러는 물론 케이스와 단상자까지 그의 손길과 생각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깐깐하기로 말하면 톰 포드가 1등이다. 제품 개발 단계부터 광고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까지 모두 톰 포드의 비전과 컨펌을 거쳐야만 한다. 톰 포드 뷰티 PR 매니저 민유정 과장은 “리딩 시간이 길어져 론칭 일주일 전에야 겨우 제품이 입고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귀띔한다. 톰 포드의 까다로운 취향에 흡족할 만큼 완벽하지 않으면 출시가 미뤄지거나 아예 제품 자체가 공중분해되어버리기도 한다. “이 과정을 아는 사람은 톰 포드가 결코 비싸다고 하지 않아요.” 이런 뒷단의 치열함을 소비자가 알아줄까? 톰 포드 뷰티를 보면 희망이 있다. 최악의 불경기지만 론칭 이후로 매해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니까. “싱글 섀도, 미니 립스틱, 프라이빗 블렌드 EDT같이 가격 면에서 접근하기 좋은 제품으
로 밀레니얼 고객들이 유입돼요. 메이크업 제품을 먼저 경험하면 그것이 나중에는 향수 구매로 이어져 고정 고객이 되죠.”
조르지오 아르마니 뷰티 글로벌 사장 베로니크 고티에는 BW 컨피덴셜과의 인터뷰에서 “유일한 트렌드는 테크놀로지”라고 못 박았다. 아르마니는 에지 있고 시크하지만 튀려고 애쓰지 않는 브랜드로 자기 톤을 지키며 진보하는 방식을 택했다는거다. “우리의 DNA에만 충실할 거예요. 다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고집만이 성공을 보장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어차피 하이엔드 럭셔리 뷰티 브랜드는 ‘국민 립스틱’을 꿈꾸며 만든 것이 아니다. 대신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든 제품임을 알아달라 호소한다. 제대로 만든 럭셔리의 ‘피 땀 눈물’을 사는 것이지 바가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너의 목소리가 보여
사실 뷰티에 있어 무엇이 럭셔리인지를 정의하는 건 참으로 어렵다. 가격대로 잘라 말하면 가장 편리하겠지만 스피릿이 고귀한 합리적 가격대 제품을 럭셔리의 대척점에 세우기도 애매하다. 무엇보다 립스틱은 생필품이 아니기에, 필요 없는 것을 산다는 맥락으로 보자면 1만5,000원짜리 화장품도 호사다. 어차피 모든 메이크업 제품이 소확행을 위한 럭셔리라면 그들에게는 팔릴 이유가 있어야 한다.
최대균 대표는 그래서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럭셔리는 감성적인 것이에요. 만지고 바르고 휴대하는 매 순간 그 감성이 유지되어야 하죠. 그래서 제품 하나하나 얘깃거리를 만들고 디테일을 챙기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지방시, 구찌등 패션 하우스의 후광을 입은 금수저들은 출발부터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무슈 디올의 A라인 드레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마스카라, 샤넬 트위드 재킷을 그대로 빼닮은 블러셔 등 뼈대 있는 가문이라 가져올 모티브도, 우려낼 스토리도 넘친다. 지방시 뷰티 역시 아이코닉한 소재인 메탈과 블랙 레더 케이스를 이용한 ‘시그니처 꾸뛰르 립스틱’을 스타 프로덕트로 점찍어뒀다.
남은 과제는 그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밀레니얼들은 철저히 퍼포먼스 위주의 실용적 구매를 하고 있어요.” 최대균 대표는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지금의 소비 패턴을 뒤집을 만큼 눈길을 끄는 바이럴 콘텐츠가 필요할거라 말한다. “우아한 메시지를 필두로 하는 럭셔리 채널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지금의 소셜 커머스와 합이 잘 맞지 않아요 전통적인 방법을 고집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그래도 희망은 있다. 진정성이 있건 없건 모두들 손바닥보다 작은 사진 하나로 취향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대리석 상판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앵글 밖 어떤 허름함도 감출 수 있는 시대니까. “시각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세대에겐 격이 다른 비주얼 쇼크로 승부수를 던지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요?” 최 대표는 그들에겐 럭셔리를 시각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치를 소유했음을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거죠.” 물론 과감히 병맛 바이럴을 통해 반등에 성공한 A 브랜드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현재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어필할 우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아무리 비싸도 화장품은 소확행이다. 저렴한 제품 여러 개로 놀이하듯 즐기든, 럭셔리 아이템으로 라이프스타일을 뽐내든 위화감을 조성할 만큼의 사치는 아니다. 그러니 한국 여성의 뷰티 선택지에 럭셔리가 추가된 것을 반갑게 누리자. 그것이 요란한 빈 수레일지 대를 물릴 보석인지는 한번 테스트만 해봐도 알게 될 테니 돈을 버릴 리 없을 거라 장담한다.
- 에디터
- 백지수
- 포토그래퍼
- 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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