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다가 아빠라면
그래픽 노블〈파더 판다〉에선 출산을 강요받은 여성이 판다의 정자를 받는다. 현실의 누추함을 환상 세계로 그려낸 훗한나 작가의 등장이다.
왜 훗한나란 이름을 쓰나요?
본명은 김한나예요. 동명 작가가 있어서 그분에게 갈 메일이 제게 오곤 했죠. 전시를 열 때마다 김씨 말고 다른 성을 쓰다가, 어느 날 ‘훗한나’가 됐어요. 앞으로는 이 이름에 정착하려고요. 영어 이름은 ‘Hanna Something’이에요. 훗(Hot)은 영어에서 어감과 뜻이 별로여서요. 큰 의미는 없고 자연스럽게 붙은 이름이에요.
그래픽 노블 전문 출판사인 미메시스에서 <파더 판다(Father Panda)>를 출판했어요. 책에서 가임기 여성은 정부가 정해놓은 나이까지 출산을 해야 하죠. 하지만 남성의 정자 확보가 어려워서 민간에서 ‘대체 아빠’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그중 하나가 ‘판다는 좋은 아빠’죠. 판다의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하고, 그 판다는 해당 여성의 집에서 식구로 함께 살죠. 요즘 미디어에서 지겹게 나오는 저출산 문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요?
20대 초반부터 ‘외부 요인 때문에 가족이 됐다가 흩어지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그림 그리는 손이 안 따라줘서 못 그렸죠. 다시 이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그려보려고 고민하던 중에 임신, 저출산 같은 설정을 넣었어요. 알게 모르게 지금의 한국상황에 영향을 받았죠. 한편으론 씨앗 회사를 소재로 삼아볼까도 했어요. 씨앗 회사에서 농부에게 씨앗을 팔면서 재파종을 금지했어요. 아예 재파종이 불가능한 씨앗을 만들어서 팔려고도 했고요. 그린피스에서 막아서 시판은 안 됐대요. 놀라운 이야기지만 작품으로 그려내려니 끝까지 연결되지 않아서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출산 관련 논문을 읽고 이거다 싶었죠.
어떤 논문이었나요?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만 다룬다는 산부인과 전문의의 논문이었어요. 출산을 여성의 임무로만 치부한다는 거죠. 불임의 원인이 정자에있어도 환자를 여성으로 두고 진료해요. 또한 생명 윤리, 철학적 논의 없이 출산을 강요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페미니즘에 집중했다기보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드는 드라마 뒤에 다른 구조가 돌아간다는 실체가 흥미로웠어요.
왜 판다인가요?
워낙 번식이 어려운 희귀 동물이라 반어적으로 선택했나 싶었어요. 그냥 떠올랐어요. 판다로 정해놓고 유심히 살펴보니 독특한 동물이더군요. 공격성도 적고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생존 방식도 효율적이지 않아서 왜 그렇게 진화했는지 설명이 어렵더군요. 알면 알수록 등장인물로 잘 정했다 싶어요.
출산하지 않으면 정부가 세금을 매긴다는 설정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다른 이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는 이른바 ‘싱글세’ 뉴스가 생각나더군요. 또 최상급 정자의 모습을 TV로 방송하는데, 여기에선 정권에서 원하는 바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세뇌하려 했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TV 보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어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았어요.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 뉴스 빼고 모든 프로그램을 봤어요. 집에 TV도 없을 만큼 평소엔 거의 안 보거든요. 그런데 보다 보니 즐거움이 학습되더라고요.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더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좋은 아빠 클리닉’이란 병원 묘사도 공감되더군요. <파더 판다>에서도 병원 직원은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개인 정보 사용에 동의하면 30% 할인을 해주겠다고 권하죠. 등장인물의 대사가 제가 듣고 경험한 거라 작가는 관찰력이 좋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저도 산부인과에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어요. 메모를 하기보다는 밤에 일기를 쓰는 편이에요. 있었던 사실을 정리하기보단 마음대로 쓰다 보면 정보도 녹아들고, 무엇보다 정신 건강에 좋아요.
<파더 판다>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후반에 나온다고 생각해요. 정부의 권장으로 판다의 자식을 낳고 함께살지만, 결국엔 차별받죠. 공원에 나온 판다 가족에게 “저기 짐승들 모여서 밥 먹는 것 좀 봐라” 하면서 대놓고 무시하고, 판다의 자식이 시민 자격이 있을까 토론이 벌어지고,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죠. 우리의 인력난 때문에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모습이 생각났어요. <파더 판다>도 우리의 이중 잣대, 이기적인 부분을 꼬집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죠.
많은 분들이 그 부분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떠오른다고 하더군요. 그걸 염두에 두진 않았어요. 사람은 늘 자기보다 낮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서 넣은 구성이죠.
또 재미있는 점은 판다의 라이벌인 자이언트 토끼 측의 로비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죠.
동물의 자식은 새로 생겨난 하층 계급인데, 어쨌든 잘 돌아가는 사업이니까 경쟁 상대가 나오죠. 뒤에서 자본을 움직여서 판다 대신 토끼와 함께 하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사람들에게 선전하죠.
현실의 민낯을 얘기하기 위해 오히려 판다 아빠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사용했나 싶었어요.
이전의 작업은 현실과 더 동떨어졌고 <파더 판다>가 현실적인 편이죠.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나요?
뉴스를 하나하나 찾아보진 않아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낀 감정을 넣었죠. 청량리의 한 백화점에서 근무한 적 있는데, 아직도 생생한 풍경이 많아요. 비둘기에게 침을 뱉다가 모이를주는 아주머니도 기억이 나요. 참 별사람 다 있구나 싶었죠. 5년 전부터는 주말마다 홈쇼핑의 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큰 자극을 받아요.
한 드라마 작가가 스타 배우에게 이런 얘기를 했대요. 성공하더라도 골프 치지 말고 버스 타고 다니라고요. 그런 점에서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것이, 작품 구상에 도움을 줄 거라 생각해요.
콜센터에서 전국의 전화를 받으면서 평소의 저라면 만나기 힘든 사람을 접하죠.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소리 지르고 욕하는 분은 많지 않지만, 때론 그런 분을 보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같아요. 자기 불안을 익명으로 드러내는 거죠. 당하는 사람은 나지만, 나보다는 저 사람이 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자본주의에 사는 많은 이들은 ‘갑을 감각’이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이름을 얘기할 때도 ‘자’ 자를 붙여요. 훗 자, 한 자, 나 자, 이런식이죠. 저보다 높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나 봐요. 익명의 타인에게 말이죠.
원화 작업은 언제 시작했나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미대 입시에 떨어져서 대학에 안 갔더니, 작가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더군요. 20대 중반부터 동화책을 작업했어요. 직업인이 된 거죠. 당시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수줍음이 많고 얼굴은 중학생 같아서 출판사에 가면 어리게 취급하더라고요. 힘들어 일을 줄이니 의뢰가 점점 끊겼어요. 이번 출판은 지인의 추천 덕에 미메시스와 인연이 닿았죠.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요?
주변에서 콜센터 얘기를 권하기도 해요. 그런데 현실을 그릴 때는 굉장히 신경이쓰여요. 제가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는 편인데, 이런 이야기는 웬만큼 잘 만들지 않으면 공감하기 힘들거든요. 제 심신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픈 얘기를 하면 보는 이를 지치게 할 것 같고요.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안정을 찾으면 보다 ‘하이퍼리얼’을 그리고싶어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이윤화
- 스타일리스트
- 최다희
- 헤어&메이크업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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