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빌 비올라, 조우>전. 이우환 공간에 설치된 작품 ‘투영하는 연못’ 앞에 서자 6년 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전시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무슨 뜻이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문구는 바로 “나는 시간을 명확한 물질로 본다”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한 남자는 연못 앞에 섭니다. 물속으로 뛰어들 것처럼 도약하지만 연못 표면에 반사된 움직임은 아주 느립니다.
빌 비올라는 비디오를 통해 극단적으로 시간을 연장합니다. 이런 독보적인 작업 스타일로 ‘회화’에 가깝다는 평까지 들은 바 있지요. 본관 3층 대전시실에 설치된 ‘놀라움의 5중주’는 45초간 촬영한 영상을 15분 넘게 확장한 작품입니다. 시간을 고무처럼 늘리자 놀라움을 각기 다르게 표현한 다섯 인물의 감정이 관객에게도 증폭되어 전해집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인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명의 여성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다른 한 여성이 끼어드는, 45초 동안 일어난 일을 10분으로 늘리자 무의식적인 몸짓, 찰나의 감정 변화, 빛과 바람의 미묘한 변화까지 느껴집니다. 작가는 셋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슬로모션을 통해 추상적인 제스처는 계속 순환하고 그 작품을 보는 순간만큼은 관객이 인간의 감정에 극도로 집중하게 됩니다.
빌 비올라는 비디오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한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입니다. 1972년부터 비디오 영상, 음향, 전자음악 퍼포먼스 등 200점이 넘는 영상 작품을 만들어왔죠. 대학을 졸업할 때부터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백남준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지금까지 만난 예술가 중 가장 창의적이고 관용적이었다는 대답을 빼놓지 않습니다. 보통 예술가들은 작업 노하우를 비밀로 하지만 백남준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늘 나누려 했다고 전합니다.
40여 년간 그의 관심은 늘 삶과 죽음이라는 인류의 원초적 질문을 향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탐구 역시 그의 작품 세계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빌 비올라의 작품에는 존재와 부재,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 등 이원적 요소가 공존합니다.
<빌 비올라, 조우>전에서는 초기작 ‘이주’, ‘엘제리드호’부터 2014년까지 아우르는 최근작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그의 작품을 보면 물, 불, 공기, 흙을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빌 비올라는 과거 인터뷰에서 물에 빠졌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강에 빠져 바닥까지 가라앉아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푸른 물속 풍경과 물위로 반사되는 빛이 매우 아름다웠다고요. 물은 고난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정화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물이라는 존재는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노센츠’에서 남자와 여자는 마치 통과의례를 견뎌내듯 물의 장벽을 통과합니다.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는 물웅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다섯 개 비디오로 구성했습니다. 어머니와 두 딸의 삶의 순환을 떠올리게 하는 ‘세 여인’에서도 물의 장벽이 등장합니다. 시각적으로도 대단히 강렬하게 다가오는 물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경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빌 비올라는 1970년대에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와 기술을 작업 도구로 사용했지만 얼마 전 휴대전화에 대해 묻는 질문에 “휴대전화만 있으면 전 세계의 도시, 바다, 동물을 검색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간을 들여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섯 개의 영상으로 이루어진 작품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가 전시된 공간에 들어서면 예술이란 보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는 것임을 실감합니다. 마치 불이 난 듯 붉은 영상이 새어 나오는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서는 주택가 거리를 걷는 행인들, 왼쪽에서는 숲속을 끊임없이 걷는 다양한 사람들, 오른쪽에서는 새로운 출발을 하듯 배에 짐을 싣고, 어떤 탐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360도로 우리를 감쌉니다. 그 생동감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나아가고 우리 인생은 그렇게 순환되겠지요.
전시가 끝날 무렵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입니다. “나의 작품이 가장 의미 있게 존재하는 장소는 미술관 전시실도, 텔레비전도 그리고 비디오 화면 그 자체도 아니다. 그곳은 바로 작품을 보았던 관객의 마음속이다.” 빌 비올라는 누구보다 현실 너머 정신 세계를 사유하도록 하는 예술가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한 해의 끝.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새로운 매체와 기술에 주저하지 않는 초로의 예술가가 던지는 질문이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2021년 4월 4일까지 이어지는 <빌 비올라, 조우>전은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 에디터
- 조소현
- 사진
- Courtesy of Bus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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