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김혜순의 한복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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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알리는 김혜순의 한복 전시

2021-02-25T11:34:11+00:00 2021.02.25|

성춘향과 이몽룡의 고을 남원에,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의 이름을 내건 김병종미술관이 춘삼월 활짝 피었다. 여기에 곁들인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과 비주얼 크리에이터 서영희의 화룡점정.

1층 메인 홀에 전시된 한복. 원삼, 당의, 살창 고쟁이 등 10개 룩을 김혜순이 새로 제작했다.

어느 날 촬영을 마치고 유명 패션 사진가의 서재에 들를 일이 있었다. 지난 십수 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정상을 지켜온 사진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한국적인 것’을 고민한다고 털어놓았다. “세상이 한국을 주목하는 요즘, 어떻게 하면 클리셰 같은 이미지에 빠지지 않고 한국을 기록할 수 있을까.” 나 역시 패션을 다루고 아티스트를 만나는 ‘직업인으로서의 패션 에디터’이기에 한국만의 정체성을 숙고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 생각은 국경이 봉쇄된 요즘 같은 시대에 더 깊어진다. 글로벌 K-팝 스타들 덕분에 어느 때보다 한복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지금, ‘패션으로서의 한복’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패션을 범주로 작업하는 전문가들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된 것이다.

“한복은 지금을 반영한 옷이에요. 그래서 과거에 멈춰 있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오늘의 옷이죠. 한복의 오늘이 전통이자 역사가 되는 셈입니다.” 40년 가까이 한복을 만들어온 김혜순은 ‘코리아니즘’을 자신의 언어로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적인 것’. 그 경계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코리아니즘입니다.”

한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한복에 더없이 창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김혜순이 패션쇼가 아닌 전시를 위해 오롯이 새 의상을 제작했다. 2월 9일부터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열리는 ‘Dialogue-賞春曲’이라는 이름의 전시다. 김혜순이 제작한 옷과 김병종의 그림이 크고 묵직한 미술관 곳곳을 온기로 채운다. ‘얼음 옷을 벗어버린 숲의 정령들이 봄을 입고 숲을 나선다’는 테마가 전시를 이해하는 단서다. “봄이 와도 어깨를 쭉 펴고 들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는 때지만 봄은 봄이에요. 김병종 화가의 ‘숲은 잠들지 않는다’를 보며 잠들지 않는 자연, 잠들지 않는 계절, 잠들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정령들의 몸은 생기로 빛나고 봄에서 길어온 온갖 붉은색이 정령의 옷으로 표현되어 봄바람에 나부끼는 걸 상상했죠.” 김혜순의 표현처럼 갤러리에는 실크로 정성껏 만든 원삼, 당의, 활옷, 케이프, 무지기 치마 등을 입은 마네킹이 빛을 발산하며 서 있다.

전시에는 김혜순과 오래 협업해온 비주얼 크리에이터 서영희가 의기를 투합했다. 김혜순은 그녀를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을 스타일로 마무리해줄 귀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김혜순은 서영희, 사진가 조기석과 함께한 <보그> 화보를 잊지 못하는 순간이라고도 덧붙였다. 2018년, 김혜순이 프라하 조핀궁에서 체코 건국 100주년 기념 패션쇼를 열었고 이에 맞춰 장장 30페이지에 이르는 화보를 창조한 그때 말이다. “사진가가 포착한 순간은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뇌리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물론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함께해서 좋았고요.”

서영희는 이번 전시를 위해 평범한 마네킹이 아닌, 빛을 발산하고 또 그 빛이 한복에 비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고 전한다. “전시 공간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담고 또 한복을 미술관에 어떻게 전시해야 할지 고민했죠. 전시장 배경음악으로는 막스 리히터가 편곡한 ‘봄’을 골랐어요. 전시가 한창일 봄에는 미술관 주변에 벚꽃이 많이 피어요. 많은 분이 이곳에 나들이 삼아 들렀으면 좋겠어요.” 서영희와 김혜순은 남원과 서울을 오가며 전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실리콘으로 가닥가닥 마네킹의 머리카락을 만들고 노방 버선을 신기며 세부 묘사에 공을 들였다.

전시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전통 인형 작가, 한복 연구가로 활약한 허영의 인형이다. 허영은 김혜순의 외삼촌이자 한국 인형의 대가로, 석고를 깎고 닥종이를 녹이고 뭉쳐 한복을 입힌 여성상을 만들었다. 2층 홀에는 기녀, 무희, 무녀, 양반가의 부인 등 한복을 입은 여섯 개의 인형과 신부가 보내는 최고의 하루를 상징하는 예술품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보그>의 코리아니즘 정체성에 완성도를 더해온 서영희 역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요즘의 생각을 전했다. “스타일리스트로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 했던 초기에는 족두리, 한복, 한옥, 민화 등 표상적인 것들이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쉽게 접하지 않았던 것들이기에 이를 어떤 식으로 멋있게 표현할지 고민했죠.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신세계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문화와 관습이 생기게 됐는지요.” 그녀와 작업하는 조기석, 민현우 같은 젊은 한국 사진가들에게 이러한 한국적 정서가 보인다고도 덧붙였다. 민현우와 함께했던 <보그>의 ‘할머니 화보’는 한국 할머니들에게 한복을 입힌 표상적 이유보다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자란 사진가만이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할머니들과의 교감이 그러한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는 이유라고 말이다. 진심으로 잘 만든 한복과 마음을 치유하듯 서정적인 김병종의 그림이 균형을 이룬 전시는 5월 9일까지 이어진다. “한복을 옷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미술, 예술의 한 가닥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김혜순과 서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복이 모두에게 예술적 영감이 되길 소망합니다.”

케이프는 개화기에 서양 문화가 유입되면서 한복 치마 위에 장식적 요소로 입은 아이템이다. 겉옷 개념이었으며 한 겹 더 입는 방식의 멋내기용으로 유행의 바람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