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신인으로 성장한 여배우 박주현
우리가 기다려온 힘차고 번뜩이는 에너지, 박주현.
지난해 <인간수업>으로 번개보다 강렬하게 데뷔한 박주현이 1년 사이 이름을 올린 작품은 <반의반>, <좀비탐정>, <마우스>, 영화 <사일런스>까지 총 다섯 편이다. 며칠 전에는 200억 규모의 넷플릭스 제작 영화 <서울대작전> 캐스팅 소식이 들렸다. ‘괴물 신인’이라는 신조어의 창작자가 있다면 어디선가 박주현의 행보를 보며 ‘그래, 이런 배우에게 붙이라고 만든 말이지’ 하며 뿌듯해하고 있을 것이다.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한복판 박주현 이름 석 자에서는 돌출된 에너지가 호기롭게 흐른다. 살인을 속죄하냐는 질문에 벚꽃놀이를 못 가서 아쉽다고 대답한 사이코패스로부터 최란 작가가 느낀 분노에서 시작한 드라마 <마우스>. 형사와 순경의 인간 헌터 추적극이라는 난장 한가운데 박주현은 어떤 사건에 기억을 품은 고등학생 ‘오봉이’를 맡았다. 제작 발표회에서는 스물여덟 살 배우에게 고등학생 역할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방영 후 그런 의문은 무의미해졌다. 박주현이 연기하는 오봉이에게는 고등학생이 그저 직업이나 취향 같은 특징 중 하나처럼 보였다.
“<인간수업> 때 다른 배우에 비해 성숙해 보이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있었는데 ‘규리’를 연기하며 쓸데없는 고민이었구나 깨달았어요. 안 보이는 것이 겉보다 더 중요하더라고요. 지금은 외적인 부분이 맞지 않았다면 감독님이 안 뽑았겠지 해요. 사실 ‘어림’을 연기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오봉이는 어리기 때문에 실언을 하고 실수를 해요. 그런데 실제 저는 그보단 어른이니까 자꾸 객관적인 시선이 들어가서 그걸 분리하는 게 어려워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사랑받아도 돼’, 자꾸 어른의 마음으로 오봉이를 보게 되거든요.” 할머니와 관계 때문인지 박주현은 유독 오봉이에게 젖어 있다고 말했다. “멘탈이 건강하고 금방 터는 편인데 제게도 할머니가 소중한 존재라 그런지 더 닿는 부분이 크네요. 첫날부터 힘든 장면을 찍으면서 김영옥 선배님과도 정이 많이 들었어요.”
연기하며 가장 고민하는 건 ‘어떻게 사람들이 봉이에게 마음을 열고 몰입하게 할 수 있을까’다. 깊은 감정에 비해 분량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 없을 정도로 한 신, 한 신, 저 자신을 갈아가며 연기했어요. 그래도 감독님이 많이 믿어주셔서 힘이 났어요. 누군가가 믿어주면 저도 모르는 힘이 엄청나게 나거든요.” 박주현은 배우 황정민에게 들은 조언대로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연기할 캐릭터로서 일기를 따로 쓰고 있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이 작업은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도, 인물과 분리해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캐릭터에게 편지를 써요. 그리고 그 캐릭터로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하며 일기를 쓰는 거예요. 처음에는 오글거리고 어색하고 괴리감이 있는데 빠져들어서 쓰다 보면 나중에는 진짜 봉이가 쓴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사이 제게도 봉이가 어느 정도 배거든요. 일기를 쓰다 보면 대본으로만 봤을 때 보이지 않던 세심한 부분까지 깊이 들어가게 돼요. 감독님이 좋다고 한 것들이 다 일기에서 건진 거예요. 봉이 첫 일기 첫 문장은 이거예요. ‘학교가 싫고 아이들이 싫다. 사실 살고 싶지도 않다.’ 어제 다시 읽어봤는데 슬프더라고요. 사실 그 인물과 계속 같이 있는 게 정신 건강에 그렇게 좋진 않거든요? 그런데 일기를 쓰면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어요. 되게 감정적인 신을 찍고 나면 집에 와서도 잘 가시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봉이 일기를 쓰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요. 저도 원래 일기를 쓰는데 고해성사하듯 쓰곤 해요.”
<마우스>는 액션극이 아님에도 몸싸움이라 불러야 할 액션 활극이 벌어진다. 박주현이 입은 스트라이프 니트 아래 팔뚝에는 멍 자국이 있었다. “액션은 아무리 조심해도 사물에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멍이면 다행이죠. 안 부러진 게 어디예요. 이번 작품에서는 전문적으로 합을 맞춘 액션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액션이에요. 막 집어던지고 도망가고, 복수하기 위한 액션이 있어요. 평소에 몸을 잘 쓰고 액션도 빨리빨리 배워서 크게 어렵지 않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액션 연기는 진짜 힘든 것 같아요.”
매일 저녁 9시만 넘으면 장르물의 짙은 기운이 대한민국을 휘감는 요즘, 장르물의 수위는 제작자, 배우 모두의 고민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 성폭력, 사이코패스 범죄 등 소재가 내포한 잔인함, 범죄자의 서사로 인한 동조와 미화까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담론이 필요하다. “직설적으로 살인 장면 혹은 피해자를 보여주지 말고 우리의 감정으로 가져가자는 얘길 많이 나눠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겪은 피해자의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까요. 이번 작품에서도 실제 사건을 떠올릴 수 있어서 정말 조심스러워요. 저도 비만 오면 사건 현장이 떠오르는 트라우마 연기가 되게 힘들었어요. 끝나고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저는 봉이가 지지 않고 강하게 버텨내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피해자나 관련된 분들 입장에서는 또 어떻게 저렇게 독할 수 있냐고 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지만 제 빛깔로 채워나가고 있어요.” 대본을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박주현은 악이 승리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픈 일을 겪었지만 버텨내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힘을 얻고 있다고도 말했다. “제게도 항상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런 인물을 만나며 무너지지 않는 힘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해요. 서로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는 듯해요.”
생각보다 유연하고 기대보다 활기찬 박주현은 ‘새로운 세대’를 사람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하이웨이스트 와이드 팬츠에 니트 브라 톱과 데님 재킷을 입고 이리저리 몸을 쓰며 스튜디오를 걸어 다니는 걸음마다 비트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박주현에게서 느껴지는 건 시대의 에너지다.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눈으로 <인간수업> 오디션에 붙었다고 전해지는 박주현의 ‘눈’은 감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저돌적인 에너지는 엔터테인먼트 빛깔을 띠는 작품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요즘 시대가 바라는 배우라는 말을 건네자 박주현은 “큰 운이죠.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쉴 수가 없다니까요?”라며 씨익 웃었다.
<마우스> 출연 소식을 전한 박주현의 SNS에 이런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누나는 왜 만날 살벌해요?” 범죄 현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 번번이 출연한다는 의미일 테다. 다행히 박주현은 살벌한 곳에서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며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뭔가 하려는 여성 캐릭터가 좋아요. 일단 저랑 많이 닮았거든요. 시키는 대로 하는 걸 안 좋아해요. 그리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드라마가 더 좋아요. 성격이 워낙 즉흥적이고 규칙적인 걸 싫어해서 그런가 봐요. 밤공기와 새벽 냄새가 좋은데 왜 밤에 자야 하는지 늘 이해하지 못하던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이 잘 맞나 봐요.”
캐릭터를 위해 복싱을 배우고 골프채를 휘두른 이야기를 들려주던 박주현은 연기란 정말 사람 공부라고 말했다. 인간에 대해 알아가고 또 다른 인간을 만나는 작업은 사람의 심리, 철학까지 공부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돌연 연기하는 캐릭터가 본체 박주현의 패션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반의반> 때 굉장히 여성스러운 캐릭터를 맡았거든요? 긴치마를 엄청 샀어요. 라인이 들어간 롱 코트도요. 그땐 제가 취향이 바뀐 줄 알았어요. 뭔가 농후한 느낌을 내고 싶은가 보다 했는데 <인간수업> 때 사진을 보니까 저지 같은 운동복을 엄청 입고 다녔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검은 옷밖에 안 입어요. 완전 짙은 갈색, 짙은 남색을 위아래로 입고 모자도 검은색만 쓰고요. 오봉이처럼요. 내가 캐릭터에 따라 영향을 받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반의반> 때 샀던 옷 요즘 절대 안 입는데 어떡하죠?(웃음)”
이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에게서 보이는 건 다양성이다. 허리는 가늘고 골반이 크며 어깨는 넓다. 까끌까끌하며 공명하는 목소리는 귀를 사로잡는다(포토그래퍼 강혜원은 불균질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어릴 때부터 왜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말랐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현실성이 있나?’ 했어요. 마른 역할은 마른 배우가 하고 나는 리얼리티 있는 역할을 하면 돼요. 할리우드만 봐도 제니퍼 로렌스 되게 통통한데 쫄쫄이 입고 멋있는 역할 다 해요. 그런데 왜 우린 이토록 마른 몸을 좋아할까 반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살 빼라고 해도 오롯이 연기로만 승부를 하겠다고 했어요(웃음). 그렇다고 제가 관리를 안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건강 제일주의자’ 박주현은 덕분에 엄청난 체력을 자랑한다. “우리 팀에서 제가 만날 가장 말짱해요. 지친 스태프들이 절 보며 깜짝깜짝 놀라죠. 평소에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무슨 운동이라도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다음 작품을 위해서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싶어졌어요. 캐릭터를 위해서 좀 더 수척하고 예민해 보이고 싶거든요.”
따르기 힘든 규칙을 묻자 박주현은 “왜요?”를 입에 달았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다. “호기심이 많아서 당연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어요. 왜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지, 학교는 왜 아침에 가야 하는지 등등. 그래서 선생님들이 귀찮아했죠. 지금도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소속사에 별의별 걸 다 물어봐요. 그래서 이제 부사장님이 제 전화를 잘 안 받으시죠(웃음). 초등학생 때 제일 존경하던 선생님이 왜 사는지 질문을 던지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그냥 멋있었죠. 그래도 그 질문이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나 해요. ‘내가 뭘 위해 달려가지?’가 없으면 힘이 빠져요. 당장 우리 가족이 행복했으면 해서, 내가 맛있는 걸 먹고 싶으니까. 이런 목표가 있으면 좇기 좋잖아요. 달릴 맛도 나고.”
좋아하는 연기 스타일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박주현은 배우 김혜자 이야길 한다. “선생님은 오랜 시간 연기를 하셨는데도 늘 새로운 느낌을 주시죠. 그게 되게 멋있어요. 저는 자연스러운 연기가 좋아요. 자연스러움이 그냥 편하게 논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진짜 자연스럽기 위해선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손동작 하나하나까지 공부해서 저도 진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싶어요.” 배우를 시작한 이상 박주현이라는 이름이 브랜드가 될 때까지 가고 싶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사실 진짜 먼 꿈이죠. 어느 정도 나이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해질 거예요. 그러려면 롱런해야 되고 좋은 작품도 많이 만나야 하죠. 오롯이 제 힘으로만 이룰 수 없을 테지만 목표로 잡고 있어요.”
끝으로 박주현은 이제 오봉이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말했다. “데뷔하고 나서 일주일 이상 쉰 적이 없어요. 지금 컨디션이 최고라고 말은 못해요. 하지만 끌리는 캐릭터나 작품을 만나면 힘이 다시 나요. 몸은 지쳐도 심적으론 지치지 않거든요. 이제 다시 봉이로 돌아갑니다. 거기가 제가 있어야 할 곳 같아요. 박주현으로 놀러 나와서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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