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과 김제덕의 완전히 새로운 스포츠맨십
진심으로 즐기고 결과만큼 과정을 소중히 여긴다. 안산과 김제덕의 완전히 새로운 스포츠맨십.
4년에 한 번씩 활쏘기를 보는 사람들에 비해 활을 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몇 년 전 활쏘기를 취재할 때 활을 쏴본 적이 있다. 프로 레벨은 다 그렇지만 활쏘기도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이르는 몸의 수직축은 땅에 박힌 말뚝처럼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한다. 활대를 쥔 왼팔과 활시위를 당기는 오른팔 역시 흔들림 없이 뻗어 있어야 한다. 활시위는 생각보다 팽팽하고 표적은 30m든 70m든 막상 앞에 서면 잘 안 보일 만큼 멀다.
막상 해보면 10점 과녁을 맞히는 건 둘째 치고 과녁 안에 화살을 집어넣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다. 활이 시위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해야 하는 일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살짝 벌려주는 것뿐이지만 그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후의 결과는 두 번 다시 바뀌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양궁 선수들은 이걸 몇백 번씩 하는데, 거의 모든 순간 과녁 한가운데에 화살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화살을 과녁에 꽂는 체력과 집중력을 올림픽 레벨에서 구현한다는 건 완전히 단위가 다른 이야기다. 극도의 체력과 집중력을 발휘해 수백 발을 쏴서 모두 맞혀야 한다. 경쟁자들은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무대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본 곳이다. 날씨는 엄청나게 덥고, 어떻게 생각하면 온 세계가 나를 보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견딜 수 없는 압박감 속에서 시위를 하나씩 당겨야 하는 상황, 한국 양궁은 그 압박감 속에서 지금까지 43개의 메달을 땄다. 1972년 뮌헨부터 2020년 도쿄까지. 볼수록 놀랍고 궁금해진다. 어떻게 한국 양궁은 이렇게 강한 걸까?
“종목 자체에 부정이 끼기 힘들어요.” 2016년 리우 올림픽 양궁 대표 선발전을 취재해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태웅 KBS PD의 말이다. “양궁은 굉장히 오랜 기간 누적된 실력을 보고 평가합니다. 종목의 성적 자체도 숫자로 떨어지는 종목이고요. 그러다 보니 수학적, 확률적으로 결과가 좋은 선수가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포츠 종목 중에는 감독이 내보내줘야 뛸 수 있는 종목이 있죠. 반면에 양궁은 개인 퍼포먼스 종목이기 때문에 숫자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어요.” 그는 한국 양궁의 강세 이유를 뛰어난 시스템에서 찾았다.
“(그중에서도) 집중력이 돋보이는 선수가 있죠.” 공평하고 뛰어난 시스템의 존재 목적은 결국 뛰어난 개인 발굴, 영웅을 찾아내는 일이다. “지금 KBS 해설위원인 당시 기보배 선수가 기억에 남습니다. 양궁협회에서는 ‘다큐멘터리 촬영도 훈련이다. 이게 우리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들어와도 상관없이 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었어요. 그래도 카메라가 들어오면 다른 선수들은 의식을 하는데, 기보배는 전혀 의식을 하지 않았어요. 연기를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요.” 뛰어난 개인은 어디서나 돋보이니까. 이번 올림픽에서도 우리는 뛰어난 두 명의 개인을 알게 되었다. 2001년생 안산과 2004년생 김제덕이다.
안산의 성적은 우수한 선수가 많은 한국 양궁 역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훌륭한 수준이다. 안산은 이번에 혼성 단체전, 여자 단체전, 여자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 사람이 금메달 세 개를 획득하며 3관왕이 된 건 현대 양궁 역사상 안산이 최초다. 한국 하계 올림픽 역사에서도 개인이 3관왕을 한 건 안산이 처음이다. 특히 양궁 혼성 단체전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처음 채택된 종목이다. 처음 채택된 종목에서 올해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 된 선수가 최초 우승을 한 것이다. 혼성 단체전 준결승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김제덕 선수가 쏜 10점 화살을 맞히는 장면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맞힌 ‘로빈 후드 화살’은 스위스 로잔의 올림픽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 모두가 2001년생 선수가 자기 발로 서서 이룬 일이다.
안산은 처음부터 그릇이 컸다. 인터넷에 거짓말 같은 사진이 하나 있다. 얼굴이 뽀얗고 안경을 낀 소녀가 메달 여섯 개를 들고 어색하게 서 있는 사진이다. 2016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남녀양궁대회 여자 중등부에서 안산이 거둔 성적이다. 당시 광주체중 3학년이던 안산 선수는 여중부 싱글 라운드 30m, 40m, 50m, 60m, 개인 종합,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해 대회 6관왕이 되었다. 한국 양궁은 워낙 유망주가 많아서 어릴 때 뛰어난 성적을 내도 성인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안산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는 그 성적을 그대로 유지하며 세계 수준에 올랐다.
안산의 특장점으로 많은 사람이 특유의 집중력을 꼽는다. 2017년의 안산을 인터뷰한 귀한 기사에서, 안산의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안산을 칭찬하는 부분도 기본기와 집중력이다. 동시에 안산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될 사람이 따로 있나 싶기도 하다. 안산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양궁을 시작했다는데 처음 1년은 활을 쏘지도 않고 활 쏘는 자세만 연습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활을 쏴보고 싶어서 양궁부를 찾아갔는데 활은 못 쏘게 하고 자세만 계속 가르칠 때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이 에피소드부터가 안산의 집중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2017년의 안산은 국가 대표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큰 대회 나가면 떨리겠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안산의 대답은 “저는 그런데, 뭘 하든 무슨 대회에서든 나 할 것만 하는 스타일이라서요”였다. 4년 후 그는 도쿄에서 그 말대로 했다.
2020년 도쿄에서는 또 하나의 천재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남자 단체전과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제덕 선수다. 그는 만 17세의 나이로 금메달을 획득해 한국 남자 양궁 역사상 올림픽 최연소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아직 주민등록증이 나오지 않았지만 예술체육요원 조건을 충족해서 군 복무도 면제됐다. 이 모두가 치킨과 햄버거와 망고주스를 좋아하고 게임 메이플스토리와 서든어택을 즐겨 한다는 소년이 이룬 것이다.
소년 김제덕의 실적과 재능은 극적이라 감동적이고 천재는 이런 건가 싶어 놀랍다. 김제덕은 개인 사정으로 예천에 계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장난기가 많던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선생님이 “양궁장에 가서 좀 침착하게 하는 것도 배워라”라고 해서 양궁장에 갔다. 이때부터 김제덕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0발을 넘게 쏘고, 12시까지도 훈련했다고 할 정도니까.
스포츠는 결과의 세계이고 결과가 나오면 남다른 것도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김제덕은 아주 큰 응원 소리로도 이번 올림픽에서 화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젊은이의 패기라 말했지만 그를 직접 지도한 코치의 의견은 달랐다. 경북일고 황효일 코치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특별 훈련을 할 때부터 ‘파이팅’을 외치며 스스로 긴장을 풀려고 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벌써부터 그 긴장감을 겪는다는 게 좀 안쓰럽다”고 했다. 하긴 17세의 나이에 어쩌다 보니 세계 수준이 되어 한 발 한 발이 세계 최고로 나가는 길이라 생각하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포츠계에는 “압박감은 특권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세계 일류만 느낄 수 있는 압박감을 어깨에 메고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이들은 승리자의 기쁨을 두루 누리고 있다. 올림픽 전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던 젊은 운동선수였는데 이제는 전국 단위로 알려진 사람들이 되었다. 유재석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안산이 좋아하던 연예인이 안산을 직접 응원했고, 김제덕의 스폰서는 그에게 자동차를 증정했다. 아마 이들의 삶에서 처음일 화보를 찍고 광고를 찍으며, 이들의 젊음이 상품화되고 작품화되어 역사에 남는 중이다.
그렇다 해도 이들의 미래는 미지수라 말하는 건 부정적 예측이 아니다. 한국 양궁은 수많은 천재들이 깨끗한 룰에 따라 꾸준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곳이며, 이들도 그 사실을 안다. 역대 최연소 대표 선수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들보다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젊은 천재들이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니까. 안산은 차분하고 김제덕은 화끈하며, 이렇게 다른 둘의 스타일로 각자의 과녁을 채우는 둘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다음 올림픽에서는 이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들의 모습이 더욱 반갑고 아름답다. 젊은 사람들이 성과를 내서 기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건 많지 않으며, 그것이 스포츠의 반칙 같은 매력이니까. 동시에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젊음 같기도 하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할 걸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결과를 낸다. 결과를 낸 후 그 성취감과 행복을 당당히 즐긴다. 화보 속 이 젊은 천재들의 표정을 보면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이 선수들, 이 젊은 친구들에게 지금의 성과가 멍에가 아닌 지렛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그>의 멋과 상반되는 뻔한 말로 원고를 끝내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선수들이 계속 즐거웠으면 좋겠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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