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저는 거울을 잘 안 봐요"
이주영은 평범하기보다는 특별하길, 특별하기보다는 나답기를 꿈꾼다.
지난 5월 <브로커>로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왔죠.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춘몽>으로 생애 첫 레드 카펫에 서며 떨던 기억이 나요.
당시 부산 가는 기차 안에서부터 생생해요. 소속사도 처음 만났고 배우로서 낯선 경험이 많던 시절이었죠. 무척 떨렸는데 레드 카펫에 가니 관객들, 기자들이 환호하며 영화에 참여한 감독과 배우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줬어요. 칸도 비슷했어요. 처음엔 어느 공간에 가서 뭘 할지 몰라 긴장돼 송강호 선배님께 많이 여쭸죠. 점차 달뜬 마음을 즐겼어요.
무대에 서는 가수와 달리 배우가 대중과 만나는 몇 안 되는 자리가 영화제예요. 그런 면에서 더 즐겨야죠.
맞아요. 저에게는 GV 행사가 그런 의미예요. 팬과 함께 영화 보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너무 좋아서 50번 넘게 했어요. <브로커> GV는 신기했어요. 그렇게 많은 조명과 플래카드가 있다니! 저는 주로 조그만 극장에서 탁자 하나 놓고 했거든요(웃음).
영화제가 즐거운 마라톤 같다는 말이 있어요. 많은 일정으로 체력이 부쳐서요.
칸 2~3일 차부터 배우들 동공에 피곤함이 어려 있었죠. 많은 기자를 만나고 라운드 인터뷰를 했지만 다들 재미 있어했어요. 영화와 캐릭터를 더 배우는 자리기도 해요. <브로커>에서 배두나 언니와 주로 촬영했고 다른 배우와는 접점이 많지 않았거든요. 프로모션을 통해 영화에 대한 배우들의 해석을 들을 수 있었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브로커>를 세 개의 박스로 설명했어요. 하나는 아기가 버려지는 베이비 박스, 두 번째는 브로커들이 탄 차와 뒤쫓는 형사들의 차, 세 번째는 사회와 제도권이라는 박스죠. 이들 박스가 로드 무비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촬영도 이야기 전개 순서대로 이뤄졌죠. 배우로서 편한 지점이 있었겠죠?
로케이션 상황, 배우들 스케줄 고려하면 정말 그렇게 찍기 쉽지 않거든요. 특히 우리 영화가 로드 무비 색채가 강하잖아요. 부산에서 시작해 강원도까지 쭉 올라와 서울에서 마무리했죠. 순서대로 찍는 것도 좋았지만 실제 해당 로케이션에서 촬영이 이뤄져서 놀랐어요. 보통 차 안 장면은 밖에 배경만 입히고 세트에서 찍곤 하거든요. 효율성 때문에요.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님은 로케이션에서 직접 찍었어요. 배우가 운전대를 잡고 운행하면서요. 각자 선호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저랑 두나 언니는 너무 좋아했어요. 연기할 때 느낌이 확연히 달랐거든요. 제가 그날의 분위기, 날씨에 좌우되는 편이기도 하고요.
첫 촬영은 어땠나요?
비 내리는 밤, 소영(이지은)이 베이비 박스에 아기를 넣는 모습을 이 형사(이주영)와 수진(배두나)이 지켜봐요. 밤에 모였는데 해 뜨기 직전까지 찍었죠. 계속 비를 맞아서 지은 씨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기생충>의 홍경표 촬영감독님도 고생하셨죠. 고레에다 감독님께서 <기생충>의 비 내리는 장면을 감명 깊게 보셨대요. 개인적으론 수진이 “버릴 거면 낳지를 말던가”라는 대사를 하며 영화에 물음을 던져주는 오프닝 신이라 좋아해요.
초반의 “버릴 거면 낳지를 말던가”가 후반에 이 형사가 하는 “브로커는 우리가 아닐까”로 번져가는 듯하네요. 영화의 주제를 담은 중요한 대사인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했나요?
수진과 이 형사는 브로커들을 쫓아 포위망에 넣어서 승진한다는 목적으로 접근하죠. 점차 브로커들의 사연을 알면서 ‘이게 맞나?’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형사는 영화에서 관객의 시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듯해요. 그래서 답이 정해진 명확한 연기보다는 ‘이런가? 저런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고레에다 감독님도 배우에게 연기 디렉팅을 하기보다는 편안한 환경을 만들려고 하셨죠. 그러고 보니 정말 ‘이 대사는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말씀이 한 번도 없었어요.
수진은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버리는 미혼모를 탓하기보다 그를 보호하지 못한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하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본 볼 때부터 미혼모 소영에게 마음이 갔어요. 그 인물의 상처가 드러나면서 배후를 더 알고 싶어졌죠. 영화는 캐릭터 각자의 사연이 점차 ‘빌드 업’ 되기에, 관객은 극 중 누구에게든 자신을 대입하게 될 거 같아요. 정말 점차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시나리오였어요.
준비할 때와 첫 촬영이란 실전에 들어갈 때 간극은 없었나요?
현장성에 기대는 편이에요. 물론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현장에서는 다 던지고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주의죠.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잘하고 싶었나 봐요. 나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현장 상황까지 예상해가며 준비했어요. 감독님이 일본어로 쓰신 시나리오를 번역해서 받았기에 더 그랬나 봐요. 일본어의 디테일한 표현, 감독님의 의도 하나하나 다 살려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관객이 간극을 느끼지 않길 바랐거든요. 막상 촬영을 하니 감독님 눈에 그런 제가 보였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김독님께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제가 준비해간 것들을 해체시키는 디렉팅을 주셨어요.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걸 해도 돼요’라는 분위기를 계속 만드셨죠. 중반부턴 두나 언니와 놀듯이 편안하게 촬영했어요.
언어가 달라 불안한 배우들을 달래려고 감독이 직접 편지를 썼죠. 어떤 내용이었나요?
이 영화를 왜 찍고 싶었는지와 각 인물의 이야기에 대한 견해를 담은 편지였어요. 크랭크업, 그러니까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시나리오가 계속 수정됐는데 그때마다 감독님은 항상 편지를 쓰셨죠. ‘이 장면이 없어진 이유는 이러합니다.’ ‘결말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이러합니다.’
손 편지였나요?
감독님은 아직까지도 손으로 시나리오를 쓰세요. 아마 편지도 그러셨겠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문서 형태가 되었죠.
언어가 다르기에 더욱, 말보단 글이 진심에 가깝게 전달되리라 여겼군요.
한번은 너무 감동을 받아서 답장을 썼어요. 이 형사 캐릭터에 대한 내 생각, 바뀐 부분을 이렇게 해보면 어떨지 썼죠. 의상 피팅이 끝나고 감독님이 “잠깐 이것에 대해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셔서 편지 내용을 한참 논의하기도 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브로커>를 하면서 배우로서 처음 해본 경험을 묻고 싶었는데, 그중 하나겠네요.
맞아요. 제 필모그래피를 보면 규모는 작지만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해왔어요. 그렇기에 고레에다 감독님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이 무척 기뻤어요. 배우로서 참여 못하더라도 감독님 팬으로서 의미가 컸죠. 그런데 제가 <브로커>로 칸에 다녀왔다니 믿기지 않아요. 사진을 보면 갔다 온 거 같긴 한데(웃음). 이렇게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작품의 일원이 되다니 즐겁고 귀한 경험이죠. 물론 스케일을 따져서 작품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앞으로 많은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가 끝나고 한 인터뷰를 봤어요. 드라마가 워낙 잘돼서 주변에서 “고생 끝났다”고 했지만 그때도 “꾸준히 일해왔기에 관심을 조금 받았을 뿐, 이제 첫발을 뗐다”고 했죠. <브로커>가 개봉한 지금은 어떤 마음인가요?
그때와 같아요. 내게 주어진 걸 그냥 계속 해나갈 뿐이에요. ‘이 정도 했으면 고생 끝’ ‘특정 기점에 가면 뭔가 확실히 달라지겠지’ 이런 게 전혀 없어요. 배우가 특별한 직업도 아니고요.
이전에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을 인터뷰하며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매일 주어진 일을 했을 뿐, 목표에 맞춰 움직인 적 없다고요.
저도 목표를 잘 안 세워요. 하루의 목표도 없고, 1년의 목표도 없어요. 달성하려 애써도 현실은 다르잖아요. “언젠가 칸영화제에 꼭 갈 거야”가 아니었기에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욕심이 없다고 봐야 할까요?
일 욕심이 없다가 아니라, 목표가 있으면 사람이 다급해지고 그것만 따라갈 수 있잖아요. 작품 선택이나 일할 때 내게 주어지는 이득이 뭘까 따지기도 하고요.
인터뷰마다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보여요.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맞아요. 다만 성과라고 하긴 웃기지만, 내가 얻은 성과를 과소평가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전엔 주변에서 축하해주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한 게 없는데 운이 좋았다’고 여겼어요. 누가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고,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나한테 칭찬을 좀 해주려고요.
거울 보면서 “주영아, 참 잘했다”면서?
절대 그런 적은 없고요(웃음). 저는 거울을 잘 안 봐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는 거 같아서요. 드라마나 영화도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아요.
지망생들이 거울 보면서 연습하고 그러던데요.
정답은 없죠. 다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내 몸으로 하는 거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렇기에 내 모습을 내가 계속 관찰하면 갇혀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지금 입은 아노락에 트레이닝 팬츠가 평소에도 주된 의상일 거 같아요.
20대 초·중반은 한창 치장에 관심 많고, 스타일이 정립되기 전이라 이것저것 입어봤어요. 요즘은 정말 트레이닝복만 걸쳐요. 이 차림이 편하기도 하지만 가장 나답기도 해요.
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가 시간이 아까워서 같은 옷만 입는데, 그와 비슷할까요? 치장에 들이는 에너지를 좋아하는 다른 일에 쏟는 거죠.
정말 그래요. 샤워부터 외출까지 20분이 안 걸려요. 머리도 감은 채로 만지지 않고 나가요. 물론 옷과 꾸미는 걸 좋아한다면 당연히 시간을 투자해야죠. 저는 그 과정을 압축하고 싶은 거고요.
이주영 하면 짧은 머리가 떠올라요. 그 길이를 고수하나요?
최근 1~2년 정도는 변화를 꾀해볼까, 길러볼까 싶었지만 계속 머리 자르는 역할이 들어왔어요. 배우는 역할에 따라 머리가 바뀌니까요. 한 번도 ‘나 짧은 머리 할 거예요!’ 한 적 없어요.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를 위해 보육 시설을 취재하면서 ‘내가 태어나길 잘했을까’란 의문과 불안을 안고 어른이 된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죠. 영화에서도 실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대사를 넣었고요. 본인도 생에 불만과 의문을 가진 시기가 있었나요?
지금도 그래요. 제 직업은 계속 내 것을 끌어내고, 나에게 질문하고 나를 고민해야 하죠. 남들이 말하는 슬럼프가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처음 슬럼프를 마주할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이걸 계속 해야 하나, 할 수 있을까’ 싶었죠. 이제는 슬럼프가 오면 ‘엄살 부리지 말자, 지나갈 테니까 견디자’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꽁꽁 숨기며 혼자 견뎠는데 주변에 털어놓으니 도움을 받아요. 방법 하나를 찾은 거죠.
책으로도 위로를 얻을 듯합니다. 고등학교 때 책을 많이 읽어서 ‘도서관 대출 가능 권수’를 늘려주는 상도 받았다죠.
일주일에 5권인데 15권인가로 늘려주셨죠. 학창 시절엔 문학 작품을 즐겨 읽었고 지금은 가리지 않아요. 워낙 여러 매체의 콘텐츠가 넘쳐나서 의무감으로라도 책을 펼쳐요. 근데 이젠 시집을 못 읽겠어요. 로봇이 된 건가 싶어서 슬퍼져요.
<브로커> 관련 스케줄이 잦아들면 뭘 할 건가요?
축구 해야죠! 세 개의 축구 클럽에 가입했는데, 한 달 동안 못해서 얼른 공 차고 싶어요.
여러 인간관계에 얽매인 현대인으로서 단체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이 신기했어요.
처음엔 취미 영역까지 사회생활을 하게 될까 봐 망설였어요. 친구의 꾸준한 제안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그 매력에 푹 빠졌어요. 운동하는 2시간 동안 사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아요. 공만 차는데도 전우애와 팀워크를 느껴요. 축구 단톡방이 4~5개 정도 되지만 부담 없고 즐거워요. 사회에서 운동으로 모인 사람들의 관계는 독특하면서도 특별해요.
하반기는 축구도 하고, 또 어떻게 보낼 건가요?
근래 2~3년 동안 일하는 즐거움을 알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재밌게 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죠. 이전에는 혼자 책임감을 떠안았거든요. 지금은 주변 사람들도 많이 편해졌고, 작품을 하더라도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협업이라 여기면서 즐기려고 하죠. 그래서 작품을 최대한 많이 하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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