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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08.26

by 민용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삶은 자기 선택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최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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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시대가 지나도, 그 어떤 사랑에 관한 영화가 나온다 해도,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이 대사만큼 가슴을 치는 대사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변한다. 변하기 마련이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믿음을 유지하며 관계를 지속하는 오래된 연인도 실상 처음과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늘 이별로 종착해야 할 변화일 리만은 없는 것이다.

    열렬히 사랑하던 마음이 버튼 누르듯 탁 꺼지는 이도 있겠지만 냉침을 해도 제법 그럴듯한 향이 나는 차처럼 그윽하게 지속되는 애정을 유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늘 서로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은 쌍방이다. 하지만 이별은 일방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돌아서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이별은 선언하는 쪽도, 통보받는 쪽도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시간이자 순간일 것이다.

    지난 2021년에 열린 제74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여우주연상 수상작이 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우연한 만남과 필연한 헤어짐을 반복하며 사랑을 전전하는 여자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에 관한 영화다. 최고의 성적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의대에 진학했지만 목수가 된 기분만 느끼며 회의감에 빠져든 율리에는 육체보다 정신에 관심을 많다는 확신을 갖고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꿨다가 휴대폰 사진을 뒤져보던 중 스스로 시각에 예민한 기질이 있다고 판단하며 갑작스럽게 사진작가가 되길 선언한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 카메라와 렌즈를 사고 서점에서 임시로 일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속도보다 사랑에 빠져드는 속도가 더 빠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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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12개 챕터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영상으로 쓴 연애 소설 혹은 연애 에세이 같은 영화다. 12개 챕터는 이야기 전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연속된 흐름을 나열하는 구성 단위로 지정된 것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챕터가 제각기 독립된 단편 서사로서 완결성을 지닌다.

    12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의 개별 악장을 듣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탐독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미투 시대의 오럴 섹스’처럼 동시대 화두를 건드리는, 도전적이면서도 유의미한 시선을 견지한 챕터도 등장한다. 단순히 사랑하고 헤어지는 연애담으로 사유화된 이야기로 국한되는 것 이상으로, 동시대에 관한 시선이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반영된 관점을 병풍 삼아 여성성과 남성성을 탐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물론 이것은 한 여자가 어떤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다. 압축해보자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율리에가 두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그리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 호감을 느끼게 된 유명 그래픽 노블 작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과 보낸 하룻밤은 일시적 충동이 아닌 감정을 일깨우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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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며 달콤한 매일을 보내지만 곧 시련이 닥쳐온다. 아이를 낳길 원하는 악셀과 곧잘 반목하고, 작가로서 삶에 집중하는 악셀의 시간이 율리에는 권태롭기 짝이 없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간 파티장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와 강력한 교감을 느끼게 된다.

    율리에는 언제나 망설이는 법이 없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자신의 의지로 맺고 끊는다. 물론 마냥 충동적인 것도, 그저 매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충실하게 선택할 뿐이다.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진 행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번 기꺼이 사로잡을 따름이다. 그 모든 시작은 늘 성공적이고, 로맨틱하다. 하지만 시간은 늘 야박하다. 감정은 언제나 제 온도를 지키지 못하고, 마음은 늘 머물지 않는다.

    사랑을 속삭이던 입에 가시가 돋친다. 미소가 만개하던 표정은 심심찮게 굳고, 달콤하던 대화는 예전 같지 않게 격양된다. 그렇게 사랑이 변해가지만 율리에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애인이 바뀌고, 동거인이 변해도 서점에서 일하는 삶은 여전하다. 임시라고 생각하던 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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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영문 제목은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인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세상 최악의 인간’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이 제목이 가리키는 최악의 인간이란 아무래도 주인공인 율리에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이는데 그것이 비단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그 관계를 전전하는 율리에의 삶을 저격하는 의미로 활용된 것 같진 않다. 짐작하자면 매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 그녀를 최악의 인간으로 만들고 만다는 일종의 비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시작점에서 느낀 설렘이 휘발되는 순간은 매번 찾아온다. 웃음소리보다 언성이 높아지는 시기가 도래한다. 결국 사랑하지 않으면 최악의 인간이 될 필요가 없을 텐데 매번 사랑함으로써 율리에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

    “세상 최악의 인간? 혹시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영화를 만드나요?” 영화를 만들기 전 제목을 미리 본 누군가가 던진 질문을 듣고 요아킴 트리에는 웃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이건 노르웨이 사람들이 곧잘 쓰는 자기 비하 표현을 영어로 번역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사랑으로 인한 불행과 개인적으로 느끼는 패배감을 다룰 것이다. 모두 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지만 사랑엔 끝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유감이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다.”

    그러니까 이건 비단 율리에의 사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사랑을 하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이별한다. 나이가 든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경험하고 체감할 뿐이다. 그 순간마다 거듭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기분을 느낀다. 자기 비하라는 감정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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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고, 숭배한다. 자신의 존재와 애정, 아이를 갖는 문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걸 느낀다.” 요아킴 트리에의 말처럼 최악의 인간이 된다는 건 역설적이지만 그만한 자유를 선택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사랑에 빠져드는 율리에는 언제나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 만남도, 헤어짐도, 그렇게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선택하는 법이다.

    물론 삶은 만만치 않다. 스스로 확신하던 재능의 시간은 그 모든 최악의 순간을 야기한 감정을 이전의 시간으로 밀어낸 뒤 비로소 현재진행형으로 복원된다. 비로소 결별한 뒤, 사진작가의 삶은 시작된다. 자기 감정에 솔직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답답하던 율리에는 비로소 자신이 희망하던 어딘가로 떠나기 시작한다.

    <라우더 댄 밤즈>(2016)와 <델마>(2018)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노르웨이 출신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최근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의 초기작 <리프라이즈>(2006)와 <오슬로, 8월 31일>(2011)에 이어 오슬로에서 살아가는 어느 청년의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 연애사를 그린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리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레나테 레인스베를 위해 만든 영화였다는 점에서 좀 더 특별한 이야기다.

    일찍이 <오슬로, 8월 31일>에 출연해 한 줄 남짓한 대사를 하는 단역을 맡았을 뿐이지만 그녀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 요아킴 트리에는 배우로서 좀처럼 큰 기회를 얻지 못하는 그녀를 주연으로 염두에 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병헌이 레나테 레인스베에게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전달하는 모습. Getty Images

    <라우더 댄 밤즈>와 <델마>의 각본을 함께 쓴 공동 각본가 에스킬 보그트와 또 한 번 새로운 이야기를 쓴 요아킴 트리에는 각본 초안을 레나테 레인스베에게 보냈다. 이에 피드백을 보낸 레나테 레인스베는 결국 주연을 맡았고, 지난 2021년에 열린 제74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자벨 위페르는 레나테 레인스베의 연기를 보고 이와 같이 말했다. “그녀의 연기에는 뭔가 특별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무언가를 느껴집니다.” 확실한 건 배우로서 레나테 레인스베의 입지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요아킴 트리에의 캐스팅 제안을 받기 전 그녀는 배우 일을 그만둘 계획이었고, 실제로 목수로 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최악의 인간’이 됨으로써 배우로서 온전히 새로운 챕터를 열게 됐다.

    “대부분의 일은 인생에서 대체로 무의미하다. 사랑, 직업 혹은 아이나 결혼처럼 큰 의미를 둘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나게 되고, 그 모든 걸 잃을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런 걸 느끼고 경험해도 된다는 걸 배웠다.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스스로가 먼저 세상 최악의 인간이 된다면 그것으로 괜찮다.” 레나테 레인스베의 말처럼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전히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란 타인에게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 사이의 모순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타인의 마음에 상흔을 남기는 선택이라 해도 적어도 비겁한 삶은 아닐 것이다. 그 모든 선택이 늘 현명한 건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기 삶을 살 것이다. 최악이 될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드는 것처럼, 어차피 살아가야 할 삶이라면.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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