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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린’, 어떤 영화는 그렇게 삶을 담아낸다

2022.12.20

by 민용준

    ‘가가린’, 어떤 영화는 그렇게 삶을 담아낸다

    <가가린>은 창작의 무중력과 현실의 중력 사이 어딘가를 유영하는, 관점과 시선과 상상과 창의의 영화다.

    “가가린 알아?”라는 질문에 소년이 대답한다. “최초의 우주인요.” 흑백 영상 너머로 보이는 인파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구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다. 유리 가가린은 프랑스 파리 외곽 이브리쉬르센 지역에 조성된, 그의 이름을 빌린 400여 호 규모의 ‘가가린 주택단지(Cité Gagarine)’ 개관식에 참석했다.

    가가린에 입주한 시민들은 그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1963년 당시만 해도 프랑스 공산당은 나름 위세 있는 정당이었고, 가가린은 공산당원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마련된 터전이었다. 구소련의 우주 영웅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빌린 대규모 주택단지가 프랑스 파리의 외곽에 조성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2015년,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은 때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보르도 대학에서 정치학 수업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은 도시 재생과 공공 주택을 비롯한 도시 계획을 전공했고, 서로의 관심사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러다 2015년 건축가 친구를 통해 가가린 주택단지에 관한 다큐멘터리 연출 의뢰를 받고 현장을 찾았다.

    건축적인 미학이 느껴지는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에 깃든 독특한 역사와 그 모든 것이 몇 년 뒤 허물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철거될 예정이라고 했으나 여전히 주민으로 가득 찬 주택단지를 보며 다큐멘터리 제작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이름 때문인지 거대한 주택단지가 우주선처럼 느껴졌다. 그 느낌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써서 단편영화 공모전에 출품해 지원금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15분 남짓한 러닝타임의 단편영화 <가가린>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2019년,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은 다시 가가린 주택단지를 찾았다. <가가린>을 포함해 세 편의 단편영화를 공동으로 연출한 후였다. 그들에게는 첫 장편영화가 필요했고, 감독으로서 그들의 첫 경력을 쌓아 올린 계기가 된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2020년 철거가 예정된 주택단지를 카메라에 담아낼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가가린 주택단지는 15분 남짓한 이야기로 끝낼 그릇이 아니었다. 더 너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었고, 그 그릇은 조만간 없어질 예정이었기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촬영을 결정할 당시 이미 철거가 결정되었고, 본격적으로 철거가 이뤄지기 전에 촬영을 끝내야만 했다. 2015년과 달리 2019년의 주택단지는 대부분 비어 있었고, 일반인의 접근도 불가능했지만 촬영을 허가받고 가가린 주택단지에 살던 주민들의 협조를 구했다. 그렇게 <가가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공간을 기록하고 기억을 보존하는 영화로 완성됐다.

    프랑스 파리 외곽에 위치한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살아가는 유리(알세니 바틸리)는 우주를 꿈꾸는 소년이다. 그의 방에는 우주와 관련된 사진이 붙어 있고, 천장에 매달린 공을 비롯한 작은 구체가 은하계 행성처럼 공전궤도 간격을 유지하며 각기 돌아간다. 혼자 사는 것인지 어른이 보이지 않는 집 안에 홀로 자리한 소년은 천체 망원경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소년의 관심사는 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년은 낡은 주택단지를 부모처럼 돌본다.

    건물 곳곳을 돌며 전구가 나간 등을 체크하고 보수가 필요한 곳을 살핀다. 심지어 고장 난 엘리베이터 수리에도 직접 나서고 칠이 벗어진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등 자비를 털어 지극정성으로 건물을 돌본다. 곧 건물의 노후 상태를 심사하고 철거를 검토할 공무원이 방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년에게 가가린은 집 이상의 존재다. 삶의 전부다. 절박하다. 하지만 세상은 유리의 절박함에 무심하다. 가가린은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유리는 가가린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 않는다. 할 생각이 없다.

    <가가린>은 역사적인 의미조차 낡아버린 공동주택단지에 홀로 남게 된 소년의 기구한 처지에 주목하지만, 그 처지를 마냥 처절하게 몰아갈 의사가 없다는 듯 공상적인 기지를 발휘해 나름의 낭만을 부여한다. 모두가 떠나간 공동주택에 홀로 남아 숨어 들어가는 유리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듯 단독적인 삶을 이어갈 아지트를 마련한다. 우주선의 기내 풍경과 시스템을 모방하듯 자급자족이 가능한 채소를 재배하고 산소가 순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믿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모두가 떠나간 건물의 벽을 부수어 새로운 통로를 만들며 텅 빈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무너질 운명이다.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는 소년의 일상은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 우주선처럼 꾸민 방에 있을 뿐, 우주에 나아간 것이 아니듯 현실의 중력은 결코 그 힘을 잃는 법이 없다.

    결국 희망적일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 자명함에도 홀로 남겨진 소년의 삶을 비관적인 관점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가린>은 명확하고 남다른 영화다. 게다가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납작한 위로로 타협하는 것도 아니다. 유리라는 소년의 삶은 누군가의 암울한 현실을 대변하는 직설 같기도 하지만, 한때 명성을 누렸던 오래된 건물에 드리운 운명 자체로부터 길어 올린 은유를 대행하는 상징적 존재 같기도 하다. 공동의 사상을 단단하게 견지할 영토라며 열광했던 주인들의 환희가 식어버린 주택단지의 마지막 순간에 자리한 건 하루하루를 건사해야 하는, 가난으로 점철된 이들의 삶이었다.

    가난한 이민자를 비롯해 다양한 출신의 주민들이 가가린 주택단지로 모여들었고, 그렇게 사상적 공동체의 터전이 되리라 믿었던 공산당원의 공간은 하층민의 삶을 수용하는 너른 터전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가가린>은 공동의 사상을 기반에 둔 신념의 영역에서 실질적인 삶의 공간이 된 주택단지의 마지막 풍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유산의 가치를 획득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비록 허구의 산물일지라도 현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법의 매체라는 발상과 창의가 흥미롭다.

    이제는 허물어져 과거형으로 언급하게 될 공간의 형상을 영화적으로 보존했다는 사회적 의미를 넘어 상징적인 공간에서 얻어낸 창작적 영감이 고스란히 담긴 서사와 묘사의 재능을 증명한다는 것 역시 <가가린>이라는 영화가 지닌 온전한 성취일 것이다. 구소련의 우주 영웅 이름을 빌려 지은 주택단지가 냉전 시대 자유 진영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파리에 들어섰다는 근원적인 사실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되는 인상인데, 이로부터 동시대적 감각을 추출하고 작법을 입혀낸 두 감독의 재능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사라는 상징적 이름을 빌린 건물의 역사를 소년의 꿈으로 치환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소년이 홀로 남기를 선택한 철거 대상 건물을 우주선에 비유하는 재능은 현실적인 문제를 조명하지만, 그것을 웅변의 메시지나 계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작가적 시선이 탁월하다. 그럼으로써 사라질 운명을 앞둔 건물에 일찍이 깃들어 있던 역사적 상징성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안에 자리한 소년이 처한 현실에 보다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사실은 <가가린>이 실제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생생한 연출을 동원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해당 공간에서 삶을 살아온 인물들을 현장으로 이끌어 만들어낸 풍경을 포착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2019년 7월부터 9월 사이,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에 가가린 주택단지를 고스란히 비추며 촬영할 수 있었다는 의미를 넘어 실제로 그곳에 살고 있던 이들이 모두 떠나기 이전에 촬영할 수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과 현재진행형의 풍경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라는 너른 의미를 확보할 기회였다. 기억과 추억을 보존하고 기록한 영화라는 사실은 영화 말미에서 철거 직전의 건물 앞으로 모인 이들의 표정을 통해 더욱 생생해진다.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로 가가린 주택단지에 살았던 이들로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갖은 감정은 연기가 아닌 실제적인 감정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가가린>은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나름의 답변처럼 보인다. 사회학적 관점을 토대로 포착해낸 표정은 수면 아래의 실존을 끌어올린 가상의 풍경으로서 유효하다. 현실과 완전히 밀착하지 않는 가상의 선상에서 확보할 수 있는 진짜 얼굴들의 영화로서 생경하면서도 생생한 체험의 영역에 가닿길 시도하며 나름의 성취를 전한다.

    <가가린>에 등장하는 진짜 우주 비행사는 유리 가가린만이 아니다. 가가린 주택단지에 홀로 남은 유리가 실내를 우주선 내부 환경과 흡사하게 만들고 우주선과 유사한 생활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던 건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엔지니어 자질이 있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보는 영상 너머 여성 우주 비행사가 전하는 지식과 경험 덕분이기도 하다. 유리가 보는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유럽우주국(ESA) 소속으로 프랑스 최초 여성 우주 비행사가 된 클로디 에뉴레인데 그녀는 민간 출신 우주 비행사이기도 하다. 비록 몽상 혹은 망상에 불과하다 해도 유리의 꿈을 간접적으로 실현시켜주는 대상이 되는 프랑스 여성 우주 비행사의 존재감은 유리의 삶을 구원하는 실질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다이아나가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는 듯하다.

    엄마의 부재 속에서 고립을 선택하는 유리의 삶을 돌보는 것이 여성 우주 비행사이며 유일하게 유리의 현재에 관심을 갖는 다이아나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모성으로부터 달아나듯 고독한 몽상에 빠져든 소년의 삶에 길을 열어주는 또 다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도 독립적인 삶 안에서 선택 가능한 관계의 가능성을 부각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감은 <가가린>이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내포한 영화라는 사실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우리 캐릭터들이 항상 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언제나 희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무너지는 세계와 상승하는 것 사이에서 영화의 균형을 찾으려 했고, 보편적인 은유로서 무중력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제레미 트로윌의 말처럼, <가가린>은 끝내 바닥에서 떠오르고, 방관과 무관심의 무중력으로부터 세상과 관계의 중력으로 회복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무중력의 우주에서 유영하듯 떠오른다고 느끼는 유리의 몽상은 세상으로부터 괴리되는 비관적인 현실을 도피하는 망상으로 내려앉기 전에 유리가 보낸 신호를 읽어내는 다이아나 덕분에 다시 세상으로 안전하게 착륙한다. 유리의 시선으로 올려다보이는 가가린이 우주선처럼 낯설게 반짝이며 이륙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유리의 관점이 현실 도피적인 망상이 아닌 낭만적인 몽상처럼 여겨지는 건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내면의 희망으로 파고드는 그 상상이 응원할 만한 재능처럼 보이는 덕분일 것이다.

    낯선 현실과 조우한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가린>이 칸 영화제에 초청되자 두 감독은 영화에 조력해준 가가린 주택단지의 주민을 칸 레드 카펫에 초대할 계획을 세웠다. 팬데믹으로 계획은 무산됐지만 가가린 주택단지 주변에 자리했던 작은 영화관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그렇게 영화가 된 사람들과 함께 <가가린>을 보며 지나간 시간을 기억했다고 한다. 사라지고 무너진 이름은 끝내 영화로 윤회해 세상을 돈다. 어떤 영화는 그렇게 삶을 담아내고 내일을 응원한다. 희망을 가리킨다. 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란 어쩌면 그런 것이기도 할 것이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포토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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