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사람, 하지원

2023.05.12

by 황혜원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사람, 하지원

    더 솔직하게, 직관적으로 소통하고 싶은 사람.
    하지원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전달하는 작업에 매혹돼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고, 20여 년을 몰두했다. 그림도 그 연장선이다. 지난 4월 22일 시작한 첫 번째 개인전도 ‘관계’에 관한 얘기다.

    하지원

    하지원을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11년 전이었고, 두 번째는 10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꽤 오래 보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그 사이 많은 부분이 변했을 거라 추측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그림으로 얘기하게 된 것도 변화였으니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전시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지원이 전시장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제가 설명 좀 해드릴까요?” 그녀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관람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그림보다 배우 하지원을 만난 감격이 먼저 보였다. 천만 관객 영화에 출연했다는 의미의 금배지가 네이버 프로필에 번쩍이는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종전의 일에 관해 물으니 하지원은 “전 관객에게 우리가 찰나의 순간을 맺었다고 말해요. 제 작업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하고요. 그러면 아주 좋아하시죠”라며 웃었다. 매니저에 의해 늘 보호받고 감춰진 삶에서 직접 관계를 맺기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였다. 전시 주제인 관계와도 이어졌다. “사실 배우로 살아온 게 20~30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제게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였어요. 그렇지만 무섭지 않았어요”하고 덧붙였다.

    하지원, Virtual Venus, 2023, Oil on canvas, 162.2×130.3cm

    하지원이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날 때 소속사를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인 기획사를 차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녀는 그 시점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다고 말했다. “시간이 생기고 자유로워졌어요. 그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동하는 차 안, 대기하는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스케줄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이 생긴 덕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전제품을 분해해 다시 조립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학교 다닐 때는 수업 안 듣고(웃음) 그림 그리고, 선생님께 혼나서 지우고 다시 그리고. 그래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다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어요.”

    작업에 몰입하게 된 건 4년 전, 코로나로 영화 작업이 미뤄진 게 결정적이었다. 늘 캐릭터에 몰두하던 그녀는 생각할 주제를 잃어버렸고, 텅 빈 자리에 ‘자아’라는 주제가 들어섰다.

    아트 스페이스 폴라포 제공

    “정말 바쁘게 지내다 보니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늘 연기에 몰두하느라 캐릭터 고민만 하고 살았죠. 그런데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니 제가 왜 배우를 하고 있는지, 연기도 이 정도면서 계속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민도 깊어졌다. 하지원은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털어놨다. 우울증까지는 아니지만 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계속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차근히 올라오면서요. 어릴 적엔 반항아였거든요. 불공평한 것이 있으면 나서서 이야기했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반항’이라는 키워드가 낯설지 않은 건 문득 하지원의 신인 시절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으레 있을 법한 여배우의 탄생은 아니었다. 드라마 <학교 2>에서 푹 내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던 날카롭던 눈빛이나 가수 왁스 대신 ‘오빠’란 노래를 립싱크하던 모습, 당시 선택한 영화까지 떠올려보면 그녀는 정석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아니었다.

    INSTANT : THE BEGINNING OF A RELATIONSHIP

    하지원은 첫 번째 전시 주제를 관계의 시작이라고 지었다. 팸플릿에는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적혀 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인간관계 또한 넓어졌으나, 관계 저변에는 불안이 깔려 있으며 관계의 질은 오히려 저하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얘기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유독 ‘관계’에 관심을 두는 걸까. 그녀는 4년 넘게 자아 찾기를 하며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로 중심이 이동했고, 세상을 향해 가지가 뻗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 관계는 알고 가니까 너무 편하잖아요. 마냥 재미있는 세상이죠. 그런데 배우는 어찌 보면 한정된 관계 속에서 지내게 되거든요. 나를 생각하면서 관계 또한 뒤돌아보게 됐죠. 돈이나 명예, 자신의 권력으로 관계를 맺는 움직임이요. 모든 사람이 소중한 존재로 태어났음에도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맺거나 삶을 대할 때 존재 자체로 대하지 않잖아요. ‘왜 권력으로 타인을 누르려고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죠.”

    쓸데없이 내가 그녀를 세 번 만났음을 강조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11년 전 막내였던 내게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인사한 사람이었다. 10년 전, 썩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원하던 모두와 사진을 찍어주고 멋지게 퇴장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스타가 그녀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주제 선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원, Virtual Venus, 2023, Mixed media on wood panel, 162.2×130.3cm
    하지원, Virtual Venus : Olympus, 2023, Painting marker on wood panel, 162.2×260.6cm

    그림 속 인물에는 얼굴이 없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맺은 디지털 관계의 모습을 표현했다. 디지털 특유의 즉흥성과 가벼움은 화려한 컬러로 표현됐고, 얼굴 없는 인물들은 몸만 아주 끈적하고 복잡하게 붙어 있다.

    이에 대해 하지원은 “엉켜 있는 모습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도 있어요. 지금 우리가 맺고 있는 얼굴 없는 인간관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결국 혼자 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죠. 우리가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시작했듯 혼자 태어난 것 같아도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고, 사회적으로 좀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작업 후반으로 갈수록 더 진하고 끈적해졌고요”라고 말했다.

    이는 관계를 시작하는 형태나 방식은 달라져도 가치는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녀는 디지털 관계가 확장돼도 인간적인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전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이 던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여전히 울렁거려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렇게 하기까지 4년이 걸렸어요. 내가 가진 틀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다짐하기까지요.”

    그림에 도전하고 싶은 그녀를 도운 건 그녀의 오랜 지기이자 홍익대를 졸업하고 영상 제작사를 운영 중인 이솔 감독이었다. 그는 하지원과 함께 전시가 진행 중인 ‘아트 스페이스 폴라포’의 공동 대표이기도 하다. “이솔 대표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생각이 매우 비슷해서 같이 폴라포를 세우게 됐죠. 작업할 때도 자유롭게 도전하면서 저만의 스타일이 나올 수 있게 도움을 줬어요.”

    Polarpo(하지원, 이솔), Interior Only, 2021, Mixed media on canvas, 72.7×60.6cm

    이솔 대표는 공간에 대해 “예술을 접근하는 형태와 방식을 변화시켜 좀 더 사람들이 작품을 쉽고 자유롭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연예인에게 미술은 리스크”라고 말했다. 어떤 형태로 보나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렇기에 자신은 미술 하는 모든 사람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하지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앞서 한 말을 가져오자면 “앞으로 어떤 방황을 또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세상을 탐구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제 시작이니까요”라고 했을 뿐이다. 언젠가 0에 수렴하고, 플러스에 다다를 순간을 꿈꾸는 걸까? 확실한 건 이 관계에서 하지원이 계속 노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원 첫 번째 개인전 <INSTANT : THE BEGINNING OF A RELATIONSHIP>

    장소 : 아트 스페이스 폴라포(@polarpo_official)
    전시 기간: 4. 22(토)~5. 21(일)
    ⠀⠀⠀⠀⠀⠀6. 17(토)~8. 17(목)
    관람 시간: 화~일, 11:00~18:00, 월요일 휴관
    네이버 관람 예약

    포토
    아트 스페이스 폴라포 제공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