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먹고 쇼핑하고 탐미하라,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2023.08.25

먹고 쇼핑하고 탐미하라,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파리, 밀라노, 바르셀로나에서는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미식과 쇼핑으로 충만한 나날로 일상의 탄력을 회복했다.

바르셀로나 라로카 빌리지의 25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아티스트 티비보이의 야외 전시 <스트리트 오브 러브>. 여름, 사랑, 희망, 미래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였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이혼 후 무작정 떠난 이탈리아의 숙소 침대에 누워 자문한다. 스파게티에 송아지 고기를 먹고 레드 와인과 따끈한 빵까지 해치운 후 티라미수로 방점을 찍고 돌아오던 길, 피어오른 만족감에 당황해서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까지 엘리자베스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억할 새 없이 금세 잠들었다. 이번 여름 파리, 밀라노, 바르셀로나를 돌며 나도 그랬다. 이런 게 필요했다. ‘먹고, 보고, 사는’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여행이. 충만함으로 포식한 나머지 까무룩 잠드는 밤이.

센강을 따라 루브르의 전경이 보이고 작은 골목을 따라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마주하자 비로소 파리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테라스를 차지한 손님들은 빠져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건만, 레스토랑 주변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골목마다 이어진다. 해가 지지 않는 파리의 찬란한 여름밤을 이길 도리가 있을까, 아니 이겨야 할까? 보들레르가 말했듯 저무는 태양이 세상을 금빛으로 만드는 이 도시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감각을 깨우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다음 날 파리의 ‘라발레 빌리지(La Vallée Village)’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파리 라발레 빌리지의 라뒤레 매장.
인증 샷 행렬을 만든 시릴 랑셀랭의 작품, ‘밀 미르와르’.

라발레 빌리지는 유럽 전역에 위치한 럭셔리 아웃렛, ‘비스터 컬렉션(The Bicester Collection™)’의 11개 빌리지 중 하나다. 각 도시의 특성에 따라 이름이며 분위기를 달리한 터라 몰랐는데, 런던의 비스터 빌리지(Bicester Village)도 이 ‘비스터 컬렉션’의 식구다. 파리 시내에서 40분, 짙은 초록으로 뒤덮인 한여름의 풍경을 만끽하다 보면 라발레 빌리지에 도착한다. 프로방스 지역의 작은 마을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건물이 특징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부티크 숍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숍 110여 개가 골목마다 이어진다. 디즈니랜드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어서인지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 손님들이 눈에 띄는데,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90%일 만큼 현지인에게 사랑받는 쇼핑 스폿이다. 고도의 에너지를 요하는 게 쇼핑인 만큼 빌리지 내 라뒤레(Ladurée)의 달콤한 마카롱 하나면 다시 지갑을 열 힘이 생긴다. 저렴한 가격에 이직 축하용 넥타이 하나를 건진 뒤 흡족한 마음으로 올데이 다이닝을 제공하는 메뉴 팔레(Menu Palais)에서 점심을 먹었다. 프렌치는 아니지만 익숙한 메뉴가 한국인 입맛을 만족시키고, 새소리가 들리는 테라스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게다가 거리 곳곳에는 리옹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시릴 랑셀랭(Cyril Lancelin)의 작품, ‘밀 미르와르(Mille Miroirs)’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이는 물론 어른까지 작품을 통과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황금빛 구(球) 사이를 오가며 인증 샷 행렬이 이어진다.

파리 시내에서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미디어아트의 시초, ‘라틀리에 데 뤼미에르(L’Atelier des Lumières)’를 찾았다. 1910년대 파리에서 1940년대 뉴욕에 이르기까지 샤갈의 예술사를 통째로 담아낸 전시가 한창이었다. 들어서자 극장을 가득 채우는 클래식 선율에 따라 그림이 파도처럼 흘러들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담한 색채로 흩뿌린 샤갈의 환상적 세계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수놓았다. 나는 온몸으로 매혹당한 뒤 감각의 패배를 선언했다. 지금 파리에서 가장 인기인 일식 파인다이닝, 오가타(Ogata)에서 먹은 저녁도 인상적이었다. 제철 채소를 활용한 아뮤즈 부쉬, 깔끔한 생선회와 촉촉한 비프커틀릿, 구수한 솥 밥까지 미슐랭 1스타다운 세심하고 정갈한 코스였다.

샤갈 전시가 한창인 라틀리에 데 뤼미에르.

파리가 예술적이었다면, 밀라노는 패셔너블하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대성당, 두오모 디 밀라노(Duomo di Milano)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1865년에 문을 연 럭셔리 백화점 리나셴테 밀라노(Rinascente Milano)가 있고, 그 옆으로 패션과 디자인 지역인 브레라 지구(Brera District)가 자리한다. 밀라노에서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장소다. 도착한 날은 대부분의 쇼룸이 문을 닫는 일요일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셋째 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을 만났다. 가판대 위로 손때 묻은 브로치와 과장해서 주먹만 한 크리스털이 박힌 볼드한 액세서리, 브랜드의 빈티지 의류를 구입했다. 시장 부근, 브레라 예술대학이자 브레라 미술관 건물의 앞뜰은 스탕달이 루브르 박물관보다 더 아름답다고 평했을 만큼 무척 운치 있다.

여유가 있다면 프라다 재단의 복합 문화 공간, 폰다치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에 들르길 권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공장 지대를 인수해 밀라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9층 건물을 포함해 3개 동을 새로 지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건축물이 밀라노를 대변하는 것 같다.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존 발데사리, 카르스텐 휠러 등 프라다와 철학을 공유하고 재단 활동에 참여한 작가의 상시전을 볼 수 있다. 건물 내 카페인 바 루체(Bar Luce)는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 직접 디자인했다. 다양한 색상의 포마이카 가구가 그의 영화를 떠올린다. 레스토랑 토레(Torre)는 전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모든 메뉴가 황홀했다. 딜 향기가 그윽한 대구 요리, 붉은 새우를 올린 사프란 크림 리조토, 갈릭 페스토로 만든 칼라마라타 파스타까지 제철 재료로 만든 독창적인 요리를 선보인다.

스탕달이 루브르 박물관보다 아름답다고 평한 브레라 예술대학이자 브레라 미술관 건물 전경.
폰다치오네 프라다에 위치한 레스토랑 토레.

밀라노에서 쇼핑이 빠질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비스타 컬렉션의 ‘피덴자 빌리지(Fidenza Village)’를 찾았다. 도심을 벗어나 주황빛 집의 행렬을 차로 1시간 정도 따라가면 피덴자 빌리지가 나온다.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고향에 위치해서인지 아웃렛은 활기차고 예술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방문 당시 제3회 피덴자 빌리지 거리 예술 축제(StreetArt Festival)가 열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거리 예술계의 유명 인사 루카말레온테(Lucamaleonte)가 주최하는 축제로 신인 아티스트 3인이 함께 빌리지의 벽을 꾸몄다. 벽화는 브랜드의 특징을 담았으며, 작가의 창작 스토리도 오디오 가이드로 들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브랜드를 비롯해 120개 패션 & 라이프 숍도 쉼 없이 누볐다.

컬러풀해 놀이동산이 연상되는 피덴자 빌리지 입구.
밀라노 피덴자 빌리지 중앙에 있는 아티스트 피디아 팔라스케티(Fidia Falaschetti)의 작품 ‘에고지(Egoji)’.

가끔 하나의 인상이 여행을 지배할 때가 있다. 마지막 종착지인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서 바라본 새파란 해안선이 그랬다. 지중해를 맞댄 스페인 최대 항구도시답게 온화한 날씨, 호방한 사람들의 태도를 알기에 그 옛날 모험심 넘치던 뱃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찰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한때 세계를 누비던 이들에게서 바다를 향한 갈망보다 호안 미로와 안토니 가우디를 품에 안은 자부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공항에서 첫 번째 행선지로 택한 호안 미로 미술관(Fundació Joan Miró)에서 그것을 목도했다. 세계대전을 두 차례 겪으며 프랑스와 미국 등지를 떠돌던 미로가 마침내 고향인 바르셀로나 꼭대기 몬주이크 언덕에 터를 잡고 직접 기획한 미술관이었다. 아이가 자유롭게 그린 듯한 호안의 그림은 사실 한 획조차 철저한 계획 아래 있었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포진한 가우디의 유연한 건축물 또한 철저한 계획에서 탄생하지 않았나. 자유와 평안에 대한 갈망을 하늘과 새에 투영한 후 점, 선, 면이라는 단순하고 강력한 도구를 통해 이야기한 호안 미로. 그의 숱한 아픈 밤이 나에게도 스쳐갔다.

가우디 4대 건축 중 하나인 카사 바트요(Casa Batlló)에서 본 외부 풍경.
바르셀로나 라로카 빌리지의 25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아티스트 티비보이의 야외 전시 <스트리트 오브 러브>. 여름, 사랑, 희망, 미래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 여행 일정은 역시 쇼핑이었다. 라발레와 피덴자에서 내려놓은 물건들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부터 ‘라로카 빌리지(La Roca Village)’로 향했다. 150개 이상의 브랜드를 둘러보며, 직원의 “마지막 피스예요”라는 말마다 내적 환호를 지르며 손에 담았다. 라로카 빌리지에는 바르셀로나의 뱅크시로 불리는 티비보이(TVBOY)가 빌리지 오픈 25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야외 전시 <스트리트 오브 러브(Streets of Love)>도 열리고 있었다. 스프레이 캔을 형상화한 조형물, 자유와 존중, 다양성, 지속 가능성의 메시지를 표현한 그래피티가 쇼핑 중간중간 눈을 환기시켰다.

장마를 건너뛰고 서울로 돌아와 지난 여행을 떠올려보곤 한다. 평생 하늘과 별과 달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던 미로처럼 나의 면에도 점과 선이 찍히고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오로지 먹고 마시고 보고 쇼핑하던 유희의 나날 이후 삶의 즐거움을 더욱 탐구하는 중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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