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길 위에서 만난 예술가 8인

2023.09.08

by 류가영

  • 윤혜정

길 위에서 만난 예술가 8인

여성에서 출발해, 예술을 경유하고, 결국 세상에 당도한 여성 예술가 8인을 호명한다. 2023년 현재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삶과 예술의 지형도로 완성한 나의 사적인 미술 출장기.

동시대의 문제작들을 원 없이 만날 수 있다는 미술 출장은 삼시 세끼 코스 요리가 나오는 관광청 출장과 비슷하다. 대단히 호사스럽지만, 매 끼니 으리으리한 고급 요리를 지치지 않고 섭렵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도, 즐겁기만 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의 엄중한 사명까지 띤 미술 출장이 그러나 기대 혹은 실제보다 더 좋게 기억된다면, 그건 길 위에서 만난 예술가들 덕분이다. 생소한 작가든 익숙한 작가든, 내게는 모두 언제까지나 ‘미지의 예술가’로 각인된다. 이들은 환대의 정신을 발휘해 나의 감각과 사유의 장을 열어젖힌다. 호기심을 갖게 하고, 관찰하도록 이끌며, 질문하도록 하고, 감탄하도록 하며, 급기야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혹자가 썼듯 “세상의 모습에 놀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잊을 줄 아는 것”이며 “자신에게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는 여행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미술 출장의 진정한 묘미는 단순히 유명 작품을 본다는 게 아니라 이들을 일련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시간에 생생히 봉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수년 전 나는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의 그 유명한 논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1971)가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들은 완전한 평등을 얻지 못했다고 쓰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몇몇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그 사이에 상황이 변했거나 혹은 오해했음을 깨끗이 인정해야 했다. 일상으로 복귀한 지금에도 내가 간절히 쓰고 싶은 대상은 우연히 만나 손 내밀어준 여성 예술가들이다. 물론 여러 번 강산이 바뀌는 동안 여성 작가들의 행보가 진화한 것도 큰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태생을 초월한 이들의 언어가 나의 그것과 같은 온도와 농도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공감,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존중, 자기 정체성의 깊은 성찰, 불의와 폭력에 대한 고요한 저항, 미술의 역할을 향한 탐구… 이들은 여성에서 출발해 예술을 경유하고 결국 세상의 이야기에 당도한다. 내가 이 존재들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동안, 성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삶의 지형도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나의 사적인 미술 출장기’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여성’을 존중하고, 또 지워나가는 여성 예술가들의 용기에 대한 기록이다.

HAEGUE YANG 진보하는 공동체

Installation View of Haegue Yang: Several Reenactments, S.M.A.K, Ghent, Belgium, 2023, Photo: Dirk Pauwels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의 소도시 겐트의 미술관 S.M.A.K.(Stedelijk Museum voor Actuele Kunst)가 이번 출장의 첫 행선지인 건 당연했다. 여기서는 현대미술가 양혜규의 벨기에 첫 미술관 개인전 <양혜규: 몇몇 재연(Haegue Yang: Several Reenactments)>이 열리고 있는데,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의 전시가 열린 건 1999년 개관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양혜규의 전매특허, 즉 고대와 현대, 전통과 아방가르드, 역사와 경험을 관통하는 대담한 조형 언어와 이분법을 초월한 방대한 사유는 전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워낙 다양한 지점을 참조하는 탓에 난해하게 인식되기도 한다. 더구나 전시를 통해서는 미술관의 건축적 대칭 구조에 주목해 ‘반복’의 시각적 효과를 조명한다고 했다. 나는 실제 공간에 들어가 보고서야 작가의 깊은 저의, 즉 이중화, 반사, 분할의 개념을 미술적으로 탐색하고 작품 간의 상호 맥락성을 생성하고자 했음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메인 전시장의 양옆으로 작은 캐비닛 갤러리가 위치해 유난히 기다란 이 공간 특성을 온전히 살려 완벽한 데칼코마니 형식의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메인 홀에서는 17개 점으로 구성된 조각군 ‘전사 신자 연인–소리 나는 버전’(2023)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나를 마중했다. 양혜규의 특징적 재료인 방울 조각들은 여기에 인조 식물, 가발, 태양광 조명 등 공예와 산업의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각자의 이름과 정체성을 시사한다. 높은 층고와 대비를 이루는 소담한 조각들은 비순응적인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전사, 절대적인 믿음을 안고 삶을 사는 신자, 상대에게 자신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연인 등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일구어내는 이들에 대한 경의인 셈이다.

어느 순간에는 이슬람의 기도 시간에 맞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흘러나오기도 하는데, 만약 이 선율을 들었다면 당신은 운이 좋다. 크고 아름다운 전면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아래 선 조각들이 전설의 발레곡으로 인해 더욱 공감각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겐트에서, 이슬람식 시간 흐름에 맞춰, 러시아 아방가르드 음악가가 100년 전 슬라브 토속 의식에 영감을 받아 만든 음악을 배경으로, 방울과 감나무로 치장한 조각들이 선보이는 상상의 군무. 모든 요소가 황당할 정도로 대담하게 뒤섞인 이 혼종의 상태가 바로 양혜규 작업의 백미이자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재연’의 순간이다.

사실 양혜규는 이번 전시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를 직조해 만든 일종의 환경임을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었다. 공간 초입에 이정표처럼 걸린 실크스크린 작업 ‘봄의 원천은 움직임을 추적하는 데 있다’(2021)는 1800년대 말 예술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월터 크레인이 영국 사우스 런던 갤러리에 제작한 마룻바닥을 참조한 작업이다. “예술의 원천은 민중의 삶 속에 있다”는 문구를, 양혜규는 작업 당시 미얀마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상징으로 미얀마어로 번역해 작품에 활용했다. 그때 크레인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바친 이 문구가 수백 년 후 한국 미술가에 의해 크고 작은 폭압에 항거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메시지로 진화한 셈이다. 불투명한 서로를 부정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혜규식 공존법, 시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정의가 ‘그들만의 리그’인 미술계를 뚫고 나와 일상에 가닿는다.

말없이 말하고, 제자리에서 생동하는 조각 사이를 걸으며, 나는 이토록 다른 서로들이 그저 자유롭게 존재하는 무위의 연대를 잠깐이나마 꿈꾸었다. 내가 일상에서 숱하게 행하는 ‘페어링’과 ‘미러링’의 형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방울 조각들의 무리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는 현대인을 위한 토템으로, 전시장 양쪽에 대칭으로 마주 보며 걸린 ‘기쁠 희(喜)’ 자의 한지 작업 ‘황홀망’은 이곳에 온 이들의 안녕을 비는 부적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작가의 영상 제목처럼) ‘이름 없는 이웃’이 될 수 있다. 이제껏 양혜규의 전시가 근사하거나 야심 찰지언정 따듯하다고 생각한 적 없던 내가 작가의 온화한 손길을 느낀 건, 출장 중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GRACE NDIRITU 미래적 미술관

대칭과 반복을 전시의 주된 방식으로 삼은 양혜규의 개인전은 흥미롭게도 미술관의 또 다른 전시, 젊은 여성 작가 그레이스 은디리투의 개인전과 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었다. 케냐 출신인 은디리투는 공동체, 생태, 흑인, 페미니즘 및 토착민과 관련된 현대적 이슈를 작업한다. 이를 위해 퍼포먼스, 영화, 사회운동, 텍스타일 작업 등을 두루 활용하는데, 특히 명상이 작가의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이번에도 2022년 필름 런던 자먼상을 수상한 ‘블랙 뷰티’, 어느 패션모델과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남미의 기후변화, 팬데믹, 식민주의 등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의 토크쇼가 전시의 문을 열지만, 은디리투의 작업은 뉴스에서 쏟아지는 이슈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날의 미술관이 외부 세계, 정확하게는 서구 밖 세상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12년부터 이른바 ‘미술관 치유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세미 회고전 형식인 이번 전시의 제목도 그래서 ‘힐링 더 뮤지엄(Healing the Museum)’이다.

“신발을 벗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으세요. 눈을 감고 잠깐 멈춰보세요. 마음과 호흡을 연결하세요, 들이쉬고 내쉬고… 이제 천천히 ‘사원(The Temple)’에 다가가보세요.” 전시장 앞에 쓰인 문구를 보고 신발을 벗었다. 미술관에서 백 체어에 드러누운 적은 있지만, 맨발로 걷기는 처음이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카펫의 감촉은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도록 한다. 공간 가운데에는 작가가 ‘사원’이라 일컬은 호두나무 구조물이 자리하는데 그녀의 할머니가 살던 오두막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기도하듯 무릎을 꿇은 카르스텐 휠러의 코끼리 조각처럼, 작가는 이 사원 안에서 명상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사원 안팎에는 작가의 스승이었던 마를린 뒤마를 비롯해 키스 해링, 게르하르트 리히터, 요셉 보이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 미술관의 유명 소장품과 작가 자신의 작품이, 라벨도 위계도 없이 걸려 있다. “목욕하는 것처럼, 경건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던 작가의 바람대로 값비싸든 그렇지 않든 미술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누구든 자신만의 감상과 해석으로 예술과 소통할 수 있는 신성한 청정 지대다.

Grace Ndiritu, The Temple, 2021, Installation View of Healing the Museum, S.M.A.K, Ghent, Belgium, 2023, Photo: Dirk Pauwels

은디리투에게 ‘치유’란 온건한 제도 비판이자 부드러운 저항의 제스처다. 비서구적 시선으로 미술의 공공연한 관행에 균열을 내는 그녀의 작업은 그래서 급진적이라 평가받는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위로받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비약적으로 많아졌지만, 여전히 미술계 일각에서는 치유나 위안 같은 키워드를 아마추어적이라 치부한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S.M.A.K.만 보더라도 ‘제3세계’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개최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과 대안을 찾고자 하는 방향성을 전면에 드러낸다. 지난해 국제박물관(미술관)협의회가 미술관을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비영리적이고 영구적인 기관’으로 재정의하고, 초점을 사물(작품)에서 사람(관람객, 예술가)과 공동체로 전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은디리투가 이론 대신 감각을 강조하는 건 매우 미래적인 태도다. 현대미술을 삶에서 분리하지 않으려는 시도이자 본질을 향한 질문이다. 작금의 세상에서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미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기차 시간에 맞춰 허둥지둥 떠나는 내게는 정답보다도 ‘힐링 더 뮤지엄’이라 쓰인 에코백을 구입하는 게 급선무였지만 말이다.

JENNY HOLZER 시대적 명상록

Exhibition View: Jenny Holzer,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2023, ©2023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Achim Kukulies

브뤼셀에서 기차로 3시간을 달려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까지 간 건 순전히 제니 홀저의 개인전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작가가 독일에서 10여 년 만에 선보이는 미술관 전시였지만, 사실 지난 40여 년간 언어를 주재료로 해온 그녀의 작품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역사 및 정치적 불의를 고찰하고 당대 현안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다양한 원전의 문장은 포스터, LED 전광판, 티셔츠, 모자, 컵, 트럭, 대리석 벤치, 건물 벽면, 홈페이지, 그리고 의외의 숱한 장소를 통해 전달된다. 누구든 발언할 수 있는 SNS가 지금처럼 일반화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홀저그램(Holzergram)’을 크게 유행시킨 제니 홀저는 우리의 일상, 사적인 영역을 공공의 장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아는 것이 다르듯,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의 위력을 실감했다. LED의 번쩍이는 불빛은 심장박동에 맞춰 날카롭게 요동치며 메시지를 발산했고, 대리석 벤치에 새겨진 문제적 텍스트가 손끝에서 전율했다. 그렇게 그녀의 문장은 종종 생명체처럼 느껴지곤 한다.

유난히 밝고 환한 ‘벨 에타주’ 전시장에서는 역설적으로 현 세계의 가장 어두운 실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국의 비밀 정부 문서에 금박을 입힌 ‘검열 회화’(2005~)는 언뜻 순수한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라크 군사작전, 구금과 고문, 일반인을 겨냥한 범죄 등을 담고 있다. 숨은 메시지는 그 앞에 놓인, 충격적인 뼈 무덤 형상의 설치작 ‘쾌락 살인’(1993~1995) 시리즈로 더욱 강렬해진다. 실제 (합법적으로 수집한) 인간의 뼈에 메시지를 새긴 은색 밴드를 두른 이 작품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여성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폭력을 고발한다. 세월이 흘러도 비극은 지속되고, 이는 무엇도 홀저의 외침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작가는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응답으로 LED 신작 ‘우크라이나’(2023)를 선보였다. 창 옆에 걸린 자그마한 LED 기계는 러시아의 권력에 의한 강간, 고문, 살인, 무차별한 공격에 대한 증언을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이들의 절규가 한갓진 창밖 풍경과 대비되어 무참함을 더한다.

Truisms, 2020, LED Sign with Blue, Green & Red Diodes, 150.72×5×5in. / 382.8×12.7×12.7cm, Text: Truisms, 1977~1979, Installation: Jenny Holzer,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2023, ©2020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Collin LaFleche
Ukraine, 2023, LED with Blue, Green & Red Diodes, 61×4.88×2.05in. / 154.9×12.4×5.2cm, Text: Report of the Independent 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on Ukraine, United Nations Office of 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October 18, 2022, Installation: Jenny Holzer,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2023, ©2023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Collin LaFleche

이번 전시에 대한 애초의 기대감은 포스터로 증폭되었다. 작가의 대표작 ‘경구들’(1977~1979) 문구 중 하나인 ‘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권력의 남용은 놀랍지도 않다)’가 쓰인 티셔츠 차림의 여자 사진, 바로 홀저와 1980년대부터 협업해온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이디 핑크의 소싯적 모습이다. 오랜만에 홀저와 핑크는 재회했고, 둘의 협업은 1970년대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내전을 겪은 이들의 고통과 삶의 의지를 담은 강렬한 벽화로 되살아났다. 벽화가 전시장을 거리로 바꾸었듯, 반대로 뒤셀도르프의 고속도로, 지하철역, 공항 입국장 등은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시내에 나붙은 포스터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행인들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홀저의 작품이 불편하고 괴롭다면, 부조리한 세계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대의 명상록’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를 깨어 있도록 독려한다. 홀린 듯 전시를 보고 나왔더니, 미술관 앞에 작은 연못이 보였다. 가장 냉철하고도 가장 뜨거운 홀저의 문장이 수면 위에 공명하며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TEL ADNAN 내면의 추상

Untitled, 2010~2011, Oil on Canvas, 25.4×35.2×2.8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VG Bild-Kunst, Bonn 2022, Photo: Achim Kukulies, Düsseldorf

제니 홀저의 전시를 선보인 공간이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 중에서도 21세기 현대미술을 다루는 K21이라면, K20은 20세기 미술을 위한 공간이다. 20분을 걸어가 당도한 K20에서 행운처럼 레바논계 예술가 에텔 아드난을 만날수 있었다. 모더니즘의 대표 주자인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시인이자 소설가, 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활동은 그저 주어진 대로만은 살 수 없었던 어느 시대인의 궤적이기도 하다. 1925년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그녀는 철학적, 역사적 관점으로 아랍의 현실을 쓰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50년대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 지배에 항의, 연대를 표하기 위해 아드난은 프랑스어로 글쓰기를 포기하고 “아랍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른이 훨씬 넘어 그림을 시작한 그녀가 미술계의 인정을 받은 건 수십 년이 지난 2012년, 86세의 나이에 카셀 도큐멘타에 초청받으면서부터였다. 전시장을 거닐며 나는 난해하고 첨예하기로 정평이 난 미술의 각축장, 도큐멘타 현장에서 그녀의 고요한 그림이 어떻게, 얼마나 좌중을 압도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Etel Adnan in Her Studio in Paris, 2014, ©Galerie Lelong & Co.
Etel Adnan. Poetry of Colors, Installation View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2023, ©VG Bild-Kunst, Bonn 2023, Photo: Achim Kukulies

에텔 아드난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행보처럼 다채로운 예술 형태, 매체, 문화 등이 결합되어 있다. 대체로 잡지 사이즈보다도 자그마한 캔버스에 응축된 직관적인 기하학적 구조, 풍부한 질감, 평온한 색은 가히 독보적이다. 특별한 형광 물감을 썼나 싶을 정도로 그림에서 광채가 나고, 밝다 못해 맑다. 하지만 마음을 어루만지는 색으로 채워진 캔버스를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뉴욕 타임스>가 평한 대로 “거의 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따스한 오후의 빛줄기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의 치유제(Balm)”로 다가온다. 세상을 향한 발언은 모든 예술가의 임무이자 특권이지만, 아드난의 방식은 다르다. 서정적이고도 활기찬 작업 면면에 굴곡 많은 삶을 관조하는 도저한 시선이 흐른다. “우리는 비극적으로 결함이 있는 생명체이며, 화려함과 추함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한 그녀는 세상의 빛, 즉 깨달음을 담아냈다.

Untitled, 2022(Draft 2020), Ceramic, Private Collection, France, Courtesy Sfeir-Semler Gallery Beirut/Hamburg, ©VG Bild-Kunst, Bonn 2023, Photo: Achim Kukulies
Etel Adnan, Persian, 1963~1964,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VG Bild-Kunst, Bonn 2023

이번에 나는 드디어 아드난의 대표작을 보게 되었다. 1970년대 즈음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집에서 바라본 타말파이어스산에 매료되었고, 그 후 줄곧 자연을 향한 경외를 담아 이 산을 그렸다. 지금도 그녀의 타말파이어스산 그림은 폴 세잔이 전념한 생트빅투아르산 작업과 종종 비견하곤 한다. 이건 단순한 산이 아니다. 타향에서 더 긴 세월을 산 노마드 예술가의 정신적 랜드마크이자 기억과 융합된 그리움의 대상, 삶의 내면을 추상화한 상징이다. “내가 보는 것을 쓰고, 내가 누구인지를 그린다”던 예술가는 지난 202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요와 격동 사이에서 충만한 이중성을 창조해냈다. 오늘날과 같은 첨단의 시대, 그녀의 작업은 구식으로 보일지언정 변함없이 낭만적이고 여전히 강력하다. 에텔 아드난은 당대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며칠 후 나는 아트 바젤 현장에서 아드난의 시와 그림을 차용해 오마주를 바치는 어느 작품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소중한 비밀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DORIS SALCEDO 상실과 애도, 찬란한 예술

Installation View ‘Doris Salcedo’ at the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2023, ©Doris Salcedo, Photo: Mark Niedermann

매년 6월에 열리는 아트 바젤의 모든 방문객이 반드시 들르는 단 하나의 공간을 꼽으라면, 바로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이다. 이번에도 바이엘러는 영원한 스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전시를 야심작으로 내세웠는데, 오히려 미술 관계자들과 관람객의 발걸음은 바로 옆 도리스 살세도의 전시장으로 속속 향했다. 콜롬비아 보고타 출신의 예술가 살세도는 지난 40여 년 동안 사물을 활용한 조각, 대규모 장소 특정적 작품 등을 통해 정치적 폭력으로 잃은 숱한 사람들, 이름 모를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현대의 가장 끔찍한 사건, 이것이 야기한 폭력과 갈등, 슬픔과 상실 등 인간이 마주하는 절망적인 상태를 예술로 복기한다. 살세도 역시 어린 시절 콜롬비아 내전으로 가족을 잃었지만, 미술 공부를 마친 후 비극의 땅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같은 처지인 이들을 인터뷰하고, 손을 맞잡고, 고통과 희망을 함께 직시했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삶을 온전히 관통한 용기 있는 작업만이 특수성과 국경을 초월해 보는 이를 감동시킬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된다.

시적이고도 철학적인 작업은 각각의 가슴 아픈 사연을 새기고 있다. 곱게 접은 셔츠 더미에 금속 막대를 꽂아 넣은 작업 ‘Untitled’(1989~2014)는 어느 콜롬비아 농장 노동자들의 학살 사건을 담는다. 수만 장의 장미 꽃잎을 수술용 실로 일일이 바느질한 ‘A Flor de Piel’(2012)은 군사 조직의 고문으로 사망한 콜롬비아 간호사에게 바치는 날것의 수의다. 실종된 사람들의 신발만 모아 반투명 양피지 안에 넣어 봉인한 ‘Atrabiliarios’(1992~2014)와 옷장과 침대 등의 가구가 돌처럼 굳은 형상인 ‘Untitled’(2009~2016)는 부재와 상실감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한다.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투명한 실크 블라우스 ‘Disremembered’(2020~2021)는 시카고 총기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을 향한 오마주다. 대규모 작업 ‘Palimpsest’(2013~2017)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바다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난민들을 일일이 호명한다. ‘유압 공학 시스템’을 활용한 이 작품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은 물방울이 되어 솟아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또 다른 이름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남은 자에게든 떠난 자에게든 안타까운 운명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듯, 땅이 운다.

Installation View ‘Doris Salcedo’ at the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2023, ©Doris Salcedo, Photo: Mark Niedermann
Doris Salcedo, Palimpsest, 2013~2017, Hydraulic Equipment, Ground Marble, Resin, Corundum, Sand and Water;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2022, Courtesy of Doris Salcedo and White Cube, ©Doris Salcedo, Photo: Mark Niedermann
Doris Salcedo, Disremembered X, 2020/2021, Sewing Needles and Silk Thread; Dimensions Variable, Glenstone Museum, Potomac, Maryland, ©Doris Salcedo, Photo: Ron Armstutz

미술 작품이 사람을 울릴 수는 없다는 공공연한 진리는 살세도의 작업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감히 공감이나 이해 같은 단어를 운운하기보다는 차라리 몸이 아프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수술용 실을 이용해 바느질하는 방법론은 작품을 작가 자신과 희생자들의 몸, 즉 신체와 동일시한 데서 기인한다. 덕분에 보는 나의 몸이 훼손당하거나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아픔으로 연결되고, 무엇인가가 나의 살갗을 찌르고, 베고, 뚫고, 자르는 듯한 기묘한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미술 앞에서 이토록 적나라한 감각에 완전히 지배되는 낯선 경험에도, 몇 시간이나 전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린 이유는 가차 없이 고통스러운 그녀의 작업이 동시에 한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처절한 슬픔은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발현되고, 이렇게 의도된 무한한 간극은 보는 이를 더한 비탄에 빠뜨린다. 잔인한 삶은 지속되고 망각의 힘은 세다지만, 살세도는 끝끝내 잊지 않음으로써 애도한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긴 타인들의 비극이 우리의 아픔이 되어 내가 선 시공간에서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형언할 수 없이 찬란한 먹먹함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무시로 떠오른다.

ANDREA BÜTTNER 세계를 확장하는 법

Andrea Büttner, Vases, 2021, Exhibition View Kunstmuseum Basel | Present, Wooden Tables, Replicas of Tables in Karmel Dachau, 75.6×220×70.2cm, ©bei die Künstlerin / the Artist & ProLitteris, Zurich, Courtesy the Artist, Photo: Julian Salinas

예술가들이 세상 만물을 작업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독일 여성 작가 안드레아 뷔트너에게는 아스파라거스가 그런 대상이다. 이번 출장길에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게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메뉴를 먹어보라 권했다. 초여름 5~6월의 아스파라거스는 독일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식재료라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뷔트너의 전시장에서 다양한 아스파라거스를 발견했다. 나무로 만든 드럼 스틱 모양의 아스파라거스 조각도 있었고, 아스파라거스 농부들의 손놀림을 묘사한 목판화도 보였다. 뷔트너는 내가 이제껏 먹어본 중 가장 맛있었던 바로 그 아스파라거스를 예술적으로 파헤치며 진실을 들여다보게끔 이끈다. 한시적으로 출시되는 탓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수확해야 하고, 덕분에 늘 일손이 태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해외 노동자들이 대거 고용되었지만 그마저도 코로나로 여의치 않았고, 게다가 높은 노동 강도와 형편없는 처우가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 등등. 19세기경 마네가 그린 아스파라거스가 당시 인상주의에 한 획을 그었다면, 뷔트너의 아스파라거스는 작금의 부조리한 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묘사한다.

Exhibition View Kunstmuseum Basel | Present, Time of Creation: 2021, 143 Asparagus Carved from Wood on Table, 73×200×110cm, ©by the Artist / the Artist & ProLitteris, Zurich, Courtesy Galerie Tschudi and the Artist, Photo: Julian Salinas

안드레아 뷔트너의 작업은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다. 식물학, 수치심, 가난, 예술사, 철학, 공예, 일, 종교 등 무엇이든 다룬다. 게다가 표현 방식마저 목판화, 조각, 책, 유리공예, 비디오 설치, 텍스타일, 사진 등으로 매우 다채롭기 때문에, 그녀의 작업 영역은 방사형으로 확장된다. 특히 작가는 세상과 관계 맺고 사는 나의 자율성을 부추기는데, 그런 점에서 전시 제목 ‘관계의 핵심(The Heart of Relations)’은 이토록 폭넓은 작업들을 묶어주는 거의 유일한 키워드가 된다. 흥미로운 건 뷔트너가 길어 올린 세상의 내러티브를 생동하게 만드는 것이 거창한 작품이 아니라 ‘작은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런던 노팅 힐에 있는 수녀원을 담은 영상 ‘Little Works’(2007)는 수녀들이 만드는 코바늘 바구니부터 종교에 관한 본질까지, 공예와 미술, 순간과 영원을 무심하게 넘나들며 복합적인 세계를 엮어낸다. 작은 점에서 출발, 소우주까지 부드럽게 가닿는 특유의 솜씨가 전시장 곳곳에 놓인 90여 점의 작품 하나하나를 특별하게 만든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에 나를 데려다놓고, 제자리에서 더 넓은 세상, 더 깊은 세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뷔트너만의 축지법이다.

CHRISTINA QUARLES 정체성과 예술성의 상관관계

Christina Quarles in Her Studio, Photo: Ilona Szwarc, 2021
Christina Quarles, We Can Require No Less of Ourselves, 2019, Acrylic on Canvas, 121.9×152.4×3.8cm,
©Christina Quarles, Courtesy the Artist, Hauser & Wirth, and Pilar Corrias, London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크 반호프 미술관에서는 요즘 미술 시장과 현장에서 공히 가장 주목받는 앙팡 테리블, 크리스티나 퀄스의 독일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LA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퀄스는 현재 미술계가 단연 가장 뜨거운 주체로 꼽는 흑인 혼혈이자 퀴어 아티스트,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의 선두에 선 예술가다. 자신의 태생을 직시한 작가는 단순히 몸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의 규범에 의해 규정된, 인종화되고 퀴어적인 몸에서 살아내는 경험을 탐구한다. 그녀의 회화에는 기이할 정도로 흐느적거리는 팔다리와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표정도, 정체도, 의중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출현한다. 뒤엉켜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껴안고 사랑을 나누는 것 같기도 하며, 무의미한 몸부림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슴과 엉덩이가 드러나지만 결코 여성적이지 않고, 여성과 남성의 구분도 모호하며, 어느 순간에는 인간이 아닌 생명체인가 싶다. 왜곡되거나 과장된 형태의 이들은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대체 넌 뭐야?’라는 식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고 자란 한 인간이, 그리고 인종적, 성적으로 스스로 ‘정상’의 범주에 놓거나 만족한 적 없었던 한 예술가가 탄생시킨 모순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인물형이다.

Christina Quarles, Collapsed Time, Hamburger Bahnhof – Nationalgalerie der Gegenwart, Christina Quarles, Courtesy the Artist, Hauser & Wirth, and Pilar Corrias, London, Photo: Jacopo La Forgia
Christina Quarles, Slick, 2022, Acrylic on Canvas, 195.6×243.8×5.1cm, ©Christina Quarles, Courtesy die Künstlerin, Pilar Corrias, London und Hauser & Wirth

사실 피부색과 나이, 성적 취향 등 정체성을 분류하는 기준과 편견은 미술계에서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언뜻 프랜시스 베이컨의 기묘한 인물화를 연상시키는 퀄스의 회화는 철저히 개인화되면서 한결 투명해졌고, 이로써 자신을 내내 가두었던 비판과 자조, 분노를 초월한다. 게다가 그녀는 이번에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감금’함으로써 더욱 자유로워졌다. 자기 작품을 회화의 역사에 가두기 위해 미술관의 유명 소장품을 함께 배치했고, 공간을 제한적으로 쓰기 위해 곳곳에 반투명 천을 설치하고 부러 작품을 가렸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인 나는 천과 천 사이를 기웃거리며 인물들의 팔꿈치와 무릎이라도 겨우 보는 데 만족하거나, 아예 뿌옇고 흐릿한 상태의 작품을 받아들여야 했다. 은밀한 작품을 보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부지불식간에 관음의 상태에 놓고, 명확히 보여주길 거부해 좌절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인 장치를 통해 인종이나 성별의 경계는 물론, 주체와 객체의 경계, 경험의 경계, 명료함과 불명확함의 경계 등이 무너지고 뒤섞인다. 정체성의 모호함이 신선한 현기증으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전시 제목 ‘붕괴된 시간(Collapsed Time)’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GINA FOLLY 일상의 혁신성

스위스 바젤의 유서 깊은 미술관 쿤스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사진가 지나 폴리의 전시 <오토포커스(Autofocus)>는 예술적인 동시에 사회학적이다. 카메라는 일군의 노인들이 저마다 일에 몰두하는 다채로운 모습을 포착한다. 정원을 가꾸거나, TV를 고치거나, 아이들의 등굣길에 안내자를 자처하거나, 조명을 바꾸거나, 가구를 옮기거나.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은퇴자, 즉 연금 수급자들의 커뮤니티 격인 ‘Quasi Tutto’의 회원들이다. 폴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이제는 전부가 된 그들의 일을 담아내며, 자신의 쓸모를 다하려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Being Needed(필요로 한다는 것)’와 ‘Being in Use(사용한다는 것)’의 상관관계 안에서 개인적 이익과 사회적 효용의 연결 지점을 탐구하고, 인간의 기본 권리와 실존의 조건, 삶을 일별하는 주된 가치 등을 고찰한다. 1980년대생 작가의 시선에 담긴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귀엽고 유머러스한 데다 숭고해 보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이유는 세대 간의 교류와 소통, 이해의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Gina Folly, Quasitutto I(José disposing of a garage), 2023, C-Print, Framed, 80×60cm, ©by the Artist / the Artist
Gina Folly, Quasitutto XV(Stephanie sweeping the snow), 2023, C-Print, Framed, 80×60cm, ©by the Artist / the Artist

작가는 사진 속 이들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일상을 돌보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전 세대와 구시대를 향한 이러한 존중의 마음은 전시장의 벤치 덕분에 더욱 배가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공장소의 벤치는 일터를 떠난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다. 저마다 일에 열중하는 인물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앞에 놓인 벤치는 소일거리 없는 이들의 시공간을 뜻한다. 작가는 이 벤치를 알록달록하게 칠하고는 지난 세기 예술사와 일상을 바꾸어놓은 아날로그 필름의 브랜드 로고를 각각에 그려두었다. 필름 카메라의 쇠퇴야말로 사진가로서 가장 가까이서 접한 현실적 변화이며, 그래서 벤치를 시대적 변화를 시사하는 동시에 은퇴자들의 존재감을 역설하는 이중적 장치로 활용한 것이다.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잊혀가고, 그럼에도 끝까지 효용을 다하려는 건 (예술 세계의) 아날로그나 (현실 세계의) 그들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Gina Folly. Autofocus, Exhibition View at the Kunstmuseum Basel | Present, 2023, ©by the Artist / the Artist, Photo: Emanuel Rossetti
Gina Folly. Autofocus, Exhibition View at the Kunstmuseum Basel | Present, 2023, ©bei der Künstlerin / the Artist, Photo: Max Ehrengruber

지나 폴리는 일상 주변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섬세하게 탐구하고, 새로운 주제와 표현 방식을 고안하면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수년 전에는 쿤스트하우스 바젤란트에 거대한 책장 모양의 사진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히 책의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우정, 사랑, 과거, 미래, 연대감의 발현이었다. 그녀는 평면 작업인 사진을 늘 입체적으로 구현하고자 하고, 이와 같은 태도로 평범한 삶과 보통의 현상 곳곳을 비춘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때로는 애틋하게. “일생은 내 작업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폴리는 사진 예술이 프레임을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삶을 꾸준히 창조하는 인간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오토포커스’ 기능처럼, 지나 폴리라는 작가의 가장 신세대적 면모를 스스로 비춘다. (VK)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저자)
사진
Dirk Pauwels, Achim Kukulies, Mark Niedermann, Emanuel Rossetti, Max Ehrengruber, Jacopo La For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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