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네와 프레데릭 말이 만났을 때, 그 색과 향은?
패션 하우스의 시각적 이미지를 후각화하고 화학식을 통해 다시 구현해낸 조향이라는 예술.
“우리 가족은 다 유머러스하죠. 사람들은 다들 외할아버지나 어머니 등 외가 쪽에 대해 질문하곤 하지만, 사실 난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어요.” 프레데릭 말(Frederic Malle)은 미국 보그닷컴의 에디터인 사촌 클로에 말(Chloe Malle)이 정말 재미있는 캐릭터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클로에의 아버지인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Louis Malle)은 프레데릭의 삼촌이다. 프레데릭의 아버지 장 프랑수아 말(Jean-François Malle)은 동생 루이 말과도 작업한 영화 제작자였다. 실제로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의 향수 이름을 보면 그가 영화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그는 최근 본 영화로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감독의 <사촌들>(2003)을 꼽은 적이 있다. “<사촌들>이라고요? 언제 봤더라··· 난 거의 매일 영화를 보거든요.” 그가 요즘 꽂혀 있는 건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작품이다. “펠리니에 대한
팟캐스트를 듣고 그의 영화를 전부 다 찾아봤어요. 그중에서도 <달콤한 인생>(1960)이 가장 인상적이었죠. 현실을 어찌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지 잔인할 정도라니까요.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얼마나 허무한 환상인지를 보여줍니다. 프루스트의 작품과 정말 비슷해요!” 아, 마르셀 프루스트.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은 가장 ‘프렌치’다우면서 고상한 취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퍼퓸 하우스다. 프레데릭 말은 드리스 반 노튼, 알버 엘바즈에 이어 패션 디자이너와 세 번째 협업한 아크네 스튜디오×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향수 론칭을 기념해 서울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한 후 이틀 동안 지나치게 자기 이야기만 늘어놨다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부모님은 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질문을 많이 하고, 내 얘기는 적게 하라고 가르치셨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머니가 아신다면···” 그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 와중에도 SNS에는 인터뷰 전날 저녁 이태원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그가 지드래곤과 함께 있는 사진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0년 정도 됐고 그동안 여러 번 서울을 방문했지만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드래곤이 꽤 오랫동안 ‘뮤스크 라바줴’를 애용해왔고, 한국에서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직접 그린 카무플라주 패턴을 프린트해서 만든 밀리터리 박스에 향수를 넣어 보내기도 했어요. 군대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말이죠!” 둘의 우정의 표시로 이태원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레이블과 박스에 지드래곤의 피스마이너스원 데이지가 그려진 뮤스크 라바줴가 전시되어 있다. 프레데릭은 보도 자료를 배포하지 않은 방문이었음에도 그를 보기 위해 길거리에 몰려든 인파와 환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셀러브리티가 많이 사는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서도 수없이 많은 이벤트를 해봤어요. 파리에서 <온 퍼퓸 메이킹(On Perfume Making)> 책 론칭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비 오는 저녁 카트린 드뇌브가 혼자 우산을 쓰고 행사장에 도착했죠. 모두가 그녀를 알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제 매장 앞에서 본 사람들의 반응이란! 이곳에서 셀러브리티의 영향력을 직접 목격하게 됐습니다.”
지드래곤에 이어 아크네 스튜디오라니, 마케팅과 대중을 노린 수익 창출이라면 질색하던 그가 변심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드리스 반 노튼과 알버 엘바즈(슬프게도 각기 다른 이유로 패션계를 떠난 두 거장)는 패션계에서 아크네 스튜디오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잘 알고 있어요, 스타일도 다르죠. 하지만 나를 비롯해 아크네 스튜디오 옷을 실제로 착용하는 사람이 주위에 정말 많았다는 거예요. 나도 아크네 스튜디오의 진을 입고 내 어시스턴트도, 내 아이들도 그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죠.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정제된 룩이 좋았어요. ‘어째서 이렇게 쿨하고 유행을 타지 않을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고 클래식한 재단에 기반해 비율이나 색감, 원단을 변주한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기존의 것을 비틀어서 또 다른 걸 만들어내는 거죠. 내가 향수에 접근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곧바로 조니에게 파리에서 커피 한잔하자는 손 편지를 썼습니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니 요한슨(Jonny Johansson)과 프레데릭 말은 지난해 12월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만났다. ‘덩 떼 브라’ 외에 다른 향수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 조니는 프레데릭을 향한 흠모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요즘에는 손으로 쓴 편지가 흔치 않아서 굉장히 시크하게 느껴졌어요. 그가 제시하는 컨셉과 작업을 매우 좋아합니다. 누가 프레데릭과 작업하고 싶지 않겠어요?” 착실한 학생인 요한슨은 개인적인 취향을 포함해 스웨덴의 정서를 상징하는 것들을 부지런히 모아 프레데릭에게 보냈다. 그중에는 즐겨 듣는 음악과 스웨덴 디자인 사조인 스웨디시 그레이스풍 식기, 가구 디자이너 악셀 에이나르 요르트(Axel Einar Hjorth)의 목재 가구,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감독의 영화 <페르소나>(2013)도 있었다. “조니는 이미 준비된 상태였어요. 드리스, 알버와 작업했을 땐 내가 먼저 향에 대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제시했죠. 조니와의 작업은 훨씬 평화로웠답니다.”
조니는 그의 의견이라면 기꺼이 수용했다. 전문가에 대한 신뢰와 프레데릭 말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살짝 으스대는 표정으로 자신이 맞는 말만 했기 때문일 거라고 했지만 곧바로 정정했다. “뭐, (연장자에 대한) 연민의 발로였을 수도 있겠군요.”
흥미로운 점은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조니 요한슨은 조향사가 누구인지 몰랐고, 향수가 완성된 후에야 수지 르 헬리(Suzy Le Helley)와 만났다는 사실이다. 프레데릭은 아크네 스튜디오와 더 잘 공명하는 향을 찾고 싶었기에 평소 함께 일하는 인물을 포함해 여러 조향사에게 아크네 스튜디오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그들 각자의 해석이 담긴 샘플을 모았다. 그중 젊은 조향사는 수지 단 한 명이었는데, 프레데릭이 향에만 의지해서 추려낸 5개 샘플 중 2개가 수지의 것이었다. “누구라고 밝히진 않겠지만, 수지는 자신보다 경력이 훨씬 오래되고 유명한 조향사들과 경쟁해서 이긴 겁니다. 정말 놀라웠죠. 곧 굉장한 조향사가 될 거라고 확신해요, 두고 보세요.”
조니는 프레데릭이 제시한 5~6개 샘플 중 3개를 골랐고, 그 3개의 샘플을 다듬고 구축해서 최종 후보로 남긴 2개 역시 수지의 작업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조향사와 패션 디자이너의 서로 다른 언어를 통역하는 것이 프레데릭의 역할이자 작업의 핵심이었다. “난 브랜드의 시각적 이미지를 향으로 해석할 줄 알죠. 나의 관심은 조니가 향을 맡고 아크네 스튜디오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구분하는 데 온통 쏠려 있었어요. 그의 반응을 면밀히 살핀 다음 수지에게 조향사의 언어로 전달하며 함께 향을 다듬어야 했으니까요.”
프레데릭은 조니가 제시한 스웨덴에 대한 모든 것이 수지의 샘플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페르소나>에서 화이트 터틀넥 톱을 입은 리브 울만(Liv Ullmann)을 보고 깨끗함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향을 맡으면 터틀넥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고 섬유 유연제 같은 인상을 주는 향 말이다. 수지는 처음부터 알데히드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청결한 어코드의 샘플을 발전시켜나갔고 그 과정에서 꽃 향이 나는 알데히드와 시크한 인상을 주는 파우더리한 구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향은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공할수록 구체적인 스토리와도 더 긴밀하게 이어졌다. 화이트 터틀넥은 여름 혹은 겨울에 창백한 피부의 여자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미니멀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향수는 보틀이 만들어내는 투명한 무지갯빛 그러데이션을 연상케 한다. 프레데릭은 패션 하우스의 향수라면 브랜드의 정체성을 영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만큼 패션 하우스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이어지고 일맥상통해야죠.”
“포뮬러를 가지고 작업하는 조향사를 화학자가 아니라 아티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수학과 과학 또한 고도의 형이상학적 수준에 이르면 추상적이고 창의적으로 접근하게 된다는 그의 설명을 듣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향수의 포뮬러를 전부 수집해서 데이터화한 AI가 등장한다면? 그는 의외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어떨 땐 나 자신도 AI인 것처럼 느껴져요. 경험치 덕에 포뮬러만 보고도 수정 사항을 말할 때요. 하지만 그게 정말 좋은 아이디어일까요? 진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기 때문에 평범한 수준을 대체하는 데 그칠 거라는 예상과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의적이고 급진적인,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도 있다는 양가적 관점에서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주운 지식 조각을 그럴듯하게 끼워 맞추는 ‘가짜 지성’을 대체할 수는 있을 겁니다. 지루한 아이디어만 제시하는 그런 부류는 우리 주위에 늘 있어왔죠. AI에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해요. 내가 조향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가능한 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독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보라
- 포토
- COURTESY OF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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