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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휠러에 대한 모든 것

2024.02.02

by 류가영

  • David Canfield

산드라 휠러에 대한 모든 것

영화 <토니 에드만> 속 산드라 휠러(Sandra Hüller)보다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명곡 ‘Greatest Love of All’을 더 어색하게 부른 이가 있었을까. 영화에서 그녀는 부쿠레슈티에 거주하는 반사회적인 기업의 컨설턴트 이네스로 등장한다. 삭막한 부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네스의 아버지,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별의별 장난을 다 시도하지만 어쩐지 효과가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버지의 장난에 속아 이네스가 낯선 누군가의 부활절 파티에서 미국의 고전 명곡을 부르게 되며 도래한다. 우스꽝스러운 가발과 틀니를 낀 아버지가 피아노 연주에 심취한 사이, 빳빳한 화이트 셔츠와 검은색 재킷을 갖춰 입은 휠러는 억센 독일어 억양을 애써 숨기며 ‘웃픈’ 노래 실력을 뽐낸다. 엄청난 몰입도와 현실감으로 가득한 이 연기는 산드라 휠러를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등극시켰다.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토니 에드만>을 만나며 이름을 날리게 된 휠러는 독일에서 10년 넘게 착실히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었다. 할리우드는 휠러가 뜨거운 신예인 것처럼 대서특필하며 광분했지만.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독일의 자택에서 마주한 휠러의 목소리에서 실망한 기색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금방 사그라들 수도 있죠. 괜찮아요.” <토니 에드만> 이후 주변의 관심이 10배 이상 증가한 건 체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시상식 캠페인에 혼신의 힘을 쏟지 않는다. 그런데 아카데미 후보로 거론되는 자신의 영화가 한 편이 아닌 두 편이라면? 쥐스틴 트리에(Justine Triet) 감독의 신작 <추락의 해부>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휠러는 믿기 어려울 만큼 침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극도의 현실감과 냉정한 열정, “시스템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선언에서 휠러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져갔다.

물론 휠러는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다. 지난해 열린 거의 모든 주요 영화제는 SAG-AFTRA(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 파업의 직격탄읕 맞았는데 국제 합작 영화에 출연한 휠러는 그런 상황에도 업계 거물에게 당당히 작품을 선보이고 홍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휠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이런 흐름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냉정히 분석했다. “세계적인 배우들이 대거 참석한 영화제였다면 이 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휠러의 연기는 위대했다.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추락의 해부>가 황금종려상을,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것은 합당한 결과였다. 무려 3개 국어로 보여준 폭넓고 매끄러운 연기와 인간적이고 악랄한 역할을 오가며 만들어낸 밀도 있는 테이크. 이제까지 맡은 역할과는 전혀 다른 두 캐릭터의 복잡한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한 휠러는 3월 10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다시 <추락의 해부>로 여우주연상,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실감이 나질 않아요.” 물론 그녀는 여전히 덤덤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몇 번의 줌 콜을 통해 휠러와 이야기를 몇 번 더 주고받을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이자 최장 시간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휠러가 텔류라이드 영화제(Telluride Film Festival)에 참석하고 돌아온 지 2주 후 이뤄진 인터뷰였다. 뜨거운 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휠러는 다시 열두 살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독일로 돌아와 <햄릿> 공연을 위해 정기적으로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보훔을 오가는 삶에 완전히 적응했다. <학살의 천사>(1962)를 각색한 연극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행사에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참석해요. 그 자리를 최대한 즐기되 끝나면 바로 다 잊어버리죠.”

대화를 거듭할수록 휠러는 2시간 동안 잠잠히 있다가 북받친 감정으로 열창하는 <토니 에드만>의 이네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휠러도 이네스처럼 감정을 크게 표현하거나 내면을 터놓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적절한 기회가 오면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휠러의 캐릭터를 익히 알고 있었던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고민 없이 그녀에게 <추락의 해부> 주인공 ‘산드라’를 맡겼다. 역할의 이름에서 느껴지듯 사실 트리에 감독은 1년 전부터 휠러를 점찍어두고 캐릭터를 구축했다. 둘의 만남은 2019년 개봉한 영화 <시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휠러는 자제력을 잃어가는 히스테릭한 영화감독 역할을 연기했다. 트리에가 그녀의 강점과 매력을 확신한 시점은 휠러를 스타로 만들어준 <레퀴엠>(2006)을 보고 난 후였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휠러의 성격을 높이 샀다. “산드라는 실제 본인과 캐릭터를 아주 긴밀하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요. 대본을 초월하는 뭔가를 갖고 있죠.” 트리에의 증언이다.

<추락의 해부>에서 휠러가 연기하는 산드라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독일인 작가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집의 위층 창문에서 추락한 남편이 사망하고, 산드라는 용의자로 의심받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판에 서게 된다. 법정 드라마의 틀 안에서 집요하게 이어지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추락의 해부>는 성공한 여성, 양성애자 여성 등 여성의 다양한 면면을 낱낱이 해부하는 영화예요.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단서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산드라에 대한 관객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아주 흥미롭죠.” 휠러가 설명했다. 과연 어떤 관점으로 산드라를 연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그녀는 일찍이 감독에게 산드라가 과연 유죄인지 물었지만 트리에는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는 말만 되돌아왔을 뿐이다.

산드라는 모든 면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난 숨길 것이 없다”고 외칠 때조차도. 산드라를 연기하며 휠러는 그런 벽을 감지했다. 산드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파악하고 규정하지 않기를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깊은 속내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다. “배우는 극 중에서 온갖 감정을 쏟아내고, 상황에 따라 극적으로 행동하지만 제 경험상, 물론 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순간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해요. 그건 사실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휠러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더는 못 참고 소리를 지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치열한 부부 싸움 장면에서 산드라와 휠러는 함께 폭발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문득 휠러가 연기해온 인물 대부분이 복잡한 내면을 안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전부 세상에 대한 벽이 있는 여성이기도 했다.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예민한 고통을 훌륭히 연기해내는 비결을 묻자 휠러는 맨 처음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휠러는 독일의 작은 마을 프리드리히로다에서 성장했다. “마음속에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표출할 곳이 없었어요.” 휠러가 오래전 기억을 끌어냈다. 그러다 10대에 입단한 연극 동아리는 그녀의 숨통을 터주었다. “극단 친구들과 대화하는 방식, 서로를 대하는 친절한 태도가 정말 좋았어요. 평소엔 이야기하기 힘든 온갖 주제에 관해 집요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환경도요. 모든 걸 터놓기에는 조심스러운 것이 많은 너무 작은 마을이었거든요.” 연기는 휠러에게 피난처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교였다.

휠러는 연기할 때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야망’이라든지 ‘밀어붙이다’라는 단어는 제 사전에 없어요. 그런 건 잘 몰라요. 물론 제가 거짓말한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부추기는 동료도 있긴 하죠.” 휠러는 매 순간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는 배우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모든 것이 잘못될 수 있다고 느껴요.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고, 그땐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요.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이번엔 정말 망치겠구나’라는 위기감을 느낀다니까요. 더 이상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늘 있어요.”

촬영 내내 불안에 떨었다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해 물어보기에 최적의 타이밍이 찾아왔다. 독일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그녀지만 휠러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출연 거부 의사를 밝혀왔다. “촬영 의상으로 입은 나치 친위대 제복 차림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업로드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이해가 전혀 안 돼요. 포즈를 취하고, 시선을 끈다니!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어떻게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가 있죠?”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느슨하게 각색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의 아내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그녀는 오랫동안 고사했다. “실제로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어요.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죠. 오랫동안 피해오던 주제였어요. 정말 두려웠죠.”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난데없이 시작되는 공포 영화와 다름없다. 부부 싸움과 이직 등 사소한 삶의 문제 사이로 나지막이 흘러드는 강렬한 사운드는 담장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문과 살인을 시사한다(영화는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가족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글레이저는 당시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는지 이해하고 싶어 했어요. 평범한 가족과 말도 못할 비극을 경험한 저편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어 했죠.” 이런 특별한 관점 때문에 휠러는 결국 출연을 결심했다. 그러나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배우로서 저는 제가 연기하는 인물과 최대한 깊이 교감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죠. 이 캐릭터에 대해서는 공감 능력이라든지 애정을 발휘하고 싶지 않았어요. 시종일관 차갑게 바라봤죠. 남편 역할을 맡은 프리에델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리가 지금 뭘 하는 건지, 과연 옳을 일을 하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요.”

휠러는 배역과 배우로서의 자신,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다. 냉담할 정도로 심각하고 진중하게 현장을 서성이지만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행동하는 편이기도 하다. 촬영장에 동반한 반려견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에피소드에서 그런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글레이저 감독의 통제된 악의 초상화 속에서 휠러의 반려견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선한 소요를 일으켰다(사실 휠러는 반려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을 정도로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배우다). 이야기를 듣던 내가 잘 훈련되지 못한 우리 반려견은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잘해낼 수 없을 거라고 대답하자 화면 속 휠러가 활짝 웃으며 곧바로 되물었다. “개는 어디 있나요? 너무 보고 싶어요!” 아쉽지만 반려견은 아침 산책을 하러 나간 상태였다. 이어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반려견으로 옮겨가자 나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 가볍게 사과하고는 대화의 흐름을 적절하게 조정했다. 다시 일 얘기로 돌아와서 건넨 새 질문에 휠러는 다소 의무적으로 답변했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촬영하는 동안 하나의 생명체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정말 큰 위안이 됐어요. 삶에서 그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은연중에 휠러가 다시 반려견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휠러는 진정한 국제 스타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수준급의 연기를 선보이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페인어까지 공부하는 중이다. 인터뷰 말미에 휠러는 그녀의 화를 북돋우는 독일 영화 산업의 고집스러운 방침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독일 내 극장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는 더빙을 거쳐야 하는데 그래서 모든 영화 속 인물들이 한결같이 독일어로만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 휠러는 자신이 영어나 프랑스어로 연기한 부분을 직접 독일어로 다시 더빙하곤 한다. “독일 배급사의 요청으로 진행한 <추락의 해부> 더빙 경험은 특히 괴로웠어요.”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끓어오르는 눈치였다. “너무 화나요. 말도 못해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하는 산드라가 법정에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장면이 상징하는 의사소통의 장벽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독일어 더빙판에서는 인물이 계속 독일어로만 발언하므로 휠러의 정밀한 캐릭터 묘사와 영화의 중요한 서사적 장치는 무용해진다. “연기할 때 목소리는 정말 중요해요. 어떤 상태인지, 어떤 감정인지, 얼마만큼 긴장하는지, 얼마나 편안한 상태인지, 많은 것을 말해주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제가 다시 더빙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휠러는 아마 다시는 더빙을 거부할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끔찍해요. 정말이지 창피한 일이고, 배우로서 제 자신에게도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일이죠.”

별것 아닌 에피소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휠러의 연약함(혹은 인간적인 매력)은 이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도 휠러는 천천히 솔직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쉽게 허락하진 않지만 그녀는 언제나 얼음처럼 투명하고 시리도록 진실하다.

    David Canfield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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