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에서 시계까지, 루이 비통의 길 위에서
하우스의 시작을 알리는 트렁크는 지금도 고성능 엔진을 움직인다.


패션 에디터로 일하면서 수많은 패션쇼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는 2012 루이 비통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마주했다. 루브르 박물관 광장 사이에 세운 텐트 안은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무대 입구 문이 열리고 루이 비통 열차가 증기를 뿜으면서 트랙 위에 서서히 정차했다. 패션쇼를 위해 실제 크기의 증기 기관차를 움직이는 건 루이 비통의 ‘스웩’에 가까웠다. 더 인상적인 풍경이 곧이어 펼쳐졌다. 열차에 타고 있던 모델이 플랫폼에 내리자 유니폼 차림의 짐꾼이 모델의 가방을 대신 들고 런웨이를 함께 걸었다. 오래전 기차 여행을 즐기던 여인의 모습을 21세기에 재현하는 루이 비통만의 방식. 여행이라는 단어가 지닌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도 하우스의 기본인 여행 가방을 효과적으로 노출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브랜드의 시작이자 출발점이었던 여행 가방은 이렇게 끊임없이 거대한 브랜드의 곳곳에 아이디어를 더하고 있다. 2001년 스티븐 스프라우스가 그래피티를 더한 트렁크는 현대 패션의 전설이다. 지금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하우스 입성 이후 가장 먼저 선보인 가방도 트렁크에 뿌리를 둔 ‘쁘띠뜨 말’이었고, 리뉴얼 공사가 진행 중인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의 외관을 장식한 것도 16층 높이의 거대한 트렁크 6개다. 그리고 이 트렁크는 루이 비통의 시간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루이 비통의 하이 워치를 담당하는 ‘라 파브리크 뒤 떵 루이 비통(La Fabrique du Temps Louis Vuitton)’은 20세기 초 트렁크를 담아 도로를 달리던 배송 트럭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시계를 선보였다. 오뜨 오를로제리의 기술을 담은 ‘루이 비통 까미오네트(Louis Vuitton Camionnette)’가 그 새로운 타임피스다. “하우스의 초기 역사를 들려주는 이 전설적인 차량의 본래 모습을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루이 비통의 타임피스를 담당하는 라 파브리크 뒤 떵 루이 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 마티유 에기(Matthieu Hegi)가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을 설명했다.
견고하고 가벼운 알루미늄을 바탕으로 사프란과 시빌린 블루 컬러로 태어난 특별한 시계는 하우스의 시작을 알리는 ‘LV 1854’라는 번호판을 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엔진 대신 시계의 무브먼트가 자리한다. 운전석에는 밸런스 휠이 디스플레이를 조정하고, 시와 분은 각각의 속도로 회전하는 실린더 2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트렁크 공간에는 미니어처 모노그램 트렁크가 있다. 차량 비율에 맞춰 사실적으로 재현한 디자인을 열면 열쇠가 나온다. 무브먼트의 태엽을 감고 시간을 조정하는 기능을 맡고 있으면서 동시에 복고적인 자동차 디자인을 떠올린다.
금빛 자동차도 탄생했다. 골드 메탈로 완성한 ‘루이 비통 까미오네트 프레셔스’ 버전의 보닛에는 0.5캐럿의 LV 모노그램 스타 컷 다이아몬드가 자리한다.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는 다이아몬드를 스노우 세팅하고 골드 플레이팅으로 로고를 더했다. 트럭의 헤드라이트 역시 라운드 컷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다. 후면의 테일라이트에 세팅한 것은 레드와 오렌지 컬러의 바게트 컷 사파이어 20개다. 제네바의 워치 매뉴팩처와 파리의 샹젤리제 매장, 그리고 트렁크가 탄생하는 아니에르 공방의 주소가 트럭 옆면을 장식하는 건 상징적이다. 단순히 시계가 아니라 루이 비통의 역사와 함께하고자 하는 컬렉터에게 전하는 작품에 가깝다.

‘기항지’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탐험의 낭만을 담고 있는 ‘루이 비통 에스칼(Louis Vuitton Escale)’ 컬렉션 역시 또 다른 여행의 예술 정신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에스칼을 정의하는 건 트렁크 고유의 디자인 요소를 떠올리는 디테일이다. 트렁크 모서리의 황동 브래킷과 리벳은 러그 디자인으로 이어진다. 특별히 완성한 프레젠테이션 트렁크도 함께 제공된다. “이번 에스칼의 새로운 챕터는 지난 4년간 우리가 겪어온 변화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루이 비통 워치 디렉터 장 아르노(Jean Arnault)의 설명이다. 상징적인 모델인 ‘루이 비통 에스칼 월드타임’도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케이스와 다이얼, 무브먼트 피니싱 등 모든 디테일을 세심하게 고민했습니다.”

에스칼 월드타임은 24개 타임 존을 동시에 표시하기에 2014년 처음 등장한 이후 에스칼 컬렉션을 상징해왔다. 2026년 버전은 ‘메티에 다르’와 오뜨 오를로제리가 함께했다. 미니어처 페인팅을 더한 월드타임 링과 모노그램 캔버스의 텍스처를 더한 그레인 블루 센터 다이얼이 특징이다. 여기에 새로운 인하우스 무브먼트 LFT VO 12.01을 더했다. ‘루이 비통 에스칼 월드타임 플라잉 투르비용’은 에나멜 기법으로 국기를 완성했다. 35가지 컬러를 미세한 붓으로 칠하고 40번 넘게 굽고 말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다이얼을 완성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린다. 다이얼 중앙에 플라잉 투르비용을 더하기 위해선 칼리버의 구조도 완전히 새롭게 구성했다. 60초에 한 바퀴 회전하는 별 모양의 모노그램 플라워 투르비용은 메종의 자랑이다. “월드타임은 에스칼의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마티유 에기가 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한 월드타임을 다시 선보이는 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컬렉션을 정의해온 이 컴플리케이션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필수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루이 비통 에스칼 트윈존’과 ‘루이 비통 에스칼 미닛 리피터’ 역시 에스칼 컬렉션의 경계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개의 타임 존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듀얼 타임 워치 에스칼 트윈존의 매력은 두 세트의 핸즈에 있다. 덕분에 30분 또는 45분 단위의 시차를 지닌 지역을 포함해 모든 타임 존을 분 단위까지 정확하게 설정할 수 있다. 로즈 골드 모델의 실버 톤 지구본 다이얼과 플래티넘 하이 주얼리 에디션의 어벤추린 다이얼은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다이얼과 케이스, 폴딩 버클에 각각 120개, 170개, 11개의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를 더한 플래티넘 모델은 놀라운 존재감을 자랑한다. 에스칼 미닛 리피터 속 하우스 특유의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트렁크의 시그니처 브래킷을 닮은 미닛 트랙과 못 모양의 마커도 자리한다. 화려한 디자인 뒤에는 미닛 리피터와 점핑 아워를 하나에 접목하는 매뉴얼 와인딩 칼리버 LFT SO 13.01이 숨어 있다. 시각적
으로는 매력적인 숫자의 움직임에 매혹되고, 청각적으로는 크리스털 차임을 닮은 청아한 리피터 소리에 빠져든다.

지난 5월 20일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뉴욕에서 루이 비통 여성복 2027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였다. 프릭 컬렉션에서 열린 쇼의 시작은 커다란 가죽 트렁크를 든 모델이었다. 그 트렁크는 키스 해링이 1984년 검정 펜으로 특유의 그림을 그려낸 1930년대 트렁크. 제스키에르는 뉴욕이라는 배경과 키스 해링, 그리고 루이 비통의 전통에서 또 한 번 아이디어를 얻은 셈이었다. 패션과 주얼리, 리빙과 타임피스까지 하우스의 유산은 언제나 특별한 영감을 선사한다. “장인 정신의 결실은 워치메이커이자 트렁크 메이커, 특별한 오브제를 창조하는 하우스로서 우리가 보유한 뛰어난 역량을 반영합니다.” 에기는 하우스의 전통과 탁월한 기술의 만남이 타임피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우스의 전통은 루이 비통 시침과 함께 전진하고 있다. TG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포토
- Courtesy of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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