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연애시대

우리 앞에 펼쳐진 생의 골목이 의도를 숨긴 연애 편지처럼 모호하더라도, 당당히 길을 찾으라고, 그녀는 말한다. 세상에 공정한 연애란 없다는, 새 영화 〈페어 러브〉로 다가온 이타적 유전자 이하나.

플리츠 드레스는 인더우즈(IntheWoods), 테일러드 재킷은 01(at10 CorsoComo).

집에서 혼자 기타를 치다 왔어요.‘킹스 오브 컨비니언스’가 얼마전 공연에서 부른 귀여운 노래‘It’s My Party’.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를 아세요? 노르웨이 밴드죠. 난 두 명의 멤버 중 안경 쓴 남자를 좋아해요. 잘 기억해 두세요, 안경 쓴 남자. 내 얘기를 해줄까요? 연애가 시작될 즈음, 아니 끝나는 즈음의 이야기. 연애를 처음 시작했던 건 고1. 그 전까지 난 잠들어 있었어요. 많은 날들이 하루 같았죠. 난 내가 가수가 될 줄 알았죠. 대학에서 보컬을 전공했고, 음악으로 감정을 기록했고, 음악이 내 삶의 치유제였거든요. 마치 연애처럼. 드라마 〈연애시대〉기억하세요? 〈이하나의 페퍼민트〉는요? 고마워요. 내겐 연애와 노래가 하나죠. 특이한 버릇이 있어요. 좋아하는 영화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15분을 안 봐요. 극장에서 조용히 나와버리죠. 〈러브 어페어〉가 그랬고, 〈브로크백 마운틴〉이 그랬어요. ‘러브 어페어’참 멋진 말이죠? 이번에 정말‘연애 사고’를 쳤어요. 안성기 선배님과 함께한 순수한 러브 어페어 〈페어 러브〉. 카메라만 보고 살던 50대 남자에게 내가 세상을 꺼내서 보여줬어요.

이하나 나 처음 봤을 때… 밤에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그때…처음 딱 보고 그냥 친구 딸 같았어요? 아빠랑 많이 친했어요?
안성기 글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덜 친할 걸 그랬나. 난… 그래, 자신이 없어. 여태 이렇게 살았는데… 또 뭘 하겠니?뭘 다시 시작할 나이도 아니고…누가 내 인생 책임져줄 건 아니잖아?
이하나 아저씨 인생도 한 평생이고 제 인생도 저한텐 한 평생이에요. 왜 아저씨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세요?-영화 〈페어 러브〉중에서.


‘페어 러브’란 말 좀 언페어하지 않아요?‘공정’이란 형용사는 사랑한테는 안 어울려요. 사랑이 무역도 아니고. 전 죽은 아빠 친구인 형만(안성기)을 선택한 남은이(이하나)가 맘에 들어요. 연애는 뿔을 겨누는 아름다운 코뿔소들처럼 최선을 다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예요. 전 영화에서 버려진 고양이처럼 살아온 아이예요. 〈파주〉는 형부와 처제가, 그리고 〈세비지 그레이스〉는 엄마와 아들이 사랑하는 영화라면서요? 그들은 누가 먼저 사랑했을까요? 〈페어 러브〉는 아빠의 친구를 사랑한 이야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아빠의 친구가 안성기 선배님이라서 좋아요. 그분의 사랑은 배려. 진부하지만 자기를 희생하고 견주지 않고 상대를 더 사랑해버리는 쉼 없는 배려.

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을 질 것도 아니면서 남한테 영향을 끼치는걸 좋아하죠. 전 그런 사람 싫어요. 생각해 보면 난 늘 고양이 같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아이 같은 남자, 똑똑한데 순수한 남자, 천재인데 바보스러운 남자,‘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안경 쓴 그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은 얼랜드. 연애는… 먼저 거는 거예요. 무관심한 사람보다는 사건을 만드는 사람이 해내는 거죠. 아웅다웅 하는 사이 정이 드는 거죠.

스팽글 카디건은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팬츠는 엘리스 오버핸드(Elise Overhand at Detail).

노르웨이에 다녀왔어요. 내가 사랑하는 그 멤버들의 고향. 얼랜드가 어디서 뭘 보고 자랐을까? 궁금했죠. 그들의 고향인 노르웨이 베르겐에 가려고 암스테르담에서 경유하는데, 공항 모퉁이에서‘얼랜드’와 마주쳤어요. “난 영어를 못하지만 나는 너의 팬이야.” 그는 놀라지 않았고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었죠. 스치듯 헤어지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내렸어요. 그리고 베르겐 공항 트레일러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쳤어요. “베르겐 지도는 갖고 왔니?” 나의 멘토이자 우상이 측은 한 듯 물었어요. “줘 봐. 갈 곳을 표시해줄게. 여기 클럽과 레스토랑은 꼭 가보도록 해.” 내 지도는 낙서 하나 없이 새하얀데, 오로지 그들의 공연장만 하트 마크가 그려져 있었어요. 불 꺼진 도시의 유일한 등대처럼. 얼랜드는 가만히 하드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더니 노래를 시작했어요. 작은 목소리로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공항 모퉁이 의자에서. 3곡을 불러준 후 그는 굿바이 했어요. 난‘러브 어페어’와‘페어 러브’의 사이쯤 있는지도 몰라요. 마법에 걸린 듯 베르겐의 작은 클럽에서 우연히 또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내가 입고 있던 니트를 선물로 줬죠. “사진기 있니? 내가 이 니트를 입을 테니 그걸 찍어. 그리고 이 옷은 네가 갖고 가. 언젠가 내가 서울에 가면 너는 이 옷을 입고 공연장엘 오는 거야. 그럼 내가 너를 단번에 알아볼 거야.” 이제 막 친밀감을 갖게 된, 그래서 조금만 더 서로를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즉흥적인 행동. 나 꿈이 생겼어요. 아주 멋진 여자가 되고 싶어요.

이하나 항상 그래요? 만날 때 헤어질 거 걱정하고. 해 뜰 때 해 질 거 걱정하고. 태어나서 죽을 거 걱정하면서 사는 거 아니잖아요?
안성기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하고. 해 뜨면 지는 게 당연하고. 태어나면 죽는 게 당연하지만. 니가 왔다가… 니가 날 떠나는 건 당연한 게 아니야.-영화 〈페어 러브〉중에서.


여배우 중에 저 같은 마이너 유전자가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죠? 전, 여배우답지 않아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가 봐도 아름답고, 그런 거에 욕심이 없어요. 난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그런 여자. 보호를 받는 쪽인 줄 알았는데 보호하는 걸 더 좋아하는 쪽이죠.

연애는 오래 전부터 세계를 움직여 온 ‘마음의 운동’같은 거. 연애하고 싶으세요? 그냥 부딪히세요. 그 남자의 그림자도 그리워해보고, 그 남자의 빨래도 해보고,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 울어도 보고 미워도 해보고 용서도 해보고…. 그렇게 자라면서 또 포용의 나이테가 생기겠죠. ‘페어 러브’와‘러브 어페어’사이, 나의 서울은 고장 난 멜로디처럼 조용했는데, 이젠 막 희망의 음악이 켜졌어요.

이하나 매 순간, 매 순간, 뭐든지 어떤 면으로는50:50 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영화 〈페어 러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