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여행이란?
여행은 사실 그런 게 아닐까? 지금 내 삶이 최선이라 믿게 만들면서 최악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알맹이 없는 말은 뭘까? 내 생각엔 “여행을 좋아해요” 또는 “취미는 여행”이라는 말인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하므로 이 말을 통해 상대에 대한 유의미한 단서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신이 이제껏 세상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방랑하며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한다.
여행을 싫어하는 것도 모자라 급기야 거부하는 여행 반대주의자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다. 호탕한 성격의 변증론자 G.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궁색하게 만든다”고 했고, 고독의 희열을 중시했던 사상가이자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여행을 “어리석은 자의 행복”이라 일컬었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이마누엘 칸트는 각각 아테네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집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으며 여행에 대한 그들의 반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보다 여행을 혐오한 예술가는 없을 듯하다. 그는 위대한 저서 <불안의 서>에서 여행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수많은 메모로 남겼다.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혐오한다.” “여행 간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아,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나 여행하게 하라지!” “여행은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심각하게 궁핍한 상상력만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감상을 느껴야 하는 삶을 정당화할 것이다.”
당신이 이를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자기주장이라 생각한다면 여행의 주체를 내가 아닌 타인으로 돌려서 고려해보라. 사람들은 누구나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여행은 관광으로 보일 뿐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 우리가 바로 그렇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여행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만큼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여행 이야기는 청자의 욕구보다 화자의 욕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그것은 학술 논문이나 꿈 일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여행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열변을 토하는 지점은 여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여행에 회의적이던 영국의 시인 겸 평론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역시 “프랑스에서 지내며 내 나라에 대해 더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로 여행이 지닌 장점을 일부 인정했다. 그리고 아끼던 후배 작가 제임스 보즈웰(James Boswell)에게 냉소적인 위트를 담아 아이들을 위해 중국 여행을 다녀올 것을 권하기도 했다. “자네 아이들에게 영원한 광명이 비칠 걸세! 만리장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온 사람이 바로 자기 아빠라는 광명이 늘 그 아이들을 따라다니겠지.”
여행은 업적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장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흥미로운 버킷 리스트를 달성하는 사람은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 페소아, 에머슨, 체스터턴은 여행이 인류애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여행은 지금 이 모습이 나의 최선이라 믿게 만들면서 실은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진짜 의미는 뭘까? 어떻게 해야 여행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징집되어 해외로 나가게 된 것이지 그가 여행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에머슨은 필요나 의무에 의해 여행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는 ‘예술과 연구, 선행의 목적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타지로 떠나야 하는 분명한 명분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는 기념품이나 사진,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다. 여행 다녀온 사실을 증명할 필요 없이 여행 그 자체로 모든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광의 목적은 무엇일까? “관광은 변화를 경험할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어떤 곳을 방문하는 일시적인 여가 생활을 뜻한다.” 이 정의는 관광 인류학 분야의 고전 학술서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관광으로서 여행은 변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뭐가 변화한다는 것인가? 같은 책의 마지막 장에 더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관광객은 지역 주민이 관광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에 비해 지역 주민에게 영향을 덜 받는다. 관광객이야말로 지역 공동체에 나비효과를 촉발하는 변화의 주체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오히려 그곳에 있는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고 돌아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0여 년 전 아부다비의 매 전문 병원으로 가이드 투어를 다녀온 적 있다. (이곳에서 팔 위에 매를 올리고 찍은 기념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다.) 사실 나는 매 훈련이라든지 매라는 동물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동물과 마주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갔을까? 그저 ‘아부다비에 가면 꼭 해야 하는 것’을 검색하면 빼먹지 않고 등장하는 액티비티 프로그램이었기에 호기심에 가본 것뿐이다. 매 병원의 구조부터 그곳에 걸린 동물 보호를 위한 선언문까지, 모든 것이 나와 엇비슷한 이유로 이곳을 찾은 관광객 때문에 형성된 것이며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변화 추구자, 바로 우리 같은 관광객에 의해서 말이다. (매 병원 현관에 ‘우수 관광업체’ 표창장이 주르르 걸려 있던 것이 기억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곳은 동물 병원이었다.)
어떤 장소가 변화를 경험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새롭게 기획되는 것이 지역 문화 측면에서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바로, 그 장소를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를뿐더러 뭔가를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를 보라. 아부다비의 매 병원을 찾은 사람 중에서는 매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방문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부다비에 다녀온 후에도 매에 대한 나의 무관심은 여전했고, 나는 그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 전문 병원에 가는 선택을 했다. 보통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거나 선망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러 갈 때, 그냥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별다른 행위를 하지 않는 법이다.
관광의 가장 큰 특징은 돌아다니기다. “나 프랑스에 갔었어.” 그래, 좋다. 근데 가서 뭘 했는가? “루브르박물관에 갔지.” 그것도 좋다. 하지만 거기서 또 뭘 했는가? “가서 ‘모나리자’ 보고 왔다니까.” 간단히 말해 수많은 사람처럼 ‘모나리자’ 앞에 겨우 15초 정도 머물다가 이제 기억조차 안 나는 또 다른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경험을 몇 시간씩이나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돌아다녔을 테고 말이다.
여행자들은 항상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어떤 장소에서 우리가 으레 해야 한다고 여기는 리스트를 충실히 이행하고픈 욕망과 그 행위를 모두 피해버리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던 나는 처음으로 간 파리 여행에서 일부러 ‘모나리자’와 루브르박물관을 피했다. 하지만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피하지는 않았다. 도시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일직선으로 걸어 다니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당시 지도상에서 내가 돌아다닌 경로를 줄로 이어보면 아마 커다란 별 모양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저 걷기만 한다는 건 내가 생활하고 근무하는 도시에서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최대한 가치 있게 쓰고 싶은 평상시의 기준을 쉽게 허물게 된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기꺼이 제쳐두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강박뿐이 아니다. 음식, 예술, 여가 활동에 대한 평상시의 취향 역시 쉽게 허물어버리곤 한다. 여행의 핵심은 일상에서 나를 제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계속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미술관 같은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변화를 꿈꾼답시고 미술관에 간다면 거기서 그림을 보고 대체 뭘 느낄 수 있겠는가? 생뚱맞게 아무 관심도 없는 매로 가득한 병원에 가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더 나쁜 소식은 관광객의 그런 다짐 혹은 세뇌가 결국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작가 워커 퍼시(Walker Percy)의 책 <The Loss of the Creature(생명체의 죽음)>에 등장하는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첫째는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한 관광객 이야기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의 마음속에는 협곡에 대한 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본 그랜드캐니언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온 그림과 엽서 속의 이미지와 부합한다면 여행의 만족도는 높아진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그는 친구들에게 “그곳의 모든 풍경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어!”라고 행복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날 날이 아주 흐리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의 색조와 음영이 기대한 것과 사뭇 다르다면 왠지 속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랜드캐니언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못한 채 지금 바라보는 광경이 마음속으로 상상한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지에 골몰하며 실망하거나, 아니면 발밑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 대단한 경관이 어쩐지 자기에게만은 별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둘째로 아이오와 출신의 한 커플이 멕시코에서 누린 여행에 관해 살펴보자. 이들은 여행을 즐기고는 있지만 계속되는 뻔한 풍경에 약간 지루한 상태다. 그러다 길을 잃게 되고, 둘은 바위 협곡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몇 시간이고 달리다 결국 ‘지도에 표시조차 되지 않은 작은 골짜기’에 이르러 종교적 축제가 한창인 어떤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춤추는 광경을 보게 된 이들은 마침내 “진정 볼만한 풍경, 매력적이고 진기하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만났다”며 기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어쩐지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지 못한다. 아이오와로 돌아온 이들은 인류학자 친구를 만나 자신들의 경험을 자랑하듯 떠들어댄다. “너도 거길 갔어야 하는데! 다음에 우리랑 같이 가자!” 하지만 그 인류학자가 실제로 자신들과 함께 그 마을을 찾았을 때 그 커플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대신 친구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커플은 인류학자 친구가 이 마을 사람들의 춤을 흥미롭게 여기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은 친구로부터 자신들의 경험이 제대로 된 것이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관광객은 자신의 견해를 한없이 낮춘다.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경험의 정당성을 그림엽서, 앞선 경험자의 이야기 혹은 통념에 떠넘긴다. 이 무력한 복종, 경험에 대한 과도하게 열린 마음이 관광객으로 하여금 진정한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우물쭈물한 채 소중한 시간을 다 써버리도록 만든다. 에머슨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바티칸과 왕궁을 찾는다. 그곳의 장엄한 광경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영감에 흠뻑 도취된 척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어떤 건축물이나 그림 혹은 매 앞에서 스스로에게 뭔가 대단한 감흥을 느끼기를 요구해본 적 있을 모든 관광객의 마음을 대변한 말이 아닐까. 우리는 에머슨과 퍼시를 통해 이런 요구가 왜 부당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즉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진정으로 ‘어떠어떠한지’ 아닌지는 본디 ‘어떠어떠하지’ 않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소아와 체스터턴은 윤리적 관점으로 여행 문제를 다룬다. 이들은 여행자들이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교감하지 못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나는 지난 파리 여행에서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들이 입고 있는 옷, 그들의 태도, 그들끼리의 상호작용을 유심히 관찰했다. ‘프랑스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결코 친구를 사귀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다. 페소아는 살면서 ‘영혼을 가진 진정한 여행자’를 딱 한 명 만났다고 이야기했다. 집착적으로 온갖 팸플릿을 수집하고 신문에서 지도를 잘라 간직하며 멀리 떨어진 도시를 오가는 열차 시간표를 훤히 외우던 어느 사환이었다. 이 사환은 전 세계의 항해 루트를 줄줄 외울 정도였지만 한 번도 리스본을 떠난 적이 없었다. 체스터턴도 그런 ‘집에 가만히 있는’ 여행자를 긍정했다. 그는 “햄프스테드나 서비턴에 있는 자기 집에서 충분히 라플란드 사람들을 동경하고 중국인을 포용하며 파타고니아인을 가슴에 품을 수 있으면서도, 그곳에 가서 현지인을 보고 싶다는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충동으로 집을 나선 어리석은 관광객을 보면 어딘가 짠하고 심지어 비참해 보인다”는 글을 남길 정도였다.
문제는 다른 나라의 삶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관광객을 유도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를 어디까지나 구경꾼으로 머물게 하면서 현지인과 관계 맺지 못하게 만드는 여행의 비인간화 효과에 있다. 체스터턴은 “멀리 있는 것을 멀리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적절한 방식이며 더 보편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 체스터턴은 말했다. “햄프스테드에 사는 어떤 사람이 외국인을 (아주 추상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로 간주한다면, 그는 그들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진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사람이 집에서 느끼는 인간에 대한 유대감은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진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관광에 대한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여행에서 돌아온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익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휴가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낯선 곳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일이라면 어두운 터널 끝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모르면서도 그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두려움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자는 여행을 마친 후에도 자신의 관심사, 정치적 시각, 삶의 방식이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여행길에 나선다. 여행은 그러니까 부메랑이다. 우리를 다시 출발지로 되돌려놓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이런 이야기가 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며, 자신은 인격을 고양해주고, 견문을 넓혀주며, 진정한 세계민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마법 같고 심오한 여행을 누려왔다고 여긴다면 당신의 여행은 일인칭 시점에서는 온전히 평가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페소아, 체스터턴, 퍼시, 에머슨은 여행자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변화했다고 주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름을 맞아 여행을 앞두고 설레어하는 가까운 친구 한 명을 떠올려보라. 이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어떤 상태일 거라 짐작하는가? 당신 친구는 ‘살면서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생을 변화시키는 대단한’ 여행을 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들의 행동과 믿음 체계, 윤리적 기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여행 후 그들에게 달라진 것이 단 하나라도 있기는 할까?
여행은 분명 즐거운 것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신비롭지는 않다. 진정 신비로운 것은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여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여행에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가 하는 것이다. 휴가가 그저 변하지 않을 변화를 추구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주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왜 그토록 여행을 추앙하는 걸까?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만약 여러분의 앞날에 여행은 두 번 다시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느껴질 것 같은가? 커다란 인생의 변화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그렇게 그냥저냥 살다가 죽겠지’라는 암담한 미래만 그려지지 않겠는가? 여행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기나긴 시간을 여행 전과 후로 분절하며,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마지막을 잠시나마 못 본 척할 수 있도록 가려준다. 언젠가 우리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직 미지의 세상을 체험하고, 타인과 교류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그런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는 식의 내러티브로 인생을 포장할 수 있을 때만,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줄 기념품과 사진이 있을 때만 씁쓸한 결말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겨우 조금 얻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철학자가 아닌 우리에겐 여행이 바로 그런 과정이 아닐까? (VL)
- 글
- AGNES CALLARD
- 일러스트
- MARÍA ME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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