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누나 2

꽃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국민 남동생의 크로아티아 여행기 <꽃보다 누나>는 예능판<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파란만장했던 모험을 끝내고 마침내 현실 세계로 돌아온 윤여정과 김희애, 이미연, 그리고 이승기가 오랜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이미연이 입은 러플 실크 블라우스는 도나 카란 컬렉션(Donna Karan Collection). 김희애가 입은 빨강 레이스 톱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어느 따분한 날, 꽃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호기심 많은 국민 남동생은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다. 서울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을 날아 터키 이스탄불에서 하룻밤, 그리고 다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부터 900km를 달려 최남단 두브로브니크까지. 낯선 땅에 떨어진 이들의 9박 10일간의 여행을 담은 tvN <꽃보다 누나>는 첫 회부터 1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꽃보다 할배> 1탄에서 평균연령 76세 할아버지들의 배낭여행기를 통해 아이돌 스타 일색의 예능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바 있는 나영석 PD는 이번엔 ‘꽃보다’라는 수식어에 딱 걸맞은 비밀스러운 여배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인데, 사실은 잘 모르는 그런 대상이 어디 있을까 고민을 해봤습니다.”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그리고 짐꾼(?) 이승기를 드라마나 영화도 아닌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을 거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설렘을 안고 출발한 이들의 여행은 곧 말도 안되는 일들이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모험으로 변모한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총 8회에 걸쳐 방송된 그 파란만장한 여정은 우습고 황당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코발트색 아드리아 해와 주홍빛 지붕을 비추는 햇살, 이국적인 동유럽의 풍광이 어우러져 설마 이게 꿈인가 싶기도 했다. 눈물과 감동도 있었다. 모든 모험기가 그러하듯 <꽃보다 누나>는 주인공들의 좌충우돌 성장기이기도 했다.

마침내 긴 여행의 꿈에서 깨어난 여배우들과 이승기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현실 세계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여행 내내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던 이미연은 <보그> 촬영 현장에도 가장 먼저 도착해 무사 귀환한 역전의 용사들을 뜨겁게 맞이했다. “친한 사람들끼리 가도 싸우고 온다는 게 여행이잖아요. 개성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배우들의 여행인 만큼 누구도 아프지 않고, 마음 상하지 않고 돌아오자는 게 가장 큰 목표였어요. 다행히 그건 성공한 것 같아요. 덕분에 돌아와서 몸살을 좀 앓았죠.” <개그콘서트>의 유행어를 흉내 내며 닭똥집과 골뱅이 소면을 폭풍 흡입하던 ‘잡식 소녀’ 김희애는 어느새 우아한 여배우로 돌아와 있었다. 하늘거리는 드레스 차림으로 다소곳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던 그에게 혹시 방송을 보았는지 묻자 김희애는 작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혹시’라니요? 당근!” 안타깝게 도 김자옥은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라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긴 여행이 끝나자마자 바로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 복귀한 김자옥은 추운 날씨에 강행군을 이어가느라 컨디션마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전국 투어 콘서트 중이던 이승기는 크리스마스 이브조차 콘서트 무대 위에서 맞이했다. 사실 이 쟁쟁한 배우들을 한날한시에 모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열흘간의 배낭여행은 애초에 불가사의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 수수께끼의 첫 번째 열쇠는 윤여정이 쥐고 있다.

퍼프소매 오간자 블라우스는 골든구스(Golden Goose), 자카드 풀 스커트는 레드 발렌티노(Red Valentino), 양손의 볼드한 골드 반지들은 까르띠에(Cartier), 파이톤 소재 오픈토 힐은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벤츠에서 내린 윤여정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오늘 입을 의상부터 체크하고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어수선한 촬영장 한쪽에 스스럼없이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야기의 서막을 열었다. “<1박 2일> 때부터 나영석이라는 사람의 팬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화가 왔어요. 전화도 아주 예쁘게 했어. 그래서 ‘아, 그럽시다. 나도 팬이에요. 말 나온 김에 빨리 봅시다. 어차피 나 지금 놀고 있으니까’라고 했죠. 그렇게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만났어요.” 모든 예능 PD들이 탐낼 만큼 재치 있는 말솜씨를 지닌 세련된 독설가 윤여정은 재빨리 시간을 지난해 여름으로 되돌렸다. <꽃보다 할배>를 한다는 광고가 막 나올 무렵이었다. 제작진이 내민 첫 기획안은 <꽃보다 누나>가 아니라 <꽃보다 할매>였다. 거절했다. “나 PD를 믿지만, ‘꽃할매’는 아니라고 했죠. 후발 주자는 불리하기 마련이니까.” 타 방송사에서 비슷한 컨셉의 방송이 시작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참 예쁘게도 2~3일 후에 다시 연락을 해왔어요. 절 만나고 나서 창피해서 혼났다는 거예요. 본인은 자기 아이디어니까 아무 고민 없이 다음 시리즈를 한다고만 여겼는데, 반성을 많이 했다고요. 참 대단하다 싶었죠. PD들이나 감독들이나 다 자기 잘났다는 사람들인데, 그런 얘기 쉽지 않잖아요?” 포맷이 바뀐 후에도 승강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 PD와 윤여정은 주말부부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다정하게 밥을 먹었다. “나중엔 우리끼리 폐단식까지 했어요. 정도 들었으니 그냥 다녀온 걸로 치자고 말이죠.” 김자옥의 섭외도 윤여정의 출연 조건 중 하나였다. 70년대의 신세대 아이콘이었던 김자옥과 윤여정은 무려 40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마침 김자옥이 새로 드라마에 들어간 상황이라 윤여정은 이번 여행이 성사되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나영석의 승. “인정! 그러니 내가 안 할 수 없죠. 그게 풀 스토리예요.”

김자옥과 윤여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다. 이승기는 그래서 <꽃보다 누나>를 “말로만 듣던 5촌 당숙의 예쁜 두 따님과 외할머니의 친구 두 분과 떠난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오래전 “누난 내 여자니까”라고 노래한 승기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1박 2일>의 원년 멤버로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나 PD와의 의리로 기꺼이 출연을 결심한 그는 누나들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동유럽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온종일 비지땀을 흘렸다. “서진이 형이 ‘힘들 거다, 승기야. 나보다 힘들 거 같아’라고 했을 때, 그게 많은 걸 포함하고 있단 걸 알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방심했어요.” 만능 짐꾼으로서 통역사와 관광 가이드 역할은 물론, 운전사, 인간 내비게이터, 요리사, 회계 임무까지 멋지게 수행해낸 이서진과 초보 짐꾼 승기는 같은 소속사다. 이번 여행에서 청일점 막내였던 그에겐 변변한 방 한 칸조차 없었다. 나 PD를 비롯한 스태프들과 동침하거나 장비 방을 오가며 쪽잠을 잤다. “한쪽에 촬영 장비들을 밀어놓고 잤는데, 어느 날은 악몽을 꿨어요. 이불을 막 당겨도 안 딸려오기에, 가위눌린 줄 알고 깜짝 놀랐죠. 일어나보니 이불 위에 짐이 너무 많이 쌓여 있었던 거예요.” 사실 불편한 잠자리는 <1박 2일>의 야외 취침으로 단련된 야생 승기에겐 큰 문제도 아니었다. 이승기는 자신이 잘못된 시험 범위를 공부했음을 여행이 시작된 후에야 깨달았다. “여행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는데, <1박 2일> 같은 예능으로만 생각한 거예요.” 데뷔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한 적 없는 이 착실한 모범생은 자신의 판단 착오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공부 많이 했는데, 성적 안 나오는 그런 친구들 있죠? 밤 새워서 공부해놓고 고작 점수는 30~40점 나오는… 제가 그런 경우였어요.” 이 건장한 20대 청년이 든든한 짐꾼이 아니라 그저 잘생긴 ‘짐’이었다는 사실은 여행 첫날부터 드러났다. 트램 타는 곳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고, 숙소를 찾아 천 리를 걸으며, 한번 길을 나서면 사라지기 일쑤, 자신의 노래 가사처럼 “알고 보면 여린 여자”인 누나들의 마음도 몰랐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노란 팽이에 온통 마음을 뺏긴 나머지 누나들을 몽땅 잃어버린 ‘팽이의 저주’ 사건은 유명하다. “팽이요? 터키를 떠나면서 그 나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왔어요. 저주를 끌고 갈 것 같았거든요.” 그때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그는 여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로 넘어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의 이동 경로에 관한 모든 경우의 수를 노트에 기록한 그는 여행 내내 그 보물 수첩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이미연이 입은 스팽글 주얼 장식 블라우스는 미우미우(Miu Miu), 하트 패턴 와이드 팬츠는 구찌(Gucci), 플랫폼 슈즈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이승기가 입은 패딩 베스트는퍼스트룩(Firstlook), 이국적인 플라워 프린트 셔츠는 프라다(Prada), 팬츠는 랑방(Lanvin), 레이스업 워커 부츠는 까르벤(Carven at Koon).

여행에 서툰 건 사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직접 숙소를 예약해본 건 처음이었어요. 혹시라도 다른 분들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죠.” 세화여고 시절부터 이미 청춘스타였던 이미연은 배낭여행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꽃보다 누나>의 제안을 받은 후, 이미연은 나 PD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행이 끝나고 1월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제가 감독님에게 뭐라고 말하게 될까요?” 나 PD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무조건 고마워할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제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편인데, 이런 사람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안 하던 짓 한다고 갑자기 죽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래서 마음 바뀌기 전에 바로 계약서 쓰자고 했어요.” 화끈한 성격의 이미연다운 LTE급 결정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이미연은 막내 이승기가 허둥지둥 적응해가는 동안 팀의 엔진 역할을 했다. 이 정열적인 여배우는 행동대장으로서 궂은일마다 앞장섰다. 거침없이 “익스큐즈 미!”를 외치며 한 손에는 여행 책자를, 다른 한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정의의 여신처럼 씩씩하게 나아갔다. 그 분위기에 동화된 이승기는 무의식중에 실수로 이미연을 “형”이라 부르기도 했다. <꽃보다 누나>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멋 부리는 것도 포기했다. 한동안 그는 ‘단벌 숙녀’로 통했다. “저도 여배우인데 기왕이면 잘 입고, 유행도 시키고 싶죠. 하지만 이건 배낭여행이잖아요. 거기에 더 집중하고 싶었어요. 여행 외에 다른 데 관심을 두기 힘들 만큼 체력적인 한계도 있었고요.” 한때 거상 김만덕이자 명성왕후이기도 했던 이미연은 지금껏 작품 속에서 맡아온 시대의 여성 리더들처럼 통이 크고 대범하다. “부인하고 싶진 않아요. 이번 여행을 통해 특히 더 느꼈는데, 전 어디에서든 싫으면 싫다고 분명히 얘길 하더라고요. 사실 전엔 제가 다른 여배우들과 좀 다르단 걸 몰랐어요. 여배우들과 함께 한 작품도 많지 않았고. 또 막상 친해지면 저만큼 여성스러운 사람도 드물거든요.” 실제로 그는 피난민 같은 생활 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선물한 ‘미연 다방’의 솜씨 좋은 바리스타이기도 했다. 사전 미팅을 통해 모닝커피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커피와 홍차를 담은 가방을 서울에서부터 따로 싸 짊어지고 왔다. “외국에 나가면 커피가 너무 진해 입맛에 안 맞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리고 커피가 지겨울 땐, 홍차만 있으면 우유를 데워 밀크티를 마실 수도 있으니까요.” 세심한 준비성이다. 아마 ‘꽃보다 할배’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배우들에겐 낯선 환경만큼이나 예능 촬영도 생경했다. 김희애는 방 안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빨간 눈을 끔벅거리는 24시간 관찰 카메라 때문에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자는 모습을 한 명도 아니고 수 천만 명의 남자가 이렇게 쳐다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운 거예요. 3~4일 정도 지나면 익숙해진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죠. 그렇다고 코미디에서처럼 좋은 것만 가려서 ‘이건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할 수는 없잖아요. 어차피 그런 걸 다 알고 온 거고요.” 김희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개그 프로그램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 여배우들의 말투를 다시 한 번 따라 했다. 이런 엉뚱함은 <꽃보다 누나>가 발굴해낸 김희애의 새로운 얼굴이다. <썰전>에서 김구라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김희애와 이미연을 캐스팅했다. 예능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꽃을 따온 것이다.” 83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브라운관 속의 김희애는 빈틈이 없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의 모범생이었고, 여성스러우면서도 자의식 강한 여성이었으며, 노골적인 섹스어필 없이도 관능적이고 고급스러웠다. 광고에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15초 여신’이었다. “두 아들의 엄마인 저는 완전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당황한 승기를 다독여가며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던 이 지혜로운 큰누나는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이면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제작진의 묵은지 김치찌개를 뺏어올 만큼 생활력도 강하다. “카메라 안에서도 연기고, 밖에서도 연기고, 모든 게 연기가 되면 정상적인 지구인으로 두 발을 딛고 살지 못하죠. ‘연기자는 내 직업이자 생활 수단’이라고 자꾸 의식하면서 툭툭 털어내야 내 삶을 살아요. 전 그래요.” 쇼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궁금해진다. 어디까지가 진짜 모습일까? “100% 진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짜도 아니죠. 카메라 앞에서 다 벗을 수는 없는 것처럼요.” 그는 반가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행복하면서도 조심스럽다고 했다. “친근하게 여기는 만큼 더 잘해야 하니까요.”

화이트 셔츠는 도나 카란 컬렉션(Donna Karan Collection), 섹시한 블랙 슬릿 롱스커트는발맹(Balmain), 실크 스카프는 에르메스(Hermès), 꽃 프린트 슈즈는 미우미우(Miu Miu).

그런 점에서 윤여정은 지난 방송이 영 달갑지가 않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미연과 ‘아름다운 푸푸’ 사건에 대해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자신의 큰 숙제인 변비때문에 고생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창피하죠. 지저분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 방송 다음 날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도 취소했어요. 식당 문 닫을 테니 나오라고 해서 겨우 밖에 나갔죠. 그날따라 내가 왜 그랬는지….” 한숨을 쉬며 푸념하던 윤여정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내가 비리를 저지른 건 아니잖아? 에잇, 몰라. 다른 사람들도 변비 때문에 고생하겠지, 뭐. 방송 나가고 난 다음에 앙탈을 부리면 뭐하겠어?” 윤여정은 쿨하게 문제를 체념했다. 성인군자도 모두의 호감을 살 수는 없는 법. 그리고는 귀엽게 덧붙였다. “만인이 좋아하면 일찍 죽어요.” 이토록 매력적인 67세 여배우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임상수와 홍상수의 영화로 칸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은 그는 유럽에서도 꽤 유명하다. 그가 출연했던 <고령화가족>이 ‘런던한국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크로아티아에서 바로 런던으로 날아간 그는 영화제 측에서 제공한 런던 사보이 호텔의 럭셔리한 스위트룸에서 그간의 여독을 풀었다. 이미연과 김희애가 챙겨준 전기장판을 광활한 킹 베드 위에 깔고 난 다음엔 인증샷을 찍어 나 PD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이런 데서 묵고 있다.’ “지상과 천상의 극과 극을 오간 셈이죠.” 윤여정은 유일한 60대 패셔니스타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면 윤여정 패딩, 운동화, 청바지, 부츠 등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힐링캠프> 때 신은 윤여정의 샤넬 스니커즈는 지금까지도 화제다. “진짜예요? 영광이죠. 난 협찬 받은 건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 편한 걸 찾지만, 젊을 땐 옷을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모 감독이 놀리죠. 옷만 안 사 입었으면 집을 두 채 더 샀을 거라고.” 청바지에 롱부츠를 맵시 있게 연출한 그는 어떤 칭찬보다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블랙 슬리브리스 드레스와 메탈 액세서리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다이아몬드 반지는 까르띠에(Cartier).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승기는 3일째에 접어들면서부터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여정 누님’이 지쳐 보일 때마다 “부스터, 부스터!”를 외치며 센스 있게 한 잔의 화이트 와인을 내밀었다. 알코올홀릭은 아님을 강조하는 윤여정이 패션만큼이나 사랑하는 일종의 피로 회복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짧은 시간 내에 뛰어난 학습력을 보여준 승기는 크로아티아를 샅샅이 뒤져 윤여정을 위한 맞춤형 고데기를 찾아냈으며, 빨간 구두를 찾아 헤매는 김자옥의 쇼핑 메이트가 되어 가방을 들어주고, 심지어 속옷 매장까지 동행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김희애와 연락이 끊겼을 땐, 리바 거리로 마중을 나와 빗속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여행 내내 그는 싹싹한 아들이자 사랑스러운 남동생, 듬직한 친구, 때로는 살가운 딸, 종합적으로는 ‘꽃누나’들의 활력소였다. 누나들의 칭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낯간지러운 표현을 못하는 윤여정조차 “승기는 참 앞뒤가 똑같다”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막내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김희애는 어린 나이에 데뷔했던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며 대견해했다. “프로의 세계에 일찍 뛰어들어 얻은 것도 많았지만, 전 평범한 학창 시절 속에서 그 나이대에 필요한 마음의 영양소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핸디캡은 있지만, 전 그런 게 좀 부러웠어요. 그런데 바르고 밝게 사회생활 하는 승기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싶기도 해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는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길 바랐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도를 닦은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요? 참 대단하고 배울 점이 많은 아이예요.” 이미연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이승기로 살기도 쉽지 않겠어요. 워낙 긍정적이고 바른 친구지만, 그 모범적인 이미지가 어느덧 그 친구가 짊어져야 할 어깨의 짐이 된 건 아닌가 안쓰럽기도 하죠.” 연예계 대선배들은 이 기특한 청년을 걱정하고 진심으로 이해했다.

프린트 셔츠는 폴 스미스(Paul Smith), 블루 컬러 팬츠는 랑방(Lanvin), 실크 스카프는 구찌(Gucci), 앵클부츠는 에르메스(Hermès).

방송에도 잠시 나왔지만, <꽃보다 누나>의 커뮤니티 밴드 이름은 ‘소녀시대’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공지 사항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제작진과의 소통 수단이었다. 소녀시대라는 이름처럼 여배우들의 감수성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모두의 시선을 받는 톱스타고, 가정에서는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 이모, 그리고 딸이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마음속엔 한없이 여린 소녀가 살고 있다. 그 소녀들은 새벽 시장의 신선한 과일 냄새를 맡고, 작은 선물 상점의 사랑스러운 물건들을 만지고, 바다의 푸른 춤을 구경하고, 모든 순간을 느끼며 때로는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단, 윤여정만 빼고. “난 연기할 때 빼고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절대 울지 않아요.” 물론 윤여정 역시 아름다운 크로아티아의 풍광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원래 여행에 별 감흥이 없는 사람이에요. 경치 좋은 걸 본다고 그걸 사가지고 오겠수, 뭘 하겠수?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잖아요. 여행을 싫어한다더니, 제일 ‘인조이’한다고요.” 여배우들이 손꼽은 관광 명소는 터키의 아야소피아 성당과 거리 악사의 연주도 들을 수 있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바다 풍경이 일품인 두브로브니크의 노천카페였다. 우리의 파란만장 승기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전부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순간이었요. 무사히 여행이 끝났으니까요.”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누나들을 자신의 콘서트에 초대했다. “한 번쯤은 저도 잘난 모습을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만회의 기회였던 셈이죠. 덕분에 이미지 쇄신했어요. 흐흐.” 싸이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등장하기도 했다. <꽃보다 누나>에 이르기까지 국민 남동생의 이미지를 만든 이승기의 데뷔곡 ‘내 여자라니까’의 작사·작곡자가 바로 싸이였다. “신기한 게 터키에 막 도착해 제일 혼란스러웠을 때, 싸이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10년 이상 같은 업계에서 버틴 사람들끼리는 미묘하고 끈끈한 동료애가 있는 것 같아요.”

김희애의 나비 프린트 슬리브리스 톱과 플리츠 풀 스커트는 랑방(Lanvin), PVC 소재 하이힐은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이미연의 리본 칼라 실크 블라우스는 클로에(Chloé), 블루 와이드 팬츠는 에르메스(Hermès), 컬러 블록 스틸레토 힐은 디올(Dior),플라워 장식 이어커프는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 at Mue).

윤여정의 방에 모여 빗소리를 들으며 와인을 마셨던 자그레브에서의 두 번째 밤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미연은 밤거리에 쓸쓸히 선 김희애를 꼭 안아주었다. “그날은 좀 많이 힘들었거든요. 오래 헤맸고, 날씨도 쌀쌀했어요. 모두 지친 상황에서 혼자 먼 곳을 보며 오도카니 선 희애 언니를 보는데, ‘왜 여기 와서 이 고생들을 하나’ 갑자기 눈물이 확 나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 인생의 짐이 제일 무겁겠지만, 그곳에선 나보다 더 힘든 다른 누군가가 보이기도 하더군요.”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걸어온 선후배 배우들은 늦은 밤까지 연기와 인생에 대한 조언을 릴레이처럼 주고받았다. 연기가 어렵다는 20년 후배 이승기에게 김희애는 중요한 건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윤여정은 연기 변신을 고민하는 20년 후배 김희애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아직까지 넌 창창하니까 빨리 깨질수록 좋아. 넌 연기자야. 유리관 속에서 ‘아, 김희애는 저런 여자구나’를 보여주는건 다 굴레 아냐? 너 편할 대로 하는 게 좋지 않아? 이게 꼭 장애물 경기같아. TV고 영화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김희애가 있어. 그 김희애를 뛰어넘어야 박수를 받지, 그렇지 않으면 매너리즘일 뿐. 또 다 팽개쳐, 사람들이. 우리 직업이 그런 게 참 냉정하고 무서운 거 같아.” 김희애는 교양 있는 40대 여자와 20대 피아니스트 남자의 사랑을 보여줄 JTBC <밀회>를 준비 중이다. 상대역은 곧 개봉할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도 함께 출연한 열아홉 살 연하의 유아인이다. 나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조차 훌쩍 뛰어넘은 이 파격의 여배우에게 더 이상 어떤 굴레가 문제가 될까?

왼쪽부터 이승기의 프린트 셔츠는 프라다(Prada), 스컬 패턴 서스펜더는 란스미어(Lansmere). 윤여정의 레이스 블라우스는 올 세인츠(All Saints), 테일러드 재킷은 DKNY, 김희애가 입은 프린트 셔츠는 폴 스미스(Paul Smith), 블랙 크롭트 재킷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이미연의 화이트 터틀 톱은 돌체앤가바나, 진주 드롭 이어링은 빈티지 헐리우드(Vintage Hollywood).

사진 촬영을 위해 오랜만에 다시 모인 이들은 정말 한 가족 같다. 지적인 멋쟁이 엄마 윤여정, 성숙하고 지혜로운 첫째 김희애, 가슴 뜨거운 정의의 여신 둘째 이미연, 어느새 남자가 된 속 깊은 막내 승기. 아쉽게도 함께하지 못한 낭만적인 4차원 이모 김자옥까지! <꽃보다 누나>라는 이름으로 9박 10일을 동고동락하면서 이들은 종종 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같은 작품을 한 적도 없고, 친분도 없는 우리가 뚱딴지처럼 이 먼 곳까지 와서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건 무슨 연유일까요?”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특별한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이들에겐 분명 어제와는 조금 다른 변화가 생겼다. 사교계의 여왕 윤여정은 나영석 PD와 이우정 작가라는 영리한 친구들을 얻었다. 새로운 작품도 준비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이경희 작가의 주말 연속극 〈참 좋은 시절>이다. “못생겨서 첫날밤에 소박맞은 무지렁이 여자예요. 이서진이 엄마고요.” 그의 아들 이서진은 다시 한 번 짐꾼으로서 <꽃보다 할배> 2탄에 출연한다. 재미있는 인연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돌아온 후부터 이승기는 무엇이든 스스로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한국에 와서 매니저에게 처음 했던 말이 ‘그동안 미안했다. 이제 많이 안 물어볼게’였어요. 그게 얼마나 피곤한 건지 깨달았거든요. 지난번 일본 방문 때는 내내 지하철을 타고 다녔고요.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김희애에게 <꽃보다 누나>는 배우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이젠 모두 내 편일 것 같고, 왠지 편해졌어요.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 트라우마처럼 있었거든요. 친구들끼리 하는 귓속말도 신경이 쓰이는데, 우린 늘 그런 생활이잖아요. 모든 게 조심스럽고.” 이미연은 아직 여행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 창고에 맡겨둔 여행 가방도 아직 꺼내오지 못한 상태다. “엊그제 일인 양 생생하다가 아주 오래전처럼 까마득하기도 하고, 진짜 그런 데 가긴 갔나 싶기도 해요. 그 실체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건 지금껏 제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뭔가를 크게 배웠다는 거예요.” 여행 마지막날, 이미연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어느 한국인 관광객의 말에 한참을 울었다. 인생은 아직도 길고, 삶이란 낯선 곳에서 길을 찾는 것만큼이나 수수께끼투성이지만, 용감무쌍한 누나들과 승기의 이 따뜻한 모험담은 일단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