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실종 시대

요즘 드라마와 영화 속 커플은 만화 주인공이거나, 1,000년 전 위인이거나, 외계에서 온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장강명 에세이 일러스트

내년에는 연애소설을 한 편 쓰고 싶어서 각종 연애물의 트렌드에 대해 (주로 아내를 통해) 귀동냥을 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청춘시대>와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그리고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해 들었다. 본격적으로 구상 단계에 들어가면 <제인 에어>도 다시 펼칠 생각이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가시나무새>도 읽으려 한다. 고전 걸작부터 먼저 연구해야겠지! 그렇다면 1990년대를 풍미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명작도 다시 봐야 하나? 1989년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지금 다시 보면 어떤 교훈을 얻을까? 요즘 같은 리메이크의 시대에 왜 이 작품은 다시 만들지 않을까? 그 답을 고민하다가 나는 꽤 음산하고 논쟁적인 가설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로맨틱 코미디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최근에 보신 분이 계신지? 나는 이 영화를 한때 무척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감흥이 시들해지더니 종국에는 괴롭기까지 했다. 멕 라이언은 마지막 관람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문제는 빌리 크리스탈이다. 간혹 화들짝 놀랄 정도로 무례하고 남성 중심적이다. 사실 영화의 태도 자체가 그렇다. 27년 사이에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다른 쪽이다. 이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의 고민이 2016년 기준으로는 너무나도 하찮고 사소해서 진지한 상담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 해리나 샐리가 요즘 자기 친구들한테 고민을 상담한다 치자. 상대의 반응은 이렇지 않을까? “남자 (사람) 친구, 여자 (사람) 친구가 갑자기 이성으로 느껴진다고? 그런 상태로 어쩌다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됐다고? 그게 뭐?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라고? 뭐냐? 너 나한테 자랑하는 거냐?”

1989년에는 그게 제법 큰 문제였던 거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온 남자와 여자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게. 한발 앞서나간 육체관계가 주는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할까, 따위가. 2016년 현재 OECD 가입국에서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춘 남녀는 천연기념물이나 마찬가지고, 따라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리메이크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이제 시대극의 영역에 들어서려 한다!

이미 2000년 즈음에 젊고 매력적인 남녀가 정서적 친밀도와 육체관계의 엇갈림에 대해 고민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수위는 되어야 했다.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원나잇 했는데 좀더 만나고 싶네?’(<베터 댄 섹스>) 2011년에는 이 정도. ‘연애는 하지 않고 섹스 파트너로만 지내기로 했는데 잘 안 되네?’(<프렌즈 위드 베네핏>)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나머지 두 편의 영화를 한 줄에 놓으면 어떤 일관된 방향이 보인다. 선남선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점점 더 협소하고 기묘해진다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몇 년 사이 한국의 로맨틱 드라마에서도 이 경향은 명확하다. 상대가 다중 인격자(<킬미, 힐미>), 상대가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상대가 만화 주인공(<W>), 상대가 역사 속 인물(<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점점 더 괴상해진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해서도 현실도피 혐의를 거두기 어려운데, 이 드라마 속 조선은 결국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정중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기억상실증(<첫 키스만 50번째>), 상대가 섹스 중독(<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상대가 뱀파이어(<트와일라잇>), 마침내는 상대가 좀비(<웜 바디스>)에까지 이르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로맨틱 코미디는 매력적인 남녀가 이런저런 장애로 위기를 겪다가 서로 맺어지는 과정에서 가볍고 달달한 흥을 주는 장르다. 여기서 남녀 캐릭터와 이야기 진행 방식에는 몇 가지 정형(定型)과 규칙이 있으므로,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독창적인 장애물이다. 그 장애물은 당사자들에게는 진지한 고민거리지만 동시에 관객에게는 농담거리가 될 만한 종류인 것이어야 한다. 엄청나게 무겁지는 않은 관습이나 한쪽 인물의 괴팍한 성격 같은 것이 좋다.

장애물이 그 이상으로 거대해지면 작품이 가볍고 달달해질 수 없다. KKK가 활약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러브 스토리는 낄낄거리며 볼 수가 없다. 아무리 분위기가 밝고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 해도. 그리고 그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역경에 맞선 두 사람을 다루는 휴머니즘 드라마로 분류될 것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자잘한 장애물이 현실 공간에 아주 많았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여성이 나이가 한 살만 많아도 ‘연상연하 커플’이라면서 별종 취급했다. 2000년대 중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노처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김삼순의 나이는 고작 30세였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장애물의 상당수가 제거되었고, 그로 인한 ‘소재 고갈’로 장르 전체가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또는 판타지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게 내 가설의 논지다.

물론 지금 한국에서도 남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엄연히 존재한다. 빈곤이라든가, 계급 차이라든가, 외모 같은 문제. 그러나 이런 주제를 다루면 분위기가 너무나 어두워져서 로맨틱 코미디가 되지 않는다. <청춘시대>가 로맨틱 코미디로 읽히지 않았던 이유다. 그 드라마는 시청자를 공포에 빠뜨리거나 죄책감이 들게 했다. 영화 <티끌모아 로맨스>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흥행에 실패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쾌하고 달콤하고 순결한 로맨스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공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