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패션을 위한 10가지 키워드
새로운 계절과 새 옷이 여자들을 유혹하는 8월! 여러분은 거울 앞에 서서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모든 걸 결정해야 한다. 바야흐로 10가지 패션 주문을 외울 시간. 거울아, 거울아! 올가을엔 뭘 입어야 하니?
“미러, 미러!” 줄리아 로버츠와 샤를리즈 테론은 얼마 전 둘이 똑같은 얘기를 하고 말았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젊고 멋지고 아름답길 원해 거울을 보며 주문을 외운 것. 공교롭게도 같은 동화를 주제로 한 영화(<백설공주>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서 두 여배우는 마녀 왕비로 열연했다. 젊음과 미모에 탐닉하는 왕비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은 밤낮 거울 앞에서 외모를 점검하며 자기 최면에 빠진다. 약지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끌어 올리며 어제에 비해 피부가 어떤지, 한쪽 어깨를 턱 아래로 비틀어 허리를 휜 다음 몸매 상태가 매끈한지 살핀다. 그런 뒤 정말 중요한 일 하나가 남았다. 새 계절을 맞아 새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폼 잡는 과시행위가 그것.
젊고, 멋지고, 아름답고! 패션은 이것 빼면 시체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여자의 그런 갈망에 옆구리 쿡쿡 찌른다. 2월과 3월, 뉴욕과 유럽에서 올가을 패션 위크가 열렸다. 당신이 좀더 젊고, 보다 멋지고, 가장 아름다울 수 있도록 부추길 옷들이 앙큼한 고양이처럼 무대에 나왔다 들어갔다. 청담동에 새로 생긴 SSG 푸드마켓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식품들을 고르듯, 당신은 취향과 다가올 상황에 맞는 유행에 핀을 꽂으면 된다. 그 옷 아니면 일이 손에 안 잡힐 것 같은 옷이 보인다면 ‘좋아요’ 버튼을 마음속으로 백만 번쯤 눌러도 좋다.
바야흐로 패션 거울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2012년 가을을 즐길 시간. “거울아, 거울아! 올가을엔 뭘 입어야 옷 잘 입었다는 소릴 듣니?” 하지만 웬걸? 유행의 거울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검은 그림자가 자욱하다. 가을 패션 위크가 열리던 3월로 되돌려보자. 한국에서 날이면 날마다 화제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었다. 결국 파리 패션 위크에서 릭 오웬스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보그> 트위터엔 이런 멘션이 올라왔다. “북소리와 불쇼! 국무 장씨의 흑주술이 파리의 밤에 휘몰아친 걸까요? 릭 오웬스를 패션계의 ‘국무 릭씨’라고 불러도 될 듯합니다.” 패션계의 ‘어둠의 자식’을 자처한 릭 오웬스 외에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흑주술에 빠졌다. 말쑥하고 젠틀한 스테파노 필라티마저 이브 생 로랑 고별작으로 헬무트 뉴튼 사진 속의 어둡고 강한 여성을 표현했다. 또 지방시, 아커만, 구찌, 베르사체, 랑방, 드멀미스터 등도 “Hello Darkness My Old Friend!”라며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첫 소절을 흥얼대는 느낌. 그러니 당신의 거울이 흑주술에 빠져도 섬뜩해 하지 마시라. 원색과 현란한 무늬가 방방 뜨던 지난 봄 기운을 누그러뜨리는 작용과 반작용의 패션 현상일 뿐이니까.
잠시 후엔 전신 거울이 걸린 드레스룸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가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들릴지 모른다. 말을 탄 용맹한 여인들의 환영과 함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매 시즌 다가올 유행의 방향을 지정하는 지방시 패션쇼의 첫 사운드트랙이 말발굽 소리였다. 특히 8090세대에게 익숙한 3인조 댄스그룹 소방차의 승마 바지, 에르메스를 풍자한 듯한 떠오르는 승마 부츠, 마차를 끄는 말의 눈가리개를 닮은 원형 귀고리의 조합이란! 밀라노에서는 구찌가 경마장 가는 길에 서있었다(구찌는 파리의 에르메스만큼 승마가 하우스의 귀중한 유산이다). 가을이 오면 여러분은 거울 앞에서 나와 백화점에 들러 지방시와 구찌의 승마 바지와 부츠를 비교해보시라. 늘 비슷비슷한 레퍼토리지만 앤 드멀미스터의 검정 플랫 부츠와 승마 바지도 비교체험에 끼워 넣어도 좋다. 좀더 기본에 충실하고 예의 바르게 승마 유행을 즐기고 싶다면? 타미 힐피거! 늘 그렇듯 고상하게? 에르메스! 아니면 아방가르드하게? 준야 와타나베!
일단 여기까지 패션 거울 속 풍경은 ‘어두운 승마’로 요약된다. 그런데 장교까지 합세하니 그야말로 올가을 패션은 영화 한 편이 따로 없다. 알투자라, 빅토리아 베컴, 제이슨 우 같은 뉴요커들은 물론 막스마라, 페라가모, 모스키노 등의 밀라니즈, 그리고 이자벨 마랑과 사카이 등 파리지엔에다 버버리 프로섬과 맥큐 같은 런더너들이 죄다 밀리터리 룩을 마련했다. 규격화되고 똑 부러진 외투, 바짝 긴장한 사관생도처럼 도열한 놋쇠 단추, 여기에 국방색까지. 혼자 거울 앞에 섰다면 분명 당신은 남몰래 거수 경례를 흉내 낼 듯. 사실 밀리터리 룩의 진수는 남자 친구가 한도 끝도 없이 들려주는 군대 얘기다.
하지만 그에게 실제적으로 힌트를 얻을 유행은 따로 있다. 바지 정장이 그것. 봄에 곱상하게 등장한 앙상블 수트는 잠시 보류다. ‘치마 하면 프라다’였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미우미우 무대를 온갖 팬츠 수트로 구성했으니까. 심지어 피날레 인사 땐 몸소 바지 정장을 입었다. 게다가 발렌시아가, 발맹, 고티에, 맥카트니, 샤넬, 아퀼라노 리몬디 등의 흠잡을 데 없는 팬츠 수트를 보자. 당장 재킷에 두 팔을, 팬츠에 두 다리를 쏙 끼워 넣고 싶지 않나?
자, 거울에 비친 다음 장면부터는 동공이 확장될 테니 몇 번 눈을 깜박이시길! 확 부푼 풍선처럼 옷이 빵빵해지는 광경을 목격할 테니 말이다. 이건 오버 사이즈 정도로는 약하다. 슈퍼 사이즈라고 해야 제대로 지칭한 기분이다. 우리 시대 패션 랍비, 꼼 데 가르쏭의 레이 카와쿠보와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손 하나 까딱하니 옷이 금세 거대해졌다. 보다 현실적인 예가 와 닿겠다고? 당대 스타일의 표준을 제시하는 셀린과 클로에가 양감을 키웠다면 쥐 죽은 듯 받아들일 수밖에. 사실 ‘스키니’를 처음 경험할 때 다들 치를 떨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 바지를 어찌 입냐고 “헉!”하던 시절 말이다. 이젠 모든 체형의 여자들이 애용하는 실루엣으로 일반화된 지 오래지만, 이젠 다른 실루엣 경험이 필요하다. 셀린과 발렌시아가의 볼륨 의상은 볼품없이 말랐든 짜증나게 살이 올랐든 간에 몸매 결점을 컨실러처럼 효과적으로 감춰준다. 이게 올가을 슈퍼 사이즈의 핵심이다. 단, 엄마 옷 몰래 입은 소녀처럼 보이지 않게 신경 쓸 것!
다음 단계에서는 망막이 팽팽 돌지 모르니 먼 산 한번 바라보고 다시 거울 앞에 서시라. 어둠의 세력에 의해 기가 눌려 있긴 해도 여전히 봄부터 지속된 패턴과 프린트의 창궐은 당최 풀이 꺾일 줄 모른다. 여러분 가운데 올 가을 프라다 광고에 실린 기하학 패턴을 보며 입을 못 다문 사람 꽤 있을 것이다(패션 골수들은 그녀의 96년 컬렉션 덕분에 이미 17년 전부터 인이 박혔을 듯). 60년대 실내 장식가 데이비드 힉스를 연상시키는 6각이나 마름모꼴 패턴이 수많은 국내 브랜드에 반사되는 건 안 봐도 비디오. 또 돌체앤가바나, 까르벤, 드리스 반 노튼 등의 동서양 역사적 프린트도 시각적 쾌락을 탐닉하는 패션 속성을 드러낸다. 패턴과 프린트 이상의 3D 효과도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진다. 알렉산더 맥퀸(모델이 한 떨기 꽃처럼 보였다), 발맹(파르베제 달걀에서 영감을 얻어 맥시멀리스트다운 장식을 뽐냈다), 루이 비통(반짝이 옷감과 보석 단추로 프라다와 비슷한 접근을 시도했다) 등등. 역시 패션은 보이는 게 전부다!
눈으로 실컷 구경했다면 다음은 질감과 촉감을 누릴 단계. 좀더 야릇한 시간이 펼쳐질 테니 거울을 선명하게 닦으시라. 그런 뒤 이끼처럼 매끄러운 벨벳, 양털처럼 보드라운 니트가 당신의 몸을 감싸고 도는 가을을 상상해 보시라. 먼저 구찌, 오스카 드 라 렌타, 랑방, 준야 와타나베, 버버리 프로섬, 에트로, 아크리스, 발맹 등의 벨벳 옷감이라. 청록이나 자줏빛으로 물들거나 문양 외에 나머지 부분을 불에 태운 번아웃 벨벳 옷들은 여러분의 가을에 관능미를 충분히 더한다. 다음은 마크 제이콥스, 로다테, 스텔라 맥카트니, 샤넬, A.F 반더 보스트, J.W 앤더슨 등의 니트 옷감. 소박하고 투박한 손뜨개로 떴거나 기계로 짜서 쫀쫀하고 일률적인 니트 옷들은 밤낮 쌩 하고 찬바람 부는 성격의 여자라도 인자하고 포근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결국 두 가지 옷감 모두 연인으로부터 스킨십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말씀.
말 그대로 빛과 그림자를 넘나드는 가을 패션 파노라마가 펼쳐진 거울. 당신은 안색과 주름살도 체크했고, 어깨부터 허리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선까지 쭉 훑었다. 그런 뒤 가을 새 옷을 입었다고 치자.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할 일은 ‘드라마틱’한 모자를 쓰는 것. 사실 모자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다. 중세 이후 지나치게 연극적 물건이 돼버렸으니까. 그래서 모자를 쓰면 눈에 띄거나 튀거나 둘 중 하나다. 아무튼 변변한 잇 백도 없는데다 킬 힐도 기가 꺾인 마당에 옷을 보조할 소품은 그나마 모자다. 현재 스코어 여러모로 가장 힘이 센 마크 제이콥스도 뉴욕과 파리에서 모자에 유난히 공들였다. 특히 뉴욕 쇼에서 모두를 기절초풍하게 한 기이하고 겁나게 큰 밍크 모자란! “내 생각에 모든 여자에겐 모피 코트가 필요하다. 단지 지금은 여자가 그걸 머리에 두른 것뿐.” 디자이너로서 좀 무책임한 설명이지만, 아무튼 제이콥스가 패션에 실종됐던 동화적이고 마법적인 재미를 다시 끄집어낸 건 인정! 이제 최종 단계. 당신은 줄리아와 샤를리즈보다 더 유혹적으로 주문 한마디 외우면 된다. “거울아, 거울아! 올가을, 세상 에서 누가 가장 멋들어지니?”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신광호
- 포토그래퍼
- KIM WESTERN ARNOLD, JAMES COCH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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