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전장에 핀 패션

2016.03.17

by VOGUE

    전장에 핀 패션

    패션과 정치의 관계? 치명적인 정치 상황을 겪은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과 패션 피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패션의 아름다운 힘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에 활짝 핀 패션의 꿈과 희망.

    최근 패션계에서 주목받은 우크라이나 패션. 우크라이나  표지들.

    2월 20일, 밀라노 포가차로 거리는 프라다 쇼를 찾은 사람들로 붐볐다. 렘 쿨하스의 철제 미끄럼틀 옆에 자리한 쇼장으로 전 세계 프레스와 바이어들이 입장했고, 무대 뒤편 쪽문 앞에는 담배를 피우는 모델들이 불량 여학생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암전과 함께 쇼가 시작되자 무대에는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등장한 옷들은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의상을 닮은 드레스와 모피 코트들.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의 마법에 걸린 관객들은 쇼장을 떠나면서도 실크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그곳의 누구도 밀라노에서 고작 1,600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았다.

    바로 그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는 ‘피의 목요일’이라는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최대 100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들이 숨지는 최악의 유혈 사태가 발생한 것. 친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이 EU 가입 반대 법안을 허락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이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군중이 독립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결국 무자비한 경찰 권력으로 인해 최악의 폭력 사태가 발발했다.

    프라다의 드레스와 키예프의 무력시위.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 살 것 같은 둘 사이에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패션 피플들이 밀라노를 거쳐 파리로 건너가는 동안, 우크라이나 사태는 최악의 코너를 돌아 대통령의 망명, 크림반도의 분리 독립, 러시아와의 국경을 둘러싼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 하루 종일 10개가 넘는 패션쇼와 프레젠테이션을 오가며 디올 드레스의 자수 장식과 로저 비비에 펌프스의 가죽을 논하던 패피들에게 이 사태는 호텔 객실의 CNN 화면 속 딴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전혀 다른 두 세상 간의 연결 고리가 발견된 것은 2월 26일 파리 루이 비통 본사에서 였다. 차세대 패션 스타를 찾는 사상 최대 콘테스트 ‘LVMH 프라이즈’의 1차 후보 30명과 칼 라거펠트, 니콜라 제스키에르, 라프 시몬스를 비롯한 슈퍼스타들, 안나 윈투어와 카린 로이펠트 등의 파워 플레이어들로 가득한 현장. 그곳에는 간신히 키예프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두 명의 우크라이나 출신 디자이너가 눈에 띄었다. 안나 옥토버(Anna October)와 줄리 파스칼(Julie Paskal)이 바로 그 주인공. 각자의 라벨을 디자인하는 이 젊은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이 최종 후보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3월 4일 알렉산더 맥퀸 쇼가 열리기 직전, 마레의 작은 쇼룸에서 조촐한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미국 <보그> 패션 칼럼니스트 사라 무어와 우크라이나 패션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저널리스트 다리아 샤포바로바(Daria Shapovalova)가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을 위해 후원 행사를 연 것. 이곳에는 각국 <보그> 패션 에디터들은 물론, 수많은 바이어들이 참석해 우크라이나와 그 나라 패션에 힘을 실었다.

    수백 명이 다치고,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패션 파티라니!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파리로 건너온 우크라이나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상징하는 건 가능성이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다는 기대가 그들의 레이스 드레스와 가죽 재킷에 담긴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국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많은 변화를 겪고 있죠.” 지난해 스무 번째로 <보그> 패밀리에 합류한 우크라이나판 <보그> 편집장 마샤 츠카노바(Masha Tsukanova)는 <보그 코리아>에 우크라이나와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첫 번째 럭셔리 쇼핑 거리가 생긴 건 9년 전. 우크라이나 <보그>는 이제 한 살이 됐어요. 우크라이나 패션은 우리 눈 앞에서 성장하는 셈이죠.” 지난 몇 달간의 비극적 사태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보그>는 발간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혁명, 쿠데타, 러시아의 무력 점령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에 집중하기란 어려운 일이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혁명이 일어난 광장 근처 패션 매장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매출(<보그> 광고 매출도 마찬가지)은 제로에 가까웠다. 게다가 얼마 전 열린 ‘키예프 패션 데이즈’의 스폰서였던 메르세데스-벤츠는 후원마저 철회했다. 하지만 츠카노바는 이렇게 단언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동전의 한 면일 뿐. 더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고 믿습니다.”

    우크라이나 패션의 미래에 운명을 걸었던 다리아 샤포바로바도 동의한다. “7년 전에 저는 우크라이나 TV를 통해 패션을 처음 다뤘습니다.” 뉴욕과 런던, 밀라노, 파리 등에서 직접 패션쇼를 취재하고, 라거펠트 같은 패션 거장은 물론, 크리스토퍼 케인 등 젊은 스타를 직접 인터뷰하는 노력 덕분에 패션과 파티를 구분하지 못하던 우크라이나 패션도 서서히 변했다. 그녀의 주도로 4년 전 탄생한 키예프 패션 데이즈는 의외의 성과를 거뒀다. “몇 년 만에 키예프는 유럽의 새로운 패션 도시로서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영국과 이태리 <보그>를 비롯해 스타일닷컴 등이 키예프 패션 데이즈를 소개했죠. 2014년엔 런던 패션 위크 기간 중 ‘패션 스카우트’란 행사를 기획했고, 피렌체 ‘피티 우오모’엔 초대 국가로 참석했으며, 파리에서는 쇼룸까지 열었습니다.”

    편집장 마샤 츠카노바. 오른쪽 꽃무늬 드레스는 안나 옥토버, 장난스러운 문구의 티셔츠는 안나 K. 핑크색 스커트와 크롭트 톱은 줄리 파스칼 컬렉션. 중앙 아래는 파리 쇼룸에 함께한 미국  사라 무어와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

    열아홉 살에 소도시 오데사에서 자신의 라벨을 시작한 디자이너 안나 옥토버도 패션의 희망을 몸소 체험했다. “정치 상황 때문에 패션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시위에 참석하고 아는 사람들이 다치는 걸 지켜봐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제게 주어진 건 묵묵히 제 일을 해나가는 거였어요.” LVMH 프라이즈 후보에 올라 파리를 찾은 그녀는 패션계 최고 인물들에게 우크라이나 패션의 파란 싹을 보여준 셈이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긴박한 뉴스에 놀라기만 했을 뿐, 또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건 모르죠. 우리가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스스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카트린느 드뇌브와 샬롯 램플링에게서 영감을 얻은 그녀의 컬렉션은 분명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이미지였다.

    이 젊은 여성들의 노력은 패션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가디언> <파이낸셜타임스> 등 세계적 명성의 일간지는 물론, 수지 버블 등의 슈퍼 블로거들이 각각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희망을 전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 이야기를 전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여성스럽습니다.” 츠카노바는 우크라이나 패션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비로소 진정한 우아함과 세련되고 정제된 취향을 갖게 됐습니다. 스마트한 패션을 좋아하죠. 우크라이나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 것도 즐깁니다. 물론 루이 비통, 디올, 샤넬, 프라다, 구찌를 좋아하는 만큼, 마르니, 겐조, 이자벨 마랑, 까르벵, 알렉산더 왕과 아크네 스튜디오 등도 아끼죠.” 그녀의 말대로 4월 초 <뉴욕타임스>가 취재한 키예프 패션 데이즈의 스트리트 패션 멋쟁이들은 안나 옥토버의 코트에 셀린의 부츠를 신고, 파스칼의 파카에 라프 시몬스의 백팩을 걸치고 있었다. 파리 쇼장 주변 멋쟁이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패셔니스타들의 도시였다.

    “우크라이나 패션은 잠재력으로 충만합니다. 가령 가장 나이 어린 디자이너인 안나 K.(Anna K.)의 옷은 루이자비아로마와 꼴레트에서 팔리고 있죠. 한국에서는 ‘퀸 마마 마켓(queenmama.com)’에서도 판매될 예정입니다.” 우크라이나 패션의 가능성을 전파 중인 샤포바로바는 <보그 코리아>와의 이메일을 통해 새로운 자국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에게 안나의 성공은 엄청난 성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샤 카네브스키(Sasha Kanevski), 안톤 벨린스키(Anton Belinskiy), 라라 퀸트(Lara Quint), 크라실리니코바(Krasilnikova)도 빼놓을 수 없어요. 그들 모두 mbkievfashiondays.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츠카노바 역시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을 추천했다. “리트코브스카야(Litkovskaya), 레이크(LAKE), 베브자(Bevza) 등은 세련된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안나 옥토버, 파스칼, 크세니아 키리바(Ksenia Kireeva)는 세계 무대에서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패션 개척자나 마찬가지인 릴리아 푸스토비트(Lilia Poustovit)까지!”

    최근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휩싸인 국가는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총리 반대 시위가 이어지는 태국, 학생들이 국회를 점거한 대만, 1년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 베네수엘라 등등. 하지만 어려운 시국 상황에도 패션의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 태국 <보그> 에디터들의 인스타그램에는 시위에 참석한 인증 사진과 시위를 지지하는 디자이너들의 액세서리가 눈에 띈다. 또 대만 학생들은 검정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입은 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했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 가운데에도 패션은 희망을 전한다. 2011년 대지진을 겪은 일본을 위해 전 세계 <보그> 편집장들과 톱 디자이너들이 도쿄에 집결했고, 중국 <보그> 역시 쓰촨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자선 행사를 열었다.

    “옷을 입는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우리는 본능에 더 충실하죠.” 우크라이나 정치 상황과 디자이너들의 노력을 지켜본 <파이낸셜타임스>의 바네사 프리드맨은 이렇게 전한다. “패션은 자존감과 쓰러지지 않는 의지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여성들의 조용한 힘이 담긴 꽃무늬 드레스와 세련된 코트들. 지금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과 패션 피플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옷에 담긴 자존감과 의지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이 새로운 건 아니다. 1차 대전 발발 당시, 미국 <보그>는 커버에 붉은 십자가(적십자) 모티브를 담아 평화를 전했고, 전쟁이 끝나자 이렇게 선언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파리에서는 위대한 꾸뛰리에들이 차례대로 패션쇼를 열고 있다. 이 새로운 패션에 담긴 용감무쌍함은 승리를 알리는 신호 같다. 그러고 보면 승리는 언제나 여신의 것 아니었나!”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포토그래퍼
      SEBASTIAN MADER
      기타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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