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탱 갤러리 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랑 그라소의 개인전은 규모와 상관없이 매우 야심차다. 가장 ‘현대적’인 ‘현대미술가’가 정의하는 ‘현대미술’의 ‘현재’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성과 근대성, 역사와 정치, 상업과 예술의 숱한 만남이 유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동네. 경복궁과 청와대를 곁에 둔 삼청동 초입, 팔판동에 ‘페로탱 갤러리’의 서울 분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이미 흥미진진했다.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는 매우 프랑스적인 갤러리, 페로탱의 예술적 안목이 일대의 문화 지형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의 풍경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의 궁금증은 개관전의 주인공인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확신에 찬 기대로 변모했다. (사진) 종로구 팔판동에 문을 연 페로탱 갤러리 서울 분관.
페로탱 갤러리는 “프랑스 아티스트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띠면서도 주제와 방식면에서 두려움 없이 실험하는, 그야말로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이국적이고, 동시에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미술관 등에서의 전시를 통해) 친숙한 한국 아트 신과도 잘 어울리는 작가”라 판단했다. 회화, 영상, 조각, 사진 등 매체의 경계를 관통하는 다양한 작품은 공통적으로 로랑 그라소 특유의 다층적인 시간성과 공간성으로 직조되어 있는데, 이로써 관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낯선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사진) 페로탱 갤러리의 내부 전경.
“기상 현상으로서의 일식 자체보다는 상황이 주는 매혹적인 기묘함에 관심이 있어요. 나는 사물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그들 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해요. 일식도 하나의 현상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신비로운 징조로 받아들였어요.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은 미지의 영역이에요. 바꿀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기이한’ 느낌마저 들죠. 이런 것이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사진) 설치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로랑 그라소
전시장의 시간이 유독 천천히 흐르듯 느껴지는 건 영상 작품 ‘엘리제’ 덕분일 것이다. 카메라가 실제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인 ‘황금 살롱’을 유유히 훑고 지나고, 니콜라스 고댕의 사운드가 나지막이 깔린다. 19세기의 황금 장식과 현대적인 물건을 밀착하여 보여주는 영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너진 시간의 경계를 거닐면서 전 시대에서 통용되는 가치, 즉 황금색의 화려한 궁 장식이 상징하는 권력의 미학을 재고하게 한다. (사진) 네온 형태의 ‘Elysée’(2016).
“나조차 바보같이 한평생 같은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처럼 해야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죠. 나는 지금의 세상이 내게 보여주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어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와 다양한 기술이 있는데, 평생 한 가지 예술 기법을 연습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는 그가 거리낌없이 다양한 매체를 활보하며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는 이유이며, 로랑 그라소식의 현대미술이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진) ‘Anechoic Wall’(2016).
“관객들을 특정한 심리 상태에 놓이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마치 ‘약물’처럼 감정과 정신을 바꾸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같은 영상이라도 내 작품은 광고나 영화가 아니라 당신을 특별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이르도록 하는 일종의 ‘실험’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키지 못해 안달인 요즘, 그는 예술을 통해 납득하는 대신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현대미술가’ 로랑 그라소의 ‘현대성’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사진) 영상 ‘Elysée’(2016) 앞에 놓인 조각 ‘Archimedes’(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