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경리단길 미술관

2023.02.20

by VOGUE

    경리단길 미술관

    요즘 서울에서 가장 힙하다는 경리단길에 꼭 가봐야 할 예쁜 명소가 하나 더 생겼다. 최정화의 <짓, 것>에 이어 유승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신생 공간 P21이다.


    로보트 태권브이가 경리단길에 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본격적인 비상에 앞서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요즘 서울에서 젊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인다는 경리단길의 낡은 건물 옥상에서 말이다. P21의 개관전이 열리던 9월 22일 저녁이었다. 하얏트로 향하는 오르막길 앞은 소식을 듣고 찾아 온 각국의 미술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P21은 박여숙 화랑에서 파생된 신생 공간이다. 그간 박여숙 화랑에서 해외 부문을 담당해온 최수연 디렉터가 야심차게 선보이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실험 무대다. 최수연 디렉터는 청담동 미술 시장을 이끈 박여숙 대표의 딸이기도 하다.

    수제 맥주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 한 켠에 자리 잡은 P21은 입구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길가에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공간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은 화이트 월의 모양새를 갖췄지만 다른 한쪽은 날 것 그대로다. 각각의 공간은 신문지 네 장을 펼치면 꽉 찰 만큼 작다. 그래서 재미있다. 뜻밖의 밀실이나 옥상으로 향하는 비밀통로가 나타나기도 한다. 언뜻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같기도 하다. 그만큼 이질감이 없다. 오래된 것과 새 것이 한데 뒤섞인 이 트렌디한 동네의 모습 그대로다.

    첫쇼의 주인공은 최정화 작가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을 주 재료로 한 대형 설치 작품들로 잘 알려진 최정화는 동서고금의 잡동사니들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개관전 <짓, 것>을 위해 작가는 됫박, 제기, 배틀, 촛대, 양푼, 솥 등의 고물과 폐타이어, 부표, 플라스틱 뚜껑 등 현대식 폐물들을 총집합시켰다. 제 쓰임을 다한 생활용품들은 작가의 부름 아래 옹기종기 모여 다시 하나의 탑을 이룬다. 그 가운데 장승도 우뚝 서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삼라만상, 세상만사의 잡다한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생활의 풍경은 그 어떤 기념비보다 의미 있다. 또 옥상에는 로보트태권브이를 설치했다.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거대한 몸을 일으키는 옛 만화 속 영웅이 달빛 아래서 은은하게 빛났다. 10월 22일까지 이어진 전시 기간 동안 이곳에선 최정화 작가와 함께 하는 맥주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구경하고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Yoo Seungho, 뇌출혈 natural, 2017, acrylic on canvas, 145.5 x 112

    Yoo Seungho, 머리채를 뒤흔들어 Shaking your hair loose, 2015, ink on paper, 101.5x81

    Yoo Seungho, 문 moon , 2017, acrylic on canvas, 145 x 112

    Yoo Seungho, 점순이, 2017, acrylic on canvas, 95 x 57

    Yoo Seungho,joo roo roo rook 주루루룩, 2017, acrylic on canvas, 145.5x112cm


    최정화의 뒤를 잇는 작가는 유승호다. 10월 26일부터 11월 25일까지 P21에서는 유승호의 개인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시가 열린다. 박여숙 화랑과 P21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번 전시를 통해 P21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2005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보다 2배 높은 HKD56만 400(USD약 7만 2000)에 낙찰되면서 유명세를 탄 유승호 작가의 글자 산수 시리즈가 박여숙 화랑에서 전시되는 동안 P21에서는 신작이 공개된다. 점처럼 작은 크기의 글자들을 무수히 반복하며 송대 산수화 같은 중국의 명화들을 재해석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잉크와 펜 대신 붓을 들었다. 무채색으로 일관해온 기존 작업과 달리 화폭은 총천연색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형광색 캔버스에 초서체로 써 내려간 글자들은 여전히 유머러스하다. 예를 들어 핏빛 석양 아래의 산맥을 담은 ‘뇌출혈’은 자세히 보면 ‘Natural’이라는 영단어를 문자도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3미터가 넘는 형광 주황색 캔버스의 ‘초(Fool)’는 추사 김정희가 초서체로 쓴 다산초당 현판의 한자 초를 모티브 삼아 말 그대로 ‘촛불’처럼 빛난다.
    유흥가의 네온사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광 캔버스에 새겨진 전통 서체와 유승호의 언어 유희는 경리단길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맞아 떨어지며 묘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 동서양의 제대로 된 만남이다. 남산 선비골의 전통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서양식 정서가 뒤엉키며 새로운 키치 문화를 만들어낸 이 오래된 골목길은 덕분에 요즘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로 통한다. P21은 이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People)이 하나가 되는(21, To One) 장소가 되고자 한다. 최수연 디렉터는 “우리를 둘러싼 동시대 미술과 시각문화를 포함해 삶의 아름다움을 더할 모든 것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꾼다. 경리단길에 예쁜 명소가 하나 더 생겼다. 남산 산책길에 꼭 한번 들려보자.

    문의 / 02-790-5503
    Instagram @p21.kr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 74(이태원동 5-13)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포토그래퍼
      COURTESY OF P21
      에디터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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