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제니 홀저, 시대의 명상록

2018.08.21

by VOGUE

    제니 홀저, 시대의 명상록

    40년 전에 시작된 제니 홀저의 진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세상에 각인된 ‘Holzergram’의 텍스트는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이끄는 시대의 명상록으로 자리 잡았다. 뉴욕주의 농장과 브루클린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 예술가로 살게 했다고 말한다.

    예술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나, 적어도 대중을 설득하고자 하거나, 최소한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판타지를 가진 예술가에게도 자신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예술과 정치를 접합한 텍스트 작품으로 유명한 제니 홀저(Jenny Holzer)에게 뉴욕 북부의 후식(Hoosick)에 위치한 농장은 말이 필요 없는 곳이다. 18세기 마차 여관이었던 이 집에서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신작을 들여다보고, 마구간과 헛간을 오가며 말을 돌보고, 손자를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빨간색 유리 전등이, 미국 가구의 역사가 담긴 오크 찬장이, 절친인 헬무트 랭에게 선물 받은 우비가 있고, 또한 홀저와 남편 마이크(역시 작가)의 친구 솔 르윗의 드로잉이 벽 전체에 있다. 홀저가 만든 대리석 벤치와 드로잉을 맞바꾼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이런 완벽한 작품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요.”
    제니 홀저는 여성 작가들의 드로잉과 작품도 사랑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조안 미첼, 앨리스 닐, 아그네스 마틴, 에바 헤세, 루이즈 네벨슨, 오노 요코, 로즈마리 트로켈, 루이즈 롤러, 나탈리아 곤차로바, 로사 보뇌르 등의 작품을 곁에 두고, 연구하고 즐긴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격언 “Art is a guaranty of sanity(예술은 제정신이라는 증거다)”를 전했다. “방대한 레퍼런스를 가진 작가였어요. 그녀의 놀라운 마음이 작품에서 드러나죠. 하지만 정신이상(Insanity)을 반영하는 예술도 소중하다고 봐요. 루이즈와 달리 내겐 승화가 필요합니다. 비참함과 분노를 그렇게만 보이지 않도록 변형하거나 범죄자의 초상을 만드는 방법으로 말이죠.”

    한쪽 벽 전체를 솔 르윗의 작업으로 구성했다. 아래 그림은 제니 홀저가 최근 다시 작업 중인 회화 작품.

    추상화가, 개념미술가, 정치 활동가, 페미니스트, 환경 운동가 등의 타이틀은 제니 홀저가 세상에 내놓은 텍스트로 규정된 셈이다. 권력, 학대, 소비, 통제, 섹스, 살인, 전쟁 등을 담은 메시지는 서술형의 단호한 문장으로, 무심하지만 분노 어린 목소리로 발화했다. 그러나 지금의 홀저를 설명하는 확실한 방법은 <인터뷰> 매거진에서 키키 스미스가 말한 바를 빌리는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정보와 텍스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미술가.” 구체적으로는 기밀 해제된 정부 문서, 부검 보고서, FBI의 이메일, 억류자들이 보낸 편지,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증언 등을 미술의 소재와 주제로 적극 활용하는 예술가. 홀저는 심미성과 시적 요소를 잃지 않으면서 예술을 시각적으로 정치화하는 데 성공한 흔치 않은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아름답지 않은 적 없지만, 이것이 비인도주의적 야만성에 대한 비판의 중대성을 약화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선동성을 일깨우는 ‘현대인의 명상록’은 다음과 같다. ‘Fear is the most elegant weapon(공포는 가장 우아한 무기다)’ ‘Raise boys and girls the same way(소년과 소녀를 같은 방식으로 키워라)’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날 보호해줘)’ ‘You are a victim of the rules you live by(당신은 삶이 정한 규칙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Romantic love was invented to manipulate woman(로맨틱한 사랑은 여자를 조종했다)’ ‘Money Creates Taste(돈은 취향을 만든다)’ ‘Selfishness is the most basic motivation(이기적이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동기다)’…

    미국이 대통령 선거와 ‘Trumpism’으로 뜨겁던 2017년 1월, 맨해튼에서 ‘Alden Projects’를 선보였다. 제니 홀저가 1977년부터 선보인 100점 이상의 포스터, 도발적이고도 정치적인 격언이 수십 년 만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대부분 당시 홀저가 거리 캠페인에 쓴, 아트 숍에서 포스터 한 장을 1 달러(지금은 1,000달러)에 구매한 올던이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이 사건은 여전히 홀저의 텍스트가 유효함을 방증하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없었다. 2001년 911 이후에는 ‘If you see something, say something’ 같은 홀저의 텍스트가 충격과 슬픔에 잠긴 뉴요커들을 위로했다.

    ‘Xenon for Rio de Janeiro’, 1999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Photo: Beto Felicio

    브루클린 스튜디오에서는 맨해튼 다리와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창밖 풍경을 좋아하는 그녀는 본래 ‘길거리 태생’이었다. 한밤중에 포스터 작품 ‘Truisms’를 맨해튼 도처에 붙이고 다니는 것만이 “스스로 작가인지 확신할 수 없던 예가”의 유일한 실천이었다. 당시 대중은 어떤 문장을 철학책에서 읽는 것과 타임스 스퀘어 광고판에서 보는 것이 완전 다른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데님 쇼츠에 “권력의 남용은 놀랍지 않다(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라 쓰인 싱글렛을 입은 여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은 전설이되었다. 사람들은 문장을 읽고, 대화하고, 논쟁하며, 문장에 밑줄과 별표를 그렸다. 갤러리, 미술관의 관습을 뒤로한 채 개념미술을 거리로 데려감으로써,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같은 ‘Holzergram’을 발명한 셈이다. 홀저의 의견은 기억, 경험, 정치 성향 등을 촉매 삼아 대중을 결집시키는 서사가 되었고, 호의적이든 아니든 이들의 반응은 작업을 지속할 명분과 힘을 주었다.

    그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격이 1,000배나 오른 포스터도 홀저의 변화를 대변하기엔 부족하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디아 예술센터, 뉴욕 구겐하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를 모두 해낸 것이 내 커리어의 차이점을 만들었다”고 홀저는 <보그>에 털어놓았다. 게다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 작가로 미술사에 기록된 그녀는 그해 황금사자상까지 거머쥐었다. 게릴라처럼 종횡무진하며 뉴욕 뉴웨이브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그녀가 명망 높은 미술관 쇼에 초대받는 영광을 예정한 시기이기도 했다. 배우 겸 감독 데니스 호퍼는 그녀에게 영감을 얻은 영화 <뒤로 가는 남과 여(Catchfire)>를 제작했고, 조디 포스터가 그녀로 분했다. 청부 살인업자가 현대 예술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지만,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논란의 여지 없이 홀저가 ‘셀러브리티’임을 증명했다.

    그 후부터는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제니 홀저의 삶이 펼쳐졌다. 그러나 ‘스타’도 언젠가는 선배가 되고, ‘선배’는 스타로 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 얼마 전 홀저는 회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땐 오로지 수채화 작업만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너무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억누르기 때문이죠. 숙련된 화가들이 표면에 금박을 입힌 유화 작업을, 미술사학자들을 포함한 이들이 전시와 프로젝트를 돕습니다. 우리는 건축가, 건설업자 혹은 둘 다처럼 움직여요. 전광판, 공공 미술의 프로젝션 작업은 정기적으로 몰두하는 일이죠.”

    제니 홀저에게 모든 텍스트를 대문자로 만드는 게 당연한 것처럼(인터뷰 답변도 모두 대문자였다), ‘유비쿼터스’적 존재로 사는 것도 그렇다. 미국 보그닷컴이 선보인 총기 사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에서 그녀는 실제 총기 사건 희생자들의 언어를 디지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My dad was killed, along with 13 of his coworkers’ 같은 문장이 색과 크기를 달리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책상에서 홀저의 ‘작품’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해 영국 블레넘(Blenheim)궁의 전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활동한 간호사이자 레지스탕트, 시인 안나 스위르(Anna Swir)의 경험이 차용되었다. 홀저는 건물에 텍스트를 투사하고 글을 새긴 대리석 벤치를 둔 것은 물론 휴대폰으로 텍스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테마파크에만 가도 스마트폰에서 안킬로사우루스가 튀어나오는 기술을 만끽할 수 있는 요즘, 홀저의 텍스트 아트를 구현하지 못할 리 만무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이며, 예술을 대중 플랫폼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인식과 선택의 문제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신문의 단어를 자신의 입체주의 그림에 활용한 것처럼, 포스터, 티셔츠, 모자, 전광판, MTV 채널 같은 대중적 채널로 메시지를 ‘유통’해온 홀저는 급기야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LED가 홀저의 전매특허가 된 건 이 반짝임이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는 동안, 난무하는 불빛 사이에서도 자신의 LED가 효과적이고도 아름답게 발언하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것, 일시적인 것,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반짝이는 텍스트는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실제 세계란 객관적 사실만 뜻하는 게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 의식까지 포함된 것이다.”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쓰인 바대로, 제니 홀저의 언어적 기교는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재고하게 한다. 정치의식이란 어떤 당을 지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며, 해외 토픽의 소재가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다. 홀저의 문장은 화자를 생략함으로써 읽는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하고, 이로써 이데올로기, 욕망, 두려움, 유머, 분노, 증오 등 사회적 잠재의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며 창백한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삶의 관성을 거슬러 끊임없이 각성시킨다. ‘용감한 예술가’ 제니 홀저가 세상을 둘러싼 진실 혹은 진실의 원리를 질문하기 위해 수십 년 전부터 취해온 이 방식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현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최초의 ‘시각적(예술적)’ 경험은 무엇인가요?
    내 어머니는 종종 “이것 보렴!”이라고 하셨죠. 그녀가 옳았어요.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나요?
    손자가 내 진짜 사무실에서 자고 있어서, 나는 침실 책상에 자리 잡았어요. 딸이 어릴 때,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계획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침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게 재미있네요. 18세기에 지어진 이 오래된 집의 창밖에는 사탕단풍과 독미나리나무가 있어요. 텔레비전 뉴스를 틀었지만, 소리는 꺼두었고요.

    ‘왜’라는 질문을 좋아하나요? 뉴스를 보다 보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질문인데.
    좋아합니다. 어떤 일의 이면을 이해하게 하고, 적절하게 행동해 문제를 방지하거나, 최소한 그럴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에요.

    이 농장과 브루클린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최근 이상한 습관이 생겼는데, 가능할 때면 언제나 뭔지 모를 수채화를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서든 이젤 가까이에 있는 걸 좋아해요. 수십 년간 기술과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예술을 하다 다시 이젤로 작업하고 있다니, 저도 웃음이 나요. 침대에서 반쯤 잠든 채 나의 사회이자 골동품인 블랙베리로 셀 수 없이 많은 이메일을 보는것도 즐깁니다.

    가장 혁신적인 문 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난 ‘Protect me from what I want’를 좋아합니다만. 내 문장 중에서는 “지배적인 문화를 이용해 빠르게 변화시켜라(Use what is dominant in a culture to change it quickly)”. 폴란드 시인 안나 스위르의 시도 있어요. “고통은 내게 유용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쓸 수 있는 특권을 준다. 내 고통은 연필이고 나는 그걸로 글을 쓴다(My suffering is useful to me. It gives me the privilege to write on the suffering of others. My suffering is a pencil with which I write).”

    최근 몰두하는 주제 혹은 방식의 작품이 있나요?
    늘 그래왔듯,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는지 배우고, 정보 공개법 덕분에 세상에 드러난 예전 국가 기밀문서를 어떻게 선보일지 등에 열심이에요. 스튜디오에서는 가장 흥미로운 내용을 매력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매체인 전광판으로 끊임없이 작업하죠. 특히 나는 공공장소 프로젝션에 애착이 있어요. 행인들에게 바치는 것인 데다, 흰색의 빛에는 운율이있으며, 부드럽고 예쁘니까요. 가을에는 ‘세이브 더 칠드런’과 함께 ‘세계 여자아이의 날(10월 11일)’에 맞춰 자유의 여신상에 프로젝션을 투사할 예정이에요.

    ‘미국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내 글을 인용하는 게 편치 않지만, 트럼프 정부 아래에서는 “미래는 어리석다(The future is stupid)”라는 조지 오웰의 문장이 떠오르는군요. 미국 최고의 미덕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고, 그럴 거라 믿어요. 나는 특히 행진하는 여자들과 가족으로부터 동기를 얻습니다.

    현재 한국은 급변하고 있어요. ‘#미투운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담론도 실천 중이죠. 여성이자 작가인 당신은 정치성을 어떻게 발현하고자 합니까?
    사회정치적인 것을 내 작업에 자주 포함시키지만, 예술에 명백한 주제가 없을 때도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파시스트들이 어떻게 추상화를 매도하고 파괴했는지 생각해보면 흥미롭죠. 작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작업해야 합니다. 물론 예술이 중요한 세상의 사안을 반영하고, 드러내고, 증폭하고, 명확히 하고, 외치고, 해결하려고 할 땐 멋져요. 낸시 스페로의이 대표적이고, 심미적 가치에 관한 극히 본질적인 작품인 고야의 ‘검은 그림’으로 나는 번번이 되돌아갑니다. 강한 주제와 심오한 아름다움중 하나를 골라야 할 필요는 없어요.

    ‘STATEMENT’, 2015
    Text: Interview conducted by Human Rights Watch 2011-2012 with former detainees, including women and children, and defectors from the Syrian Military and intelligence agencies. All names have been changed to protect identities. Torture Archipelago: Arbitrary Arrests, Torture, and Enforced Disappearances in Syria’s Underground Prisons, ⓒ2012 by Human Rights Watch. Used with permission. ⓒ2017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전대미문의 혁명기를 겪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끈질기게 계속한다면 성공할 것입니다. ‘#미투’를 위하여 건배!

    당신의 예술은 각성의 예술이자 실천의 예술입니다. 사회적 잠재의식을 열어 애써 무시해온 진실을 문득문득 만나게 하죠. 예술적 정치, 정치적 예술이란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고 봅니까?
    사회적 잠재의식을 열어젖히는 게 오늘날 일반적이었다면 더 굉장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규정짓는 걸 꺼리고, 조언에도 능숙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아는 것으로 시작해 그 지식을 어떻게 유용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것이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 난 폭행을 당했고, 그게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떠나 권력의 남용에 대해 확신하게 했어요. 이것이 내 작품 활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텍스트 작품 ‘Truisms’로 언어를 ‘발견’한 후, 어떻게 작업은 진화해왔나요?
    휘트니 미술관 독립 연구 프로그램에 다니며 ‘Truisms’를 선보이기 전부터 언어를 수반한 개념미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개념미술에 끌린 건 내가 미술보다 인문학에 배경을 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에드 라인하르트, 마크 로스코, 브루스 나우먼 같은 추상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더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텍스트를 찾았어요. 한동안 작품의 시각적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시 색, 빛, 촉감, 시간 흐름의 표현까지 포함시키기 시작했죠. 심미성이 내 작업으로 제대로 돌아왔고, 온전히 남기를 희망해요.

    당신의 텍스트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선동적인 동시에 이념적이에요. 또 언어 역시 매우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동시에 취약하죠. 개인성과 사회성, 취약함과 날카로움 등 언어의 이중성은 작업에서 다양한 감성과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조율하고 활용하는 특별한 방식이 있습니까?
    나는 오래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튕겨내버려요. 둘 다 작품 속 여러분위기와 주제와 관련 있을 거예요. 자유롭게 글을 쓰고 대부분의 주제를 다룬 다음, 선별성, 규율, 간결함을 시도할 겁니다. 다른 사람인 체하며, 그러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을 말할 거고요. 1인칭을 써서 온전히 나로서 다른 사람들에 가닿으려고 할 겁니다.

    한국에도 정치성을 띤 작가가 존재하지만, 당신만큼 시각적인 동시에 직설적인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한국 추상화가 대단히 심오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될까요? 형태든, 메시지든.

    특히 전쟁 관련 문서는 너무 강렬해 오히려 픽션처럼 느껴져요. 실존하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듯한 자료를 활용할 때, 무엇을 의도하나요?
    911 이후로 아카이브에서 미국과 이라크 침범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애썼어요. 보도된 것보다 더 많은 걸 읽고 싶었고, 이 역사를 모르던 이들과 자료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싶었죠. 핵심 정보를 에서 재생산해 워싱턴과 뉴욕의 도서관 외벽에 이 문서를 투사했어요. 당신 말처럼 어떤 관객들은 그 문서가 가짜일 거라고 생각하더군요. 나는 이 문서가 군인, 정치인, 억류자, 민간인 등의 ‘진짜’ 생각과 행동을 나타낸다고 설명해야 했습니다.

    새로 시도하는 회화 작업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리넨에 페인팅 작업을 합니다. 최근 그린 유화 표면은 얇은 금속으로 덮여 있죠. 예술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 러시아 절대주의의 직사각형을 상기시키고, 대중에게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숨기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심하게 편집된 정부 문서를 골랐어요. 사람들에겐 그림을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으니, 작품의 내용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브로드 뮤지엄에서 본 ‘Thorax(2008)’는 굴곡진 LED 사인 12개로 만든 작품이었어요. ‘Truisms’나 ‘Inflammatory Essays’는 포스터라는 취약한 포맷을 의도한 것 같았고요. 메시지 내용을 재료의 종류 혹은 물질성과 어떻게 결부시키나요?
    ‘Thorax’는 가슴뼈처럼 보이기도, 무기를 닮기도 했죠. 작업할 당시엔 고문에 쓰는 케이지를 떠올리기도 했어요. 내 길거리 포스터는 정치 선언문이 메아리치게하고, 할 말 있는 개개인들의 포스팅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진짜 정치적, 상업적 목적을 가진 인쇄물 가운데 설치했어요. 이렇게 재료가 딱 맞아떨어질 수도, 그저 메시지의 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집중시키려고 텍스트에 부적절하거나 흔치 않은 재료를 고르는 일은 흥미로워요. 재료, 크기, 위치, 무게, 색, 표면, 내용, 맥락, 움직임 등 많은 요소가 중요하고, 예술 작품을 위해 나는 연합하거나 싸워야합니다.

    종종 디지털화된 문장과 돌에 새겨진 문장이 병치된 풍경을 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재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고, 가로인지 세로인지에 따라서도 그렇죠. 텍스트가 보이는 방식과 내용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맞아요. 어떤 방향으로 텍스트가 보이는지 등은 효과와 연관된 문제죠. 각기 다른 재료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이 나를 매료합니다. 대학 시절 내 만트라(진언)였던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지속된 모양이에요. 모든 걸 최대한 조리 있게 만들어 내용이 생생하게 도달하도록 하지만, 가끔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해 부러 어색한 조합과 병치를 만들기도 해요.

    기술의 발달이 텍스트의 영향력을 증폭한다고 보나요?
    VR, 앱, 로봇, 애니메이션을 실험해왔지만 나는 원하는 만큼 최신 기술에 밝지 못해요. 나이를 실감하고 있죠. 당시 전광판을 선택한 건 뉴스를 보여주기 위한 매체였기 때문이에요. 당신 말대로 나는 LED가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상징한다는 사실과 섬광이 사람들을 매혹한다는 사실에 끌립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보는 곳에 작업물을 두고 싶어요.

    작품은 대중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작가는 관객의 반응 등을 컨트롤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작품을 의도에 가장 잘 맞게 이해하는 경험을 한 적은 있을것 같은데, 어떤가요?
    사람들이 내 텍스트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 조용해질때, 정말 행복해요. 낯선 이들과 저녁에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에서 라이트 프로젝션 작업을 보면서 이런 경험을 하곤 하죠. 사람들은 남아서 전광판을 읽고, 뉴욕 구겐하임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공간의 색이 바뀌는 것을 구경했어요.

    반면 언론의 평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무엇이었나요?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을 때 비평가 로버트 휴즈는 “똑똑한 체하는 아가씨가 파티를 열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식으로 썼어요. 베니스에서 선택한 작가가 여성이어야 했다면, 더 나은 여성 작가일 수도 있었다는 취지의 말도 있었던 것 같군요.

    티셔츠를 만드는 것과 예술을 만드는 것을 분리하지 않는 대중적인 예술가입니다. 스스로의 대중성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나는 대중과 예술계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존중과 신뢰를 갖고 있어요. 내 작품은 실제 혹은 상상 속 대중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니까요. 읽어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보기에 매력적인 예술을 만들고 싶고, 모든 피드백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럼에도 익명으로 작업하기를 선호해요. 생김새, 셔츠, 대화, 성별, 나이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내가 관객의 반응을 연구할 수 있도록요.

    ‘Truisms: A relaxed man…’, 1987 ⓒ1989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Photo: David Regen

    당신의 텍스트가 현시대 디지털의 물결, 인터넷의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갈 거라는 걱정은 없나요?
    변하는 시대에 따라 어떤 조정은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소통하는 곳에서 계속 작업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내용이겠죠. 사람들이 소음과 광고만 예상하는 곳에 진심으로 중요한 걸 심어놓는 일은 여전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작업에서 언어는 상징적인 동시에 본능적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고 있어요. 언어의 가치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내게 언어를 평가할 자격이 없지만, 상징적이고 본능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해요. 나의 개인적, 작가적 삶은 시인이자 친구인 헨리 콜(Henri Cole)의 시를 알게 되면서 크게 향상되었어요. 나는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안나 스위르, 체스와프 미워시(Czesław Miłosz), 메리앤 무어(Marianne Moore),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 등의 작품을 투사하고 새기고 프로그래밍한 아마추어 시 애호가라는 점에서도 운이 좋습니다.

    시인 혹은 작가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하나요?
    죽음 이면에 닿으려는 의지, 무시무시한 걸 초월하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인내를 넘어서려는 의지.

    언어를 콘텐츠로 한다는 건 예술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반기이자 비물질화하려는 시도예요. 반면 당신의 텍스트는 아트 숍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죠. 당신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의 어디쯤 있나요?
    나는 최소한 ‘비물질화’ 같은 개념의 팬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동시에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 동안 작품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는 것도 좋아요. 저렴하고 무료인 예술을 만드는 것 역시 좋고요. 비싼 것을 팔아서 비영리 공공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도 좋습니다.

    Artists Rights Society(ARS) 같은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 협업을 많이 했어요. 이런 작업을 통해 당신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나요?
    뉴욕에 도착하고 머지않아 예술가 집단의 공동 작업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어요. 우리는 공공장소에 작품을 실현하고, 버려진 건물 같은 색다른 곳에서 전시를 열고자 노력했으며, 서로를 지지했어요. 이제는 시인, 애니메이터, 건축가, 앱 개발자나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작업합니다. 최근엔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와 프로젝션 작업을 했는데, 똑똑하고 재능 있고 유쾌한 사람과의 좋은 경험이었어요.

    당신의 작업 방식과 메시지가 예술가라는 인종의 역할을 규정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작업이 나의 좋은 부분을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살인적이지 않고, 기만적이지 않고, 극도로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 예술가가 어때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

    어디선가 ‘Holzerism’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어요. 들어본 적 있나요?
    그런 용어가 있다는 게 웃기네요. 더 유명한 홀저를 소개하자면, 워홀의 슈퍼스타 제인 홀저와 작고한 유령 사냥꾼 한스 홀저 등이 있어요.

    내년 봄에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회고전을 엽니다. 그 자리를 빌려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요? 당신 자신? 작업? 메시지? 아니면 이 모두인가요?
    좋은 질문이군요! 제안할 게 있나요? 아마 많은 작업과 메시지를 선보일 것이고, 불가피하게, 후회스럽게 나의 무엇인가를 드러내게 되겠죠. 프랭크 게리의 비상한 건축물에 응답하고싶은 마음은 확실합니다. 30년 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물(뉴욕 구겐하임)에 그랬듯이 말이죠.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한 1980년대의 제니 홀저와 지금의 제니 홀저, 어떻게 다른가요?
    더 느려졌지만,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당신의 작품은 미술이 도외시해온 슬픔이라는 감정을 야기합니다. 슬퍼해야 분노할 수 있고, 분노해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 취지에 공감해요. 당신에게 슬픔은 어떤 감정인가요?
    트럼프가 나를 슬프게 해요. 깊은 슬픔은 정확하고 현실적이며, 고귀하고 잘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술가 인생의 ‘위기’가 있었나요?
    대학원에서 제적당할 뻔했을 때 나는 거의 살기를 멈췄어요. 예술에 전념하기로 결정한 후였죠. 오랫동안 내 직업윤리와 약간의 성공이 내 사생활에 문제를 일으켰고, 혼란스러웠고 슬펐어요. 최악의 위기는 내 예술을 충분히 좋게 만들 수 없을 때고,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시간에서 그랬어요.

    그렇지만 예술가에게는 비참함이 곧 기회라는 이야기를 여전히 믿고 싶어요. 당신에게 ‘단 하나의 진실’이란 무엇인가요?
    가족 중 의사가 몇 명 있어 그런지, ‘해롭게 하지 마라’가 생각나요.

    당신이 얘기한 1984년에 만든 스티로폼 컵에 프린트한 오웰의 문장 “The future is stupid”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끈질기게 반복하려 하는 악을 개선하거나 멈추게 하는 일을 예술이 조명할 수 있어요. 예술에는 그런 열망이 있거든요!

    시대를 풍미한 당신 같은 예술가는 대체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남을 위해 열심히 생각하고 일하는,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봅니다. 루이즈 부르주아, 요셉 보이스, 사이 톰블리, 솔 르윗 등 선망하는 사람들의 예술을 연구해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마사초(Masaccio),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예상 가능하겠지만 다빈치로 가능한 한 자주 되돌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시도하고 싶은 작업이 있습니까?
    존 레논과 오노 요코처럼 세계 평화라는 마법을 걸자!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고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세우자! 그걸 실패한다면, 나는 내 예술 작품이 더 나아지길 바랍니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꿈꾸나요?
    의미 있고 쓸모 있는 것을 내놓고 싶어요. 나의 작업이 너그러움, 박식함, 재미있음, 끔찍함, 사랑스러움, 신비함의 알 수 없는 조합이면 좋겠습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은?
    Thank you and goodnight.

    미술가 제니 홀저의 삶은 엄마이자 여자의 삶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레온 골럽이 그린 마오쩌둥의 머리를 아이의 침대 뒤에 걸어두는 어머니인 그녀는 스스로 “작가로서의 결정적 전환기”를 “미친 시간”이라 표현한다. 딸을 임신했을 땐 디아 예술센터에, 갓난아이를 키우면서는 뉴욕 구겐하임에, 딸이 두 돌을 맞았을 땐 베니스 비엔날레에 있었다. “배우고 깨닫기에 좋은 시간이었지만” 예술은 힘들었다. 이 성공한 여자 작가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법에 대해 물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종종 딸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내가 대단한 지혜를 전하면 좋겠지만, 일과 가정, 삶의 균형을 맞추는 건 불가능했고, 지금도 균형을 맞추지 않아요. 물론 딸을 위해 해야 하는 전부를 하고 있지 않을 때면 괴로웠죠. 뒤늦게 깨달았는데, 여자가 일에 빠져들거나, 자녀를 위해 해야 하는 전부를 하는 걸, 남자들의 세상이 쉽지 않게,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요. 남자의 장점으로 여겨지는 것이 여자에게는 문젯거리죠. 국경을 초월한 사회적, 개인적 문제이기에 당장 이상적인 해결이 필요해요.” 제니 홀저의 딸 릴리에게 작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기회는 없었다. “딸이 어릴 땐 집에서 간판으로 작업하는 나를 보고는,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전광판을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컸을 땐 내가 미술가라고 말해주었죠. 그녀는 한동안 예술과 미술관을 싫어했는데, 나는 그녀의 이런 행동이 꽤 정당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그녀는 자신의 좋은 안목을 포토저널리스트로서 발휘하고 있어요.” 나는 제니와 릴리의 인생을 지지하는 것과 내 인생을 응원하는 것의 다를 바를 찾지 못했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Richard Choi
      글쓴이
      윤혜정(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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