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주냐 식전주냐
단지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음주 문화가 가볍게 변화하며 주목받는 술이 있다. 식전주 다.
않게 하늘이 맑고, 구름이 퐁퐁 떠다니는 토요일 오후였다. 관광객 북적대는 덕성여고 길을 걸어 이태리재로 갔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이 두 해에 걸쳐 빕 구르망, 더 플레이트로 선정한 캐주얼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베네치아 음식을 한국에 선보인다는 전일찬 셰프가 굽이굽이 돌아 들어간 골목 끝의 작은 한옥을 개조해 마련한 공간이다.
주방을 62인치 TV 화면처럼 넓게 바라보는 바 좌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조르르 진열된 아페롤 병부터 눈에 들어온다. 메뉴판을 보면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할 수 밖에 없다. 탄산수 8,000원, 아페롤 스프리츠가 같은 8,000원이라면 주말의 한국인은 당연히 낮술을 선택한다. 아페롤 스프리츠는 베로나에서 짧게 일한 전 셰프가 주말마다 일부러 찾아간 베네치아에서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칵테일이다. 일본에서는 “도리아에즈, 나마 비-루(일단 생맥주)” 하며 시원한 생맥주부터 급하게 주문하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일단 아페롤 스프리츠부터” 하는 것이 일상이다.
허브와 뿌리 약초류의 쌉쌀한 향, 오렌지의 달큼한 시트러스 향과 맑게 빛나는 주황색을 가진 아페롤은 그 이름부터 프랑스어의 식전주인 ‘Apéro’에서 따온 대표적인 식전주 브랜드다. 너무 달지 않고 알코올 도수도 낮으면서 동시에 풍부하고 복잡 미묘한 향을 내는 이 술은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는 아페롤 스프리츠로 마시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아페롤 스프리츠는 아페롤에 드라이한 프로세코(이탤리언 스파클링 와인)와 탄산수를 섞어 만든 가볍고 경쾌한 칵테일의 전형이다. 아페롤과 프로세코의 향이 어우러져 한층 더 복잡하고 섬세한 향으로 변모하고, 프로세코와 탄산수의 탄산이 곱해져 두 배로 청량감을 준다. 근원을 따지자면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 당시 군인들이 베네치아 와인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낮추기 위해 탄산수를 섞어 마시던 와인 칵테일이 아페롤 출시 연도인 1919년 이듬해인 1920년에 ‘베네치안 스프리츠’로 자리 잡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전일찬 셰프는 “식전에 마시기 시작해서 식사하는 내내 마시는 술이죠”라고 소개한다.
전국에서 아페롤을 가장 많이 소비한다는 비공식 기록의 이태리재 아페롤 스프리츠는 그 음식과 필연적으로 매우 잘 어울린다. 특히 이태리재에 가면 누구나 주문하는 치케티(Cicchetti)는 아페롤 스프리츠와 영혼의 단짝이다. 치케티는 핑거 푸드 사이즈의 작은 요리를 이쑤시개에 꽂아 한 접시에 담는 베네치아 전통 안주인데, 스페인의 타파스와 개념이 멀지 않다. 베네치아에선 이 치케티를 밥때 가리지 않고 주문해 먹으면서 아페롤 스프리츠나 가벼운 와인을 꿀꺽꿀꺽 마신다는 것이 셰프의 설명이다.
이태리재의 아페롤 스프리츠는 원래의 레시피를 변형해 더 가볍다. 식욕을 돋우는 향은 보존하고, 알코올 도수는 엷게 희석한 버전이다. 이 조합이라면 베네치아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영원히 먹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랑비처럼 은근히 올라온 취기는 그 토요일의 가을 오후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한반도 밖으로 나가면 식전주는 지극히 당연한 생활의 일부다. 얼마 전 학회 참석차 베로나에 갔던 어느 교수가 한 쌀 농가를 방문해 막걸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농가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 술은 식전, 식중, 식후 중 언제 마시는 술이에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 아닌 그들에게는 그만큼 술이 식사 전후 또는 식사와 함께 마시는 무엇인가로 구분되고 체화된 것이다. 식욕을 자극하는 아페리티프로 시작해 강한 알코올로 여흥을 이어가고 소화를 돕는 디제스티프로 끝내는 식사가 그들의 일상이다. 식전주 최초의 기록은 1786년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베르무트로부터 시작됐다. 베르무트는 아페롤보다 더 씁쓸한 허브 향을 가진 리큐르다.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된 식전주 바람은 유럽 전역에 퍼져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모든 유럽 국가가 식전주를 당연시하게 되었다. 미국에는 20세기 초 전파되었다. 식민 지배를 받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도 이식된 문화다.
아페롤, 베르무트와 캄파리가 식전주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지만 사실 식전주가 꼭 리큐르 또는 칵테일이라는 법은 없다. 샴페인이나 드라이한 와인 역시 쌉쌀한 맛과 향으로 식욕을 자극하지 않던가. 돔 페리뇽, 모엣&샹동, 뵈브 클리코, 크루그 등 메이저 샴페인을 다루는 엠에이치샴페인즈앤드와인즈의 김건희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에서는 레스토랑에 착석하면 음식 주문 전 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등으로 식전주를 먼저 즐기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일입니다. 샴페인은 기분 좋은 산도와 탄산으로 미각을 돋우기 때문에 식전주로 적합합니다. 식전주로 즐길 경우엔 당도가 없는 브뤼 계열의 샴페인이 잘 맞죠.”
외국인 손님 비중이 높은 호텔의 레스토랑과 바에선 그래서 식전주가 자연스레 메뉴에 올라 있다. 샴페인을 글라스 단위 또는 하프보틀로 판매하는 경우가 바로 식전주로 권하기 위함이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시그니엘, 레스케이프 호텔 등에선 돔 페리뇽을 글라스로도 판매하고 있다.
식전주의 발원지가 이탈리아인 만큼, 특히 호텔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식전주를 메뉴에 올리는 것은 의무에 가깝다. 얼마 전 리뉴얼한 콘래드 호텔 서울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트리오’는 식전주를 메뉴에 복원시켰다. 이곳의 김혜진 사원은 “외국인 손님의 비중이 낮지 않은 편이라 식전주를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모습입니다. 아페롤 스프리츠를 익숙하게 주문하며, 술을 잘 못하는 손님이라도 무알코올 칵테일 등 식전주 역할을 하는 음료를 주문해 마시며 환담을 나누곤 하죠”라고 전한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 바 찰스 H.의 로렌조 헤드 바텐더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식전주는 사교 문화 자체입니다. 가족, 친구들과 식사전, 하루를 마무리하며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식전주가 꼭 함께하죠.” 이탤리언 레스토랑 또는 그 계열 바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놓쳐선 안 될 요소가 식전주라는 의미다. 그는 식욕을 잃지 않으면서 포만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이상적인 식전주로 꼽으며 씁쓸하고 드라이한 칵테일을 그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식전주용 칵테일은 포티파이드 와인, 베르무트가 들어가 이채로운 맛을 낸다. 오미자와 홍시로 로컬화된 버전의 식전주 스프리츠를 만들기도 한다.
특히 레스케이프 호텔은 하드웨어적으로 식전주를 위한 공간을 준비해놓고 분위기를 보는 중이다. 화제를 몰고 온 이 호텔의 두 레스토랑, 컨템퍼러리 퀴진을 선보이는 ‘라망시크레’와 모던 차이니스 퀴진 ‘팔레드 신’에는 바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솔로 다이너를 위해 오픈 주방 앞으로 바 테이블을 펼친 대다수 레스토랑과 목적은 다르다. 식사 중 한 부분으로 술을 위해 마련한 하드웨어다. 이 공간에 대해 김범수 총지배인은 이렇게 말한다. “식사 전 기다리는 시간 또는 식사를 마친 후에 굳이 멀리 가지 않고 와인이나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공간이 레스토랑에 들어선 후 첫 순서로 큼직하게 놓여 있지만 한국에선 낯선 동선이다. 호텔 측은 이 공간을 각각 와인 바 같은 서브 공간 또는 티 라운지 성격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마이너한 변화이지 그것이 공간 레이아웃 전체의 변화가 되진 않을 전망이다.
한국의 식문화에서 식전주는 언뜻 요원해 보이는 컨셉이다. 우리야 뭐, 술이 음식보다 먼저 나오면 그것이 식전주요, 소주 마시기 전에 시원하게 말아 마시는 ‘소맥’, 아니면 일단 한 병 주문하는 맥주가 식전주를 대신하지 않던가. 저녁 식사 자리의 반주가 술자리로 이어지고, 저녁 식사를 안주로 때우는 문화에서는 어디까지나 소맥이 최고의 식전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낯선 술을 받았을 때 술을 마실 타이밍에 대해 묻는 그들의 문화, 그리고 단지 음식, 아니 안주보다 빨리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술자리 내내 마실 술을 식전주인 양 마시기 시작하는 우리의 문화.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온도 차는 분명 존재한다. 그 근원은 어디까지나 식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온다. 즐겁고 다정한 대화가 목적인 식사와, 취하는 것이 목적인 식사는 그 정경도, 뒷모습도 모두 다르다.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만, 가치 판단은 뒤로 미룬다. 단지 다름이다. 훌륭한 술을 음미하는 것도 사랑하지만, 단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도 즐거운 일임을 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애주가로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는 어렵다. 다만 아무런 감정적, 관계적 소득도 없이 단지 취하기만 하던 숱한 날의 숙취와 사라진 기억을 떠올려보면,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 에디터
- 조소현, 남현지 (패션 에디터), 서준호
- 포토그래퍼
- 김영훈
- 모델
- 조앤박
- 글쓴이
-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 헤어
- 임안나
- 메이크업
- 황희정
- 장소
- 레스케이프 호텔(L’ESCAPE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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