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섭의 시작
신예 이가섭은 신중함과 평범함을 진지하게 추구함으로써 특별해진다. 그의 입체적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지난 10월 이가섭은 영화 <폭력의 씨앗>으로 대종상 영화제 신인남우상을 거머쥐었지만 이 기사가 나갈 때쯤이면 ‘2018년 가장 무서운 남자 1위’로 등극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도어락>에서 이가섭은 공명한 목소리, 실루엣, 몸짓 등으로 자신을 한 조각씩 꺼내 보이며 관객들의 공포심과 자신에 대한 주목도를 목덜미 끝까지 끌어올린다. 유약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단단해 보이는 이가섭의 신선한 마스크는 낯설다는 감각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첫눈처럼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명백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가섭은 도대체 어떤 배우길래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 심장을 이렇게 뛰게 만드는가.
이가섭은 눈 밝은 독립영화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배우였다. 김태용 감독의 단편영화 <복무태만>으로 연기를 시작한 후 영화 <양치기들>에 딱 2분간 얼굴을 비쳤고, 임태규 감독은 그 2분으로부터 가능성을 찾아내 <폭력의 씨앗> 주인공을 맡겼다. 폭력에 노출된 한 군인의 하루를 따라간 작품에서 그는 폭력이 한 사람에게 스며들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줬다. 군복에 가려진 가느다랗고 기다란 몸과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불안감을 고조시켰으며 문뜩문뜩 내비치는 잔인한 눈빛과 말투가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했다.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 수작으로 남은이 영화는 전주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도어락> 속 이가섭은 어젯밤 9시 뉴스처럼, 시사 다큐 프로그램처럼 현실적이다. 비록 소수점 자리 비율일지라도 언제 어디서든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을 품은 사람. 이가섭은 현대인에게 무엇이 공포가 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모든 조건을 다 떠나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나 주위에 많이 있는 존재.” 혼자 사는 여자를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이유가 따로 그려지지 않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이가섭이 한 일은 소설 <종의 기원> 읽기 뿐이었다. “실제로 전 도덕적이고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인데 동훈 같은 인물을 연기하려니 많이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 감정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저 ‘동훈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그 상황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공포영화, 스릴러 드라마 OST를 들으며 마음속 긴장감을 함께 고조시켰다. 극 중 동훈은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시도를 일절 하지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고, 물건을 소비하며, 타인을 대한다. 절대 위험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 뒤틀린 파괴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한폭탄이 어느 순간 폭발할지 예측 할 수 없다는 것. 이가섭은 역설적으로 평범함을 부각시킴으로써 현대사회의 공포를 명징하게 보여줬다. 언론 시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뉴스 같은 영화”라는 말이 나왔다. “혼자 사는 여성이 갖는 공포를 굳이 스크린으로 확인하며 또다시 피로감을 느껴야 하는가”라는 의견 제기도 있었다. 이가섭은 이에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실제로 혼자 사는 그는 밤에 혼자 걸어가다가 뒷목이 스산할 때 가장 무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한 번씩 돌아보죠. 어떤 책에서 봤는데 수풀이 무서운 이유는 눈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래요. 정말 공감해요. 보이지 않는 공포가 가장 무서워요. 사실 전 머리 감을 때도 무섭긴 해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갑자기 느낌이 좋지 않을 때가 있어요. 무서움이 많은 편이라 이불 밖으로 발도 빼지 않고 자요. 하하.” 다행히 <도어락> 촬영이 남긴 트라우마는 없다고 했다. 촬영이 끝나고 머리를 자르며 캐릭터를 떠나보냈다. 그는 영화가 남긴 트라우마보다 연기의 완성도에 더 신경 쓰이는 신인배우다. “아, 촬영이 끝났구나 생각하면서 곧바로 후회를 시작하죠.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는.”
배우가 되기 전 이가섭의 과거를 덧붙이자면 그는 프로 바둑 기사 지망생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아들이 좀더 차분한 성격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원에 보냈고 바둑과 함께 10년을 보냈다.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며 정적인 시간을 보내던 이가섭은 문득 바둑과 완전히 반대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연기를 하게 된 계기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저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던 시기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고 3이었고 한 달간의 외출 같은 외도겠지 생각하던 연기를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연기는 뭔가 많은 걸 할 수 있는 것같아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늘 자리하고 있어요. 재미있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버스 카드를 충전해놔야 버스가 왔을 때 탈 수 있잖아요. 기회가 왔을 때 부응할 수 있게 늘 충전을 하고 있어요.” 바둑돌을 한 번에 하나씩 놓으며 승부를 벌이듯 인생도 하루하루 살아가며 완전해지기에 ‘인생은 바둑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가섭은 바둑을 두며 인생에 신중해졌다. “신중에도 종류가 많은데 상대방의 말을 항상 신중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을 땐 인터넷 바둑을 둡니다. 바둑을 두면 집중이 잘돼요.”
지금까지 이가섭은 조용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면을 품고 있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내면의 회로도가 복잡하지 않다면 도저히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다. “실제 성격은 그냥 무난한 것 같아요. 조용한 편은 아닌데 그냥 무난해요.” 어릴 적 엄마가 챙겨준 우유와 멸치 덕분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사이키가 훅 자라버렸다는 이가섭은 어떤 질문에도 골몰했다. “뭔가를 하면서 그냥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하기 전에는 그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하진 않을지 한 번 더 생각하고요.” 임태규 감독이 ‘선한지 악한지 헷갈리는 얼굴’이라고 표현한 외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얼굴은 어떤 서사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전 제 얼굴이 무난해서 좋아요.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 인터뷰 때부터 밝히고 있는 다짐은 한결같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좋은 사람의 기준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얘기할 때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기운이 맑고 밝은 사람이 되려고 하죠.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배우가 되는 것 같아요.”
차기작은 정해졌다.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니나 내나>에서 장혜진, 태인호, 이상희와 호흡을 맞춘다. 아픔을 지녔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가족 얘기다. 이 영화는 이가섭의 평소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 긴장감과 재미 때문에 요즘 엑소시즘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주변 친구들 보면 취업 고민이 많아요. 인생은 마냥 재미있지도 행복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얘기에 늘 마음이 끌려요. 우리 이야기니까요.” 얼굴에 드러내는 표정까지도 신중한 이가섭은 그 누구보다 모든 순간을 궁구하고 감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2018년 자신만의 극적인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 이 선선한 배우는 새해를 어디서 맞이할까. “혼자 집에서 맞이하지 않을까요? 사실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 부모님과 함께 일출을 보긴 했는데. 시간 되면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야죠.”
- 에디터
- 조소현, 남현지(패션 에디터), 서준호
- 포토그래퍼
- 목나정
- 헤어& 메이크업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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