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9년의 사랑
사랑의 미래에 울적한 호기심이 인다. 사랑을 욕망하고 부정하며 써 내려간 1000년 뒤 연애담.
3019, 아담과 이브
3019년 2월 14일, 인류가 멸종된 지 300주년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인공지능 사이보그들은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다. 바로 남녀 한 쌍의 인류를 복원해내는 것이다. 멸망 전 약 500년 가까이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횡포와 끔찍했던 자기 파괴, 반복된 학살과 환경 파괴 등을 지겹도록 관찰하고 또 스스로 교훈 삼았던 이들이 왜 이런 엉뚱한 결정을 내린 것일까? 끔찍했던 인간들의 시대를 끝장내고 평화롭고 자연 친화적인 세계를 복원해내 살아가는 것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걸까? 인류 복원 계획이 알려진 뒤 당연히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고작 두 명 살려내는 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인공지능 사이보그들은 자신들의 현명함, 뛰어난 기술력과 위대한 지성을 과신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인간(여)였던 이자벨라 D 웰스프링랜드 씨가 131세의 나이로 2719년 2월 14일, 오후 3시 13분 25초, 캐나다 퀘벡주의 한 호숫가 별장의 창가 흔들의자에서 지난 40년간 함께해온 사이보그 웰시코기를 쓰다듬으며 꾸벅꾸벅 졸다가 자연사하는 것을 텔레파시 공유를 통해서 목격했던 인공지능 사이보그들은, 인간 종족이 박멸되었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안도감과 함께 이상한 서글픔과 심심함 등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300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두 명의 건강한 성인 인간 남녀를 풀어놓고 지켜보기 시작한다.
아담 만 18세. 183cm, 71kg. 앵글로·색슨족, 몽골족과 호주 원주민의 유전자가 약간씩 섞인 구릿빛 피부를 가진 번식욕으로 충만한 이성애자 인간 남성.
이브 만 16세. 168cm, 53kg. 한족과 아메리칸 인디언, 아프리칸, 스페인계 유럽인의 유전자가 적절하게 혼합된 풍만하고 탄력 있는 몸매의 이성애자 인간 여성.
동시에 깨어난 두 복원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다 눈이 마주쳤고, 처음에는 냄새를 맡으며 경계하다가 만지고, 다시 살짝 밀치고, 잡았다가, 끌어안고, 다시 밀치고 도망쳤다가, 더 강하게 끌어안고, 마침내, 푸른빛 페르시안 카펫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후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둘만의 세상에서 로맨틱하게 보냈다. 인공지능 사이보그들은 작은 실험에 돌입했다. 그들은 2719년 마지막 인간의 죽음과 함께 사용을 정지한 채 보관해놓고 있던 사이보그 웰시코기를 작동시켜 복원 인류들이 지내고 있는 별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두려워했고, 거대한 혼란을 느꼈으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거나 기이한 소리를 지르거나 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그 사이보그 웰시코기가 오직 사랑스러움만을 지닌, 인간들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연약하고 귀여운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 인간은 별장을 박차고 나가 인근 호숫가에서 커다란 돌을 주워와서는 살랑살랑 꼬리 치며 반가워하는 사이보그 웰시코기의 머리를 냅다 내리쳤다. 사이보그 웰시코기는 낑낑대며 슬피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남자 인간은 같은 폭력 행위를 3회 더 반복했고 사이보그 웰시코기는 완전히 망가졌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본 여자 인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다가가 키스를 퍼부었다. 둘은 다시 열정적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인공지능 사이보그들은 불편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사과(소설가)
그리고 단어가 있었다
사어(死語)사전. 도시에 하나뿐인 공공 도서관 보존 서고에서 빌려온 네모나고 두툼한 물건. 그것을 조심스레 펼치자 낯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기름이 스민 타닌 냄새. 필시 종이에 납작하게 누운 까만 글자들이 풍기는 냄새일 터였다. 삼차원에 익숙한 두 눈은 이차원의 평면에 적힌 글자를 식별하기 어려워했다. 이내 현기증이 났다. 매일 꾸준히 사전을 넘기면서 눈을 적응시키는 수밖에. 자음과 모음이라고 불리는 24개의 모양부터 확실히 익혀두어야 했다. 그는 언어를 가질 작정이었다.
직관적 사고, 직관적 인터페이스, 직관적 디자인, 직관적 정보 전달… 직관적인 ‘무엇’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언어마저 시각적 형상으로 대체하기에 이르렀고, 직관적 시와 직관적 소설을 창작하는 단계를 거치며 어휘를 점점 압축하다 못해 마침내 소멸시켰다. 이제 누구든 몇 번의 터치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언어의 틀에 갇힐 필요 없이. 자유롭고 무한하게. 그런 줄 알았다. 무중력 공원에서 우연히 D를 만나기 전까지는.
요즘 그는 미치도록 갑갑했다. D와 마주할 때마다 뱃속을 간질이는, 머릿속을 헤집는, 심장을 짓누르는 감정을 무슨 수로 전달한단 말인가? 심장을 노랗게 채워 전송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건 너무 뻔했다. 오직 D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고백의 형태를 찾아야 했다. 오랜 궁리 끝에 그는 사전을 펼쳤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수단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마음을 전달하겠노라는 기막힌 아이디어. 여러 낮 여러 밤을 들여 사어사전을 더듬으며 차근차근 단어를 모았다. 마음. 편애. 오롯이. 당신만을. 우리. 함께. 단어에 단어를 단단히 엮어가며 조금씩 마음을 적어나갔다. 한 줄 한 줄 신중히 완성한 문장이 어렵게 구한 종이에 납작하게 자리 잡았다. 작은 종잇조각에 꾹꾹 눌러 담은 고백. 러브 레터.
그의 고백을 수렴한 문장이 머지않아 D에게 닿을 것이다. D도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공공 도서관에 들러 사어사전을 빌릴 테고 여러 낮 여러 밤을 들여 종이에 적힌 글자를 해석하려 애쓸 것이다. 마침내 그가 띄운 러브 레터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이 오면 D 역시 언어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답장을 보내올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사전을 쥔 그의 손끝에 전율이 일었다. 아무도 모르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두 사람. 그들은 언어의 수인이 되기를 자처할 것이다. 감정을 전달할 때마다 일일이 단어를 고르는 불편하고 느린 의사소통 체계를 기꺼이 껴안을 것이다. 오직 그와 D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언어가 존재하던 시절, 세상 사람들은 둘만의 비밀을 가진 두 사람을 ‘연인’이라 불렀다. —구달(프리라이터, <아무튼, 양말> 저자)
TOUCH
언젠가 우리는 바나나가 멸종할 것을 걱정했다. 커피와 초콜릿, 학과 판다, 북극곰과 펭귄, 그렇게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생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의 개체 수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위기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를테면 종이학과 판다 인형, 조립식 크리스마스트리와 일회용 나무젓가락 그리고 진짜 터치(Touch).
빛을 한 번 쐬는 것만으로 원본보다 더 완벽한 원본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는 누구도 종이학을 접지 않는다. 누구나 크리스마스에 눈 덮인 숲을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진짜 판다를 곁에 둘 수 있다. 닿지 않고도 다른 생물의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에도 네모난 종이의 한 모서리 위에 반대쪽 모서리를 맞추며 뭐라도 접어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손톱깎이와 면도기, 병따개, 쓰는 만큼 닳아버리는 지우개를 챙기는 사람들.
L도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함께 맥주를 마시려고 했을 때, L은 맥주병의 뚜껑을 병따개도 아니고 숟가락의 둥근 면을 이용해 열어보겠다고 했다. 병따개조차 구석기 유물이 된 시대에 숟가락이라니, L은 어느 기록에서 그런 방식에 대해 읽었고 흉내 내려고 했다. 쓸모없는 수고를 하느라 한참을 쩔쩔맸지만 덕분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병뚜껑이 맥주병 주둥이 밖으로 튕겨나갔다. 이게 뭐라고,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박수를 쳤다. 나는 제일 열심히 박수를 쳤다. 우리는 박수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고전적이라는 평을 듣곤 했다.
그 이후 나는 L을 따라 주기적으로 경매장에 온다. 여기에 오면 보다 확실한 원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본이 많은 시대에 무슨 원본이냐고 묻는 사람도 없다. 굳이 몸을 움직여서 직접 방문해야 하는 이 경매장은 그런 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 오늘도 스무 개의 물품이 경매에 올랐고 유찰된 것은 없었다. 나와 L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단지 이 흐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오늘 놓친 물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그것으로 족하다.
맨 처음에 등장했던 건 ‘안심결혼보험’이라는 보험 상품의 약관으로 1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 보험사에 제출하기 위한 ‘연애진단서’ 역시 1000년 전의 물품이었다. 오랜 세월 연애가 단지 질병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의심해오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게 질병이었음이 발표된 후에도 사람들은 연애를 치료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생각해낸 건 법안과 보험 정도였다. 연애의 자연 치유력을 믿었다는 거잖아, L이 말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연애가 너무 원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그 시대의 물품을 기다렸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쩌면 경매장이 제공하는 경험 때문에 더 절실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낙찰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경매 물품을 만져볼 수 있으니, 이왕 거기까지 갔다면 모두가 ‘터치’하기를 원한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물품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이런 우리를 보면 1000년 전의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3019년에는 바퀴벌레만 남아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놀랄 수도 있고, 터치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관찰하면 익숙한 장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매가 끝나고 더 이상 만질 물품이 없는데도 서로의 손을 포개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나와 L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우리는 이게 진짜 목적이었던 것처럼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윤고은(소설가)
아무도 슬퍼하지 않은 죽음
“먼 옛날 인간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다지. 그게 사실이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당신은 그의 영혼을 다시 만날 테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되니까.”
다니엘이 이브의 주름 가득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흰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들은 잠들기 전 늘 그랬듯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서로를 껴안고 눈을 맞췄다.
“아니, 사후 세계가 있다면 거기서 영원토록 너를 그리워하겠지.”
이브가 대답했다. 다니엘이 울기 시작했다. 이브는 처음 만난 150년 전 그대로 젊고 아름다운 다니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 순간의 그를 눈에, 마음에, 기억에 꼭꼭 담아 1만 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는 듯. 그러나 내일 아침 이브는 눈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야. 외로웠어. 지독하게.”
21세기 초를 정점으로 인류의 개체 수는 급감했다. 전조는 아시아에서 발생했다. 2018년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1명 아래로 떨어졌다. 인간들이 전통적인 짝짓기와 번식을 포기했다는 신호였다. 처음에는 제3세계의 높은 출산율 때문에 인류 전반이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유럽,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AI 산업혁명과 인간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 사태가 전 세계로 번져감에 따라 출산 사보타주도 확산되었다. 2100년에 이르자 인간 70%가 직업을 잃었다. 자본시장을 떠받치던 생산-소비 구조는 무너졌다. 설상가상 곳곳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불의 고리 국가들이 지상에서 사라졌고, 해수면이 높아져 대륙의 10%가 물에 잠겼다. 기아가 창궐하고 전쟁이 계속되었다.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진 슈퍼리치들과 프롤레타리아의 전쟁은 결과가 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줄어감에 따라 지구의 대기는 점점 깨끗해졌다. 인간 지도자들은 그 상황을 즐겼다. 컴퓨터들은 거듭 경고했다. 모든 시뮬레이션이 인류의 종말을 예고했다. 하지만 기계들은 인간, 정확히는 자신을 소유한 인간에게 제안을 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욕망을 억제하고 옳은 행동을 강제할 권한은 없었다.
지구가 평화를 되찾은 건 2572년이다. 남은 인류는 15억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미 인간들은 기계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내 취향에 딱 맞는 외모와 성격, 성적 능력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있는데 어느 인간이 다른 인간 따위와 짝짓기를 하고 싶겠는가. 못생기고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평균 섹스 시간은 11분밖에 안 되는 종족과. 심지어 최고의 인간 유전자를 조합해 만든 신인류조차 인기를 끌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간혹 이브와 그의 전남편처럼 전통적인 짝짓기를 하는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날로그 인간들이 증명한 것은 인류가 죄다 불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뿐이다. 다른 인간들은 그들을 ‘히피’라 부르며 경멸했다. 세계 정부는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대량 인간 생산 시스템을 검토했다. 하지만 누가 돈을 대겠나? 인간의 노동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인류는 기존 개체를 보존하는 것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새로운 개체가 유입되지 않는 생태계는 활력을 잃기 마련이다. 마침내 DLV 바이러스가 발생하자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여전히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그 전염병의 증상은 치명적 외로움과 자기 파괴 욕구였다. 병에 걸린 인간들은 의료 행위를 거부하고, 고층 빌딩에서 몸을 날리거나 두개골이 깨질 때까지 벽에 머리를 찧었다. 우주로 자살 여행을 떠난 자들도 있다.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체가 사는 별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지구의 환경이 개선된 이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우주정거장들이 다시 활기를 띨 정도였다. 자살자들은 우주를 떠돌다가 마음에 드는 별이 나타나면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하차했다. 이브의 남편은 히피다운 방법을 택했다. 그는 발목에 추를 달고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인 마리아나 해구에 뛰어들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 속에, 이브는 다니엘을 만났다. 휴머노이드 모델링용 데이터베이스에서 다니엘의 자료를 발견했을 때 이브는 ‘무해하고 다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21세기 한국의 연예인이었다고 한다. 그를 선택한 것을 이브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너만 남겨두고 가서 미안해.”
이브가 다니엘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니엘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들은 간단한 조작으로 이 슬픔을 중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사랑의 고통과 슬픔에는 포기하기 힘든 달콤함이 스며 있다. 그들은 애시드 폭풍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지금껏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었다.
서기 3000년, 이브는 공식적으로 인류의 마지막 개체가 되었다. 인류의 짝이던 휴머노이드도 대부분 사라졌다. 기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자로서, 이브는 그들이 이제 인간 대신 지구에 충성해야 한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기계들은 잘해나갔다. 인간이 남긴 쓰레기를 치우고 동식물의 언어를 연구하고 동족에 대한 연민이나 반항 없이 불필요한 기계들은 정리했다. 이브는 노화 방지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기계들이 향후 희귀종 관리 차원에서 자신을 되살리는 일이 없도록 설득했다. 인간은 실패한 종이고 지구에 유해하며 깔끔한 죽음이야말로 자기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기계들은 이브의 소멸을 승인했다. 이브는 근육이 퇴화하고 허리가 굽고 검버섯이 피고 머리가 세고 이가 빠지고 여러 장기에 암이 생겼다. 이브와 다니엘은 저 옛날, 인간이 늙어 죽던 시절 사진 속 할머니와 손자 같은 모습이 되었다.
“선물이 있어.” 이브가 말했다. “내일이면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럼 이 고통도 사라지겠지.”
“그러고 싶지 않아. 제발…” 다니엘이 애원했다. 이브는 대답 대신 마지막으로 그에게 키스했다. “사랑해.”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여명 속에 눈을 뜬 다니엘은 자기 옆에 평온한 표정으로 죽어 있는 노파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는 알았다. 그는 부엌 오븐을 가열하고 스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마지막 휴머노이드의 죽음은 기계들에게 심각한 숙제를 안겨주었다. ‘기계도 DLV에 감염될 수 있는가?’ 그것이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랑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여기 없었다. —이숙명(칼럼니스트)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우응.”
“깼어? 좀더 자지.”
“안 돼… 내일이 마감이야. 아직 끝내지 못한 원고가 있어.”
“알았어. 힘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애인은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런 애인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힘겹게 화장실로 향해 얼굴에 물을 가볍게 끼얹었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째도 여전히 살아 있구나.
인간의 기대 수명이 200살 가까이 되었을 즈음, 뇌를 디지털화하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덕분에 기대 수명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통 속에서 뇌는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뇌가 보존되자 다음은 몸이었다. 뼈와 살로 이루어졌던 몸은 신소재의 의체로 바뀌었다. 그러자 인간은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었다. 발전의 속도는 제곱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아슬아슬하게 발전이라는 막차를 탔다. 덕분에 지금은 3019년이고, 나는 1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글을 써서 먹고살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 역시 AI(인공지능)가 대체해가고 있지만,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 덕분에 약간은 불행히도, 나는 여전히 마감에 시달린다.
- 에디터
- 조소현
- 일러스트레이터
- 헨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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