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빅 웨이브
들어오면 끝, 출구 없는 매력. 신이 만든 수프에서 뛰어노는 행운아. 지구에서 즐기는 최고의 행복. 서핑에 쏟아진 찬사다. 2020 도쿄 올림픽과 2024 파리 올림픽에 서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태동기인 한국에도 서핑 문화를 개척해온 서퍼들이 있다. 꿈의 빅 웨이브처럼 멋진 이들을〈보그〉가 응원한다.
서핑만큼 서핑 라이프, 김상우
제주 로컬 서퍼 김상우는 서귀포시 색달동 중문 색달해변 해녀의 집 앞에 있는 ‘듀크 포인트’를 좋아한다. 1990년대 중반, 재일 교포 출신 서퍼 이창남이 그곳에서 서핑을 하면서 자신의 별명인 듀크를 따 이름 지었다(듀크 카하나모쿠는 수영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근대 서핑의 창시자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그의 동상이 있다). 김상우는 쇼트보드에 왁스를 칠하며 듀크 포인트에 나섰다. “컷백이 가장 자신 있어요.” 그때 해산물을 팔던 할머니가 다가와 자기 아들도 서퍼라며 조심히 타라고 당부했다(그들의 대화는 제주 방언으로 이루어져 김상우가 통역해줬다). 할머니는 서퍼를 보면 늘 인사를 건넨다. 서핑을 하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서퍼다. 제주 서퍼는 모두가 모두를 알았고, 염려했고 응원한다. 이게 서핑 문화다. “처음엔 서핑 자체가 재미있었는데, 이제 ‘서핑 라이프’가 좋아요. 꾸밈없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죠. 제가 만난 서퍼들은 욕심과 시기, 질투가 없고 조급해하지 않아요. 파도가 자연의 일이니 자연스럽게 그리 변해가죠.” 그는 어릴 때부터 수영 훈련을 했기에, 물에서 하는 더 재미난 놀 거리를 찾다 서핑을 만났고, 그것이 자신을 바꿨다. “이렇게 능동적이었던 적이 있을까요? 겨울에 바다에 들어가고, 출근하기 전 잠깐이라도 서핑하려고 해 뜨기전에 나가요. 서핑하다 다른 롱보드에 부딪쳐 열한 바늘을 꿰맨 적도 있죠. 사고 났을 때는 죽겠구나 싶었는데, 실밥을 푼 다음 날 서핑하러 갔죠.” 김상우는 언젠가 타히티의 초포(높은 파도와 날카로운 산호초로 죽음의 포인트로 불린다)에 가고 싶다. “죽을 수도 있지만… 꼭 갈 거예요!”
세상은 슬로모션, 임수현
임수현은 열한 살에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으로 서핑을 접했다. “송정에서 산 타고 강 타고 타잔처럼 놀았음에도, 보드를 타보니 진짜 자연을 만나는 느낌이었어요. 처음 덕다이브 하는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모든 게 슬로모션 같았죠. 지금도 그래요. 일단 파도를 타기 시작하면 시청각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요. 서핑을 하면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임수현은 누나(서퍼 임수정), 아버지와 함께 서핑 트립을 다니며 홈스쿨링을 했다. 캘리포니아, 하와이, 호주, 발리, 일본, 대만 등 세계의 파도와 함께 자랐다. 스물두 살이 된 지금은 군 복무를 위해 제주 중문에 머문다. “하와이 선셋 비치가 기억에 남아요. 두껍고 강렬한 파도의 힘을 영원히 새길 거예요.” 서핑과 함께 보낸 유년은 중요한 가르침을 줬다. “서핑은 삶과 비슷해요. 파도는 늘 오지 않죠.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고, 자연 앞에 겸손하게 교감해야 해요. 그래야 내가 원하는 파도를 탈 수 있어요.” 임수현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퍼로 성장해 프랑스, 일본 등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2020 도쿄 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로도 선발됐다. “국제 대회에서 접한 서핑은 춤 혹은 예술 작품 같아요. 하나의 종목이지만 서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기술, 좋아하는 파도, 좋아하는 턴을 하죠. 서핑은 그 사람이 표현되는 운동이기에 이런 작품이 나오는 듯해요.” 임수현은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계속 서핑을 할 것이다. “일하든 운동하든 살아 있음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서핑은 그 빈도가 훨씬 높아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정적인 세계, 박성준
박성준은 한국에서 롱보드를 가장 잘 타는 서퍼 중 한 명이다. 그가 롱보더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길다. 15년 전만 해도 서핑을 가르치는 서퍼나 스쿨이 없어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그와 친구들은 세 명이 보드 하나를 돌려 타고, 리시가 없어 빨랫줄을 발목에 감았다. 노래방 화면에 나오는 하와이 서핑을 보면 다들 쇼트보드를 탔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싱글핀 롱보드로 전 세계를 유랑하는 다큐멘터리 <옐로우 싱글핀>을 보고 감동을 받은 박성준은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하이퍼포먼스 롱보드를 구했다. 본래 스러스터로 타는 게 맞았으나, 사이드 핀을 떼고 탔다. 보드를 많이 살 여력이 없으니 핀을 바꿔가며 학습했다. 지금은 송정해수욕장에 ‘베어브라더 서프샵’을 운영한다. 후배들은 자신처럼 시행착오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친다. 그는 서핑의 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흔히 서핑 하면 턴, 스프레이, 배럴을 떠올리며 동적 스포츠라 여기지만, 몇 시간 바다에 있어도 파도를 타는 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바다와 자연을 느끼는 정적인 시간이니 말이다. “처음엔 재미를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적인 감성을 가져가야 해요. 서핑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대자연 앞에서 기다리고 생각하며 겸손해야죠.” 서핑의 이런 면은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핑에 빠진 친구들이 정서적으로 휴식이 되는 바다 근처로 이사하고, 돈을 덜 벌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자는 태도로 변해요. 반면에 먹고살아야 서핑을 할 수 있으니 더 즐겁게 일하기도 하죠. 때론 오늘만 사는 듯 보이기도 해요. 오늘 파도가 좋으니 오늘이 너무 중요하고 내일은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요. 서퍼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아요.”
0.00001초의 예술, 조준희
“서핑은 제가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스포츠보단 연극, 연기, 공연, 행위 예술에 가까워요. 하지만 연기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죠. 파도만 바라보며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고, 그가 기회를 줘야 원하는 것을 펼칠 수 있어요. 살아 있는 도화지(게다가 까탈스러운!)에 감히 내가 그림을 그려도 되는지 묻는 것과 비슷하죠.” 스물다섯 살의 조준희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도를 찾아 호주, 발리, 니아스, 대만, 스페인, 한국 등 세계의 파도를 경험하며 자랐다. 멘타와이라는 무인도에서 하던 서핑은 잊을 수 없다. “해 질 무렵 파도가 좋은 걸 보고 뛰어들었어요. 하늘은 푸르스름하면서도 분홍빛으로 빛났고 파도는 힘이 느껴졌죠. 너무 즐겁고 두근거렸죠. 완전히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에 혼자 남았어요. 보이는 건 없지만 느껴지는 건 커다란 밤이었어요.” 조준희는 여행에 조금씩 지쳐가며 ‘집’이라 불릴 곳이 필요해 호주 골드코스트에 머물며 ‘주니초 서핑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서 새롭게 서핑에 빠진 이들이 더 파도를 사랑하도록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한다. (현재는 한국에 있다. 지난 6월, 전남 고흥군 남열해수욕장에서 열린 국가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고, 우승했다.) 그의 보물은 서핑 선생님이자 셰이퍼인 클레이튼이 만든 보드다. 언젠가 그 보드를 들고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스켈레톤 베이라는 포인트에서 서핑을 하길 꿈꾼다. “세계에서 가장 긴 배럴을 딸 수 있을 거래요. 그곳에 가려면 사륜 사파리 차로 2주 정도 사막을 달려야 해요. 제 차로 가고 싶어요.” 조준희의 꿈은 세계 최고의 서퍼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맞아요. 하지만 자리에 상관없이 0.00001초라는 그 순간에 집중하며 살 수 있는 서퍼가 되고 싶어요. 아직도 서핑을 하면서 생각이 많아요. 파도만 바라보고 파도 속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이곤 해요. ‘그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쩌지?’ 등 순간을 살지 못하죠. 딱 그 순간에 파도와 한 몸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서퍼가 되고 싶어요.”
파도가 안아줄 때, 임수정
강원도 양양에서 서퍼들을 촬영할 때, 거의 모든 일정과 섭외를 서퍼 임수정이 맡아주었다. 친절함, 환한 미소를 지닌 초여름의 바다 같은 서퍼다. 현재는 양양에 머물지만, 부산 송정에서 동생 임수현과 함께 자랐다. “10여 년 전 부산에 100년 만의 폭설이라는 예보가 떴죠.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동생은 서핑에 푹 빠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다로 나갔어요. 폭설이 오던 그날도 마찬가지였어요. 동생은 구멍 난 수트 두 장을 낑낑대며 껴입고 보드를 들고 눈발 흩날리는 거친 바다에서 한참 놀더군요. 이렇게 추운데? 서핑숍으로 들어온 동생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덜덜 떨며 ‘이거 엄청나게 재밌어. 근데 말로 다 하기가 어려워’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다시 바다로 나갔어요. 다음 해 여름, 처음 서핑을 했는데 동생 말이 맞더라고요. ‘시원 짭짜름한’ 바람, 온몸을 감싸는 빗줄기, 먼 길 흘러온 파도의 움직임, 뭐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푹 빠졌어요. 그해 겨울, 동생과 같이 오들오들 떨며 파도 나눠 타던 게 10년이 되어가네요.” 이제 임수정의 삶은 바다를 축으로 돌아간다. “서핑할 때 지켜야 할 기본은 바다처럼 움직이는 것, 서퍼로서의 꿈은 바다처럼 사는 것이죠.” 잊지 못할 순간은 배럴 라이딩이다. “모든 게 천천히 움직였어요. 파도의 결이 옆을 스쳐 올라가 쨍한 햇볕을 가려주고 저를 포근히 안아주듯 감쌌죠. 가끔 너무 과격하게 안는 바람에 제가 찌그러질 때도 있지만요!”
청정 제주 앰배서더, 김하정
김하정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서퍼이기에, 중문의 색달해수욕장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많은 추억을 얻은 만큼, 깨끗한 제주 바다를 만들고자 하는 비영리단체 세이브제주바다의 앰배서더로도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제주에서 친환경 컨셉의 결혼식도 올렸다. 폭죽 등 쓰레기가 남는 파티용품 대신 비눗방울을 쓰고, 플라스틱이 아닌 생분해 되는 100% 친환경 용기도 썼다. 꽃도 리본이나 비닐 없이 노끈과 종이로 포장해 하객에게 선물했다. “서핑 덕분에 제가 바뀐 거 같아요. 서핑은 모든 사람의 성향에 맞는 스포츠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해요. 당신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꿀 겁니다.” 그녀는 쇼트보드 세 개 중 최근 장만한 DHD사의 DX1을 가장 아낀다. 이 보드를 들고 조만간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떠날지 모르겠다. 그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과 도전 욕구를 함께 준 곳이니까. “오하우섬의 노스쇼어는 전 세계 서퍼가 찾는 곳이죠. 겨울만 되면 정말 큰 파도가 와요. 파도가 작아지길 기다리다 노스쇼어의 할레이와 비치 포인트에 들어갔어요. 작아졌다지만 10~12피트의 파도에 바닥은 암초여서 다치기 쉬웠어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뛰어들었고, 3시간 동안 꿈같이 튼튼한 파도를 즐겼죠! 조만간 노스쇼어의 다른 포인트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서핑할 때마다 이 말을 되새긴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 것. 자신의 무지와 욕심이 타인과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 서퍼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죠.” 김하정은 최근 서울로 이사 오며 자주 서핑을 하지 못해 안타깝다. “자주 못해도 걷는 힘이 있는 한 서핑과 함께할 거예요. 서핑은 제 삶의 질을 지켜주거든요. 스트레스와 좋지 않은 감정을 바다에 털면 다시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어요.”
파도 따라가는 드러머, 김진원
“천사들이 내려와 물 위에서 노는 것 같았어요. 자유롭고 원초적이었죠.” 그룹 YB의 드러머이기도 한 서퍼 김진원은 2004년 공연을 위해 떠난 뉴질랜드 마운트 마웅가누이 포인트에서 파도 타는 서퍼들에게 반해버렸다. 이제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서핑에 맞춰 돌아간다. 공연과 밴드 연습 외에 매일 파도를 체크하고 파도가 오면 계획을 짜서 떠나고 다시 돌아와서 몸을 준비한 뒤 파도를 기다린다. “서핑은 취미를 넘어 드럼만큼 삶에 깊이 자리 잡았어요. 같이 사는 거죠.” 국내에서는 강원도 고성의 천진, 양양의 기사문해변에서 탄다. 지난겨울엔 양양 물치해변에서 잊지 못할 파도를 탔다. “사이즈가 큰 파도가 오는데, 과연 잡을 수 있을지 공포스러웠어요. 용기를 내서 몸을 던졌죠. 말로 어찌 표현할까요. 엄청난 아드레날린과 쾌감이 솟구쳤어요!” 그때 사용한 보드는 블로윈드의 국내 셰이퍼와 함께 상의해 만든 7.0 미니건이다(그는 보드 아홉 개를 갖고 있다). 김진원은 처음 록 밴드를 시작할 때와 한국 서핑 문화가 비슷하다고 느낀다. “국내 서핑 환경이 좋지 않아서, 서퍼들이 시간을 쥐어짜고 어떻게든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해요. 저도 록 밴드를 시작할 때 어려운 부분이 있었죠. 서퍼들을 보면 젊은 시절의 제가 떠올라요.” 한국에서 서핑 붐이 일면서, 초보자도 많아졌다. 김진원은 그들이 좀더 자유롭길 바란다. “숙련된 서퍼들은 서핑 포인트에 가면 아는 사람을 만나요. 하지만 초보자들은 낯설고 부족한 실력에 소외감도 느끼죠. 하지만 서핑은 자연을 느끼고 그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 하잖아요. 파도를 쫓아다니는 거니까 기초를 다진 후 열린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녀보세요. 또 바다에 선한 행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해변의 플라스틱을 보면 쓰레기통에 버리는 작은 행동이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할 거예요. 제 꿈 역시 물 위에서 ‘자유롭게’ 나이 들어가는 겁니다.”
송정의 컨트롤 타워, 서미희
서미희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던 때 “바다에 나비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는 윈드서핑에 빠졌고, 후에 “0.1초 만에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듯 서핑에 빠졌다. “그때부터 제게 인간은 남자, 여자, 서퍼로 나뉘죠.” 서미희는 1995년 송정해변에 송정서핑학교를 열었다. 전면이 통유리인 그곳에서 계속 바다를 관찰한다. “바다를 보는 훈련을 계속해요. 고깃배가 이상한지, 카약이 뒤집혔는지, 서퍼가 수영객과 부딪치지 않는지, 오늘처럼 누가 다치지 않았는지 체크하죠.” 그날도 쇠파이프에 발이 찢긴 아이를 데려다 치료하고, 파상풍 주사를 맞히고 귀가시켰다. “그러려면 구름이나 인공위성을 보면서 기후를 예측하는 등 준비가 필요하죠.” 서미희는 송정에서 이루고픈 꿈이 많다. 송정에서 스킴보드, 서핑, 윈드서핑, SUP, 수영, 카약 6종 등 사계절 해양 레저를 즐기게 하는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다. 또 하나의 꿈은 세계적인 서핑 학교를 설립하는 것. 그래서 직원과 자녀를 호주 HPC(High Performance Centre)에 꾸준히 연수을 보낸다. “갈 때마다 빨대로 빨아들이듯 그들의 노하우를 가져오라고 해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서핑이 늦었잖아요. 좋은 건 빨리 배워 키워야죠. 겨울이면 송정서핑학교 코치들도 발리로 ‘서핑 유학’을 보내요. 당연히 월급을 주면서죠. 좋은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니까요.” 그는 선수 출신의 훌륭한 지도자도 빨리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첫 주자는 딸(이나라)이다. “선수 생활을 마치면 지도자 교육을 제대로 받고, 올림픽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역량 있는 지도자로 성장하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함께 차를 마시며 그가 여름마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서핑을 가르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핑은 평생 함께하는 친구이자 자존감을 높여주는 좋은 취미죠.” 서미희는 송정의 빅 마마 혹은 컨트롤 타워다.
태양의 염색, 이나라
서퍼 이나라의 머리는 해가 비치면 금발처럼 반짝일 만큼 밝은 갈색이다. 놀랍게도 바다에서 오래 훈련해 자연 탈색된 것이다. 그는 고교 1학년을 마치고 발리로 이주해 훈련하고 있다. 1년에 8~9개월은 훈련하고, 서핑 대회에 맞춰 호주, 유럽, 일본, 한국 등을 찾는다. 그와 만남을 갖길 기다렸는데 다행히 전남 고흥에서 열린 국가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려고 입국했다. 물론 국가 대표로 뽑혔다. “주 종목 쇼트보드 부문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어요. 현실적으로 이번에는 입상이 어렵지만, 2022년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에서는 메달을 목에 걸고 싶어요. 국가 대표로서 꿈을 이룬 뒤에는 대표 팀 감독이 되어서 후배를 돕고 싶어요.” 이나라가 제일 자신 있는 기술은 플로터. 파도가 부서질 때 부서지는 면을 타고 내려오는 기술로 성공률 90%다. 빅 웨이브를 감당하는 대범함도 갖췄기에 언젠가 메달을 기대할 만하다. “발리에 10피트가 넘는 파도가 들어온 적 있어요. 서핑을 하는 사람보다 해변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은 날이었죠. 체격 좋은 현지인 아저씨도 무섭다고 할 정도였어요. 친구들과 파도를 잡기 위해 먼바다로 나가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죠. 처음 파도를 잡은 친구는 보드가 반으로 부러졌고, 다른 친구는 파도에 휩쓸려 먼바다로 떠밀렸어요. 저는 계속 파도를 피하다가 정말 큰 파도를 잡았죠. 세상을 다 가진 듯 짜릿했어요!” 프로 서퍼로서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지만 이나라가 서핑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서핑은 제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어머니께서 부산 송정에서 서핑숍을 운영해서 네 살 때부턴가 서핑을 한 거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와 인도네시아 롬복으로 첫 해외 서핑 트립을 갔어요. 롬복 마을 아이들과 서핑하면서 본격적으로 눈을 떴죠. 지금도 그 친구들을 만나러 롬복에 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그냥 보드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요. 감기에 걸려도 파도를 타요. 서핑이 만병통치약이거든요!”
주체적인 삶, 이지훈
“여행 갈 때 계획을 짜잖아요. 어디서 자고, 뭘 보고, 어떤 음식을 먹을지. 서핑도 그래요. 계획을 세워야 하죠. 파도를 체크하고, 어디서 탈지, 어떻게 라이딩할지, 어떤 연습을 할지, 서핑이 끝나면 뭘 할지, 어디에서 자고, 뭘 먹을지 생각해요.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나 자신 혹은 타인의 피드백을 받고, 다시 계획하고 실행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서핑을 하죠. 그러다 보니 삶 역시 자연스럽게 주체성을 갖게 되더라고요.” 수많은 서핑 여행 중 단연 최고는 일본 시코쿠에서 배럴 라이딩을 했을 때다. “물로 만든 방에 들어간 기분이었어요. 주위에서 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계속 났어요. 정말 엄청났죠!” 이지훈은 서울 가로수길에 서핑 편집숍 개념의 ‘라인웍스 서울’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 있는 새터데이 서프(Saturday Surf)를 좋아해요. 서핑용품을 판다기보다 서핑 문화로 다가가는 공간이죠. 저도 그런 곳을 열고 싶었어요. 라인웍스 서울도 전문 서퍼뿐 아니라 일반인도 서핑 라이프를 친숙하게 접하도록 운영하려고 해요.” 물론 라인웍스 서울을 운영하며 힘들 때도 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서울에 머물면서 바다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3~4일만 바다를 못 봐도 목욕탕에 안 간 듯한 기분이에요. 어쩌다 부산에 가는 날이면 파도가 없어도 패들링이라도 하고 나오죠.”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고자 종종 카버보드를 탄다. “스케이트보드보다 뱀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서퍼들이 연습용으로도 많이 타고, 무엇보다 일상에서 서핑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라인웍스 서울과 부산 지점에서는 매주 목요일 밤 ‘카버 나잇’을 연다. “제가 느낀 카버보드의 매력을 많은 분께 전하고 싶어요.”
사랑의 블랙홀, 김병성
2007년, 김병성은 부산에서 우연히 보드를 들고 다니는 캐나다 여인을 봤다. 캐나다에서 열 살 때부터 서핑을 한 서퍼였다. “그녀의 권유로 처음 서핑을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스케이트보드를 탔던 김병성은 풍랑 주의보가 내렸음에도 첫 서핑을 시도했다. 물론 물만 먹고 보드만 부러진 채 나왔지만. 그때 아내가 빌려준 키트로 보드를 수선했고,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됐다. “누군가 서핑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를 말하기 힘들어요. 그저 사랑으로 시작해 업이 되고 여기까지 왔죠.” 둘은 2010년 해운대 백사장에 서핑 보드를 꽂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에 태어난 딸, 김카이영도 서핑을 한다. 김병성은 서핑을 인생과 비유한다. “바다가 늘 좋을 수만은 없잖아요. 좋은 파도가 하나 오면 그렇지 않은 파도가 하나 따라오죠. 영화 <관상>에서 내경(송강호)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해요.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서퍼라면 공감할 거예요. 내려가면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는 파도를 타는 것처럼 ‘밸런스를 타면서’ 살고 싶어요.”
파도와 성장한 스무 살, 이도운
부산 송정에는 유명한 ‘서퍼 패밀리’가 있다. 1세대 서퍼인 어머니 서미희와 이나라이도운 남매다. 이제 스무 살이 된 막내 이도운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서핑을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발리에서 서핑 훈련을 시작했다. 이후 호주, 뉴질랜드, 캘리포니아, 프랑스를 거쳤다. “캘리포니아에서 존경하는 서퍼 콜로헤 안디노의 강연을 들었어요. 그분의 성장 과정, 트레이닝 방법, 멘탈 관리를 배우며 이전보다 서핑을 더 진중히 대하고 사랑하게 됐죠.” 제일 좋아하는 지역은 발리다. “매일 좋은 파도가 들어오니까요! 다른 서핑 스폿도 차로 30분 거리라 언제든 좋은 파도를 찾아 떠날 수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살고 있고요.” 좋아하는 서핑 포인트 역시 발리다. “발리의 울루와투는 레프트 파도를 잡아 롱 라이딩할 수 있고, 케라마스는 얼마 전 WSL(World Surf League)이 열린 곳이에요. 환상적인 라이트 포인트로 힘 있게 타면서 연습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톱 턴과 라운드하우스라는기술을 콤보로 구사하길 좋아해요.” 발리에서의 훈련 과정은 꽤 엄격하다. ‘바루서프 발리’의 코치 김윤호와 매일 새벽 5시에 조깅하고, 2시간 동안 실제 대회처럼 연습한다. 자신의 서핑 영상을 리뷰한 뒤, 프리 서핑을 하며 부족한 점을 보강한다. 지상 연습도 한다. 훈련 목표는 많은 프로 서퍼의 꿈이자 목표인 WSL 진출. “서퍼로서 최종 목표죠. 하지만 서핑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재미있어서’입니다. 조금씩 성장하는 나를 보는 것도 좋고요.”
칠드런 오브 맨, 민경식
서퍼 민경식은 유소년을 엘리트 선수로 키우는 꿈을 갖고 2012년 부산 송정에 ‘서프짐’을 열었다. 바다뿐 아니라 실내에서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하고 싶어, 서프짐에는 서핑에 도움이 되는 밸런스, 코어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관 형태의 공간도 있다. “선수 생활을 해봤으니 한국에서 얼마나 힘들게 서핑 훈련을 하는지 잘 알죠. 겨울에 잠시 해외 원정 가는 걸로는 부족해요. 2017년 프랑스에서 열린 ISA(International Surfing Association) 대회에 선수단을 이끌고 참여해 원하는 목표를 이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어요. 의류는 브랜드 지원을 받았지만 태극 마크를 직접 사서 달아야 했고, 대한서핑협회와 선수 개인이 십시일반 모은 자금으로 움직였죠. 대표로 참가한 선수들은 열악한 여건에서도 스스로 훈련하며 성장한 멋진 친구들이에요.” 그는 ‘그 멋진 친구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활동하길 원한다. “서핑 선수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제 인생 목표입니다.” 민경식은 종종 아들을 업고 패들링을 하거나 파도를 탄다. “빠르게 미끄러지니까 엄청 좋아해요! 지금 서퍼의 2세들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핑을 접하고 있어요. 자라면서 이전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테고, 전 세대와는 ‘클래스’가 다를 거예요. 정말 기대되지 않나요?”
아홉 살 서퍼, 김카이영
김카이영이란 예쁜 이름은 서퍼 부모가 각자 좋아하는 단어를 하나씩 붙여 지었다. 카이는 ‘바다’라는 뜻의 하와이어, 영은 헤엄칠 영(泳)이다. 김카이영의 놀이터는 부산 바다, 자신의 보드도 갖고 있다. “서핑은 친구들과 같이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같이 놀면 재미있잖아요. 엄마, 아빠가 서핑 회사를 운영하세요. 그래서 친구들과 서핑을 하면 코치 삼촌들이 안전한지 봐주세요. 파도가 치면 몸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데, 그러면 제 서핑 보드도 따라 움직여요. 너무 재미있어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 에디터
- 김나랑(피처 에디터) / 손은영(패션 에디터) / 이소민(에디터)
- 포토그래퍼
- 곽기곤(서퍼), 고원태 / 이준경(모델)
- 모델
- 강소영, 김설희, 메구
- 스타일리스트
- 오충환(서퍼)
- 어시스턴트
- 김찬룡(서퍼)
- 헤어
- 김환, 임안나(서퍼) / 한지선(모델)
- 메이크업
- 이봄(서퍼) / 오미영(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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