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적 사진가, 피터 린드버그
패션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던 슈퍼모델 시대를 열었지만, 정작 자신은 오랫동안 여성의 자연스러움을 찬양했다. 30년 넘도록 여성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을 흔들어놓은 피터 린드버그의 아름다운 모순.
“화가는 구성하지만 사진가는 드러낸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단정했다. 대상을 있는 모습 그대로 기록하려는 욕망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회화가 현실을 꾸며야 한다면 사진은 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 1944. 11. 23~2019. 9. 3)는 가장 양면적인 사진가다. 화가처럼 원하는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피사체를 가장 솔직하게 바라보기 위해 애쓰며 그 선을 마음껏 오갔다. 때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과 미녀의 만남을 영화처럼 연출했고, 때로는 화장기 하나 없는 여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30여 년간 이 양면적 욕망을 마음껏 누려온 그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피터 린드버그는 독일의 어느 산업도시에서 자랐다(그의 사진에서 공장과 산업적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백화점 쇼윈도 드레서로 일하던 중, 카메라를 들게 된 건 생각지 못한 계기가 있었다. 갓 태어난 조카가 너무 귀여워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곧 베를린 아트 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어시스턴트 생활 후, 1971년 뒤셀도르프에 스튜디오를 마련했다(동시에 본명인 ‘Brodbeck’ 대신 린드버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흑백 광고사진으로 유명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70년대 말, 파리로 떠났다. 패션 수도에 도착한 그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첫 번째는 1988년 안나 윈투어가 편집장으로서 처음 선보인 <보그> 커버를 촬영한 일. 모델 미카엘라 베르쿠가 크리스찬 라크르와 꾸뛰르 스웨터와 낡은 청바지를 입은 이미지는 새로운 패션 시대(윈투어가 여왕에 오른)가 도래했음을 증명했다. 동시에 피터 린드버그라는 사진가가 패션계에서 가장 신선한 두 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사진이 되었다.
두 번째는 전설적인 1990년 1월 영국 <보그> 커버. 당시 편집장이었던 리즈 틸버리스와 린드버그는 패션계의 떠오르는 스타 모델 다섯 명(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털링턴, 신디 크로포드, 타티아나 파티즈)을 뉴욕 다운타운에 모았다. 심플한 청바지에 저지 톱을 입은 다섯 명의 단체 사진이야말로 슈퍼모델 시대의 포문을 연 결정적 순간이었다. 조지 마이클은 이 이미지를 바탕으로 ‘Freedom’ 뮤직비디오를 촬영했고, 패션계 바깥 사람들도 슈퍼모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슈퍼모델 현상이 이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린드버그는 그 촬영이 전설로 남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였죠.” 생전의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여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린드버그 커리어의 대부분은 여성을 기록하는 방법에 대한 숙고였다. 가장 오랫동안 린드버그와 함께 손발을 맞춘 이탈리아 <보그>의 전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는 언젠가 이렇게 정의했다. “피터는 여성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를 위해 긴 머리를 싹둑 잘랐던 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 역시 린드버그야말로 진짜 여성을 발견한다고 이야기했다. “제가 함께 일해온 수많은 사람 중 피터야말로 진짜 저를 기록한 사람이에요. 저조차 진짜 제가 누군지 모르지만요.” 아마 에반젤리스타가 그렇게 느낀 건 가상의 장치와 허상의 욕망이 가득한 패션이라는 세상에서 린드버그는 과장된 모든 것을 걷어내고자 애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린드버그는 리터치를 거부해왔다. “이제 리터치하지 않습니다.” 2016년 고향인 독일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하지만 너무 피곤해 보이지 않나요?’ 피곤해 보이면 어때요? 피곤하고도 아름다울 수 있죠!”
그 외에도 거장이 고집한 건 많다. 스튜디오보다 야외 로케이션, 컬러보다 흑백, 어린 소녀보다 성숙한 여인 등. 여기에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환상적인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앰버 발레타가 헬무트 랭의 화이트 수트를 입은 채 날개를 달고 타임스 스퀘어를 거니는 사진,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샤넬 드레스를 입고 소호 거리를 나는 사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소중하게 여긴 작업은 1990년 3월 이탈리아 <보그>에 실린 ‘Verso il 2000(2000년을 향하여)’라는 화보다. 헬레나 크리스텐센은 이 화보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과 동행한다. 캘리포니아 사막이라는 배경도, 특수 분장을 통해 완성한 화성인(상상을 초월한 예산은 모두 사진가가 기꺼이 부담했다)도 모두 린드버그의 상상에서 비롯됐다. 샴페인 잔을 들고 아름다운 궁전을 오가거나 완벽한 색깔의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던 화보가 난무하던 패션계에서 그 이미지는 충격일 수밖에.
린드버그가 74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 역시 패션계에 충격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영국 왕실의 메건 마클과 함께 영국 <보그> 9월호 특집을 위해 현재 가장 중요한 여성 열다섯 명을 촬영하며 건재를 과시했으니 말이다(메건 마클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린드버그를 추모했다). “우리가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곰 같은 피터를 잃었다는 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손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었던 사진가를 잃은 미국 <보그>의 안나 윈투어는 이런 문장으로 피터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그는 어떤 사진가보다 더 분명히 우리가 현대 패션을 바라보는 방법을 정의했습니다. 그레이스 코딩턴과 함께한 수많은 <보그> 화보는 우리 잡지의 역사 중 가장 인상 깊은 이미지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의 작업을 사랑한 이유는 그의 사진이 놀라운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작업은 여성으로 하여금 힘과 당당함을 이끌어내고, 장식 없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담아내곤 합니다.” 지금 패션계를 움직이는 여제가 들려주는 린드버그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함이 없다.
만약 사진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신만의 사진을 완성하는 것이라면, 린드버그야말로 가장 큰 영광을 누린 사진가였다. 2013년 <Images of Women>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은 린드버그와 인터뷰를 하던 <보그 코리아> 에디터는 이렇게 물었다. “사진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가의 답은 어렵지 않았다. “자기만의 사진 언어를 갖는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거리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내는 건 사진가의 감각이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실내든 따뜻한 자연광 아래서든 그 감각을 똑같이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나 꺼내 쓸 수 있는 나만의 표현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30여 년간 패션계는 모두 린드버그의 감각에 취해 있었다. 환상적이지만 솔직하고, 꿈같은 이야기 속에 진짜를 발굴하는 놀라운 시선. 린드버그만의 모순을 모두가 그리워할 것이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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