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종’ 이수연 월드의 차갑고 건조한 매력
<지배종>은 파격적인 그래픽과 함께 시작한다. 도축된 고기가 식탁으로 전달되는, 말 그대로 ‘밥맛 떨어지는’ 이미지가 흘러나오더니, 곧 배양육 업체 대표 윤자유(한효주)가 고객들 앞에 나서서 ‘피 흘리지 않는 고기’를 홍보한다. 그의 대사는 크루얼티 프리와 지속 가능 영농의 필요성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환경 운동가들이 목 놓아 외치지만 대중의 귀에 잘 도달하지 않는 메시지가 상업 드라마의 세련되고 아름답고 부유하고 야심 찬 여주인공의 입으로 발화되는 풍경이 신선하다. 물론 <지배종>은 환경 교육 콘텐츠가 아니다. 오히려 잘 만든 기업·스릴·액션 드라마에 환경이라는 소재를 자연스럽게 접목한 것처럼 보인다. 그게 이 드라마의 위대한 점이다.
드라마 초반에는 윤자유가 진짜 환경을 생각하는 경영인인지, 자기 야심 때문에 세균 덩어리 배양육의 실체를 숨기고 살인까지 도모하는 악당인지 확실치 않다. 그리고 이내 윤자유가 겪는 다양한 위협이 드러난다. 전통 축산 농가의 반발, 제3세계 농업을 장악한 마피아, 기술 유출, 유니콘을 집어삼키려는 자본가들… 이것들은 배양육 산업을 잘 몰라도 납득 가능한 반작용이고, 하여 드라마에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도 설득력이 있다.
<지배종> 6화, 마침내 윤자유의 진심이 드러난다. 그는 대학원 시절 동물 살처분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쌍둥이 자매를 소위 ‘인간 광우병(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으로 잃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자유는 “다른 생물체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건 진정한 지배종이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먹이사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BF를 설립했다. 이 소재는 2011년 한국에서 벌어진 구제역 사태를 상기시킨다. 그 무렵 울부짖는 포유류의 모습이 연일 TV 뉴스에 나왔고, 공장식 축산이 비판대에 올랐다. 윤자유의 동료는 다른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빠져 있을 때 자유는 대안을 떠올리고 실천에 옮겼다고 그를 치켜세운다. 이 사연은 윤자유가 전 대통령 암살 시도의 배후일 거란 혐의를 두고 그에게 접근했던 경호원 우채운(주지훈)마저 감화시킨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보고 단지 걱정하거나 가슴 아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드라마를 써낸 이수연 작가가 있다. K-콘텐츠의 자기 복제를 우려하는 관객이라면 그에게 뚜렷이 전달될 만큼 큰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 재미를 떠나, 이미 멋진 드라마다.
이수연 작가가 시대를 읽고 화두를 제시하는 능력이 있는 드문 창작자라는 데는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배종> 후반으로 가면 배양육 기술에서 발전한 인공장기 문제, 그것을 통해 영생을 누리려는 악당들, 스스로를 실험체로 내놓는 윤자유의 모습을 통해 미래 바이오 기술의 윤리적 문제와 장애물까지 언급된다. <지배종>은 환경 의식을 전면에 담은 첫 한국 드라마이자 세상 잔인한 얼굴을 하고 막상 하는 짓이라곤 정경 유착, 부동산 개발, 경영권 다툼, 마약, 성범죄 따위가 전부인 한국 드라마 속 진부한 기업가상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사고로 다친 후 본의 아니게 인공장기를 이식받고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우채운의 모습에서는 리얼리즘을 벗어나는 순간 붕 뜬 느낌이 들고야 마는 한국 SF 영상 콘텐츠의 돌파구도 암시된다.
물론 흥행은 또 다른 문제다. 이수연 작가의 <비밀의 숲> 시리즈처럼 <지배종>은 느리게 끓어오르는 드라마다. 차갑고 건조한 주인공도 여전하다. 창작자들 입장에서 OTT는 전통적인 TV 미니시리즈처럼 억지로 12부작까지 늘릴 필요가 없어서 좋은 플랫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 미스터리 구조와 절제된 감정선이 특징인 이 작가에게 적합한 환경이다. 다만 이번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개인 서사가 거의 주어지지 않은지라 악당들의 극적 매력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만큼 주인공들이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윤자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이 그다지 드라마틱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주지훈은 원래 표정의 뉘앙스가 풍부한 배우는 아니다. 이건 장르나 협업하는 배우들의 에너지 레벨에 따라 오히려 효율적으로 쓰일 수도 있는 개성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가뜩이나 건조한 감정선을 더욱 휘발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대신 그는 액션 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액션 신은 전반적으로 낮은 에너지 레벨을 유지하는 이 드라마에서 시의적절하게 활력을 공급하는 장치다. 그러니 이것은 균형의 문제라고 해두자.
이 차가움과 건조함 그리고 대중성의 낯선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에 따라 <지배종>은 올해 가장 신선한 한국 드라마일 수도, 야심 찬 시도에 비해 결과물이 잔잔해서 아쉬운 범작일 수도 있다. 적어도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수확은 한국 드라마의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야심 그 자체다. 그것만으로도 <지배종>은 박수받아 마땅한 드라마다. <지배종>은 총 10부작이고, 5월 둘째 주 디즈니+에서 마지막 2회가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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