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의 무한 매력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한예리는 세상을 포용하는 배우로 기능하며 세상을 다양하게 궁리하게 한다. 무궁무진한 매력으로 관객을 붙잡아두는 그녀가 새 작품으로 꺼낼 이야기는 가족이다.
어떤 배우를 좋아하게 되는 데는 극 중 캐릭터라거나 외모, 행보 등 다소 커다란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예리는 좀 다르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한예리가 좋다고 말했다. 눈물을 참을 때 입 모양이 좋아서, 강단 있고 신념이 꽉 찬 눈빛이 좋아서, 세상만사 지친 표정이 좋아서, 동글동글한 목소리가 좋아서…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명장면처럼 한예리는 분절될수록 강렬해진다. 특정 이미지에 갇히지 않지만 사람들을 사로잡는 수만 개의 디테일이 있는 배우. 그리고 나는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장난감 총을 겨누고, 팝콘을 뒤집어쓰며 화보를 촬영하는 한예리를 보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섬세한 얼굴근육과 세상에 귀여움을 더하는 리듬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건네자 한예리는 말했다. “앗, 저는 허당이에요. 평소에도 어딘가 구겨져 있죠. 게으르고 부족한데 빈틈없는 사람으로 이미지가 포장되어 있어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타입이라서 밥 먹을 때도 ‘이것도 맛있을 것 같고 저것도 맛있을 것 같으니까 다 시켜서 먹어보자!’ 해요.” 촬영 중간에 우리는 김밥을 종류별로 시켜서 동그랗게 둘러앉아 꼭꼭 씹어 먹었다.
지난해 <기생충>의 국제적 경사에 앞서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주인공은 <미나리>였다.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가족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떠난 가족처럼 한예리 역시 지난여름 미국을 향해 떠났고, 6주간 영화를 찍었고, 어느새 선댄스영화제 한복판에서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손에 있는 선댄스영화제 티켓이 너무 신기했어요. 나도 여기 와서 영화를 보는 날이 있구나 이러면서.” 그 얼떨떨한 순간, 그리고 완성된 <미나리>를 처음 본 한예리의 흥분은 브이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강원도 같았어요(웃음). 가족적인 분위기인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인지 영화계 흐름이 보였어요. 이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것들이 다음 화두구나 싶었죠. 다른 영화도 네 편 정도 봤는데 아트 영화라기보다 생활과 가까이 있는 작품이 많았어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잖아요. 영화가 ‘이게 삶이야. 이게 콜라 맛이고 이게 사탕 맛이야’라고 얘기하는데 내가 아는 느낌이라 더 흥미롭게 봤어요.”
<미나리>에서 한예리는 두 아이의 엄마 모니카를 연기했다. 배경인 1980년대는 우리 어머니 세대의 젊은 날이었다. 한예리는 대본의 빈 곳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잘 아는 여성들을 투영시켰다. “촬영하면서 할머니, 엄마, 이모에 대한 기억이 스쳐갔어요. 생각해보면 엄마는 저보다 어릴 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6·25전쟁 중에도 살아내셨죠.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우린 태어났고 적응하면서 살고 있어요. 완전히 다른 나라에 가서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모니카의 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어디를 가든 똑같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우리 여성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극 중에서 어머니로 관계를 맺은 윤여정의 얼굴은 한예리에게 깊은 잔상을 남겼다. 그 주름과 연륜이 겪어온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지막 장면 외에도 한예리의 젊은 날의 해외 진출은 따뜻하고 새로운 의미를 새겼다. “정말 많은 분이 영화에 도움을 주셨어요. 계속 생각했거든요. 왜 모니카는 지금 여기 있는 걸까. 답은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몹시 사랑하고, 이 영화를 만드는 아이작(정이삭) 감독님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이 사랑으로 뭉쳐 현장에 있었어요. 그 기운 덕분인지 촬영하면서 기분이 참 좋았어요. 겁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다 사람이 사는 얘기니 무슨 작품이든 너무 겁먹지 말고 일단 해보자고 여기게 됐어요.”
언젠가 가정을 이루면 진지하게 생각할 것 같았던 ‘가족’에 대한 생각은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로 이어졌다. <미나리>를 마치고 돌아와 가장 재미있게 본 대본이었다. 배우들에겐 작품이 화두를 던지고 한예리는 ‘불현듯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더 많이 고민할 수 있는 질문이 생기는 그 과정’ 자체를 좋아한다. 공교롭게도 또다시 은희 역을 맡았다. <최악의 하루>에서 세 남자와 얽혔던 은희를 기억한다. <더 테이블>에서 은희는 결혼식 하객 대행을 할 대로 해본 ‘꾼’이었다. “신기한 게, 은희라는 이름으로 연기를 할 때 남자관계가 복잡해져요(웃음). 그리고 <최악의 하루> 은희는 타인에게 많이 맞춰주는 경향이 있잖아요. <가족입니다> 은희도 타인의 눈치를 보고 배려해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몰라 주변 상황이나 남자에게 휘둘리거든요. 은희라는 이름이 그런가 봐요(웃음).” <가족입니다> 은희는 둘째 딸이다. “대본이 무척 어렵다는 말을 배우들끼리 많이 했어요. 스릴러나 장르물처럼 사건이 딱 벌어지는 스토리가 아니다 보니 감정의 폭마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어요. 그 선택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 있고요.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은희가 모두 만나다 보니 왜곡이 없도록 신경 썼어요. 은희는 착하고 참 좋은 친구긴 한데 굉장히 허술해서 ‘쟨 또 왜 저래?’ 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 어떤 사람은 은희를 좋아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부분이야말로 모든 가족에게 다 있어요.”
우리에게는 가족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남는 건 가족밖에 없다’, ‘또 하나의 가족’, ‘가족 같은 친구’, ‘가족보다 가까운’, ‘가족보다 못한’. “더 많이 챙기고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한예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를 들으며 <미나리> 배우들의 단체 사진도, <가족입니다> 포스터도 가족사진처럼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 촬영이 끝난 뒤 함께 밥을 먹고 주말에도 시간을 같이 보낸 <미나리> 배우들, 짬이 날 때마다 모여 ‘상식적인 가족’에 대해 토론하는 <가족입니다> 배우들. 한예리가 1년 동안 경험하고 있는 ‘가족 같은’ 순간이다.
사실 드라마 제목처럼 우리는 가족을 잘 모른다. 비밀로 삼지 않더라도 가족의 어떤 면은 낯설다. 한예리도 그렇다. “집에서는 무뚝뚝하고 일만 많이 한다고 여기세요. 그런데 사실 밖에 나가면 많이 웃고 많이 떠들어요. 남동생, 여동생의 어떤 모습은 저 역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특히 남동생은 저에게 말을 잘 안 하는데 둘째한테는 말을 꽤 하더라고요. 이게 첫째 누나와 둘째 누나의 차이인가요?”
물론 관객도 한예리에 대해 모르는 면이 있다. 영화 <해치지 않아>에서 동물원 자리에 리조트를 개발하려다가 환경 파괴 논란이 일자 “나 그린피스 회원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한예리를 적어도 나는 상상해본 적 없다. 빈틈없이 단정한 커트 머리와 재벌 2세들이 공식 석상에서 주로 착용하는 수트 재킷과 펜슬 스커트를 입은 모습도 마찬가지다. 한예리는 키득거렸다. “일단 재미있었죠. 손재곤 감독님의 전작을 좋아해서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제 이미지를 소모적으로 쓰기보다 다른 면을 찾아봐주신 점도 좋았고요.” 앞으로도 한예리의 뻔뻔한 연기를 자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가 바로 체면 차리는 인물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는 영화는 희귀하니까.
누군가는 한예리를 ‘무쌍 시대’를 견인한 배우로 꼽을 테지만 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양성을 확장한 배우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료로 삼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동하는 배우는 다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특정 이미지를 지닌 배우들이 이 역할을 대변해왔다. 독립영화계에서 상업영화계로 건너와 처음 찍었던 영화 <코리아>에서 북한 팀 선수 유순복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체가 튼튼해질 만큼 탁구를 연습할 때부터 한예리의 리얼리즘 시대는 열렸는지 모른다. 한예리는 무수한 연속성의 시간 속에 어떤 특정 지점에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야 마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관객이 극 중 인물에게서 자신을 보는 듯 공감하거나 극 중 인물로 인해 새롭게 환기되는 것만큼 배우로서 의미 있는 역할이 있을까. 생활고에 지친 청춘의 고단함(<청춘시대>), 연애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의 변죽(<최악의 하루>), 엄마의 새로운 얼굴(<챔피언>), 어지럽던 시대에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강인함(<녹두꽃>)은 한예리였기에 생명력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우상의 자리가 아닌 대변자의 자리에서 등장인물의 서사를 관객에게 더 밀착시켰다. 그녀의 성향과 취향과 마음가짐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작품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방향성을 만들어냈다. 물론 결과론일 뿐 한예리가 의도한 바는 없다. “제 취향 자체가 잡식성이에요. ‘재미있거나 좋은 영화면 다 좋아’ 이런 식이죠. 음악도 가리지 않고 시나리오도 재미있으면 다른 조건은 별로 상관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제가 편한 현장이 좋아요. 감독님과 대화할 때 ‘코드가 비슷한 것 같은데?’ 싶으면 별생각 하지 않고 하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지금 제 나이가 그래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가 회사원이 됐다가 20대 초반 취준생도 될 수 있죠. 시간이 더 지나면 달라질 텐데, 가볍고 편안하게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좋아요.”
연기를 하기 전 한예리는 무용수였다. (고향 제천에 마땅한 어린이집이 없어 생후 28개월부터 무용 학원에 갔다는 사연은 박혁거세 신화처럼 들린다.) 지축처럼 곧은 자세와 유려한 팔근육은 혹독하던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신인 시절 가방을 메고 다니며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대단해했더니 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고 대답하던 어느 인터뷰도 떠올랐다. 실제로 무용가로 지내던 시간은 뭐든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했다. 춤출 때 생긴 근성 덕분에 지금 이런저런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다고 여긴다. “한국무용은 일단 10년은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나이 들수록 인정받기도 하고요. 연기를 시작할 때도 ‘일단 10년은 해보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했죠.” 어릴 때부터 연습하는 매일만 있었다. “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쉬는 날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배우 일을 하면서 몸이 이렇게 덜 힘든데 돈을 벌어도 되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웃음). 늘 육체로 다 때웠으니까요.”
한예리는 지금도 무대에 선다. 5년째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공연을 해오고 있다. 최근 무대는 지난해 10월이었다. 겸손한 말투로 조금 빠르게 무용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예리는 견고해 보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선보인 창작무용이나 <녹두꽃>에서 한복 입은 모습을 수개월 동안 지켜봤어도 그렇다. “프로로 활동하는 친구들만큼의 실력도 안 되고 몸 컨디션이 좋은 편도 아니에요. 제가 할 만한 것을 찾아 하는 정도예요. 그래도 무용이 재미있고 관객을 직접 만나고 소통하며 받는 에너지를 좋아해서 계속 무대에 서요. 춤으로만 가능한 것도 있고요. 지쳐 있을 때 춤을 추면 환기가 돼요. 연기로 힘들 때 무용으로 훌훌 털고 돌아오곤 해요.” 아울러 국악의 매력도 소개했다. 듣다 보면 들리는 게 있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추천이었다. “클래식에 극강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국악은 구성져요. 궁중음악, 정악, 민속악 모두 다르지만 전라도 쪽 음악을 들으면 훨씬 다이내믹하고 재즈 느낌도 있어요. 비트가 많이 쪼개지고 신이 나거든요. 슬플 때 들으면 감성적이 되기도 해요. 국악은 정말 다양해요. 어떤 곡을 제가 추천하기보다 어떤 악기의 어떤 소리가 좋은지부터 시작해서 퓨전, 창작, 궁중음악 등으로 넓혀가보세요. 진짜 좋아요.”
얼마 전, 그러니까 2020년에 한예리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한 팬이 트윗을 올렸다. “한예리도 인스타를 하는 시대다!” 비록 지구에서 인스타그램을 가장 늦게 시작한 배우일지라도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숨은 적은 없다. 여자 캐릭터가 제대로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적다고 속상해한 적도 있고, 여자 배우도 할 수 있는 좋은 배역을 남자가 맡을 때 질투가 난다고 한 적도 있다. 반대로 오직 여성의 대화만으로 끌어간 영화를 할 때는 신난다고 그 감정을 천진하게 드러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홍보대사도 맡았다. “애써서 어떤 얘기로부터 도망가려고 하지 않아요. 이런 일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알겠지 생각해요. 이기적으로 살기 위해 하는 얘기가 아니라 누구도 차별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인걸요. 저 역시 페미니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해요. 은연중에 사회적 관념에 의해 하는 말도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여주인공 위주의 드라마가 많았는데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차이가 있었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예리는 말한다. 특히 “젊은 여성 캐릭터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년 여성 캐릭터도 많이 달라져서 좋다”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이런 변화가 일시적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인들의 소망을 가능하게 할 구체적인 희망 사항도 품는다. “제작 쪽에서 방법이 있었으면 해요. 몇백억대 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플랫폼을 아예 분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관객이 다양하게 보는 게 중요하거든요. 관객들이 극장에서 ‘또 저 영화밖에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요. 저는 다양한 영화를 보며 자랐어요. 장르적인 영화도, 로맨스도 많았어요. 지금은 이 감독이 만든 영화는 참 좋다는 얘기가 덜 나와서 아쉬워요. 감독님들이 개성을 뽐내면서 찍을 수 있게 좀 더 기다려주고 믿어줬으면 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생각을 듣는 동안,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평범한 일상에도 여러모로 뒷모습이 있음을 보여줬던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가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한예리는 ‘평범하게 살면서 잠복하라’는 극 중 스파이 미션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수행해낼 것이다. 물론 우리 촬영에 동원된 거북이는 망망대해와 무관한 남아프리카 출신이었고, 앙귤라타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대한민국에 와서 돗대거북으로 불리고 있었다. 논현동 스튜디오에 도착한 돗대거북은 의외로 빨리 달렸지만 막상 촬영을 시작하자 등껍질 속에 들어가서는 나오질 않았다. 한예리는 거북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가만 말했다. “그냥 우리가 좀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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