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장편 경쟁 한국 영화 4편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장편 경쟁 선정작 중 한국 영화 네 편을 소개한다. 이우정 감독의 〈최선의 삶〉, 박소현 · 이솜이 · 강유가람 · 소람 감독의 〈애프터 미투〉,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 이재은 · 임지선 감독의 〈성적표의 김민영〉. 닫아버린 상처의 방에 함께 들어가주고, 잊힌 유년의 어느 밤을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도 곁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길.
그때의 내게 주는 위로 처음 세상에 휩쓸리던 학창 시절의 나에게 이우정 감독의 〈최선의 삶〉을 보내고 싶다. Writer NARANG KIM
“집에 가만히 있으면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뭐가?” “상처가.” 영화 <최선의 삶>에서 고등학생 강이와 아람이 육교에서 나눈 대화다. 이우정 감독은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며 ‘친구와 나눈 저런 순간들 덕분에 그 시절을 잘 넘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최선의 삶>은 고등학생 강이, 소영, 아람의 관계가 축이다. 셋은 같이 가출할 정도로 친하다. 계단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자도 함께라서 안전함을 느끼고, 기성세대가 그들 사이로 침범할 때도 서로를 구해낸다. 에어컨, 선풍기도 없는 뜨거운 반지하 방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지고, 그때부터 소영은 강이를 따돌린다. 학교로 돌아온 뒤 강이를 향한 폭력은 점점 심해진다. 아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가정 폭력에 짓밟히던 아람은 ‘주인이 있더라도 안쓰러운 모양새로 있는 물건은 모두 주워 오는’ 친구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안쓰러운 고양이를 돌보며 강이와 서서히 멀어진다.
세 친구의 ‘지금’은 감독의 인생에서도 가장 강렬하던 시절이다. “제게 깊게 남은 감정은 다 그 시절 것이에요. 처음 맞아보는 거대한 파도를 맨몸으로 버텨야 했죠.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밀쳐낸 친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 해보려 했는데 더 멀어지는 무력감. 그때의 감정은 너무 깊어서, 같은 감정의 단어라도 그때만큼의 깊이가 되기 힘들죠.“ 나도 <최선의 삶>을 보며 잊고 지낸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출구 없는 터널 같던 10대의 내게 보내는 위로 같은 영화였다. 이 작품은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KTH상을 수상했다. 이우정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감독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단편 <송한나>(2008), <애드벌룬>(2011), <서울생활>(2013)을 연출했고, 친구들의 작품에 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최선의 삶>은 임솔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우정 감독은 마일스톤컴퍼니 대표가 권한 이 소설을 읽고 앞서 언급한 이유뿐 아니라 ‘내가 가진 것과 정반대의 힘’을 느껴 영화화를 결심한다. 인물에게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는 자신의 연출 태도가 싫어질 즈음, 인물에게 밀착해서 나아가는 이 소설을 읽게 된 것. “이번만 큼은 인물과 꼭 붙어 나아가고 싶었어요.”
201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비어 있는 학교에서 크랭크인을 했다. 이우정 감독은 전날 밤 ‘기차가 출발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설레고 두려워 잠을 설쳤지만, 첫 신을 찍으면서 안심했다. 세 주인공이 서로 부대끼며 신나게 복도를 달려가는 장면으로, 배우들이 마치 원래 그 인물이었던 것처럼 잘해주었다. 덕분에 촬영은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감독과 스태프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한 신만 더 당겨오고 싶었다. 강이가 대걸레를 끌고 학교 복도를 지나가는 장면인데, 감정의 파도를 한창 겪는 와중인 후반부의 것이다. 미안한 권유였지만 배우는 해냈다. 감독은 그때를 절대 잊지 못할 거라며 회상했다. “첫 촬영일에 강이의 가장 행복한 얼굴과 슬픈 얼굴을 보면서 ‘정말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강이 역할은 방민아가 맡았다. 걸스데이의 민아와 동일 인물인지 중반까지 몰랐다. 배우가 원한 것도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자신을 몰라보는 거였고, 감독도 ‘사람들 이 상상 못한 민아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성공이었다. 그만큼 방민아가 연기한 강이는 마음이 불편해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이돌 이미지가 강한 민아의 캐스팅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이우정 감독은 민아와 처음 만날 때부터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민아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들었던 고민, 괴로운 지점을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저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갈 배우를 원했기에 민아의 이런 이야기가 반가웠죠. 민아뿐 아니라 아람 역의 심달기, 소영 역의 한성민 배우 역시 함께 만들어갔기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예산일수록 함께해나가는 에너지가 중요하죠.”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처음으로 “도와주세요”라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강이의 절박한 눈이었다. 그 SOS로 구원받진 못했지만, 학창 시절의 나도 강이처럼 용기를 내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 작품을 강이 나이의 나에게 보내고 싶은 이유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강이의 눈은, 가출해서 모텔에 머물 때 거울에 비친 소영을 바라볼 때다. 친한 친구라 좋고 편해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 라 설명이 힘들고 복잡해 보였다. 어떤 디렉션이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우정 감독은 배우에게 감정을 요약해서 설명하거나 문장으로 전달하길 피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장면마다 최대한 배우들이 자유롭게 표현하길 바랐어요. 대신 촬영 전 준비 단계에서 오래 대화를 나눴죠. 강이가 소영이에게 갖는 감정이 뭐가 있을까, 사랑, 우정, 동경, 모든 가능성이 나왔어요.” 감독은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동안 최대한 배우 곁에 머물려고 애썼다. “혼자 감내한다는 생각은 안 하게 하고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촬영 전에 긴 대화를 나누거나 모니터를 통해 응원의 마음을 보내는 게 다였지만요.”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세 친구가 함께 걷고, 강이가 혼자서도 걸었던 길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다. “길에 아이들의 실체는 없지만 마치 그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솔직히 특정 배우의 연기가 빛나는 장면을 꼽지는 못하겠어요. 편집하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라는 소리를 하도 해서 스태프들 사이에서 금기어가 됐거든요.” 감독은 언제나 배우에게 감사했고, 그들에게 어떤 평가나 가름도 원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결말에선 아마도 당신의 예상이 어긋날지 모른다. 최근 본 한국 영화 중에 이렇게 과감히 끝까지 가버리는 작품이 있었던가. 결말을 열어둬야 세련된 것처럼 여겨지거나 때론 안전하지만 감독은 ‘욕먹을 각오’로 끝을 맺었다. “그 직전에 이야기를 끝낼까도 싶었죠. 강이가 결심까지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 거예요. 하지만 어렵더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끝을 본다는 것 자체가 제게 도전이었어요.”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말마따나 “너에게도 나에게도 공평한 최선이란 세상에 없다”를 생각하게 한다. (감독은 한 줄 정의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우정 감독은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 평으로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를 꼽았다. “왜 만들고 싶은지 저 도 궁금해서 만들었거든요. 저라는 사람은 메시지를 정해놓고 작업하면 재미없더라고요.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죠. 가슴 아픈 평이지만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물론 대부분의 평은 “위로를 받았다”이다.
다음 작품은 조금 더 편안하고 느긋하게 웃기고 슬픈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단편과 <최선의 삶>도 얽힌 관계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했죠. 거대한 현안도 많지만, 자리에 누웠을 때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죠. 제 일상이 좀 웃기고 슬퍼요. 여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게 될 거 같아요.”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거대한 ‘미투 운동(#MeToo)’ 속에서 세계는, 한국 사회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얼마나 변했을까. 운동 이후 삶을 더 건강하게 재건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박소현 · 이솜이 · 강유가람 · 소람, 여성 감독 네 명이 이 질문을 품고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2021)를 만들었다. Writer JIHYE JUNG
무더운 7월의 여름밤. 강남의 한 사운드 믹싱 스튜디오에서 <애프터 미투>(2021) 팀을 만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의 첫 공개를 앞두고 후반 작업이 한창이다. <애프터 미투>는 박소현의 <여고괴담>, 이솜이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강유가람의 <이후의 시간>, 소람의 <그레이 섹스>, 이렇게 단편 다큐멘터리 네 편을 묶어낸 옴니버스다. 영화 제목 그대로 감독 네 명이 각자 생각하고 관심을 둬온 미투 운동과 미투 이후의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이 프로젝트는 강유가람 감독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2019년 겨울이었어요. <우리는 매일매일>(2019)을 만든 후였고 사회 곳곳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죠. 그런 흐름과 상황을 잘 반영한 미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있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혼자 작업하기에는 다뤄야 할 내용이 상당했고 그 범위도 넓었어요.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 당시 옴니버스 작품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도 그 방식으로 작업해보자 싶었죠. 여성 감독들끼리 함께 작업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을 것 같았어요.” 미더운 동료들이 함께했다. 남순아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아 기획을 구체화하는 데 힘을 한껏 실어줬고, 박혜미 프로듀서가 제작 총괄을 맡으며 꼼꼼하고 치밀하게 기획서를 매만져나갔다.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질 만한 동료 연출자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의 의미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민했을 사람들, 무엇보다 미투 이후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재건해야 할지에 관해 자기만의 질문을 던지고 잠정적 해답을 찾아보려는 창작자들. 그들이 모여 <애프터 미투>가 됐다.
<구르는 돌처럼>(2018),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2019) 등을 만든 박소현 감독은 스쿨 미투에 주목한다. “‘애프터 미투’는 미투 현상을 고발하거나 미투를 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투 너머를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미투 이후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변하고 또 변하지 않았는가라는 고민으로까지 나아가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청소년들과 작업하면서 공교육, 제도권, 비제도권, 특성화 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현장을 경험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용화여고 스쿨 미투 운동에 관심이 갔죠.” 하지만 이것은 특정 학교, 특정 세대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주목하자. 감독에게 용화여고 미투 운동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아주 오랫동안 여러 학교에서 계속됐어요. 이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건 뭘까. 어떤 구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일까.” 폭력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서로 다른 시기 여러 학교의 사진 푸티지를 모아 작업했다. “영화는 시간성을 통해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요. 여러 시간대, 다른 학교의 사진이 모여 마치 한날 한 공간에서 벌어진 일처럼 보이는 효과를 생각했습니다.”
<관찰과 기억>(2017)을 연출한 이솜이 감독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중년 여성의 미투, 한 여성의 내밀한 폭력의 역사에 집중한다. “누구나 알 법한 굵직굵직한 미투와 달리 누군가의 이야기는 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때가 있어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가정 폭력 피해 여성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공연을 진행한다)를 통해 영화의 주인공인 박정순 선생님을 만났어요. 가정 폭력, 소아 성폭력, 친족 성폭력 등 선생님이 겪은 폭력의 피해가 너무도 컸어요. 선생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큰 소리로 계속 얘기해도 세상은 내 말에 관심조차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얘기하는 걸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셨죠. 그 솔직함, 어떻게든 말하고자 하는 의지에 깊이 감동했어요.” 그간 이솜이 감독은 비선형적 편집, 이미지 간의 충돌과 어긋남에서 오는 격차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업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방식을 고수할 수 없었다. “남순아 감독님이 편집본을 보더니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관객이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다’는 피드백을 준 적이 있어요. 그땐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맞을까, 기존의 내 영화적 취향과 너무 다르지 않나 싶었죠. 그런데 편집을 해갈수록 선생님의 감정과 의지를 조금이라도 더 드러낼 수 있는 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물과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감독의 연출법 역시 변화의 과정을 겪은 셈이다.
한편 강유가람은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 등을 통해 각기 다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동과 삶을 주목해왔다. 이번에는 ‘미투 운동의 당사자들과 함께했던 연대자들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췄다. “문화 예술계의 미투 운동에 힘을 싣고 목소리를 냈던 이들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미투 운동의 과정에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고 그 활동이 각자의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를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인물들의 인터뷰를 충실히 따르며 미투 운동과 관련된 정보를 영화에 기입해두려 했다. “미투에서 많은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정작 이 사회는 그 변화를 받아들일 만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나 농담처럼 미투 운동을 소비하는 건 아닐까요. 실제로 미투의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미투 이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여성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다양한 형태의 ‘통금’에 관한 영화 <통금>(2018)을 만든 소람은 ‘일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미투’ 얘기를 해보려 한다. “사적 경험을 통해 영화적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많아요. 내가 마음에 뒀던 상대와의 신체 접촉을 경험하고 이후 상대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됐을 때 이것은 로맨스와 성추행, 그 어디쯤일까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죠. 그때의 나의 욕망, 폭력적인 일 을 겪은 것 같은 감정은 각각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터졌죠. 또 소셜 앱으로 만난 상대와 하룻밤을 보낸 친구가 공포감을 느꼈다는 일화 등을 듣게 됐어요. 그러면서 어쩌면 이런 일이 개별적인 사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런 경험과 감정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엮어나가면서 소람 감독은 “여성들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길 바랍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감독들과 프로듀서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관심이 잘 반영된 네 편의 영화가 단순한 묶음에 머물지 않도록 서로 의 영화를 두고 치열하게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남순아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의 오프닝에는 1991 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영상이 들어가 있다. 또 영화의 끝에는 미투 사건으로 치르게 된 지난 보궐선거의 풍경이 기록돼 있다. 미투 운동이 어느 날 별안간 찾아온 게 아니라 아주 긴 역사 동안 계속돼왔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감지되는 지점이다.
궁금해졌다. 미투 운동과 그 후의 시간을 보내며 영화를 만든 여성 창작자들은 과연 일상을 건강하게 재건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고 있을까. “많이 걷고, 잘 먹고, 혼자 여행을 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감정을 존중하고 잘 들여다보기 위해 일기를 쓰죠.”(소람)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해요. 필라테스도 시작했어요.”(강유가람) “이번 작업을 하며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서울창의예술교육센터로 출근하며 아이들에게 영화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규칙적인 생활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요.”(이솜이) “반려묘들을 보며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졌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길 좋아하다 보니 거리 두기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사랑을 줄 땐 주더라도 자기 영역이 확실한 고양이들을 본받아야 할 것 같아요.”(박소현)
우리의 사랑 고백 한국 성소수자부모모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도착했다.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너와 나를 향한 누군가의 애틋한 사랑 고백을 듣게 될 것이다. Writer JIHYE JUNG
여기, 한 편의 영화를 통한 사랑 고백이 있다. 발신인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의 부모들, 수신인은 그들의 성 소수자 자녀들이다. 물론, 때때로 발신인과 수신인은 경계 없이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편지가 희망하는 바에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위계와 일방적 종속의 언사로부터 이 편지는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언어로 다시 이 관계를 써 내려가고 싶다. 부모와 자식 역시 사람 대 사람, 인격 대 인격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각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마땅한 관계임을 몸과 마음으로 겪어나간다.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영화가 됐다.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2021)이다. 하청 노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 <플레이 온>(2017)을 연출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자 ‘커밍아웃 3부작’인 <3xFTM>(2008),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2010) 등을 만든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열 번째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제작에 협력해 완성한 첫 번째 영화라는 데 의미가 있다.
변규리 감독이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만난 건 2017년 가을.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연분홍치마에 자신들의 홍보 영상 제작을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은 2014년 자조 모임으로 출발해 2018년 성 소수자의 부모, 가족, 당사자가 함께하는 인권 단체로 거듭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을 외치고 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은 그 일련의 과정과 의미를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변규리 감독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많은 이를 사전 인터뷰하며 그들이 서로에게 큰 힘이 돼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을 처음 찾은 분들은 기존에 활동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세상에 나만 홀로 있는 게 아니었구나’를 느끼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가능하다면 영화에 다양한 퀴어 정체성, 각기 다른 부모와 자식 간 관계 맺기 방식을 담고 싶었다. 젠더 퀴어로 정체화한 결과 한결과 엄마 나비, 예준과 엄마 비비안을 중심인물로 두고 영화는 그들의 바람을 하나씩 그려나간다. “성 소수자인 당사자들이 커밍아웃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가 자신의 부모가 아닐까요.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정체성을 설명해야만 할 때가 있어요. 그때 부모와 아예 연을 끊게 되거나 아주 오랜 설득의 과정을 갖죠. 나 역시 부모보다는 자식 된 입장이다 보니 부모 세대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컸어요. 그런데 부모모임을 인터뷰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분들도 ‘내가 아이를 그렇게 낳았기 때문일까’를 비롯한 자책과 자식에게 했던 성 소수자 혐오 발언에 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성 소수자를 향한 이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부모님들도 자유롭지 않았던 거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커밍아웃한 자식, 그런 자식을 통해 되레 자기 자신의 변화 과정을 겪는 부모. “<너에게 가는 길>을 통해 성 소수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데 일조하는 일 못지않게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재정립해야 할까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부모와 자식이 어떻게 해야 서로 각자 독립해 잘 살 수 있을까요. 독립이라는 게 단순히 공간을 분리해 따로 산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건 어떤 방식일 때 건강한 것일지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것, 그 과정이야말로 독립의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변규리 감독의 말대로 영화 속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자립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한다.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을 하는 한결, 그 곁에서 따로 또 같이 한결을 지지하는 나비, 연애하고 사랑하며 일상을 일궈가는 예준, 예준의 활기찬 에너지를 긍정하며 성 소수자 인권 활동을 이어가는 비비안. 그들이 우뚝 서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비비안은 애정 표현도 잘하는 화목한 가족이라고 여겼음에도 예준 혼자 오랫동안 벽장 속에 있어야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나비는 한결이 어릴 때부터 정체성에 관해 고민해왔음에도 그것을 외면한 건 아닌지 되돌아보며 더는 한결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미룰 수 없음을 직감한다. “트랜스젠더 학생이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변희수 하사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질 때였어요. 나비 님이 카메라 앞에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다며 처음으로 내게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늘 굳건하고 강인한 분이었는데 그땐 달랐어요. ‘한결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내가 무너질 거 같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마지막까지 한결 곁에 있겠다는 나비의 고백은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향한 비통하고 참담한 외침이기도 하다.
<너에게 가는 길>에는 성 소수자 당사자들의 변화뿐 아니라 자식을 통한 부모들의 자성과 각성이 있다. 나비와 비비안을 비롯한 성소수자부모모임의 부모들은 이 싸움을 자기 자식만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에 맞서고 동성혼과 파트너십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성 소수자 집단 진정에 함께하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차별 금지법 제정을 요구한다. 연분홍치마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변규리 감독의 전언은 이러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 덕분에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었다’며 그렇게 배운 걸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요. 또 다른 성 소수자를 둔 부모가 자식의 커밍아웃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길, 그 괴로움과 당혹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되길, 성 소수자와 연대하는 데 힘을 보태길 바라는 마음이죠. 성 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에서 시작해 더 너른 의미의 적극적인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했어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성장하는 과정이란 얼마나 보기 좋은가(웃음).” 엔딩 크레딧에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부모들의 자기소개를 덧붙인 것도 이들의 활동과 목소리, 그 존재와 에너지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변규리 감독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다큐멘터리는 주인공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주인공만 할 수 있는 것이 있죠. 카메라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포착했을 때 쾌감을 느껴요. 특히 카메라 앞에서 주인공이 더없이 솔직해질 때가 있는데 주인공과 카메라, 즉 주인공과 내가 관계를 잘 맺었다는 의미일 거예요. 그렇게 영화를 완성해 ‘우리가 함께 만든 게 이런 이야기였어요’라며 주인공에게 영화를 처음 보여줄 때 되게 행복해요.”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인물과 관계를 맺는 감독만의 방법은 뭘까. “인터뷰 현장에서만큼은 말을 최대한 아껴요. 그때 나는 듣는 역할에 충실하려 합니다.” 그것이 곧 변규리 영화가 갖는 주요한 태도일 것이다. 경청의 끝에 도달한 <너에게 가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방편이 되길, 사랑의 언어를 탐색하는 지도가 돼주길 바란다. “<너에게 가는 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 역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얘기예요. 성 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퀴어의 언어와 그 관계성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어요.”
스무 살의 멜랑콜리를 위하여 오직 20대에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있다. 〈성적표의 김민영〉 이재은 · 임지선 감독은 그 외로움과 막막함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데뷔작을 만들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Writer HYUNMIN KIM
어떻게 찍었는지 궁금한 영화가 있다면, 누가 찍었는지가 더 궁금한 영화가 있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두 번째 경우다. 삼행시를 진지한 ‘시’로 대하는 삼행시 클럽의 멤버 정희(김주아), 민영(윤서영), 수산나(손다현)는 고등학교 졸업 후 뿔뿔이 흩어진다. 민영은 다른 지역으로, 수산나는 미국으로 대학을 가고, 정희만 그 자리에 남는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아직 확신이 없는 정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로를 모색하고자 한다. 만화 <테니스의 왕자>를 좋아한 나머지 테니스장에서 일하며 여기저기 흩어진 동그란 공을 줍고, 화상 채팅을 통해 친구들과의 삼행시 클럽도 이어가고 싶다. 민영의 눈에는 그것이 비현실적 시간 낭비로 보이지만, 정희의 시간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2020년대 버전 <고양이를 부탁해>(2001)라고 부를 만한 이 영화는 20대 여성 두 명이 만들었다. 이재은 · 임지선 감독. 이재은은 수의학 전공자이고, 임지선은 스물일곱 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했다.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둘이 만난 곳은 한겨레교육문화센터다. 숫기 없는 두 사람은 인터뷰 초반 은근히 서로에게 답변을 미루는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공동 연출의 장점에 대해 물었을 때만큼은 거의 동시에 대답을 쏟아냈다. “외롭지 않았어요.” 이재은은 “감독만큼 온 마음을 쏟아 작품을 생각해주는 스태프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거니까요”라고 설명한다. 임지선은 이재은이 쓴 영화 초고 속 외로움의 정서에 공감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영화의 키워드도 외로움이다. 둘은 정희와 민영 각자의 입장에서 캐릭터를 헤아려나갔다. 이재은은 주로 정희를, 임지선은 민영을 대변했다. 자신의 캐릭터를 위해 변론하고, 때로는 반론했다. 일종의 역할극을 통해 결이 서로 전혀 다른 정희와 민영이 생겨났고, 누구에게나 이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로 완성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을 일으키며 삐걱대지만, 그 틈새로 서로를 향한 애정이 대책 없이 비집고 나온다.
이재은은 고백하듯 말한다. “저는 정희와 비슷해요. 인생에서 우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고, 항상 외로웠어요. 친구 관계에 한이 많나 봐요(웃음). 서울에서 살다가 대전으로 대학을 갔는데, 그 몇 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주말마다 서울에 왔어요. 친구들 보려고요. 친구들은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면 되지만, 나는 뭔가를 포기하고 오는 건데 그걸 몰라줄 때 서운함이 싹트기도 했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재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이러다 울 수도 있어요. 민망하지만(웃음).” 임지선은 덧붙인다. “실은 지난번 인터뷰 때 이 이야기를 하다 재은이 울었어요. 친구라는 존재가 큰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서사의 중심은 정희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이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관객 평을 보니, 성향마다 이입하는 역할이 달라 서 재밌더라고요.”
정희는 영화 후반부에서 무심히 상처 주는 민영에게 솔직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남긴다. 그것이 바로 김민영이라는 사람에 관한 ‘성적표’이다. 자신의 감정을 영화로 만들어 바라보고 나니 해소되는 지점이 있었는지 물었다. 이재은은 “나름의 판타지 실현”이라는 대답을 꺼냈다. “정희는 용기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전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놓고 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껴도 표현을 못했어요. 상대보다 내 마음이 더 큰 게 창피했거든요. 항상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만큼만 좋아하는 척했던 것 같아요. 성적표 장면의 내레이션에는 평소 생각하던 문장이 섞여 있어요. 언젠가 친구에게 직접 말 못하고 전화기를 들고 혼잣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웃음).”
처음 영화 제목을 접할 때 ‘김민영의 성적표’가 더 자연스러운 단어 조합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면 왜 ‘성적표의 김민영’인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친구의 이름으로 제목을 지은 것 자체가 애틋하지 않나. 임지선은 “끝까지 봐야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게 지었어요. 정희와 민영의 마음을 모두 대변하는 제목이에요. 민영은 정희에게 아주 큰 존재니까요”라고 설명한다.
정희는 초고를 쓴 이재은이 많이 투영된 인물이지만,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임지선의 행로와도 겹쳐 보인다.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임지선의 20대 시절이 궁금한데, 이재은은 “이런 얘기를 잘 안 해요, 친구들한테도”라며 선수를 친다. 임지선에게 하고 싶은 데까지만 이야기해달라고 청해보았다. “어렵네요. 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저는 정희처럼 내가 뭘 하고 사는지가 중요했던 사람이라 그걸 찾기 위해 돌고 돌았어요. 영화나 예술 쪽은 감히 생각도 못했는데, 막연히 영상 쪽에 관심이 있었어요. 한 번 영화과 입시에 실패하고 혼자서라도 일단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좋아하는 일을 두드릴 수 있는 그런 용기를 내는 시간이었어요.” 그렇다면 이재은의 20대는 어땠을까.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냥 이러고 있고요(웃음).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과감히 휴학하고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들어간 거죠. 저로서는 정말 큰 용기를 낸 거예요. 수의학과 학생들은 휴학을 잘 안 하거든요. 거의 고등학교의 연장 같은 분위기고요.” 수의학이라는 전공을 살릴 생각은 없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있어요. 아니, 모르겠어요. 아직도 스스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예요.” 그러면서 이재은은 지금 이 상태가 좋다고 덧붙인다. “영화를 찍었지만 제가 감독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어정쩡한 상태가 좋아요.”
단편을 찍기 위해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프로젝트는 어쩌다 보니 장편으로 확장되었고, 그렇게 만든 두 사람의 장편 데뷔작은 지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장편 부문 대상,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관객특별상,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한국장편경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임지선은 “단 한 군데의 영화제라도 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기에 이 상황이 얼떨떨해요”라고 말한다. 이재은은 “평소 낯을 가리는 편이라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정말 힘든데, 그런 상황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만큼 감사해요”라며 나지막이 웃는다.
임지선은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평보다 관객이 자기 경험에 대해 써줄 때가 좋았다”는 소감을 전한다. “그게 가장 솔직한 것 같고요. 영화에 스무 살 무렵을 소환하는 힘이 있다는 평을 들었을 때 정말 좋았어요.” 이재은은 “20대 여성이 이 이야기에 가장 크게 공감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객 연령층이 다양해질 때 신기하고 긴장돼요. 또 저희가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 최신의 감성도 아닌데 Z세대의 영화로 봐주는 것도 좋고요”라고 덧붙인다. 두 사람 모두 감독이라는 호칭에 어색해하고, 차기작 계획도 없다고 말하지만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감출 수 없이 새어 나온다. “사람마다 발달된 감각이 다르잖아요. 다들 느끼지만 그냥 지나쳐버리는 미묘한 순간을 캐치해 재구성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영화감독은 멈춰서 관찰하는 사람들이잖아요.”(이재은) “연출이 잘된 작품을 보면 희열을 느끼는 스타일이에요. <성적표의 김민영> 초고를 읽었을 때도, 내가 느끼는 만큼 사람들이 느끼면 좋겠다, 이 정서를 잘 표현하고 싶다, 하는 욕심이 가장 컸어요.”(임지선)
“묘한 코미디 감각이 들어 있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초기작을 좋아한다”는 이재은과 “얼마 전 다시 본 <매트릭스> 같은 마스터피스를 한 편 남기고 죽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임지선의 차기작을 기다리게 된다. 그 전에 우선, 경상도 출신이 아님에도 당황하면 어쩐 일인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재은과 비밀에 싸인 20대의 전사를 가지고 있는 임지선의 데뷔작 <성적표의 김민영>을 극장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보고 싶다.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최나랑
- 글
- 김나랑, 정지혜(영화 평론가), 김현민(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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