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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 ‘당신이 모를 뿐 누구나 근성이 있어요’

2022.10.03

by 김나랑

    이보영 ‘당신이 모를 뿐 누구나 근성이 있어요’

    이보영은 아침엔 배우, 저녁엔 엄마. 지금 이 순간은 ‘포즈!’

    재킷과 드레스, 귀고리, 팔찌는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부츠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재킷과 톱, 바지, 장갑은 발렌티노(Valentino).

    드레스와 목걸이는 지방시(Givenchy), 선글라스는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드레스와 목걸이는 지방시(Givenchy), 선글라스는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드레스와 톱, 양말은 미우미우(Miu Miu), 부츠는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재킷과 톱, 팬츠는 톰 포드(Tom Ford).

    드레스와 부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서영이 할 시간이야.” 큰할머니의 주말 저녁은 <내 딸 서영이>(2013)에 맞춰 돌아갔다. 최고 시청률 47.6%의 50부작 주말극에서 이보영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석 달 뒤 출연한 작품이 이종석과 함께한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다. 큰할머니는 “이 탤런트가 나오는 건 다 재밌네”라고 하셨다. 주말의 명화로 <다이 하드> 시리즈를 연방할 때 “저 남자가 나오는 건 다 재밌네” 하신 후로 처음이다.

    나는 이보영의 연기에서 귀에 똑똑 꽂히는 발음이 좋다. 저 주인공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을 준다. ‘딕션 좋은 배우’ 하면 흔히 이보영이 거론된다. 평소 발음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보영은 딕션이 콤플렉스였다. “초기엔 일부러 발음을 뭉개고 웅얼대며 대사를 연습했어요. 법정에서 변론하는 연기 말곤 또박또박 말하는 게 부자연스러워 보였거든요.” 이보영이 추구하는 연기는 ‘자연스러움’인가? “잘 모르겠어요. 연기는 할수록 어렵거든요. 겉모습과 목소리는 이보영인데 거기서 계속 변주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대중이 지루하지 않은 연기를 할까 고민이죠.”

    이보영의 작품 선택은 <내 딸 서영이> 이후로 홈런과 안타를 오갔다. 파울은 없다. 연기는 기본이고 작품을 똑똑히 고른다는 얘기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배우들은 “책이 좋아서”라는 답변을 많이 한다. 이보영은 조금 다르다. 연기해보고 싶은 신이 많으냐가 중요하다. “특정 대사가 후벼 박히면서 이 연기를 내가 하면 어떨까 설레죠. 너무 제 캐릭터 중심으로 보나요(웃음)? 요즘엔 작품 들어갈 때 8~10부 대본까지 나오지만, 예전엔 4부 정도 보고 들어갔어요. 다행히 좋은 스태프들을 만나 작품이 잘됐죠. 사실 처음엔 다들 작품이 잘될 줄 알고 시작하잖아요. 끝까지 갈지가 관건이죠. 배우는 연기를 잘해주고 작가님은 끝까지 잘 써주고 감독님은 정확하게 찍어주고, 어느 하나 삐끗하지 않아야 해요.”

    <마인>(2021)도 처음엔 희수라는 캐릭터가 와닿지 않아 고민했다. “앞서 말한 삼합이 맞아 좋은 결과가 나왔죠. 무엇보다 여성 연대가 작품에 녹아 있어서 좋았어요. 옛날부터 ‘이 작품에선 여자들끼리 왜 이리 싫어하지?’란 의문이 있었거든요.” 여성 배우 주축의 작품이 많아진 것에 이보영 역시 반가워했다. “배우로서 수명이 길어진 것 같아서 아주 좋아요(웃음).”

    이보영은 현재 드라마 <대행사>를 촬영 중이다. 매우 신나게. 최초로 여성 임원이 된 주인공이 처절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내용으로, 이보영이 ‘해보고 싶은 연기’가 매 장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고 독한 캐릭터를 처음 해봐요. <마더>의 수진 역할만큼 캐릭터 자체에 꽂혀버렸어요. 배우 혼자만 재미있어하면 위험한데(웃음).” 이보영 하면 아시아나항공 광고 모델 당시의 단아함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맡는 역할도 을의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침착하게 헤쳐나가는 편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센 언니 역할에 신나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보영은 센 언니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지 않기가 어려워요. 자기 생각 없이 무조건 고분고분해선 버틸 수 없잖아요. ‘세다’는 단어로 말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기 세계를 단단하게 가져야 살아남는다는 얘기죠.” 세 보이지 않은 이보영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보영은 신인 때 여러 작품에 출연하면서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힘들어 은퇴를 고민했다고 여러 번 말했다. “굉장히 뻘쭘한 질문이군요.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힘이라…” 이보영은 대답 대신 “나 때는요”라고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 자꾸 ‘라떼’가 되네요. <마인> 감독님이 제 또래 여성인데, ‘요즘 현장 좋아졌다’는 얘기를 나눈 적 있어요. ‘성희롱하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대본을 받고 서로 존중하면서 촬영한다고요. 옛날엔 왜 그렇게 거칠게 일했을까요? 현장에서 오가는 말도 거칠고, 대하는 마음도 거칠고. 처음 겪는 상황에 어린 저는 종종 울었죠. 오빠(지성)에게 ‘요즘 존중받으면서 일하니까 너무 좋다!’고 하니까 이러더라고요. ‘일 못하면 존중받으면서 잘린다!’ 예전엔 미숙한 저를 혼내면서도 끝까지 끌고 가주기도 했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신인 배우는 뜻밖의 상황에 처할수록 강해졌다. “제가 밟히면 근성이 생기거든요. 보통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도망가고 싶잖아요. 저도 그랬는데 이상하게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변했어요. 스태프들 보는 데서 연기 못한다고 망신당해도 ‘두고 보자, 진짜 잘해낼 거야, 보여줄 거야’라며 전투적으로 버텼어요. 제가 별로인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배우 생활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수로 탑재할 능력치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물었다. “누구나 근성이 있어요. 당신이 모를 뿐이죠!”

    든든한 맏언니 같은 이 배우에게 후배들이 조언을 많이 구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영은 조언을 건네는 데 매우 신중해졌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나는 호의지만 상대는 불편할 수 있고, 나는 해준다고 해줬지만 상대는 왜 이러지 싶을 수 있죠.” 이보영은 스태프들과 회식할 때 몇 번이나 되묻는다. 정말 가고 싶어? 괜찮은 거 맞지? 제발 솔직히 답해달라고 간곡하게. “저도 옛날에 회식이 별로였거든요. 무조건 끌고 나가는 사람 보면서 왜 저래 싶었죠. 내가 싫어했던 걸 혹시나 하고 있을까 봐 조심스러워요.” 이보영이 편히 조언을 주고받는 상대는 남편이자 배우 지성일 것이다. 서로의 작품을 꼼꼼히 모니터링해준다. 리뷰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이보영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은 신랄한 편이고 지성은 이상적인 편. 이보영은 스스로에게 매우 객관적이다. 주변에서 계속 예쁘다, 잘났다, 치켜세워줘야 하는 배우들과 다르다. 이보영은 칭찬을 들어도 자신이 먼저 납득해야 한다. “남이 뭐라 하든 내가 볼 때 괜찮아야 비로소 흡족해져요. 어릴 때 스크린에서 제 연기를 보는데 너무 못하는 거예요. 창피해 죽겠는데 주변에서 보영이 잘했어, 예뻐라고 말해서 당황했어요. 저와 가까우니 해주는 말이지만 오히려 제 발전을 저해하는 것 같았죠. 남의 말에 붕 뜨지 않아요.”

    이보영을 행복으로 붕 뜨게 하는 것은 두 자녀다. 아이가 태어난 후 다른 세상이 시작됐고, 배우로서 감정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아동 학대 피해자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는 드라마 <마더>도 아이를 낳았기에 선택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는 아동 관련 봉사 활동도 오래 해왔다. “<마더>를 하면서 관련 뉴스를 자주 찾아보며 엉엉 울었어요. 오빠가 제발 그만 보라고 할 정도였죠.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이보영의 인생관에도 늘 아이들이 있다. “집이 천국이어야 해요. 옛날에는 ‘이런 배우가 되고 싶어, 내 인생은 잘될 거야’란 꿈을 키웠다면, 이젠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폐쇄적인 가족주의가 나왔는데 찔릴 정도였죠.”

    요즘 이보영은 아이를 어떻게 잘 돌볼지와 배우가 평안한 삶에 안주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함께 한다. <마더>를 촬영할 때부터 이 생각이 커졌다. 심각하게 촬영하다 집에 오면 활짝 웃으며 아이들과 지내야 했다. “제가 감정을 집에까지 끌고 가면 안 되잖아요. ‘엄마 힘든 역할 했으니까 가만있을게’라고 할 순 없죠. 가정으로 빨리빨리 돌아가야죠. 그렇기에 ‘나 배우로서 괜찮은 걸까’란 자문이 있었어요.” 이전엔 작품이 끝나도 서너 달은 실생활에 영향을 깊이 받았다. <나는 행복합니다>(2009) 후엔 가위에 눌렸고, <내 딸 서영이>는 OST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이보영은 배우 윤여정의 말을 인용했다. 배고플 때 연기가 잘된다. 그 역할이 절실해서 육감을 다 열고 날이 선 채 연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보영은 이런 태도뿐 아니라 식사도 거르고 연기를 했다. 배부르면 나태해지는 것 같아서. “예술도 평안한 상태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여겼어요. 그 길은 고독하고 외로워야 할 것 같았죠.” 이젠 두 갈래 길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중이다. 오래 연기하기 위해. <대행사>를 찍는 요즘도 부모님과 번갈아 육아하고, 촬영할 땐 그 순간에 예민하게 임한다. “제게 골프를 왜 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신기해요. 그럴 시간이 있겠어요?” 역시 딕션이 좋았다. (VK)

    드레스와 안에 입은 톱은 미우미우(Miu Miu).

    에디터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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