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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을 잃고 난 뒤 생긴 일

2023.02.12

by 조소현

    미각을 잃고 난 뒤 생긴 일

    레고 1,998개 조각으로 재현한 영국 록 밴드 롤링스톤스의 빨간색 혓바닥 로고.

    음식은 단순히 신체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연료가 아니었다. 미각을 잃자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원고를 쓰기 전 테스트하는 심정으로 회사 근처 냉면집에 다녀왔다. 요리하다가 늘 손목이라도 삐끗해 식초를 쏟는지 엄청난 신맛이 나서 먹을 때마다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변하는 곳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젓가락에 냉면과 홍어무침을 크게 둘둘 감아 한 입 먹었다. 하지만 내 얼굴은 판판한 종잇장 그대로였다. 매콤하고 새콤한 맛임은 알겠는데 맛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혀의 미뢰가 반응해 뇌로 전달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양념을 더 달라고 청해 양념에 말아 먹듯 한 그릇을 비웠다. 속만 쓰렸다. 코로나로 미각을 잃은 지 3주째였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동하질 않아.” 코로나 확진 후 가장 자주 했던 말이다. <대장금> 장금이나 <신데렐라 언니> 효선이처럼 하루아침에 미각을 잃고 절망에 몸부림친 건 아니었다. 인후통, 기침, 콧물, 두통, 발열, 근육통을 동시에 앓다가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증상이 사라졌고 마지막까지 코가 막혀 있을 뿐이다. 코에 골무를 끼운 듯한 답답함이고, 혀를 냉동실에 70%쯤 얼리다가 만 것 같은 둔감이다. 몸 안에 연가시라도 살고 있는 듯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하루 종일 “목말라…”라는 말만 중얼거리는 중이다. 처음에는 이 기회에 식욕이나 떨어져 살이 빠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날카롭고 예민해서 자랑이던 미각이 예전처럼 돌아오지 못할까 봐 무섭다. 미각 상실은 코로나의 대표적 증상이지만, 코로나의 다른 증상에 비해 경시되는 편이다.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울 뿐, 통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각과 후각이 한 몸이라는 전제하에 상상해보면 장마철 덜 마른 티셔츠를 입고 부채질을 하는 옆자리 동료, 무방비 상태에서 불쑥 풍기는 하수구나 쓰레기장 냄새에 초연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화장실이든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 가지 감각 중 한 가지만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꼽겠냐고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후각’을 꼽았다. 하지만 <보그 브리티시>는 신경 과학자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의 저서 <욕망의 향기(The Scent of Desire)>에서 시도한 실험을 언급하며 후각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시력 감퇴와 후각 감퇴의 심리적 영향을 비교한 실험에서 처음에는 시력을 잃은 환자들이 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각을 잃은 환자보다 더 빠르게 적응했다. 나아가 1년 후에는 후각을 잃은 환자가 실명한 환자보다 삶의 질이 더 저하됐다. 후각 상실과 동시에 삶에서 감정이 사라져서일 것이다. 니트에 얼굴을 묻었을 때 나는 세제 냄새, 비 오는 날 흙과 나뭇잎이 뒤섞인 냄새가 상기하는 건 정서일 테니. 실제로 냄새를 처리하는 뇌는 감정이 형성되는 부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진다.

    헤르츠가 실험으로 증명하지 않았어도, 미각을 잃자 먹는 행위로 환희가 차오르던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 실험심리학자 찰스 스펜스(Charles Spence)가 저서 <일상 감각 연구소>에서 감각의 중요성을 전하기 위해 들었던 예시가 있다. CIA가 가장 좋아하는 합법적 고문이 감각 박탈이라는 것.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식으로 후각과 미각, 촉각까지 모두 최소화하면 물리적 상처가 아니라 엄청난 심리적 손상이 따른다고 말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피로를 달래고자 캔 맥주를 치익 따서 꼴깍꼴깍 마셔봐도 여느 때처럼 “캬” 탄성이 나오질 않는다. 방금 마신 건 탄산수인가 밍밍하고 덧없는 무알코올 맥주인가. 쌉쌀한 맛이 좋아 출근길마다 마시던 아메리카노에서는 흙을 정성껏 여과한 맛이 난다. 이걸 먹어도 음, 저걸 먹어도 흠. 감정의 그래프는 요동치는 일 없이 늘 바닥에 머문다. 미각을 잃고 보니 음식은 단순히 신체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연료가 아니었다. 우리 기분과 감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몽롱하고 싶어 맥주를 들이켜고, 정신을 또렷이 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건 효과를 보기 위해 약을 복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평소 “무엇을 먹고 싶냐” 물었을 때 “아무거나”라고 답하는 부류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느새 그 문장을 말하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코를 비볐을 때 나는 살냄새도, 안대를 끼고 먹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엄마 된장찌개의 맛도 사라지니 삶에서 형용사가 사라진 기분이다. 매일 감정적인 경험이 줄어들고 있다.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고 기뻐할 일도 없다. 원고 마감을 하면 소맥에 제철 해산물을 곁들여 먹어야 나의 마감은 끝났는데, 가족 생일에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어야 무사히 한 살을 먹었음에 안도할 수 있는데 모든 일이 머리로만 아는 일이 됐다. 내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

    코로나가 우리 삶을 뒤집어놓기 전 영화 <퍼펙트 센스>가 있었다. 10여 년 전에 인간의 오감을 사라지게 하는 전염병을 다뤘으니 노스트라다무스보다 정확한 예언이었다. 코가 막힌 사람들을 위해 요리한다고 여기자며 레스토랑 셰프들이 더 짜게, 더 시게, 더 달게 요리하는 동안, 길거리에서는 맛을 상상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돈을 버는 이가 있었다. 낮은 음을 연주하며 버섯을, 중간 음을 연주하며 녹음을, 높은 음을 연주하며 빗물을 상상할 수 있도록 묘사했던가. 맛집에 다녀온 친구의 음식 묘사, 먹방 ASMR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인체의 신비를 파악한 돈벌이였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는 단지 미각만 작용하지 않는다. 감각은 이어져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출한 저녁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는 행위를 떠올려보라. 보글보글 국물이 끓는 소리, 면발이 익을 때까지 부엌을 가득 채우는 냄새, 꼬들꼬들한 식감, 젓가락과 사기그릇을 쥘 때 감촉까지 모든 감각 정보가 어우러져 ‘맛’이 된다. 후각과 미각을 잃은 지금, 나의 끼니가 바삭거리는 감자칩, 베개보다 부드러운 카스텔라, 쫄깃쫄깃한 오징어구이처럼 촉각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건 당연하다. 나는 남은 감각을 샅샅이 그러모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영화 <파니 핑크> 감독이자 근사한 푸드 에세이도 쓰는 도리스 되리(Doris Dörrie)는 채식주의자가 된 후 간헐적 단식을 이어가다가 삶에서 먹기를 더 덜어내기 위해 또 다른 식단을 시도한다. 그녀가 애정하는 식단은 다음과 같다. 고광택 요리 사진으로 가득한 요리책을 준비한다. 요리책 위에 몸을 숙이고 천천히 한 장씩 혀로 핥는다. 마지막으로 고도로 집중해서 정성을 들여 한 권을 다 핥는다. 도리스는 그러고 나면 행복감과 뿌듯함이 찾아온다고 소개했다. 이 무슨 정신 승리란 말인가 싶지만 납작해진 미각 대신 시각을 극대화한다면 맛이 주는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키하우가 미각 되살리는 방법으로 소개한 뜨거운 허브티를 마셔 콧물 묽게 만들기, 코코넛, 올리브, 참깨 오일을 입안에 넣고 20분 동안 헹구기, 물에 잘게 다진 마늘 한두 알을 넣어 마시기는 시도해볼지언정 전혀 도전해보고 싶지 않은 식단이다. 하지만 맛을 떠올리려고 애쓰다 보면 뇌 속의 신경이 활발하게 활동해 미각이 자극을 받는다는 학자들의 말만큼은 이로써 사실로 보인다.

    한편 미각을 잃고 나서 펑펑 남아도는 건 시간이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누구랑 먹을까 세 가지 고민을 거두자 평소 먹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드러났다. 사회생활은 잠시 셔터를 내렸다. 커피를 홀짝거리고 조각 케이크를 끄적거리며 생기는 느긋함이나 편안함 없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고기를 구워주며 서로를 위무하는 따뜻함 없이 외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났기 때문에 먹기도 하지만 먹기 위해 만나기도 한다. ‘먹기’란 누구나 해야 하는 공동의 과업이고 그 과정은 사람들 사이에 교류가 된다. 함께한 기억 속에서 음식은 상대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는 역할 역시 해낸다. ‘언제 밥 한번 먹자’처럼 지켜지지 않는 공약 ‘미각이 돌아오면 만나자’를 남발하자 사회적 거리 두기와는 다른 차원의 고립이 시작됐다. 하여 나의 일상은 점점 더 단출해지는 중이다. 컬러가 흑백이 된 듯한 일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조언했듯 최대 6개월이 걸리더라도 미각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먼 미래에는 화학적 분석을 통해 우리의 뼈만 살펴봐도 평생 우리가 무엇을 먹었는지 밝혀낼 수 있다고 한다. 그때 코로나 시대의 뼈를 들여다보면 빈칸이 듬성듬성 보일까. 상실의 시대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눈, 코, 입, 귀, 혀, 피부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듯이. 얼마 전 토치에 그을린 레몬 조각을 얹은 코냑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켰을 때 일시적으로 미뢰 세포가 두 팔을 들고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가슴에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좋아하는 음식이 주는 단순한 쾌락,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기쁨이 사무치게 그리운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VK)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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