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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라스의 여름’ 미래는 거기서 시작된다

2022.11.07

by 민용준

    ‘알카라스의 여름’ 미래는 거기서 시작된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변하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깨달음을 얻는 여문 과실 같은 영화다.

    그녀는 알카라스의 복숭아나무에 관해 생각했다. 알카라스는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역에 자리한 도시다. 일찍이 그곳에서 복숭아를 재배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녀의 두 삼촌은 가족과 함께 복숭아 농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복숭아나무가, 가족의 농사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점점 가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의 뿌리를 뽑고, 기둥을 베어낸 자리에는 태양광 패널이 늘어섰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다. ‘영원히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무들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연출한 카를라 시몬 감독의 최신작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 물음표에서 시작된 영화다.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카탈루냐 지역을 배경으로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여름 배경 영화이자 가족 영화를 만들었다. 부모를 잃고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시골 마을로 가게 된 소녀의 상실과 성장을 그리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여섯 살에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새 가족을 맞이하게 된 카를라 시몬 감독의 1993년 여름을 담은 이야기다.

    이렇듯 전작이 유년 시절의 자전적 기억을 되짚어 그려낸 이야기라면 <알카라스의 여름>은 알카라스에서 복숭아를 재배하는 자신의 두 삼촌과 그들의 가족이 직면한 현실을 둘러싼 동시대 문제를 조망하고 환기하며 보다 확장된 시야를 선보이는 듯하다.

    알카라스에서 3대째 복숭아 농장을 운영하던 가족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아주 오래전 할아버지가 양도받았다는, 그 농장 부지를 소유할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가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서로 친분이 두터운 덕분에 땅을 운영할 권리를 양도했다는 사실을 구두로 증명해줄 세월은 지나가버렸다.

    일찍이 언약을 통해 보증해주던 이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명문화된 계약서 한 장 없이 빌려준 땅을 돌려받길 원한다. 그나마 집은 양도 계약서를 썼기 때문에 삶의 터전마저 잃진 않게 됐지만 농장을 자신들의 일부처럼 여기며 살고 있는 가족 삼대가, 사실은 그들 이전의 선조가 가꿔온 복숭아 농장은 이번 여름에 사라질 운명이다.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복숭아 농장 대신 그 자리에 늘어설 태양 전지판을 관리해주면 된다. 게다가 귀하게 재배한 복숭아는 도매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된다. 농장주들은 집단으로 목소리를 높여 시위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쇠한 할아버지에 이어 농장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 첫째 아들은 태양 전지판 관리에도, 시위에도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금은 당장 복숭아를 수확하고 나무를 돌보고 토끼를 쫓을 뿐이다. 그 와중에 태양 전지판은 설치되기 시작하고 농장주들의 시위는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다. 그리고 가족 간에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

    “나는 이것이 흥미로운 딜레마라고 생각했다.” 카를라 시몬 감독의 말처럼 <알카라스의 여름>은 한 가족과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을 통해 대립하고 충돌하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이익을 얻거나 대대로 이어온 삶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 악의가 없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갈등을 그린다. 선조가 대대로 양도한 땅이라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소유한 땅이기에 돌려받길 원하는 지주가 추구하는 바는 잘못되지 않았다.

    반대로 대대로 가꿔온 복숭아 농장을 지키고자 하는 가족의 마음도 당연한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흘렀고, 복숭아 농사만으로는 이윤을 얻기 힘든 시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고 믿는 이가 생각하는 땅의 쓸모와 지속되는 가치를 버릴 수 없다고 믿는 이가 생각하는 땅의 쓸모가 다를 뿐이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떠밀려가는 것과 떠밀려오는 것 사이에 자리한 어느 가족의 반목과 갈등을 비추며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것을 찬찬히 응시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지중해 접경지의 풍요로운 햇살을 받아 탐스럽기만 한 복숭아지만 그 값은 예전 같지 않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시위가 한창인 길바닥에 흩뿌려져 트랙터에 짓밟히는 풍경은 고유할 것이라 믿었던 가치가 영속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아프게 인식시킨다.

    역설적이지만 복숭아 농장을 밀어내는 태양 전지판은 지구의 미래를 위한 산업의 일환으로 권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땅을 소유한 지주 입장에서 태양 전지판은 복숭아 농장보다 쏠쏠한 돈벌이 수단이고, 그 이전에 복숭아 농장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 산업이다. 본질적으로 환경을 위해 설치하는 태양 전지판이 자연을 밀어내고 세워진다는 아이러니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극명하게 극대화된다.

    흥미로운 건 <알카라스의 여름>이 이러한 세태를 거시적인 문제의식으로 부풀리지 않고 개개인의 내면 심리를 알알이 모으듯 미시적인 시선으로 하나씩 짚어낸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농장을 운영해보고자 자신이 수확한 무화과와 과일을 들고 젊은 지주를 찾아가는 할아버지와 괜한 화풀이를 하듯 집에 설치된 태양 전지판을 철거하는 첫째 아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대신 농장을 관리하고자 애써보지만 되레 질책만 듣는 손자가 반목하는 상황이 농장의 위기 속에서 고스란히 노출된다.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길 거부하는 가족의 심지는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에도 뜻밖의 원망과 갈등으로 어긋난다. 관성적인 전통을 흔드는 시대의 바람이 한 가족의 심연에 자리한 불협화음의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내 보인다. 동시에 그럼에도 끝내 한데 모인 가족의 군상을 제시함으로써 변화하는 풍경 안에서도 절대 바뀔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결속을 목도하게 만든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복숭아 농장을 운영하는 삼촌의 농가에 정착해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 어느 날 이른 아침 언제나 그러하듯 트랙터를 운전해 농가로 나아가는 삼촌의 가족 중 누군가가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고 뛰쳐나갔다. 복숭아가 가득 담긴 상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 상황은 <알카라스의 여름>에 온전히 반영되었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카를라 시몬이 보고, 듣고, 체험한 한 가족의 여름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작품은 카를라 시몬의 개인적 성찰이 반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카를라 시몬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전에는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삼촌의 가족을 위한 해피엔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떻게든 복숭아 농장을 보존하는 것이 그런 결과라고 믿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복숭아를 재배하는 농가들의 현실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타자화된 시선으로 내린 결론이 실제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과 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을 진짜 자연인으로 채우는 시도로 이어졌다. <알카라스의 여름>에 출연한 배우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이 영화 전까진 연기 경력이 전무한 이들이다. 시골 마을의 유명 축제에 참여해서 관찰하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이들을 한데 모아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영화적인 세계를 능숙하게 채워줄 이들을 토대로 허구적인 설득력을 손쉽게 강화하는 대신 연기로 삶을 지탱해본 적 없는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진짜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물론 모든 순간이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디션으로 선발한 배우들을 한데 모아 몇 차례 리허설을 거친 뒤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 만한 준비 정도는 거쳤다. 하지만 그들이 복숭아를 따고 그들에게 익숙한 진짜 일을 하는 순간은 결코 연기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러한 방식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의 찰나를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했다. 비록 허구지만 진짜 삶을 포착하는 듯한 기록이 포함된 영화로서 한 시대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다.

    마을에 늘어가는 태양광 패널이 못마땅한 첫째 아들은 동생의 가족이 그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찾아가 그와 몸싸움을 벌이고 반목하게 된다.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는 이견의 시선으로 돌아선 가족의 갈등을 서로 알면서도 침묵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는 묻는다. 늘 함께 놀던 어린 사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것이 의아하기 때문이다. 지속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방향이 달라서 부딪히거나 갈라선다. 그러면서 깊게 뿌리내렸던 우애가 삽시간에 메말라가는 듯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들이 함께 일구고 지켜온 것이 파헤쳐지는 순간 그들은 결국 한자리에서 만나 하나의 형상처럼 이어진다. 가족이 함께 지켜온 것은 땅이 아니라 가족 그 자체였다는 깨달음이 피어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다시 맞이할 여름은 예전의 그 여름과 다르겠지만 각자의 여름은 아닐 것이다. <알카라스의 여름>의 결말은 비관적인 풍경을 조명하는 것 같지만 되레 희망적이다. 지혜롭고 인자한 햇살을 받고 자라나는 복숭아처럼 포클레인의 기계음보다 비로소 재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생생하다. 사라져가는 것도 있지만 끝내 제자리에 서 있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미래도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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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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