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다시 쓸 수 있을까?

2023.02.21

by VOGUE

    다시 쓸 수 있을까?

    글을 쓰다 못해 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쓰게 된 상황을 딱하게 여겨주길 바란다. 지금 내가 글을 쓰기 힘든 새털같이 많은 이유.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건 편집장 앞에서 “진짜 이제 한 글자도 못 쓰겠어요. 더 이상 쓸 주제도 없고요”라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순간 편집장은 “그럼, 그걸 써!”라고 말한 뒤 개운한 얼굴로 이번 달 기사 배당을 마쳤다. 글을 쓸 수 없다고 글을 써야 하는 운명. 비극처럼 들리지만 사실 잡지 에디터가 글감을 잡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평소 보고 듣고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트렌드에 부합하는 주제가 그달의 기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늘 기삿거리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와서 명상 여행을 가도, 데이트 앱에서 전 남친을 맞닥뜨려도 다음 달이면 ‘한 장의 추억’이 되어 기삿거리가 된다. 잠깐, 시인이자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는 “집필자 장애(Writer’s Block)에 대해 쓰는 것이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는데, 편집장은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때”의 솔루션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운동선수에게 입스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집필자 장애가 있다. 원인과 증상에 따라 슬럼프, 매너리즘, 번아웃 등 다양한 병명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글을 쓰기 힘든, 글이 쓰기 싫은 이유에 대해 현재 나는 온갖 핑계를 갖고 있다. 잡지의 글쓰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사생활을 파는 일이다. 사실만 전달해야 하는 보도 매체도, 대역을 내세우는 문학 장르도 아니라서 이 한 몸 숨을 곳이 없다. 다만 카메라가 종일 따라다니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생활은 조작이 가능하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꺼내 보인다는 얘기다. 그달 써야 하는 주제에 따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자아 중 몇몇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백지라는 무대에 오른다.

    소잿거리를 제공하는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한 기사에서도 여러 이니셜로 3단 변신을 하며 등장한다. 이 작업이 주는 쾌감도 있다. 허공에 흩어졌을 대화가 글쓰기를 통과해 통찰로 변하는 경험. 물론 반복될수록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는가’ 자괴감이 되어 직업 만족도를 떨어뜨린다. 게다가 이런 식의 글쓰기에는 위험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라이프스타일에서는 소재가 무한 제공되지만, 그 라이프스타일을 벗어나면 소재 고갈에 시달리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밤새도록 친구들과 떠들기가 생활의 중심이던 시절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패턴으로 변화하자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이 현재 몸담은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무수한 의심을 거쳐야 했다. 일부를 극대화한 자아를 등장시킨다고 해도 글에는 자신이 묻어나는 법이라 ‘나는 더 이상 힙하지 않다’는 현실은 글을 쓸 수 없는 대표적인 핑계가 됐다. 이 증상은 코로나를 맞닥뜨리며 절정에 도달했다.

    “인풋과 아웃풋의 밸런스가 어긋날 때 생긴다.” <보그>에 꾸준히 칼럼을 기고하지만 절필도 자주 선언하는 칼럼니스트 이숙명이 글쓰기의 매너리즘이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 들려준 원인이다. “직접 경험이 아니라도 기술이 있으면 공부한 것, 취재한 것 등을 쓰면서 버틸 수 있지만, 인풋 대비 아웃풋의 속도와 양이 압도적이면 결국 콘텐츠가 고갈된다”고 말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끝없이 샘솟는 사람도 있겠지만 꾸준히 쓰려면 세계관이나 주제 의식의 변화, 하다못해 심도의 변화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때도 필요한 건 인풋이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매너리즘은 삶의 매너리즘”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옳다. 번아웃이 매너리즘으로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체력 소진도 큰 원인이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하고, 사고의 민첩성, 정신의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진단은 정확하다. 작가들은 자연스러운 쇠퇴를 문장 기법의 향상이나 성숙한 의식 같은 것으로 보완하려고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고 쓴 바 있는 그는 매일 달리기를 해서 글을 쓸 체력을 만든다.

    앞서 발로 뛰는 취재를 잡지적 시점으로 언급했지만 사실 글감은 인터넷에도 가득하다. 제레미 리프킨이 3차 산업혁명을 언급한 게 벌써 2012년이고, 스티븐 로젠바움이 정보 과잉 시대의 돌파구로 큐레이션을 제시한 게 2010년이다. 즉 나는 힙하지 않아도 힙한 애들이 노는 세상은 구경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시차 없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휴대폰으로 보는 세상에서 글감이 없다는 건 좀 궁색한 변명이다. 휴대폰으로 온갖 정보에 가닿는 이 시대는 창작자에게 일면 축복이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결핍을 터치 한 번이 해결해주니까. 그런데 정보가 많아도 너무 많다. 무전취식할 수 있는 정보를 엮어 손쉽게 기사를 완성하기도 하지만, 검색어를 바꿀 때마다 복리 이자처럼 불어나는 자료는 정말 중요한 내용을 놓치고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심화시킨다. 그 가운데 자라나는 건 이상한 완벽주의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터뷰 자료를 찾을 때도 그 인물의 출생 지점까지 거슬러 가서야 검색을 멈출 수 있었다. 게다가 웹상에는 논조가 늘 바글바글 끓는다. 생각하지 않아도 대신 생각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참고 문헌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최초의 콘텐츠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어지는 것처럼, 이슈에 대한 의견이 내 것인지 트위터에서 본 누군가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지금 쓰는 이 글은 내 생각인가, 지난달 절필을 발표한 모 작가가 블로그에 올린 글인가.

    그다음으로 언급할 핑계는 명불허전 사유, 활자 시대의 종말이다. 업계 종사자들이 모인 단톡방에서는 마감이 다가오면 글이 안 써진다는 술회가 이어진다. 매달 반복되므로 전생인가 데자뷔인가 싶은데 그럴 때마다 나오는 발언도 한결같다. “대충 써, 누가 읽는다고.” 서점에 가면 글쓰기에 대한 책이 코너 하나를 이루는데, 지금도 우리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다. 쓰고 싶은 사람은 넘쳐나고 읽은 사람은 없는 불균형.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공감해?’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하지만 영상, 사진에 압사당한 글은 예전만큼 많은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다. 존재 이유부터 충족시키지 못한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엄청난 의욕 상실로 찾아온다. (물론 모든 걸 초월하는 뛰어난 글은 지금도 탄생하고 있다. ‘나이키가 닌텐도를 경쟁 상대로 삼듯, 넷플릭스, 유튜브보다 울림 있는 글을 써야 해’ 같은 망상을 품는 필자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집필자 장애를 겪는다.) 게다가 글에는 대체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질 않는다. 등단했지만 팔리는 시집을 내지는 못하는 나의 어머니는 한 달 넘게 밤을 지새우며 쓴 시 한 편에 문예지가 원고료 5만원을 줄 때마다 “글값이 똥값이야” 하며 절필을 결심한다. 숫자에는 객관적인 구석이 있어서 그 숫자가 곧 우리가 쓴 글의 가치로 보인다. 게다가 글은 글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글 쓴 사람이 유명하거나 매력적이면 그 힘이 더 강해진다. SNS 팔로워 숫자로 단행본의 판매량이 결정되는 시장의 당연한 원리가 방망이를 깎듯, 한 땀 한 땀 직조하듯 원고를 쓰고 난 뒤에는 그렇게 서럽게 느껴진다.

    작가 제프 고인스(Jeff Goins)가 홈페이지에 올려둔 ‘라이터스 블록을 극복하는 법 14가지’는 원인 찾기부터 시작한다. 가장 큰 원인은 두려움이다. 글 쓰는 사람들은 독자가 없는 현실을 개탄하지만, 내 글이 읽히지 않길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도 품는다. 정보가 틀렸다고 지적할까 봐, 잘 모르고 썼다고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문장이 후지다고 욕할까 봐, 내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당할까 봐, 예전보다 못하다고 평가받을까 봐 두렵다. 글에 대한 피드백은 카톡 보내기만큼 손쉬워서 언제 어디서 비판을 맞닥뜨릴지 모른다. 인상적이지 않은 글은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사라지고, 논쟁적인 글은 조각조각 나뉘어 조리돌림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정말이지 한 글자 내딛기도 조심스러워진다. 이런 두려움은 종종 완벽주의로 이어진다. 더 채워 넣고 더 만전을 기하다가 완전히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제프 고인스가 지적했듯 글은 과학이 아닌 예술이라, 완벽한 글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역시 노동의 영역이라는 걸 필자들은 곧잘 잊는다. 한 번 높은 성취에 도달한 자들은 이 굴레에서 더 벗어나지 못한다. 대문호의 예를 들어 적절치 않지만 <앵무새 죽이기> 발표 후 55년 동안 책을 내지 못한 작가 하퍼 리를 떠올려보라. 기대에 미쳐야 한다는 압박, 비판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글쓰기를 어렵게 한다.

    “진짜 이제 한 글자도 못 쓰겠어요”에 대한 분석은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 같다. 그동안 글쓰기를 돌이켜보며 다시금 드는 생각은 글쓰기의 처음과 끝은 자신을 직면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일이고 자꾸만 흐트러지는 생각을 모아 단단하게 다지는 일이다. ‘생각’을 ‘자각’으로 전환하는 데 우리의 글쓰기가 있다. 이 과정은 녹록지 않아서 직면하기보다 늘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정신을 부여잡고 결국 마무리한 글은 지금 이 순간의 좌표를 촘촘히 찍는다. 가치 있고 충만한 일이다. 아니 에르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구하는 질문에 “잘 쓰려고 고군분투하기보다 정직하게 쓰기를 바란다”고 했다(또 대문호 얘길 꺼내서 부끄럽다). 지금까지 써온 글이, 앞으로 써나갈 글이 정직할 수 있을까. 쓰다 지쳐 입안이 쓴 나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 (VK)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TRAVIS RATHB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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