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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서울’,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2023.05.02

by 민용준

    ‘리턴 투 서울’,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되돌아 나로 향하는 여정, <리턴 투 서울>에 관하여.

    우연은 필연의 필요조건이다. 필연이 되지 못한 우연은 있어도 우연 없는 필연이란 있을 리 없다. 모든 건 예기치 않게 일어나지만 그래서 끝내 일어나야 할 일이 되고 만다. 창작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상상을 통해 구현한 결과물은 대체로 현실에 빚을 지고 있다. 평소 보고, 듣고, 겪은 일이 작가의 사고나 의식을 통해 새롭게 융합되고 복합된 결과물을 우리는 보고, 듣고, 즐긴다. 익숙한 듯 낯설고, 생경한 듯 낯익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창작자에게도 그 과정이 익숙하지 않은 길을 떠나는 여정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창작자의 그러한 시선이 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처럼 보이는 창작물을 만나게 되고, 이런 작품은 특별한 체험의 영화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한국을 방문한 데이비 추 감독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친구 로흐 바두플레와 함께 한국에 왔다. 그리고 영화제 기간 중 그 친구는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만남이 성사됐으며, 데이비 추 감독은 그 자리에 동행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친구의 친아버지와 친할머니를 만나는 자리에서 삼계탕을 처음 먹었고, 동석한 통역가가 때때로 과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친구의 언어를 완화해 전달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듯한 인상을 느껴서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캄보디아 이민자 출신 프랑스인인 데이비 추 감독에게 이 사건은 영화적 순간으로 각인됐고, 결국 이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친구에게 전달했으며, 친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리턴 투 서울>이 세상에 나온 전말이다.

    <리턴 투 서울>은 한국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프레디(박지민)가 서울에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기술한 건 프레디가 자발적으로 서울에 온 것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로 당도하게 됐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원래 휴가차 2주간 도쿄를 여행할 계획이었지만 기상 악화로 항공편에 문제가 생겨 여행사의 권유로 서울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 보이는 프레디는 즉흥적인 상황을 즐기듯 사건을 만들어나간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이들과 실내 포차에 가 술을 마시고, 모르는 이들에게 합석을 권하며 즉석 모임을 가져 왁자지껄하다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친부모를 찾기로 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술자리 대화 중 친부모를 찾을 방법을 알게 되고 그렇게 입양 기록을 추적해 친아빠(오광록)가 산다는 군산으로 내려가 생면부지의 친척들을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또 한번 예상치 못한 경로로 나아간다.

    <리턴 투 서울>은 각기 다른 분량의 3막과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세 번의 점프로 연결된, 4개로 분절된 서사를 한 줄기의 시간으로 엮는 프레디의 여정을 구심점 삼아 따라간다. 우연히 한국을 찾은 프레디가 친아빠를 만나고 헤어지는 1막 이후로 2년 뒤 여전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프레디가 등장하는 2막이 이어지고, 5년 뒤 다시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보이는 프레디가 등장하는 3막이 이어진 후, 1년 뒤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이국을 떠도는 것으로 보이는 프레디가 등장하는 에필로그 형식의 결말로 종착한다. 그렇게 세 차례에 걸쳐 점프하는 서사 안에서 프레디의 외모도, 성격도, 관계도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프레디가 받아들여야 하는 정체성의 문제 역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처음 서울을 방문한 프레디는 낯익은 얼굴을 한 젊은 이방인이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서울을 방문한 프레디는 자유분방하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영화는 그런 프레디의 시선을 빌려 지극히 익숙한 한국의 풍경을 낯선 단면으로 변환해나간다. 프레디가 처음 접하는 서울과 군산의 풍경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새롭다. 프레디의 거침없는 태도는 낯익은 공간의 분위기를 온전히 다른 세계로 탈바꿈시킨다. 평범한 실내 포차를 난데없이 만남의 광장으로 만들고, 무던한 분위기의 음악 바를 휘저어 댄스홀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프레디의 곁에 자리한 이들은 이런 색다른 상황을 즐기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서울과 달리 호젓한 인상을 주는 군산에서 친아빠와 친할머니를 비롯한 자신의 친가족과 대면하는 프레디는 좀처럼 동화될 수 없는 가족애를 경험한다. 어린 딸을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이해를 구하고, 용서를 바라며 한국에 정착하길 권하는 아버지와 측은한 마음으로 거듭 곡소리를 내는 할머니의 마음은 프레디에게 매우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태도는 프레디의 마음을 알 수 없게 자극하고, 화를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화를 내고 싶은 것도 아닌 듯하다.

    처음부터 예정에 없었던 가족 상봉인 만큼 특별히 느낄 애틋함도 없는 것 같지만 뜻밖의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특별히 친아빠가 그리웠던 것 같지도 않고, 되레 일방적인 반가움과 미안함과 안도감을 표하는 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품는 자신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이한 분노가 보이지 않던 머리를 들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데 낯선 기분을 느낀다.

    <리턴 투 서울>은 비로소 그때 시작되는 영화 같다. 프레디의 ‘리턴 투 서울’은 첫 방문 이후 다시 서울을 찾는 과정을 의미한다. 제목 그대로 결국 프레디가 서울로 돌아왔기 때문에 성립되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프레디가 자신의 정체성을 좇아 서울에 온 것이 아니었듯 그 뒤로도 그녀의 서울행은 자기 정체성 찾기와 무관한 여정이 된다. 오히려 그 정체성이 그녀의 삶을 서울로 끌어당기는 중력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첫 번째 방문은 여행자로서 온 것이지만 그로부터 2년 뒤에 등장하는 프레디는 국제 컨설턴트로 고용돼 서울에 정착한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자원한 결과가 아닌 것 같다. 그녀를 고용한 회사가 한국 출신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활용 가능한 가치로 판단하고 그녀를 한국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프레디도 안다. 자신이 ‘트로이 목마’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5년 뒤 무기 사업 로비스트로 미사일을 팔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지키는 데 필요한 미사일을 팔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것이 운명 같다고 친아빠에게 말한다. 그 운명은 프레디가 엄연히 한국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벌어진 인과다. 그녀를 고용한 회사는 그녀가 ‘여자 제임스 본드’로 불리며 한국 관계자와 협상을 잘 이끌어낼 적임자라 여긴다. 그 역시 프레디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리턴 투 서울>은 이민자 혹은 입양아가 자신의 고국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그린 여타 이야기들과 다른 길을 가는 영화다. 물론 타인의 세계에 편입된 삶을 살아가던 이민자 혹은 입양아가 내면의 물음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친부모를 찾거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서사는 마냥 뻔한 것이라고 치부할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건 그러한 심리 욕구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이런 유의 이야기는 그런 삶을 살아온 창작자의 경험이 반영된 고백적 형식으로 그려진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리턴 투 서울> 역시 창작자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다만 데이비 추 감독의 경험은 남들과 다른 성찰로 나아간 것 같다.

    데이비 추 감독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캄보디아 이민자 출신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리고 스스로 프랑스인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믿었지만 25세에 캄보디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런 확신이 허구적인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프랑스인이 맞지만 훨씬 복잡한 내면을 지닌 자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리턴 투 서울>은 그런 깨달음이 반영된 영화처럼 보인다. 자기 정체성에 확신을 갖는 것도 단순한 생각이지만 주변 환경을 통해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 역시 정답은 아니라고 재차 확인하듯 나아간다.

    <리턴 투 서울>은 시종일관 직관적 흐름으로 이어진다. 몇 년 간격으로 건너뛰는 서사를 납득시킬 최소한의 인과를 마련할 뿐 촘촘한 내러티브를 설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감을 지우듯 점프하는 서사는 프레디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좀처럼 알 수 없게 밀어 넣는 것만 같다. 덕분에 프레디가 ‘리턴 투 서울’을 반복하는 상황은 일종의 운명처럼 다가온다.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이 거듭 한국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그 어느 곳도 자신을 대변하는 영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듯하다.

    가끔은 그 운명에 순응하듯 순순히 끌려가는 것 같지만 끝내 그런 마음에 저항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자신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래서 프레디는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인다. 자신을 둘러싼 마음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그러니까 이건 정체성을 명확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터전이라 여기던 영역에서 하나씩 밀려나는 이야기다. 결코 알 수 없는 내면에 자리한 자아에 귀를 기울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필연적 방황의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그런 여정 속에 자리한 인물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심연을 따라잡는 영화적 체험이다.

    프레디는 더 이상 서울의 이방인이 아닌 것처럼 어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친아빠와 재회해 더 이상 반목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자신의 내면을 대면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문제를 감지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는 결국 외부에 자리한 무언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거나 충당할 수 없는 어느 자아에 관한 이야기다. 응당 그럴 것이라는 관점을 거부하고 운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전형성에서 이탈하려는 창작적 시도이자 성취다.

    프레디는 프랑스인으로서 한국을 찾아왔고, 한국에서 거듭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에 둘러싸인다. 그 모든 환경은 타고난 핏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에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정작 프레디가 누구인지 납득하게 만드는 답이 돼주진 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프랑스인이라는 자기 믿음 또한 송두리째 벗겨내는 여정으로서 그녀가 진짜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가닿는 혼란의 과도기를 정직하게 감당하는 기회가 된다.

    결국 프레디가 자신의 친부모를 모두 만나게 되는 여정은 그래서 회복이 아니라 이해의 과정에 가깝다. 일말의 기억도 없지만 애초에 그러했다는 운명론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친부모는 현재의 프레디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거나 알려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울은 프레디를 담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녀를 대변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쓸모 있는 존재지만 그 쓸모는 그녀의 내면을 단순하고 납작하게 이해하는 자들이 규정하거나 규정하려 드는 것에 불과하다.

    <리턴 투 서울>은 프랑스도, 한국도 아닌 3국을 떠도는 프레디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촬영한 에필로그 형식의 엔딩 시퀀스에서 프레디는 프랑스인으로도, 한국인으로도 정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떠도는 여정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우연한 계기로 찾아간 서울과 한국이 그녀의 정체성을 흔드는 근간이 되고, 근원적인 회복을 제공할 수 없는 세계로 판명된 것처럼 보여서 우울한 결말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서울을 처음 방문한 이후로 프레디가 거듭 한국에서 체감하는 건 자신과 다른 세계의 일원이 될 수는 없다는 자각이다.

    흥미로운 건 프레디의 서울행이 그녀를 한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도 머무를 수 없는 존재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프레디의 ‘리턴 투 서울’은 한때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프랑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규정될 수밖에 없는 한국으로부터 프레디를 멀리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떠도는 듯한 프레디의 모습은 사실상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비로소 진실된 여정처럼 보인다.

    <리턴 투 서울>이라는 제목은 미국 배급 당시 새롭게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원래 데이비 추가 생각한 영어 원제는 <All The People I’ll Never Be>라고 하는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모든 사람들’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턴 투 서울>은 나를 대변하다고 믿게 만드는 그 모든 외부 조건들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자아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마냥 프레디를 억압하거나 짓누르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프레디는 친아빠가 피아노를 배우고 자신을 위해 작곡을 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명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말미에 호텔 직원 몰래 떠나려던 프레디가 로비의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장면은 일종의 화해처럼 느껴진다. 다만 그것이 과거와 재회를 다짐하는 화해 같진 않다. 자신의 내면을 받아들이는 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거듭 되돌아가고, 되돌려지던 삶이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갈 길을 찾는다. 거기서 영화는 끝나지만 거기서 삶이 시작될 것만 같다. 불완전한 듯 완전하게, 우연에서 필연으로, 삶도, 영화도 그렇게 다다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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