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헤어의 세계를 확장하는 아티스트 7인

2023.07.10

by 송가혜

    헤어의 세계를 확장하는 아티스트 7인

    기묘한 상상력, 풍부한 표현과 예술적인 손 기술. 가발이라는 문물은 화려한 액세서리이자 가늘디가는 모발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미술관에 전시될 법한 전위적 창작물부터 오늘날 런웨이, 아이돌의 신비로운 헤어스타일까지. 헤어의 미적 세계를 무한 확장하는 아티스트 7인을 〈보그〉가 만났다.

    한국 문화를 가장 화려하고 기발한 가발로 표현하는 헤어 아티스트 가베. 그는 이번 기획을 위해 미국 <보그> 작업에서 선보인 자개 장식 가체의 연장선에 놓인 가발을 제작했다. “‘흐름’이라는 움직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어요. 출렁이는 파도, 소나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누군가 가장 힘들어 보이는 순간을 표현하기도 하죠.”

    TOMIHIRO KONO @tomikono_wig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과 초현실적 색감, 로코코 양식처럼 극적으로 부풀린 볼륨, 심해 생물을 떠올리는 기상천외한 스타일에선 강렬한 개성이 돋보인다. 걸 그룹 뉴진스가 <OMG>로 활동할 당시 선보인 색색의 화려한 무늬를 입은 헤어스타일도 그의 가발을 착용한 것. 명실상부 ‘가발’이라는 분야에서 고노 도미히로는 지금 가장 뜨거운 아티스트다.

    ‘헤어’라는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누구나 그렇듯 어릴 때 이발소에 자주 가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모든 남자의 머리를 획일적인 스타일로 자르죠. 미용실에 방문해 세심한 상담을 받기 전까지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머리카락을 ‘어떻게’ 자르고 싶은지 전문가와 상담하는 과정이 아주 인상 깊었죠. 만화 <슬램덩크> 캐릭터의 사진을 가져가보기도 했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더없이 즐겼습니다. 그것이 첫 계기인 것 같군요. 일본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게이샤의 가체 제작을 연마했고, 런던에서 전문 기술을 익히면서 점차 아이디어를 확장할 수 있었죠.

    2016년 ‘토미코노(Tomikono)’라는 가발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헤어스타일에 ‘수명’이란 개념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모델들의 머리를 스타일링하는 것은 기록을 남길 수 있지만 일회성에 불과하고, 그 자체를 전시할 순 없죠. 그래서 가발을 제작하게 됐습니다. 염색과 스타일링으로부터 자유롭고, 기간에 구애받지 않으니까요. 말 그대로 영구 보존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실제로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하고요.

    마크 제이콥스, 꼼데가르송, 메종 마르지엘라의 쇼를 위한 헤어피스를 제작했죠. 이제껏 협업해온 디자이너들은 제게 무한한 자유와 권한을 줬어요. 그들의 작품에 모티브를 얻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또 다른 에너지원입니다. 특히 ‘젠더리스’를 주제로 펑키한 스타일의 가발을 여러 개 제작한 메종 마르지엘라 컬렉션이 기억에 남는군요.

    환상적인 가발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일상 곳곳에서 영감을 받지만, 지구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로부터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라는 건 사회적인 가면을 의미하죠. 제 목표는 가발이 우리의 새로운 페르소나가 되는 거예요.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있죠.

    이토록 창의적인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에히메현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죠. 3형제 가운데 장남인데, 늘 보물찾기를 하고 놀았어요. 영화 <구니스>, <강시: 리거모티스> 같은 판타지, 모험 시리즈를 즐겨 봤고요.

    가장 인상 깊은 작업을 꼽자면? 비요크(Björk)의 앨범 커버를 위해 제작한 백금색 가발이 기억에 남는군요. 뮤즈나 다름없는 그녀와 일할 수 있길 늘 꿈꿨으니까요.

    <Fancy Creatures>라는 아트 북을 공개했습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작품을 촬영해 만든 아카이브입니다. 심해 동물부터 무성한 이끼, 멸종 위기에 처한 나방 등 다양한 생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조한 작품이 대부분이죠. 올드 할리우드를 연상시키는 얇은 웨이브로 곤충의 더듬이, 열대 꽃, 파충류의 피부와 해파리의 촉수 등을 표현했어요. 공상과학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 같죠.

    오늘날 가발은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나요? 그동안은 연극, 의학적 용도로 여겨졌다면 지금 젊은 세대는 가발을 헤어 액세서리처럼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으로 여기는 동시에 패션 아이템처럼 누구든 편하게 착용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가발을 제작해요. 뉴진스, XG와 같은 아이돌이 제 가발로 스타일링하는 걸 보면 뿌듯하고 기뻐요.

    새롭게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오는 10월 일본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에서 개최할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디지털 기술로 변화하는 지구라는 행성, 그곳에 사는 우리의 삶과 감성을 주제로 하죠.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JULIEN PARIZET @parizhair

    “가발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어요!” 줄리앙 파리제는 <보그> 인터뷰에서 들뜬 소감을 전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 속 에밀리의 단짝이자 가수 ‘민디’의 헤어스타일을 창조하고, 카디 비, 메건 더 스탤리언과 협업하는 그는 드래그 퀸들의 화려한 가발을 제작하며 경력을 넓혀왔다. 취미로 드래그 퀸 활동을 하는 그는 한마디로 헤어 월드의 ‘끼쟁이’.

    인스타그램 계정 ‘Parizhair’는 당신의 드래그 이름이기도 하죠.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보면서 미용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가발을 제작한 건 제게 자매나 다름없는 드래그 퀸 친구들을 돕기 시작할 때였죠. 드래그 활동을 하면서 헤어에 대한 통찰력이 생겼어요. 화려한 의상과 다양한 장소로의 이동, 격렬한 춤과 땀을 견디면서도 과장되어야 하죠. 제가 만든 가발을 직접 착용하면서 그들의 요구 사항을 더 수용하게 돼요. 이렇게 만든 가발에는 연금술 같은 면이 있습니다. 착용하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구조적인 디자인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가장 위대한 ‘밀리너(Milliner, 모자 디자이너)’로 추앙받는 필립 트레이시(Philip Treacy)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곤 합니다.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 광기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디자인을 반영해보려고 노력하죠. 기발한 모양새를 떠올리고, 머릿속에서 그것이 머리카락으로 얼마나 구현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얇고 섬세한 머리카락은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은데, 철물점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비즈 등의 다양한 액세서리로 대안을 모색해요.

    유명인과의 작업은 또 다른 도전처럼 느껴질 것 같군요. 연예인, TV 시리즈를 위한 협업은 촉박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압박감이 크죠. <에밀리, 파리에 가다> 촬영 당시엔 일주일에 가발 17개를 제작했을 정도예요. 하지만 평소 음악, 스타일링으로 많은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와 작업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열린 티에리 뮈글러의 전시 개막식에 카디 비가 참석했을 때예요. 붉은 공작새 같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제가 만든 금빛 가발을 착용했죠. 상징적인 장소에서, 존경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제 작품을 보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어요.

    가발에 대한 진입 장벽은 낮아지고 있나요? SNS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Get Ready With Me’와 같은 튜토리얼 콘텐츠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가발을 착용하는 스타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가발의 대중화 시대가 온 것이죠. 우리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위해 가발을 착용하지 않아요. 개성 강한 젊은 세대는 화려한 컬러, 독창적인 커팅 스타일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당신의 가발을 키워드로 나열하자면? 강렬함, 포용, 호사스럽고 열정적인 것.

    뛰어넘고 싶은 고정관념이 있나요? 특정한 관념은 아니지만 바꾸고 싶은 업계 문화가 있다면 바로 ‘과소비’예요. 기후변화라는 비상사태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창조 과정은 소비를 가속화하는 사회 문화와 동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영구 보존되어야 하고, 시간을 필요로 하죠. 이토록 호흡이 짧고 빠른 분위기에서 매번 혁신이 이뤄질 수는 없어요. 예술가들에겐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YUHO KAMO @yuhokamo

    “저는 진지한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가모 유호는 일본과 런던의 하위문화를 가장 분방한 가발로 표현한다. 기획과 촬영, 제작까지 직접 참여한 <헤어마스터(Hairmaster)> 매거진을 통해 그야말로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비주얼을 구현한다.

    CGI로 작업한 결과물이 인상적입니다. 스포츠카, 레이싱 카에서 영감을 얻은 강렬한 색감으로 염색하고, 끝을 스파이크처럼 뾰족하게 만든 펑키한 가발을 초현실적인 느낌이 나도록 렌더링 작업을 합니다. CG로 만든 특유의 텍스처는 저를 들뜨게 해요. 정교하지 못하고,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늘 정답은 제 내면에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한 주제나 개념 없이도 제가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가발에 대한 첫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요? 일본 헤어 숍의 디자이너였던 저는 우연히 그곳에서 본 반문화 잡지에 사로잡히게 됐어요. 제 안의 어떤 방아쇠가 당겨진 느낌이었죠. 그렇게 런던으로 건너가 헤어스타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가발을 만드는 데 특별한 계기나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친구와의 농담 한마디로 시작됐어요. 창작은 그저 하나의 놀이와 같아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고슴도치 등처럼 매우 짧은 모발로 만든 것이요. 가발을 제작할 때 금기처럼 여겨지는 두피 안쪽의 솔기를 오히려 의도적으로 훤히 드러나도록 표현했습니다. 반항적인 면도 있고, 보는 사람에게 다소 기괴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점을 좋아해요.

    남다른 미학을 갖고 있군요. 다른 헤어 아티스트와 달리 가발을 제작할 때 주로 합성, 인조 머리카락을 사용합니다. 오히려 플라스틱처럼 대놓고 ‘가짜’ 느낌이 나니까요. 아이처럼 천진한 매력이 있죠. 남들이 가지 않는 길과 신선한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전통과 고정관념을 부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저만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코스튬, 공상과학, 발칙하고 무서운 것으로 가득한 세계요.

    최종 목표가 있다면? 영감의 원천 중 하나인 페라리를 소유하는 것. 결과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것이죠.

    JULIEN D’YS @juliendys

    ‘헤어 스타일리스트’라는 수식어는 그의 경력을 압축하기에 한없이 부족하다. 1980년대부터 칼 라거펠트, 레이 가와쿠보, 어빙 펜, 피터 린드버그, 애니 레보비츠 같은 아티스트와 협업해온 그는 오늘날 후배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헤어 아트계의 명장. 아방가르드한 작품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그가 <보그>의 부름에 답했다.

    처음 제작한 가발이 궁금하군요.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과 함께 떠난 뉴욕 여행에서 우연히 패션 디자이너 스테판 스프라우스(Stephen Sprouse)의 전시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때 그와 대화를 나누며 준비 중인 컬렉션에 대한 저만의 헤어 비전을 제시했죠. 당시 모델 테리 토이가 피팅을 위해 참석했는데, 즉석으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가발을 제안했어요. 남성 모델을 위해 비틀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헤어스타일을 추가로 제작하게 됐고요. 본격적인 출발점이었죠.

    당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예술과 뷰티는 어린 시절부터 저를 둘러싼 두 가지 핵심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죠. 바다와 가까운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에서 자랐는데, 이곳은 풍부한 역사와 매혹적인 전설을 품고 있어요. 신화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곤 했는데 상상력을 넓히는 큰 요소이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다양한 문화, 영화, 사람, 예상치 못한 방문 장소, 음악의 선율, 내리는 비. 영감의 원천은 사소하지만 타고난 호기심이 그 주제를 광범위하게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죠.

    패션계의 여러 거장이 당신의 헤어에 매료됐죠. 레이 가와쿠보, 존 갈리아노, 아제딘 알라이아, 칼 라거펠트 같은 거목들과 함께 일하는 건 더없이 특별한 경험입니다. 모두 각자의 개성과 미학이 충만하죠. 조화로운 협업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그를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왔고요. 꼼데가르송 쇼에서 선보인 인형과 장난감을 붙인 가발부터 <물랑 루즈>에서 영감을 받은 존 갈리아노의 붉은 헤어피스까지. 런웨이에서 선보인 다양한 가발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그중에서도 칼 라거펠트와의 작업이 가장 특별했습니다. 제게 ‘헤어 건축가(Hair Architecture)’라는 애칭을 지어줬으니까요.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안겨준 순간을 하나만 꼽는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영국 패션의 전통과 변화를 주제로 ‘앵글로마니아(AngloMania)’라는 전시에 참여한 때입니다. 미술관 지하실의 유니언잭 모호크에서 영감을 받은 커다란 헤어피스 작업에 몰두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죠. 그 후로도 ‘American Women’ ‘Fashion Heroes’ ‘Model as Muse’라는 이름의 다양한 전시 프로젝트를 연이어 진행하게 됐어요. 이토록 짜릿한 도전이자 모험이 창의성의 범위를 최대치로, 어쩌면 극단적으로 넓혔어요. 지난해 <월페이퍼> 매거진과 함께 차이나타운부터 할렘까지, 시장과 골동품 가게에서 잡동사니를 조달해 상징적인 가발과 헤드피스를 재창작한 작업도 잊을 수 없군요. 버섯과 깃털을 활용하고, 젓가락을 날개처럼 붙이고, 그물망을 베일처럼 활용하는 광란의 작업이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당신의 작업을 정의한다면? 폭발, 순수, 기이함.

    최근에 몰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에 없이 자주, 다양한 스케치를 해요. 머릿속 상상을 자유롭게 펜으로 그리고 칠하는 일은 인생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SHUNSUKE MEGURO @shun.hairhead

    더없이 정교하고 조형적인 가발을 제작하는 일본의 헤어 아티스트 메구로 슌스케. 거대한 함선, 왕관 등 조각품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듯한 독창적인 헤어스타일로 구찌, 베르사체, 이세이 미야케 같은 패션 브랜드와 협업했다. 동양의 고전 문화로부터 끊임없이 기발한 착상을 얻는 그의 미적 세계를 엿봤다.

    조각가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뷰티 스쿨에서 헤어를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헤어 아티스트는 창의적 디자인에 능하고, 예술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경험이 현대미술과 헤어라는 장르를 연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죠.

    가발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아티스트로서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입니다. 외부 요소보단 내면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 편이에요.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헤어스타일에 반영되죠. 손을 움직일 때 특별한 의도는 없어요. 그저 두 손이 따라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정체성이 표현됩니다.

    그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순수와 분노. 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오는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하지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에요. 내면을 들여다보고, 말하고 싶은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면 무너진 감정이 치료될 때도 있으니까요.

    최근 미스 소희(Miss Sohee)와 협업했죠. 그녀의 드레스는 놀랍도록 아름다워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2023년 오뜨 꾸뛰르 쇼를 위한 헤어피스를 제작하게 돼 영광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궁금해요. 넓은 챙 또는 쟁반을 쓰고 있는 듯한 헤어피스입니다. 한 땀 한 땀 땋은 머리를 폭넓은 원형으로 말아놓은 형태로 왕관 같기도 하고, 동남아시아의 오래된 냄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손을 움직이면 무엇이 탄생할까?’라는 내면의 질문으로부터 완성된 결과물이에요. 서예와 다도, 가부키, 일본 전통 회화 장르인 우키요에 등을 보면서 자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렬하게 실감했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게임 디자이너 고지마 히데오. 그는 늘 새롭고 혁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자예요.

    스스로 별명을 지어본다면? 헤어 오디세이. 머리카락을 수단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며 여행을 하는 중이거든요.

    BENJAMIN DAVID @b_dgram

    헤어 아티스트 가베는 그를 “가장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가발을 만드는 장인”이라 말한다. 런던을 거점으로 전 세계 패션 매거진과 다양한 협업을 하는 그의 헤어스타일은 그야말로 ‘포토제닉’하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가발의 매력에 푹 빠진 그와 주고받은 열정 가득한 대화.

    ‘헤어 스타일링’에 대한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어릴 적부터 창의적인 일을 할 거란 생각이 막연하지만 늘 있었어요. 제가 자란 그라스 지역에선 패션지를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보그> 같은 매거진을 탐독하며 침실 벽면에 오려낸 화보로 콜라주를 만들곤 했죠. 시간을 보내던 학교 옆 미용실에서 권하는 바람에 시험 삼아 수업을 듣게 됐어요. 그리고 미친 듯이 빠져들었습니다. 수업을 듣기 시작한 첫해에 대회에서 우승하며 제 길을 찾았다고 믿었어요. 그 후로 한 번도 뒤돌아본 적 없죠.

    당신이 생각하는 가발의 매력은? 헤어스타일은 누군가의 외모, 기분, 전체적인 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예요. 가발은 그런 효과를 한껏 ‘극대화’하고 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에게 더없이 매력적이죠. 몇 초 만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어요. 매우 길고 두꺼운 모발을 가진 모델과 촬영한 적 있는데, 촬영 컨셉은 밝고 짧은 헤어스타일이었어요. 보통 컬러 스프레이를 사용하지만 그날은 가발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민트색으로 물들인 가발을 모델의 얼굴형에 맞게 과감하게 커팅했어요. 아주 멋진 결과물이 나왔고, 그 순간 가발이 제 경력의 큰 부분이 될 거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평소 아이디어를 얻는 곳은? 진부한 답변이겠지만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영감을 줍니다. 런던의 젊은 하위문화, 길거리의 전시, 오래된 잡지와 영화, 역사적인 헤어스타일, 소셜 미디어 등이요. 그걸 바탕으로 반문화적이고, 세련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헤어 디자인을 창조하죠.

    뮤즈를 꼽자면? 영원한 헤어 아이콘 셰어(Cher). 수십 년간 다양한 시도를 해온 그녀는 ‘헤어 카멜레온’ 같은 존재죠. 그녀가 항상 가발을 착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가장 좋아하는 룩은 1980년대에 선보인 멀릿 커트예요.

    그녀의 음악도 즐겨 듣나요? 물론이죠. 헤어 이외에 저를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면 패션과 음악입니다. 스포티파이 재생 목록의 이름은 바로 ‘Nostalgic Ben’이에요. 1980년대 음악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로 제 정체성인 영국과 프랑스를 결합해놓았죠. 펑크 그리고 즐거움이 가득한 것들이에요.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회상한다면?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 톰 슈나이더(Tom Schneider)와 함께 런던 180 더 스트랜드(180 The Strand)에 있는 갤러리에서 열었던 전시를 꼽고 싶군요. 어느 날 그가 머리카락을 활용한 조소 작업에 함께해달라고 요청했죠. 컨셉을 그와 면밀히 연구하며 헤어에 대한 제 관점이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타이어와 같은 원형 오브제에 머리카락과 리본을 단 브레이드를 장식했는데, 결과적으로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작품이 됐죠. 젊은 창작자에게 자신의 기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기회가 있을 때 그것을 맘껏 펼치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을 ‘헤어 00’라고 지칭한다면, 빈칸에 어떤 단어를 넣고 싶나요? ‘헤어 마법사’ 벤. 실제로 친구들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죠.

    EDA LEE @edajogo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하는 헤어 아티스트 에다 리는 자신을 ‘헤어 셔틀’이라 칭한다. 그 이면에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어디든 여러분을 데려다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려 있다. 곱디고운 머리카락으로 창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스타일에는 한계가 없다. 현실과 초현실, 이어지지 않을 듯한 두 세계를 연결 짓는 그와 나눈 헤어 스토리.

    가발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사람의 모발은 제한이 많기 때문이죠. 가발은 건축, 조각, 그림, 동식물, 그리고 질감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무한하게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에요. 예전에는 가발이라고 해도 그 모양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착용해도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러움’만이 생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미디어 플랫폼에서 자신의 작품을 포트폴리오처럼 게시하기 시작했어요. 모두 전문가는 아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경쟁처럼 더 풍성해지고, 더 화려해졌으며, 더 흥미로워진 것만은 확실해요. 매일 기분 좋은 자극을 받고 있죠.

    무엇으로부터 모티브를 얻는지 궁금해요. 저의 주 무대인 다양한 매거진을 보는 것은 물론, 조각과 동식물의 흥미로운 사진, 삽화를 수집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에요. 최근에는 AI, CG로 작업한 추상적인 사진도 찾아보죠.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지난달에 제작한 고슴도치를 닮은 가발에 유독 애정이 가는군요. 일본 애니메이션 ‘유희왕’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로, 모발 끝을 염료에 담근 듯한 그러데이션을 표현했죠. 그렇게 매일 조금씩 발전해나가는 것 같아요.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재생할 때 받은 감동을 재현했어요.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역동적인 순간을 웨이브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보그>가 지지하는 헤어 아티스트 이현우는 왕관 같은 자태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가발을 완성했다. 꽃의 대칭 구조, 꽃잎의 요동치는 형태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롤모델이나 아이콘으로 여기는 인물은 누군가요? 유진 슐레이만과 귀도 팔라우. 헤어 분야에서 압도적인 명성을 가진 거장이자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예요. 그리고 패션 월드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알렉산더 맥퀸도요. 특유의 과장된 디자인에 완전히 매료되었죠.

    당신에게 인스타그램이란? 세상에 제 가치를 보여주는 ‘창’입니다. 사실 제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이 헤어스타일은 모두에게 이해받지는 못합니다. 다수가 추구하는 미학과 다르기 때문이겠죠.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면 무의식적으로 늘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수많은 취향과 개성이 존재하는 SNS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이 가능하고,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죠.

    자신의 작품을 단어로 정의하자면? 흥미로움. 야만적인 아름다움.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미학과 기호가 있습니다. 그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창조해나가는 헤어스타일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람들을 자극하길 바랄 뿐입니다. 단기적인 목표는 매일 더 참신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에요. 결국 그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주겠죠? (VK)

      사진
      정우영, GettyImagesKorea, Courtesy of Alexander Wang, Chow Sin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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