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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미나 카말리가 이야기하는 끌로에: 칼, 자유, 피비, 공감 그리고 영원한 1970년대의 매력

2024.02.27

by 안건호

셰미나 카말리가 이야기하는 끌로에: 칼, 자유, 피비, 공감 그리고 영원한 1970년대의 매력

우리의 첫 만남은 1월 말 어느 월요일에 이뤄졌다. 셰미나 카말리(Chemena Kamali)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향했지만, 겨우 몇 시간만 주어졌다. 그래도 우리가 대화를 끝낸 뒤, 그 모든 것이 ‘가치 있었다’고 느꼈다. 그녀가 무척 활기차고 낙천적이며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카말리의 따뜻함은 가족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12월 31일을 맞아 남편, 두 아들(다섯 살, 두 살)과 함께 사디야트섬에서 휴가를 즐겼으니까. 아니면 카말리가 자신의 꿈을 이뤄서일 수도 있다. 지난 10월 9일, 끌로에 하우스는 그녀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다.

끌로에 사무실에서 셰미나 카말리. Photo: Jody Rogac / Courtesy of Chloé

독일 도르트문트 출신인 카말리는 끌로에와 오랜 시간 함께해왔다. 인턴으로 시작해 20년간 피비 파일로, 한나 맥기본,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함께 일하며 갈수록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2016년부터 6년 정도 안토니 바카렐로의 생 로랑에도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엔 언제나 끌로에가 있었다. 그녀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제안받았을 때, 모든 길은 끌로에의 헤드쿼터가 있는 파리 8구의 페르시에(Percier) 애비뉴로 통하기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원목 테이블에 앉아 카말리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오피스 한구석에는 화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블라디미르 케이건 소파가, 한쪽 벽에는 과거 끌로에 컬렉션 이미지, 특히 칼 라거펠트가 재직 중이던 1970년대 컬렉션 이미지가 걸려 있었다. 끌로에는 늘 자유분방하면서도 관능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하우스의 가장 핵심적인 DNA는 끌로에의 옷을 입은 여성이 내뿜는 활기와 기쁨이다. 카말리는 바로 이 두 요소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끌로에를 이끌 생각이다. 2월 29일 데뷔 컬렉션을 선보이며 그녀는 끌로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청사진을 제시하는 한편 몇 주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릴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 카말리는 모든 것이 결국 칼 라거펠트와 하우스의 창립자 가비 아기옹와 연관되어 있다고 얘기했다. 이후 그녀는 왜 끌로에가 언제나 ‘여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1970년대’로부터 영감을 받는지에 대한 감상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끌로에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말이에요.

끌로에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처음은 20여 년 전이었어요. 독일 트리어(Trier) 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였습니다. 1990년대 독일인에게 칼 라거펠트는 아이콘이자 영웅이었습니다. 저 역시 끌로에에서 그가 하는 일에 매료되었죠. 학부 과정의 일환으로 인턴십을 해야 했어요. 다른 학생들은 파리, 밀라노, 런던의 모든 패션 하우스에 스무 장의 지원서를 보냈지만 저는 한 장도 제출하지 않았어요. 단지 칼의 영향력, 그리고 피비가 그곳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이유 때문에 끌로에만 바라보고 있었죠. 제 포트폴리오를 들고 뒤셀도르프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에 무작정 올랐어요. 약속된 미팅도 없고 만나기로 한 사람도 없었지만, 일단 끌로에 본사를 찾아갔죠. “누구라도 좋으니, 제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싶어요. 끌로에에서 인턴도 하고 싶고요”라고 말하자 리셉션 담당자는 제가 미쳤다고 여기더군요.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안 된다’였습니다. 3시간 정도 기다렸을까요? 결국 그녀가 저를 들여보내주더군요. 그날 바로 스튜디오 디렉터를 만나 면접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2주 뒤 끌로에에서 전화가 왔고, 인턴십을 시작할 수 있었죠.

오직 끌로에만 원했군요. 실제로 끌로에에서 일해보니 어땠나요?

인턴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일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곧 주니어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피비(2001~2006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한나(2001~2006년 피비의 대리, 이후 2008~2011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밑에서 리서치를 주로 했죠. 복사기 앞에 몇 시간씩 서 있기도 했고, 시간이 나면 오래전 <보그>를 훑어보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때 샬롯 램플링, 로렌 허튼, 제인 버킨, 제리 홀 같은 1970년대 뮤즈들을 알게 됐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속할 곳을 찾은 듯했죠.

끌로에에서 일과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었나요?

피비는 항상 벽면 가득 영감이 될 만한 이미지를 모아놨습니다. 1970년대 후반 특유의 자연스럽고 쿨한 느낌의 여성성에 관한 이미지가 대부분이었죠. 꼭 옷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여성이 어떤 정신이나 분위기를 뿜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죠. 제게 샬롯 램플링 같은 아이콘은 시작점과 같았습니다. 이후 1977년 11월호, 1978년 12월호, 1979년 12월호 <보그>에 실린 화보, 광고, 커버, 컬러 등을 연구했죠. 그때 공부한 것이 2007년 세인트 마틴을 졸업할 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바로 그런 이미지와 무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졸업 컬렉션을 완성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이미지였습니다. 1970년대는 정말 자유롭고 역동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패션이 가장 자유롭던 때이기도 하고요. 화보에서도 포즈를 취하는 모델을 담기보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식이었죠.

아주 중요한 시기에 끌로에 하우스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팀원들은 어땠나요?

피비, 한나, 블루 패리어(Blue Farrier), 사라 조엣(Sara Jowett) 같은 인물들이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들에겐 패션이 ‘일’이라기보다는 ‘삶’에 가까웠죠. 그들은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직접 피팅을 진행한 뒤 어떤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 질문했죠. 그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여성들 사이에서만 생길 수 있는 커넥션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은, 그런 직관적인 관계 말이죠.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들은 모든 곳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플리 마켓, 매거진, 음악, 콘서트장도 그들에겐 영감으로 작용했죠.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브랜드와 이를 착용하는 여성들 사이의 유대감은 수년에 걸쳐 매우 강했지만, 특히 피비가 재임하는 동안 더 강해졌습니다.

그때의 끌로에에는 어떤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피비 파일로는 동떨어진 이상 따위가 아니었어요. 모두가 친숙하고, 닮고 싶은 인물이었죠. 쇼가 끝나면 백스테이지로 수많은 여성이 몰려왔습니다. 모두가 끌로에의 옷을 입고요. 그들은 단지 피비를 만나는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끌로에의 옷을 입던 여성들입니다. 언제나 여성의 삶에 깊이 관여해왔다는 것이 끌로에와 여타 럭셔리 하우스의 차이점입니다.

이제 끌로에를 이끌어갈 당신도 그런 독특함에 영향을 받겠죠.

끌로에 그리고 리치몬트 관계자와 만나 대화를 나눌 때도 “내가 끌로에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을 되살리고 싶다”고 말했죠. 끌로에는 정말 감성적인 브랜드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여성이 그 감정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예요. 모두가 끌로에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25세 젊은 여성부터, 올해로 72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클레어 웨이트 켈러 시절의 끌로에 아이템을 즐겨 입는 제 어머니와 같은 분들까지 말이에요. 수십 년 전의 끌로에 피스를 간직한 분도 여럿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제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브랜드는 없어요. 부드러운 촉감부터 컬러, 아름다운 코트와 블라우스까지!”라고 말하겠죠. 저는 그런 감성에 이끌려 끌로에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끌로에는 매우 따뜻한 영혼을 지녔습니다. 끌로에를 향한 제 감정은 다른 곳에서 일할 때도 그대로였습니다. 생 로랑에 있을 때 안토니 바카렐로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는 ‘너무 페미닌하고 부드럽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하곤 했죠. “그 아이디어는 끌로에를 위해 아껴두세요!”라는 말과 함께요!

가비 아기옹이 하우스를 설립한 1950년대부터 끌로에에는 모종의 전우애가 존재했죠.

가비는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끌로에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패션 사업을 시작할 용기를 가진, 몇 안 되는 여성이었죠. 당시에는 유명한 남성 디자이너들이 파리를 지배하고 있었고, 실루엣 역시 매우 구조적이었어요. 가비는 가벼운 옷을 만들며, 착용자를 자유롭게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끌로에의 옷을 입고 일할 수 있고,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가비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죠.

그녀는 기성복을 최초로 선보인 선구자였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또한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가비의 관점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최근 패션계에서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결국 지금은 재능과 능력이 성별을 초월하는 때입니다.

끌로에와 달리 다른 하우스는 일제히 백인 남성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불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죠.

단정적으로 ‘패션계에는 성별에 따른 제약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죠.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여성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남성에 비해 더 많은 과제에 직면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정을 꾸렸는지 여부가 결국 남성보다 여성의 커리어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성이 끌로에의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여성 디자이너들이, 여성의 시선으로 지금의 여성이 입을 옷을 선보이는 식이었죠. ‘남성 디자이너가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든다는 게 진정으로 가능할까?’라는 의구심 역시 있습니다.

그런 질문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여성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두가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여성성’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만의 에너지, 자아, 자주성, 자신의 직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때론 우리가 이야기하는 여성은 현실엔 없다고 느껴집니다. 우린 여전히 환상 속의 여성을 이야기하며, 관념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으니까요.

잠시 주제를 바꿔보죠. 특별히 좋아하는 끌로에 컬렉션이 있나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칼 라거펠트가 선보인 컬렉션을 좋아해요.(웃음) 최근에는 피비의 2003 S/S와 2004 S/S 컬렉션, 한나 맥기본의 2009 F/W 컬렉션에 빠져 있습니다.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2015 S/S 컬렉션도 좋아하고요. 개인적인 추억이 깃든 컬렉션은 2003 S/S 시즌입니다. 당시 컬렉션에 등장한 실버 네크리스와 결합된 디자인의 티셔츠를 구매했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럭셔리 아이템이었습니다. 끌로에 직원을 대상으로 한 샘플 세일에서 구매했지만요!

Chloé 2003 S/S RTW, Photo: Shoot Digital for Style.com
Chloé 2004 S/S RTW, Photo: Marcio Madeira
Chloé 2009 F/W RTW, Photo: Marcio Madeira
Chloé 2015 S/S RTW, Photo: Marcus Tondo / Indigitalimages.com

옷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소문난 빈티지 블라우스 컬렉터라고 들었어요. 지금 입고 계신 것도 그중 일부인가요?

이건 이름도 없고 태그도 없는 빈티지예요. 패치 포켓과 볼륨감, 자그마한 어깨 패드가 마음에 들어 구매했습니다. 어쨌든, 소문은 사실이에요. 600벌에서 700벌 정도 있는 것 같군요.

와우! 모두 집에 보관하나요?

네, 색상별로 정리해두었습니다. 흰색부터 시작해서 베이지색 그리고 밝은 컬러 순이죠.

모두 착용하나요?

80% 정도는 입어요. 디자인이 너무 과하거나 찢어진 것도 있지만 블라우스를 정말 좋아합니다. 가장 끌로에다운 아이템을 하나만 꼽으라고 해도, 제 대답은 블라우스예요.

최근 뉴욕의 유대인 박물관에서도 벽면 한쪽에 끌로에 블라우스가 전시됐죠. 옛날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칼 라거펠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사무실 벽에도 칼의 사진이 걸려 있더군요. 조금 전에도 칼에게 받은 영향을 언급했고요.

끌로에를 얘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칼 라거펠트입니다. 그가 끌로에의 기초를 다졌죠. 1970년대 후반, 칼은 움직임과 가벼움, 유동성을 강조하며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컬렉션을 참고하죠. 칼은 복잡하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자수를 선보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실루엣의 테일러링과 아우터를 선보이기도 했죠. 1977년부터 1979년까지는 끌로에 하우스의 코드가 정립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후 있었던 모든 디자인도 결국 그때로 되돌아가죠. 스텔라 맥카트니와 피비 파일로는 칼의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들이 활약한 2000년대 초반 또한 매우 중요한 시기였죠. 끌로에가 한층 모던하게 거듭나고, 진정으로 그때의 여성을 반영하던 때였습니다. 스텔라와 피비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기존 여성성에 약간의 낙관주의와 섹시함을 더했죠. 칼 라거펠트는 어느 인터뷰에서 “거리의 젊은 여성을 열심히 참고한다”고 말했죠. 그가 이끌던 끌로에는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곧 닥쳐올 미래를 대비하는 브랜드였습니다.

이제 셰미나 카말리의 끌로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최근 완성한 프리폴 컬렉션을 데뷔 컬렉션을 선보인 후 공개할 거라고 들었어요. 상반되는 요소가 공존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고, 실용적이면서도 섬세하더군요. 속이 비치는 드레스, 케이프, 롱부츠, 하이 웨이스트 데님, 슬라우치 백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리폴 컬렉션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요?

12월에 주요 고객에게 프리폴 컬렉션을 먼저 선보였습니다. 제가 이끄는 끌로에가 첫선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극비리에 진행했죠.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번 프리폴 컬렉션은 지극히 현실적인 옷으로 가득합니다. 가벼움, 움직임, 강렬한 프로포션, 인상적인 아우터웨어를 선보이고 싶었어요. 클래식하면서도 한눈에 끌로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을 완성하려 했죠. 구체적인 아이템과 카테고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룩과 컬렉션이 지닌 애티튜드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항상 ‘풀 룩’을 구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백, 액세서리, 주얼리처럼 자그마한 ‘레디 투 웨어’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 대신 말이죠. 다른 디자이너에 비하면 좀 더 전체적인 접근법을 갖고 있어요.

2024 F/W 컬렉션은 프리폴 컬렉션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될까요?

프리폴에서 선보인 룩과 요소가 좀 더 진화한 형식입니다.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죠.

데뷔 컬렉션을 다섯 단어로 표현한다면?

끌로에, 끌로에, 끌로에, 끌로에 그리고 끌로에!

좋은 대답이군요!(웃음) 처음 끌로에에서 일을 시작할 때처럼 당신과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들 역시 옷을 직접 입어보나요?

옷을 직접 느끼기 위해 모든 것을 시도하죠. 저는 항상 주변 여성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라면 이 옷 입을 것 같니?”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항상 현실을 직시해야 해요. 프리폴 컬렉션을 먼저 작업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완벽한 쇼를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옷을 선보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2024년 3월호 화보 촬영을 진행하며 처음으로 당신이 디자인한 끌로에 피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프리폴 컬렉션의 카메라 백과 레더 트렌치 코트를 입고 촬영했죠. 과거에는 패딩턴 백이 ‘잇 백’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백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척 중요하죠. 하지만 액세서리, 레더 코트, 블라우스도 백과 마찬가지입니다. 아까도 말했듯 개별적인 아이템보다는 전체적인 무드, 아이템과 아이템 간의 관련성이 더 중요하죠. 저는 하나의 룩을 구상함과 동시에, 그 여성에게 어울리는 백은 어떤 것인지 고민합니다. 용도나 애티튜드, 프로포션까지 하나라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백은 싫거든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패딩턴을 비롯한 대부분의 끌로에 백에 로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큰 인기를 누렸죠. 끌로에 백은 부드러운 식물성 가죽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들고 다닐수록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죠.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끌로에 백의 특징이었고요. 곧 코냑 컬러의 백을 선보입니다. 지금은 좀 더 ‘막 다룰 수 있는’ 백을 완성하기 위해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는 중이죠. 새로운 버전의 ‘파라티 백’ 역시 등장할 겁니다. 아이코닉한 백을 재발매하고 싶거든요. 이런 것도 브랜드를 이끌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많은 역할 중 하나라고 봐요.

당연하죠. 지난 몇 년 동안 패션은 급격하게 변화했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도 재정의되었습니다.

단순히 옷에 관한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브랜드를 상징하는 여성, 누구와 어떻게 소통하고 싶은지 등 모든 것을 전방위적으로 고려해야 하죠. 패션 브랜드는 하나의 문화 플랫폼이 되었고,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더 큰 뭔가를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더욱 진정성 있고, 정직해야 할 책임이 있죠.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메시지를 설파하고,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패션 브랜드의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옳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 될 뿐이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관입니다.

끌로에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과 함께 캠페인을 진행했죠. 앞서 어머니에 대한 코멘트를 듣고 나니, 당신이 탈피를 꿈꾼다는 생각이 듭니다. ‘끌로에 걸’이라는 말처럼, 끌로에의 아이덴티티는 항상 ‘젊은 여성’이었으니까요.

끌로에 걸! 하우스에 관한 가장 강력한 내러티브죠. 끌로에가 탄생했고, 끌로에 걸이 탄생했습니다. 저 역시 끌로에 걸이라는 아이디어에 매료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끌로에 걸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이 변했죠. 현재는 끌로에 걸과 끌로에 우먼이 공존하는 때입니다. 결국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니까요.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마음과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이번 캠페인에는 제리 홀 같은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죠. 확실히 새로웠습니다.

끌로에의 역사를 상징하는 여성과 얼굴을 되돌아보고 싶어서 칼의 뮤즈였던 제리 홀을 다시 불러들였어요. 촬영하며 정말 그때를 직접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당시 모두가 서로 사귀고 있었다는 식의 비하인드 스토리였습니다. 그녀를 포함해 칼의 아파트에 함께 살았던 무리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죠. 제가 부르고 싶었던 또 다른 여성은 2004년 봄 광고 캠페인에 출연한 제시카 밀러(Jessica Miller)였습니다. 제시카는 따뜻하고 동정심이 많은 데다 재미있고 섹시한 사람으로 끌로에의 여성상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죠. 에너지가 넘치고 약간 건방진 느낌이 있고요.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는 끌로에에서 처음 일할 때 아주 어렸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런웨이에 오른 쇼 역시 끌로에일 거예요. 그녀는 정말 자신의 꿈을 따랐죠. 지금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자선단체에서 놀라운 일을 하고 있고요. 당시 리야 케베데와 오늘날 끌로에의 세대를 대표하는 크리스틴 린드세스(Kristine Lindseth) 같은 새로운 얼굴들을 데려왔죠. 모두 놀라운 여성들이죠. 촬영장에 오면 진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두 번째 캠페인에 출연한 수비 코포넨(Suvi Koponen)은 촬영장에 들어와서 “끌로에는 늘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였어요.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친절하고 젠틀하고 모두가 배려하는, 여자들의 집 같았어요”라고 말했죠.

끌로에의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헌신, 즉 비콥(B Corp) 같은 인증을 받은 성과였습니다.

저는 가브리엘라 허스트(2020~2023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부터 이를 물려받았고, 중요한 일을 해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로 놀라운 업적입니다. 비즈니스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발전을 이어가는 것은 이제 제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 원단을 선택할 때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원단을 사용하는지 체크하고, 환경적 영향이 적은 버전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원단 부서와 협력해 새로운 원단을 개발합니다. 많은 부분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업무 방식에 100%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공장은 모두 우리의 가치와 기준을 존중하며 매일, 매 시즌 점검하고 있으며, 이를 내부에서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당연한 일입니다.

끌로에에서 일하기 전 잠시 쉬었죠.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살았는데, 어땠나요?

로스앤젤레스는 자유분방하고 예술적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지만, 직접 살 때 진가가 더 드러나죠. 선셋 타워나 샤토 마몽에 머물면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고 여기는 것과는 달라요. 이웃을 알게 되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더 많은 관계를 맺을 때 프랑스어로는 ‘일상적인 삶’, 진정한 ‘드 라 비에 코티디엔(De La Vie Quotidienne)’을 체감하게 되는 곳이죠. 운전을 많이 하니 음악을 많이 듣게 되고요. 바다에서 45분 거리에 있는 라구나 비치에 살 때는 햇빛을 받으며 일찍 잠을 깨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했습니다. 시차 때문에 유럽과 단절되어 오후 2시가 되면 메시지나 이메일이 더 이상 오지 않으니 단절감도 느껴지고요. 이런 캘리포니아식 생활과 사고방식에는 끌로에다운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끌로에는 파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프랑스 스타일의 세련미와 정교함이 바탕이 되지만, 제가 끌로에 걸에게서 좋아하는 부분은 ‘자유분방함’, ‘미완성’입니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아요.

이번 컬렉션은 제가 10대에 4년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는 사실, 지난 1년간 그곳에서 보낸 시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저의 모든 영감 중 하나였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머리칼과 피부, 태양, 해변에서 느껴지는 유토피아적 감각과 관능미까지 모든 것이요. 저는 휴 홀랜드(Hugh Holland), 미미 플럼(Mimi Plumb) 등 1970년대 젊은 문화를 포착한 당시 사진가들도 좋아합니다. 지난해를 온전히 그곳에서 보내면서 이번 끌로에 컬렉션의 영감은 1970년대를 바탕으로 하게 되었죠.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시간도 있었고요. 또한 에단 호크와 기네스 팰트로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유산>이나 로버트 드 니로가 출연한 <히트>(왜 이 영화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운드트랙이 정말 좋아요) 같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이 여정에 정말 좋은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어요. 패션계로 돌아갈 때 패션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로스앤젤레스의 놀라운 점이 뭔지 아세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누구와 만나게 될지 염두에 두지 않아요. 저는 그런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정말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었죠.

다시 돌아와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커튼을 열고 중앙 무대로 걸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요.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니라면 어떤 느낌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깊이 고려해본 적이 없어요. 여기 도착하고,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프리컬렉션을 준비하고, 몇 주 후 쇼를 준비하느라 ‘아,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 것 같습니다. 너무 바빠서 이 질문은 마음속에서 약간 밀려났지만, 인터뷰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정말 좋았습니다. 저와 함께 일한 모든 사람에게 물어봐도 알겠지만, 저는 항상 끌로에에 대한 애정과 브랜드의 역사를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10년 전 이미 클레어와 함께 이 피팅 룸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이번 토요일에는 아이들이 저와 함께 있고 싶어 해 아이들을 데려와서 일하는데, 주말이라 아무도 없더군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정말 말이 안 된다. 10년 전 클레어 팀과 함께 일한 피팅 룸에 내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네’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최근 ‘보그 런웨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보헤미안 스타일이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 끌로에에서 일하던 시기의 분위기도 보헤미안 스타일이었는데, 이를 어떻게 보나요?

제 생각엔 미완성, 자유, 부드러움, 움직임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 같아요. 역사를 살펴보면 관습과 전통적인 라이프스타일,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1970년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죠. 패션의 측면에서는 보헤미안 스타일이 남용되면서 정점을 지났고, 상업적으로 변질되었죠. 업계에서는 식상해서 사라졌는데,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이제 다시 그 순간이 왔군요. 보헤미안의 정신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갈망이 샘솟기 시작한 거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고, 자신이 사는 방식대로 살고 싶어 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의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가혹하고 추한 일이 대부분이죠. ‘부드러움(Softness)’이라는 영어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무언가를 갈망하고 아름다움을 원한다는 뜻의 프랑스어 ‘두세르(Douceur)’가 적당할 거 같아요. 그것은 앞으로 끌로에가 나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이렇게 큰 역할을 맡을 때는 잡음을 차단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Mark Holgate
사진
Getty Images, Splash News, Courtesy Photos
출처
www.vog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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