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이 넘는 미스코리아를 만들기까지, 하종순_보그 미장원 특집
2024년 대한민국에 있는 미용실은 약 11만3,000곳. 1933년 최초의 조선인 미용사 오엽주가 종로 화신미용부에서 신여성에게 내린 미용의 씨앗은 명동 미스코리아의 대모, 청담 여배우의 유행 스타일 메이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글로벌 K-팝 트렌드세터로 이어진다. 화학과 물리, 스승과 제자, 장인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교차하는 이 특별한 공간을 관통하는 〈보그〉의 미용 장인 이야기.
1970~1990년대에 걸쳐 100명 넘는 미스코리아를 배출한 마샬 뷰티 살롱의 하종순 회장은 국가 대표 미녀의 대모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근대와 현대를 잇는 대한민국 미용 역사의 산증인이자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현직 헤어 스타일리스트다.
1980년대, 전야제까지 이틀 연속 방영되며 시청률 50%는 가볍게 넘겼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진에 당선되면 다음 날 신문에 얼굴이 실려 전 국민에게 이름이 알려지며 스타덤에 올랐다. 파이널 왕관의 주인공을 가리는 인터뷰의 답 역시 유명한 ‘밈’이었다. 둘만 남겨진 가운데 “누가 진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옆에 있는 언니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착한 답을 했고, 진에 당선된 후에는 반드시 이 멘트를 잊지 않았다.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스코리아는 미용실에서 배출됐다. 원장님은 단순한 헤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뿐 아니라 인터뷰와 스피치 기술, 자세 교정, 인사하고 웃는 법, 치아 교정, 다이어트, 걷는 방법까지 교육했다. 100명 넘는 미스코리아를 배출한 마샬 뷰티 살롱의 하종순 회장은 한국 대표 미녀들에겐 방시혁이자 박진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하이 볼륨 사자 머리와 파란 수영복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하종순 회장이 조선 최초의 헤어 디자이너 오엽주 여사의 제자이며 종로, 충무로, 명동, 강남을 잇는 한국 미용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려 영국 비달 사순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국에서 <보그>가 론칭하기 훨씬 전부터 마샬의 사무실에는 미국 <보그>가 공수되고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올해로 87세이신데 여전히 매일 출근한다고 들었다. 1962년 간판을 올린 명동 마샬 뷰티 살롱의 상징적인 골드 벽과 우드 톤 인테리어는 그대로인가?
그렇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명동 마샬은 그대로다.
대중에게는 ‘미스코리아 원장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국가 대표 미녀를 배출할 수 있었나?
의도한 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한 고객이 미스코리아에 나가고 싶다고 찾아왔다. 당시 연예인이 많이 다니던 곳이라 여기서 스타일링을 하면 승산이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다. 고객이니 성심성의껏 해드렸을 뿐인데 덜컥 미에 당선됐다.
그렇게 한두 명 당선되다 보니 입소문이 난 건가?
맞다. 사실 내가 관심을 가진 건 미스코리아가 되면 출전할 수 있었던 세계 대회였다. ‘샤프롱(미인 대회 참가자의 보호자이자 동행인)’ 자격으로 동행할 때마다 해외 선진 기술과 트렌드를 교육받을 기회가 생겼으니까. 후보자들이 합숙하며 일정을 소화하는 시간에 비달 사순 아카데미에 등록한다든지 영국 해로즈 백화점에 시장조사를 다니며 공부했다. 당시는 해외여행 자체가 어려울 때고 유럽 거리에 동양인도 아주 드물어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눈에 담았다. 나도 스승 오엽주 선생님처럼 시야가 넓은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선생님이 유학파였거든.
조선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의 동아백화점 미용실에서 일했던 분을 뵙게 되다니! 펌을 도입해 전단 광고를 했던 기록물을 책에서 본 적 있다.
아득한 옛일이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선생님은 마구잡이로 가위질을 하던 당시 미용사들과는 달리 섹션이 정확한 베이식 테크닉을 전수해주셨다. 덕분에 승진도 빨랐고 예쁨을 많이 받았지.
그대로 승승장구였나?
그 일이 있기 전까진. 고객이 많아지다 보니 일주일 주야로 일해야 해서 남자 친구가 불만이 많았다. 도통 만날 시간이 있어야지. 외삼촌 결혼식에는 꼭 동행해야 한다고 해서 고민 끝에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다. 위경련이 났다고. 그런데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길에서 선생님을 마주치고 말았다. 다음 날 100평이 넘는 연구실 한가운데서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서운했을 것 같다.
지금은 이해가 간다. 나도 ‘조금만 더 집중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확신했던 제자가 나태해지거나 소홀해지는 기미를 보이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질책의 행간을 이해하게 된다.
명동 마샬의 시대는 언제부터였나?
충무로를 거친 후부터. 당시엔 영화배우와 가수들이 다니는 미용실이 충무로에 밀집해 있었는데 스카우트에 응해 가보니 도금봉, 김진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드나들고 있었다. 스타와 그들의 스타일을 흠모하는 고객들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며 성장하던 중 또 다른 제의를 수락해 명동으로 옮기게 됐다. 당시 삶은 참 치열했다. 미용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있을 때라 장관을 둘씩이나 배출한 시댁이 내가 미용 일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거든.
난감했을 것 같다. 잠시 포기했나?
아니 몰래 했다. 아침에 출근할 땐 외출하는 척 한복을 입고 나와, 미용실에 도착하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무를 했다. 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한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까지 헤어 디자이너가 하고 싶었나?
너무나도! 나는 이 일이 너무 좋았다. 명동 마샬 뷰티 살롱 간판이 올라가던 모습, 나에게 머리하려고 가게 밖까지 줄을 선 고객들을 보며 감사하고 뿌듯했다.
지금의 명동 마샬이 그때 그곳인가?
한 번 이전했다. 장사가 잘되니 쫓아냈다. 그래서 바로 옆, 지금의 자리로 권리금까지 80만원 주고 이사했다. 물론 그 후도 평탄하고 순조롭진 않았다. 찾아주는 사람은 많은데 직원들은 들락날락, 너무 고생스러워서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 ‘이대로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다 지나갔다.
힘들었겠지만 이룬 것이 더 많다. 뛰어난 스타일 크리에이터일 뿐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지 않나? 마샬은 프랜차이즈 헤어 살롱의 포문을 연 역사적인 미용실이다. 에디터가 되기 전인 1990년대에는 나도 집 앞 마샬에 다녔다. 엄마가 미스코리아 미용실이라고 데려갔다. 하종순은 당대 가장 핫한 스타들의 대모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사람들은 하종순에게 미스코리아 이야기를 가장 많이 묻는다. 하지만 미스코리아는 내 커리어의 일부일 뿐이다. 1970년대 초부터 미인 대회의 샤프롱 자격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고, 덕분에 당시 앞서가던 해외 미용 장인들의 노하우와 스타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당시 마샬에서만 이토록 많은 미스코리아가 배출되는지, 왜 그렇게 많은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는지 묻는다면 ‘그건 눈이 트였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트렌드를 적용하는 눈 말이다. 그래서 광고 전단을 만들 때도 미스코리아 이야기를 지양했다. 대신 나의 해외 경험과 미용 경력을 더 강조했다.
미용 장인, 그 본질에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그렇다. 마샬은 1970년대 초에 이미 10개 가까운 매장이 있던 미용실이었다. 대형 예식장, 패션 부티크, 새로 조성되는 아파트 단지 등에서 수없이 러브콜을 받았다. 어쩌면 그래서 미스코리아가 내게 절대적인 명예로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주하면 어떨까? 회장님이 캐치한 선진 스타일과 테크닉을 대중에게 발표하는 장이 바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였다고 말이다. 미녀를 도화지 삼아 펼쳐놓은 크리에이티브가 심사대에 올라, 많은 당선자를 배출한 것은 당신의 눈과 손이 그만큼 인정받은 것 아닐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고마운 해석이다.
3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매장이 늘어나면 그만큼 관리가 힘들어진다. 동분서주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딸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의외로 적응도 잘하고 확장도 잘했다. 딸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잘 키워가고 있는 걸 지켜보니 신기하다.
손녀인 엄지민 디렉터는 경영이 아니라 직접 가위를 잡고 있다.
미용실을 놀이터 삼아 자란 아이라 헤어 디자이너들의 퍼포먼스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 했는데 우선 대학까지 공부 다 마치고, 그때도 하고 싶은지 다시 고려해보자고 이야기했다.
왜 보류했나? 조기교육이 도움이 됐을 텐데.
마샬의 역사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 반, 무거운 자리를 넘겨 괴롭히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다. 내가 배출한 제자들의 성공을 지켜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고, 아름답게 변신해 살롱을 나서는 고객을 목격하는 것도 기쁘지만, 일은 일인지라 고통스러운 지난날을 돌아보며 선뜻 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도 헤어 할래”라고 선언하길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마샬의 어시스턴트 스태프부터 시작해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헤어 디자이너 수업을 받고 돌아왔고 지금은 디자이너 2년 차다. 유학을 하며 기술적인 것부터 직업을 대하는 태도까지 많은 걸 배워왔다. 잘 참고 더 많이 기뻐하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
나는 나이 들었고, 이제 좀 편안하다. 든든하고 유연하게 경영해주는 딸이 있고 야무지게 제 몫을 해내며 곁을 지켜주는 손녀가 있으니까. 지난날의 감사함으로 딸과 손녀를 응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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